이번주 필름2.0을 보다가 알게 된 건데, 오는 5일부터 개막하는 제9회 서울국제영화제에서 러시아의 여성 영화감독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의 <최고의 날들>이 개막작으로 상영된다고 한다('프로스쿠리나 Svetlana Proskurina'란 이름이 왜 '프로슈리나'로 표기되는지 모르겠다). 내게도 생소한 이름이지만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감독과 공동작업을 하는 '러시아 예술영화의 대모'라고 한다(찾아보니 <러시아 방주>의 각본을 썼다). 관련소식을 옮겨놓는다. 영화를 몇 편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소식]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특별전

2008년 제9회 서울국제영화제가 국내 최초로 소개하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여름의 시작과 함께 관객들을 찾아간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1990년 <우연한 왈츠(The Accidental Waltz)>로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황금표범상을 수상했고 올해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회고전까지 열린 러시아 여성 감독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감독 특별전'이 바로 그것!

첫 작품 <페어런츠 데이(Parent's Day)>부터 2008년 최근작 <최고의 날들(The Best of Times)>에 이르기까지 위태로운 인간존재의 모습과 내면을 특유의 세밀함으로 묘파해 온 프로슈리나 감독은 알렉산더 소쿠로프(Alexander Sokurov) 감독과 공동 작업을 하는 등 러시아 예술영화의 계보를 이어오고 있는 감독이다.

이번 서울국제영화제에서는 그녀의 특별전을 마련하면서 이 노년의 감독이 직접 방한해 자신의 장편 전 작품 6편과 그녀의 친구이자 멘토인 알렉산더 소쿠로프에 대한 개인적인 오마주인 다큐멘터리 1작품을 소개하고, 관객들과 직접 자신의 영화세계와 러시아 영화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는 '마스터 클래스'도 마련한다.

제9회 서울국제영화제가 마련한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감독 특별전(Svetlana Proskurina Retrospective)' 에서 인물들 사이의 친밀성과 질투, 욕망과 죄 등 인간 실존의 조건들을 내밀하게 그러나 최소의 것으로 응집시키고 있는 작품들을 통해 그녀의 영화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만나는 특별한 시간을 가져보자.

Светлана Проскурина
биография

*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특별전' 상영작 목록

- <페어런츠 데이(Parent's Day)>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1981Ⅰ30min
Molodost 영화제 신인감독상, 최우수단편상, 최우수여우주연상

- <플레이그라운드(Playground)>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1986Ⅰ77min
카를로비바리 영화제 경쟁부문



- <우연한 왈츠(Accidental Waltz)>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1989Ⅰ92min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표범상
마르세이유 페스티발 여우주연상, 까르띠에 특별상
산 세바스티안, 토론토, 몬트리올, 이스탄불, 로테르담, 예테보리 영화제 상영

- <거울 속의 투영(The reflection in the mirror)>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1992Ⅰ80min
깐느 영화제 감독주간
뮌헨, 토론토, 몬트리올, 로테르담 영화제 상영
1995년 뉴욕 링컨센터 회고전



- <섬. 알렉산더 소쿠로프(Islands. Alexander Sokurov)>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2003Ⅰ38min

- <원격 접속(Remote Access)>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2004Ⅰ88min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
러시아 키노쇼크 영화제 최우수 여자주연상
모스크바 영화제 최우수 작품을 위한 필름클럽상
블라디보스토크 Pacific Meridians 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최우수 여우주연상, 최우수 여우조연상



- <최고의 날들(The Best of Times)>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2007Ⅰ93min
2008 로테르담 영화제 회고전

08. 06.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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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06-03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도 그렇고, <최고의 날들>의 주연들인가요? 배우들의 모습도 시선을 끄네요..

로쟈 2008-06-04 00:11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보고 싶은 영화들이긴 한데, 이번주도 올스톱이어서.--;

노이에자이트 2008-06-04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소련 여배우는 루드밀라 사벨리에바가 제일 좋아요.<해바라기>에서 눈밭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면...관람석에서 탄성을 지르는 이들이 많았어요.이 장면에서...이런 누나들은 안 늙는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예전 교육방송에서 이 배우가 나타샤 역으로 나오는 전쟁과 평화 방영할 때는 너무 길어서 (며칠 한 것 같음)못 봤지요.근데 영화 해바라기를 검색창에 알아보니 김래원 허이제 주연 해바라기만 나오네요.인터넷 정보의 한계...

로쟈 2008-06-04 18:11   좋아요 0 | URL
<전쟁과 평화>가 데뷔작이었죠.^^
 

주중에 읽어보려고 했던 기사를 시간을 내 옮겨놓는다. 안톤 체홉의 희곡 <세자매> 공연에 대한 리뷰인데, 이번 작품은 특히 이윤택 연출이어서 눈길을 끈다. 공연을 직접 관람할 여유는 없지만 리뷰만으로도 감은 잡아볼 수 있겠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4&title_down_code=002&article_num=9160).

컬처뉴스(08. 04. 16) 희망과 절망을 담아낸 통속성

19세기 사실주의 연극의 거장 안톤 체홉은 반복되는 일상에 무기력하게 매몰되어가는 인생의 모습을 특유의 연민어린 시선으로 그려낸 것으로 유명하다. 일면 비극적인 작품으로 ‘오독’되곤 하는 그의 희곡들은, 사소한 것들에 집착해 결국 생의 진수를 놓쳐 버리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폭로한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블랙코미디와 같은 강한 희극성을 지니고 있다. 오는 4월20일까지 게릴라 극장에서 공연되는 <세자매>는 선이 굵은 중견 연출가로 이름난 이윤택 씨가, 이러한 원작의 희극성을 증폭시켜 ‘대중통속극’의 맥락으로 재해석한 이색적인 작품이다.

어린 시절을 모스크바에서 보낸 올가, 마샤, 이리나는 장교인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변방에 위치한 작은 소도시로 내려왔다. 예기치 않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더 이상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없었던 이들 자매는, 원치 않은 현실을 견디며 늘 아름다웠던 도시 ‘모스크바’를 꿈꾸며 살아간다. 자신에게 맞지 않은 직장 때문에 늘 갈등하는 맏딸 올가, 결혼하면서 처음 품었던 기대와 너무나 다른 남편의 모습으로 인해 불행해 하는 마샤, 그리고 암울한 현실 가운데서도 꿈꾸기를 단념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막내 이리나의 모습은 실상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다지 낯설지 않은 청춘의 모습이다. 사방이 가로 막혀 있는 갑갑한 현실의 벽 앞에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세 자매는 그녀들의 구원으로서 ‘모스크바’를 외친다. 하지만 꿈꾸는 것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결단하고 실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꿈을 꾼다. 견디기 힘든 현실을 견디기 위해서, 혹은 정말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꿈으로 그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비루할지언정 너무나 안정되어 버린 일상을 걷어차고,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불안한 미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미지의 시간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선택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심한 시간은 흐르고, 1막에서 ‘모스크바’를 외치던 세 자매는 2막과 3막 그리고 4막에서도 여전히 그 곳에 머물러 있다. 교사직을 그만두려고 하던 올가는 교장이 되고, 마샤는 마찬가지로 불행한 결혼 생활로 고통스러워하는 ‘베르시닌’ 중령과 동병상련의 힘겨운 사랑에 빠지며, 이리나는 무의미한 직장 생활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세 자매에게 희망과 같았던 남동생 ‘안드레이’는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한 ‘나타샤’의 유혹에 빠져, 너무 쉽게 교수가 되려던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만다.

그렇게 멈추어 서 있는 세 자매의 삶은 점점 더 감당할 길 없는 가혹한 현실에 질식당해 간다. 오직 자신이 낳은 아이들의 안녕 밖에는 관심이 없는 나타샤에 의해 자신의 방을 빼앗기는 순간, 이리나는 깨닫게 된다. 이제 더 이상 ‘모스크바’를 꿈꿀 수 없다. 정말 그 곳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듯 체홉은 그저 멈추어 서 있었기에 좌절된 꿈을 읊조릴 수밖에 없었던 세 자매의 모습을 통해 역설적으로 말한다. 갔어야 했다. 떠났어야 했다. 더 늦기 전에 결단했어야 했다. 하지만 늘 대개의 인생이 그러하듯 깨달음은 뒤늦게 찾아오고, 일과 기회 그리고 사랑은 어느 덧 희미한 자취만을 남긴 채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꿈이 사라져 버린 공간에 무엇이 남을 수 있을까? 군대의 이동과 함께 텅 비어버린 도시에 남겨진 세 자매 곁에는 속물스런 시의회 의원이 된 안드레이와 이기적인 욕망의 화신으로 변해 버린 그의 아내 나타샤 만 남아있을 뿐이다. 생존 본능을 위한 이해타산에 밝은 나타샤의 세계는 점차 꿈의 흔적을 부여잡고 위태롭게 서 있는 세 자매의 세계를 거침없이 침식해 들어온다. 이런 이유로 서로를 힘겹게 의지한 채 삶의 의미와 미래의 희망을 애써 부르짖는 세 자매의 마지막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안쓰럽게 만든다. 

간다, 간다 하면서도 결국에는 가지 못하고 현실을 맴돌고 주저앉고 마는 허다한 인생의 모습을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해 그린 체홉의 <세자매>에서, 이윤택 연출은 그 이면에서 꿈틀대고 있는 격렬한 욕망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는 원작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방식으로서 은유와 절제의 방식을 파하고, 도리어 노골적인 표현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의 본심을 폭로한다.

당시 사회 통념상 은밀한 방식으로 묘사되었던 나타샤의 유혹은 안드레이를 거의 덮치는 식의 본능에 충실한 모습으로 형상화 되고, 원작에서 서로에 대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고통스러워하는 마샤와 베르시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격렬한 키스와 포옹을 주저하지 않는다. 군의 이동으로 인해 무기력하게 떠나는 베르시닌의 등에 뛰어 올라 머리채를 움켜쥐는 마샤의 파격적인 모습은 이전의 어떠한 <세자매> 공연에서도 볼 수 없는 ‘통속적인’ 동시에 한국적인 정한의 표현 방식이었다.

사실 이전의 전통적인 방식의 공연들에서 <세자매>의 등장인물들은 비록 내면에는 인생의 고뇌와 욕망이 꿈틀대고 있을지언정, 겉으로는 세련되고 예의바른 태도로 각자의 진심을 감추곤 했다. 하지만 이윤택 연출은 이런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지극히 ‘속물적인’ 보통 사람들의 그것에 다름 아니라고 해석한다. 베르시닌은 불행한 결혼 생활을 감추기 위해 늘 인류나 조국의 미래에 관한 멋진 장광설을 늘어놓는 한심한 사람이며, 그런 베르시닌의 번지르르한 겉모습에 빠진 마샤는 그와 헤어지는 마당에도 자신의 신발을 챙기는, 말 그대로 ‘아줌마’다.

안드레이는 점차 몰락해 가는 집안의 현실은 물론, 아내 나타샤의 공공연한 외도를 애써 외면한 채 다만 안정만을 추구할 뿐이며, 그의 아내 나타샤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위에 대한 영향력을 장악해 성공하려는 탐욕스런 신자유주의 시대의 화신과 같은 존재이다. 이윤택 씨는 이번 작품을 통해 체홉의 매력이란 지극히 속물적인, 그런 까닭에 우리와 같이 평범한 보통 사람의 희망과 절망, 욕망과 좌절을 담아낼 수 있는 특유의 통속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체홉 작품 특유의 침묵과 절제의 미학을 포기하고, 통속극 방식의 자극과 도발의 독법을 선택한 이윤택 연출의 <세자매>는 분명 쉽고 재미있는 대중적인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그만큼 원작이 지닌 정서, 곧 가고 싶고, 말하고 싶고, 드러내고 싶었지만, 결국 끊임없는 망설임 속에 인생을 놓쳐버린 세 자매의 회한어린 정서는 느끼기 힘들어졌다. 어떤 방식의 해석이 원작 또는 관객의 취향에 보다 적합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이제 관객의 몫으로 남아있다. 다만 과거 전통적인 방식의 해석과 차별화 된 방식의 새로운 <세자매>가 체홉의 작품 보는 즐거움을 더하게 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듯 보인다.(박준용_연극평론가)

08. 04. 18.

P.S. 로렌스 올리비에가 감독한 영화 버전의 <세자매>(1970)는 http://www.youtube.com/watch?v=saiH6HJH2Zw 참조. 도입 장면에서 암시되지만 세자매는 세월에 흐름에 맞서고자 하는 운명의 세 여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윤택 버전에서는 너무 '속물'로만 그려놓은 것이 아닌가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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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20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홉의 소설은 재밌는데 희곡은 아직...왜 희곡은 읽기가 싫은지 모르겠어요.그래서 셰익스피어 전집도 사놓은지 5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안보고 있어요.

로쟈 2008-04-20 00:25   좋아요 0 | URL
독서일기를 내려면 읽어주셔야 할 거 같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4-22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영화 리뷰 한편을 옮긴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06). 아프가니스탄 출신 작가 호세이니 원작의 <연을 쫓는 아이>. 개봉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리뷰를 읽으니 꼭 챙겨보아야 할 영화의 하나다. 짧은 리뷰라서 이럴 땐 더 유익하기도 하고(작가 호세이니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718531 참조).

시사인(08. 03. 01) 우정과 용기의 놀라운 치유력

영화 번역가 이미도의 산문집을 읽다가 탐나는 문장을 발견했다. ‘가장 고백하기 힘든 사연이 그 사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의미를 가진다.’ 영화 <스탠 바이 미>의 원작 소설 <시체>에 나오는 첫 문장이라는데, 영화 <연을 쫓는 아이>를 소개하는 이 글에 꼭 빌려 쓰고 싶은 문장이다. 이 영화는 가장 고백하기 힘든 사연을 용기 있게 털어놓은 뒤 자기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행동을 실천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 옛 소련이 침공하기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그 사건’이 일어났다. 수도 카불에 사는 부잣집 아들 아미르와 하인 아들 하산. 아미르는 글을 모르는 하산의 머리가 되어주고 하산은 싸움 못하는 아미르의 든든한 보디가드가 되어주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다. 나란히 열두 살 되던 해 겨울, 카불 시내를 들썩이게 만든 대규모 연싸움 대회가 열리고, 아미르와 하산이 힘을 합쳐 우승을 차지한 기쁜 순간이 잔인한 운명의 시작이다. “네가 원하면 1000번이라도 연을 찾아올 수 있다”라며 떨어진 연을 찾아 골목길을 달려나간 하산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 뒤늦게 친구를 찾아 나선 아미르는 하산이 불량배들에게 겁탈당하는 현장을 목격하고도 겁에 질려 숨어 있는다. 그 후 친구 얼굴을 볼 때마다 치밀어오르는 죄책감이 불편했던 아미르는 엉뚱한 거짓말로 누명을 씌워 하산 가족을 내쫓아버린다. 참 많은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아미르는 오랫동안 잊고 지낸 하산의 소식을 듣는다. 뒤늦게 반성한다. 속죄한다. 그리고… 참 많이 운다.



<연을 쫓는 아이>는 아프가니스탄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가 2003년에 펴낸 같은 제목의 소설이 원작이다. 38개 언어로 번역돼 전세계에서 800만 부가 팔린 이 베스트셀러의 매력은 우리가 늘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실천하지 못하는 두 가지 덕목, ‘우정’과 ‘용기’의 기운 센 치유력을 증명해 보인 데 있다.

‘실용’보다 ‘관용’이 먼저이기에…
<몬스터 볼>과 <네버랜드를 찾아서>를 만든 감독 마크 포스터가 연출을 맡은 건 원작자에게 큰 행운이다. 오직 코끝 찡한 이야기의 힘에 감동해 28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스태프와 배우가 모여든 건 감독에게 큰 행운이다. 그렇다면 실제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찾아낸 평범한 아이들이 주연을 맡은 건 관객에게 가장 큰 행운일 것이다. 그 맑은 눈동자가 없었더라면, 그 순박한 미소가 없었더라면, 보는 이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뒤흔들어놓지는 못했을 테니 말이다. 이슬람권에서 금기시하는 강간 장면 촬영 뒤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는 보도를 접한 후에는 마치 내 아이들인 양 안부를 궁금해하게 됐다. 다행히 아무 탈 없이 잘 지낸다니 안심이다.  



가장 고백하기 힘든 사연이 그 사람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 의미를 가진다. 맞는 말이다. <연을 쫓는 아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가장 실천하기 힘든 행동을 정말 실천에 옮길 때, 그 사람 인생뿐만 아니라 그걸 지켜보는 우리 인생까지도 아주 소중한 의미를 가진다는 걸 보여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실용’보다 ‘관용’이며 ‘경기 회복’보다 ‘용기 회복’이 먼저라고 귀띔해주는 이 기특한 영화를 보고 <뉴스위크>의 평론가 데이비드 앤슨이 이렇게 썼다. ‘이 영화에 감동받지 못하면 가슴이 딱딱한 사람이다.’ 정확한 표현이다. 말 그대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이 영화의 찡하고 짠한 라스트 신을 보고 난 뒤에도 여전히 딱딱한 가슴이라면 그 양반, 참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김세윤_영화 에세이스트)

08. 03. 14.

P.S. 영화에 얽힌 뒷이야기, 혹은 '현실' 이야기는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1002009&article_id=5045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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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3-14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원작 책과 함께 주목하고 있었는데 개봉관은 그리 많이 잡을 순 없을 것 같습니다.

로쟈 2008-03-14 09:35   좋아요 0 | URL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도 그랬었지요...

순오기 2008-03-14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대하고 기다리는 영화입니다.

로쟈 2008-03-14 09:35   좋아요 0 | URL
아이들과 함께 볼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섬나무 2008-03-14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이나 부산도 아닌 광주에서 이런 영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건 아무래도 행운입니다. 이런 순간마다 광주극장 운영자님께 절로 감사합니다.

로쟈 2008-03-14 09:34   좋아요 0 | URL
머지않아 '서울이나 부산도 아닌 광주'에서 '광주라서'로 토가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

드팀전 2008-03-14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 영화에 대해 <씨네 21>은 비판적 의견을 냅니다.물론 전쟁 전의 아프간을 볼 수 있고 우정을 이야기하지만....미국은 빠져있는 아프간...또는 알고 봤더니 그 둘이 그랬다더라..라는 아침 드라마 같은 통속적인 설정...마지막부분 갑자기 액션 영화를 방불케 하는 연출 등등....앞에까지만 좋았다라는 평가들도 있더군요.부분 동의!!

로쟈 2008-03-14 09:33   좋아요 0 | URL
원작 소설이나 영화나 미국인들의 '아프간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부분이 있겠지요. 하지만 그러한 '효과'와 더불어 '부작용(side effect)'도 있는 거구요...

섬나무 2008-03-14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을 작정하고 구입한 건 이번에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처음이었어요. 어떤 영화 평론가의-로쟈님이 올린 기사-맥카시 평가가 대단해서리...결론적으론 이 책은 '정말 원작'으로 읽어야 그 맛이 나는 걸까? 싶었습니다. 아마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나 봅니다. '롤리타'는 정말 원작이 아니어도 나를 완전히 매수했었으니까요.
나보코프의 언어유희와 그의 감각이 그대로 전해져서 책을 읽는 내내 황홀지경이었거든요.
하여간 책을 읽고 났더니 영화가 궁금하지 않아졌지요. 피 냄새를 충분히 맡았어요.

로쟈 2008-03-14 23:37   좋아요 0 | URL
해럴드 블룸 같은 비평가가 맥카시를 최고의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고 있습니다. 피냄새보다는 소녀의 향기가 사실 더 낫긴 하죠.^^;

다락방 2008-03-14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시사인에서 이 리뷰 읽었어요. 그전부터 보고싶었던 차에 리뷰읽고 나니 더 보고싶어지더라구요. 그런데 개봉관도 별로 없을뿐더러, 그 개봉관에서 조차 상영일이 길지 않더군요. 오늘이라도 달려가서 보아야 할까봐요. 영화 한편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로쟈 2008-03-14 23:38   좋아요 0 | URL
리뷰는 여기저기 실려 있는데, 개봉관은 정말 드문 모양이군요...

L.SHIN 2008-03-14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연을 날리는 꿈을 꾸었는데... 나는 무엇을 날리고 싶었던 걸까요.

로쟈 2008-03-14 23:39   좋아요 0 | URL
저는 꿈에서 연을 본 게 몇 십년 되는 거 같습니다.^^;

L.SHIN 2008-03-15 14:12   좋아요 0 | URL
전 꿈에 연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원래 그런 꿈은 자주 꾸는 종류인가 보죠?

2008-03-15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15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동안 뜸했던 영화소식이다. 연말에 개봉된 영화들에 별로 눈길이 가지 않았는데(나는 판타지류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예외적인 영화라면 리들리 스콧의 신작 <아메리칸 갱스터>가 있다. 안 건드린 장르가 없는 감독이지만 '갱스터 무비'는 그가 처음 손대는 것이며 그만의 독특한 갱스터의 얼굴을 그려냈다는 평을 읽은 바 있다. <아메리칸 갱스터>를 계기로 대표적인 갱스터 영화들을 짚어보는 기사를 옮겨놓는다. 드라마 <소프라노스>에 대해서는 평으로만 접했는데, 이것도 '미드'로 수입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한겨레(07. 12. 31) 갱스터, 바로 당신의 두 얼굴

제목부터 과감한 <아메리칸 갱스터>는 지극히 미국적인 갱의 초상을 그려낸다. 흑인 갱단 보스 프랭크 루카스는 모든 것을 ‘비즈니스 마인드’로 생각하는 갱이다. 단지 이익을 내기 위해 폭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구조의 혁신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새로운 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야말로 가히 ‘미국의 갱스터’라고 부를 만하다. 혹은 아무것도 없었던 사막에, 몽상가의 꿈을 현실의 라스베이거스로 만들어낸 벅시 같은 갱은 어떨까? 그것이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성공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진다는 점에서, 갱단의 세계야말로 가장 비열하면서도 공정한 게임의 법칙이 관철되는 곳일 것이다. 프랜시스 코폴라의 <대부>나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의 걸작 갱스터 영화들이 갱단의 흥망성쇠를 통해 미국 사회의 내적 변화를 탁월하게 그려낸 이유도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갱스터의 캐릭터는 우리와는 다른 악인이면서, 폭력적인 인간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인 동시에 우리 자신의 얼굴이기도 했다. 하나의 장르로 완벽하게 정착한 갱스터 영화는 현실을 예리하게 담아내는 거울로서 훌륭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갱스터 영화의 고전이 된 <대부>(1972)의 마이클 콜레오네는 삼형제의 막내였기에, 자신이 보스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큰형이 죽고, 아버지가 위기에 처하자 마이클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히고 ‘대부’가 된다. 극한 상황에 몰리기 전까지, 마이클은 그저 선량한 중산층이었다. 누구나 마이클이 착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이클이 조직의 보스가 된 뒤에는, 모든 것이 바뀐다. ‘패밀리’를 지키기 위해서 마이클은 냉혈한이 된다. 그것이 마치 그의 본성이었던 것처럼, 마이클은 완벽하게 탈바꿈을 한다.

<대부>의 마이클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타락이다. 마이클은 가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모든 거짓과 폭력 그리고 음모를 이용한다. 거기에는 한 치의 후회나 망설임도 없다. 그에게는 가족이라는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을 구원하는 대부가 되기 위해서, 마이클은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그것은 바로 성공을 위해 인간성을 방기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반면 <좋은 친구들>(1990)의 헨리 힐은 마피아 동네에서 심부름을 하며 자라 자연스럽게 갱단 일원이 된다. 헨리에게 가장 성공적인 미래는 마피아 간부가 되는 것이었다. 트럭 화물을 훔치고, 마약 거래를 하는 등 악행을 일삼던 헨리는 마침내 마피아 일원이 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탈리아인이 아니라 아일랜드계였던 헨리가 간부가 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헨리는 그저 동네 양아치일 뿐이다. 남의 물건과 돈을 훔쳐 흥청망청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향락을 즐기는 보통의 인간이었다.

애초에 위대한 갱스터가 되기에는, 헨리의 그릇이 너무 작았다. 에프비아이에게 잡힌 헨리는, 조직의 비밀을 증언하는 대신 증인보호 프로그램에 들어간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낯선 동네에서, 이제 헨리는 그냥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멋진 인생’을 꿈꾸었지만, 헨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결국 그 정도였던 것이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누구나 화려한 스타를 꿈꾸지만, 대부분의 종착점은 소박한 시골역인 것이다.

가장 현실적인 갱은, 영화가 아니라 미국 드라마 <소프라노스>(1999~2007)에서 찾을 수 있다. 토니 소프라노는 뉴저지 북부를 관장하는 조그만 조직의 보스다. 그의 고민은 가정과 조직, 즉 두 개의 패밀리다. ‘급격한 클라이맥스나 사건 없이, 보편적인 삶의 리듬과 맞아 떨어진다’는 분석처럼, <소프라노스>는 우리의 일상과 다르지 않은 마피아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족과 함께 외식도 해야 하고, 아이들의 진로 문제도 고민해야 하고, 한편으론 애인도 돌봐야 한다. 합법적인 사업에 끼어들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서, 여전히 도둑질이나 도박 사업에도 손을 댄다.

일과 가족 때문에 고민을 하는 여느 가장과 마찬가지로 토니 소프라노 역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결국은 발작을 일으키고 정신 상담까지 받는 소프라노는 그저 친근한 우리의 이웃일 뿐이다. 때로 다정하고, 때로 폭력적이고, 때로 우스꽝스러운. 그들에게는 단지 우리와 같은 일상에 ‘범죄’라는 사업이 하나 더 끼어들어 있는 것뿐이다. 냉정하게 사람을 죽이거나 태연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그게 사업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비즈니스의 영역에서는 냉혹하고 잔인해지는 것처럼.

<아메리칸 갱스터>의 프랭크 루카스 역시 가족을 위해서, 성공적인 사업을 한 것이다. 원산지에서 직접 마약을 입수해 시중에서 파는 것보다 순도는 두 배 높고 가격은 절반인 제품을 팔아 시장을 장악한다. 그것만 본다면 프랭크는 탁월한 사업가다. 미국에서 가장 칭송받는, 혁신적인 사업가인 것이다. 그리고 토니 소프라노의 고민이 두 개의 패밀리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이었던 것처럼, 프랭크의 고민은 어떻게 시장을 장악하여 ‘가족’을 부유하게 만들 것인가, 였다. 프랭크야말로 전형적인 미국인이었다. 갱스터나 보통 사람들이나 목적은 하나다. 단지 그 방법이 조금 다를 뿐, 성공을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는 하나인 것이다. 갱스터 영화를 볼 때, 폭력과 범죄의 향연 속에서 결국 우리는, 우리의 얼굴과 만나게 된다.(김봉석/대중문화평론가)

08. 01. 02.

P.S. 역시나 '가족'과 '사업'을 다룬 '코리안 갱스터'로 <우아한 세계>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없었다면 더 좋은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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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1-02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묵직하고 심각한 갱스터 영화관련 페이퍼를 보면서 저는 에널라이즈 댓과 디스라는 꽤 코믹스럽게 만든 갱스터 영화 생각하면서 혼자 킥킥거리고 있습니다.^^

로쟈 2008-01-02 14:31   좋아요 0 | URL
'가족'만 아니면 얼마든지 코믹해질 수 있는 장르죠.^^
 

프레드릭 제임슨의 <지정학적 미학>(현대미학사, 2007)에 대한 한 서평을 옮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301). 지난 9월말에 읽을 만한 책 목록(http://blog.aladin.co.kr/mramor/1595932)으로 골라놓고서 아직 부분적으로밖에 참조하지 못했는데, 개인적으론 러시아의 영화감독 알렉산드르 소쿠로프를 다룬 '소련의 마술적 리얼리즘' 같은 장을 필독할 필요가 있어서 책상맡에 오랫동안 놓아두고 있는 책이다. 출간된 지 몇달이 지났지만 본격적인 서평은 눈에 띄지 않던 차여서 반가운 마음에 챙겨둔다(이런 '이론서'의 독자는 몇 명이나 되는지 문득 궁금하다). 한편, 그의 주저인 <정치적 무의식>이, 드디어, 근간예정이라는 소식도 들리므로 내년엔 '제임슨 읽기'도 따로 계획해둠 직하다(비록 '고난의 읽기'일 것 같은 예감을 떨치기 어렵지만)...

교수신문(07. 12. 10) '陰謀의 플롯’ 분석해 정치적 무의식 탐색

현대사회에서 영화는 모든 대중문화를 삼켜버릴 만큼 그 몸집이 비대해졌다. 뤼미에르 형제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차의 도착’을 상영한 이래 영화는 현대 대중문화의 절대강자로 군림한 것이다. 영화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산업은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그 위력을 발휘한다. 한국만 하더라도 적은 인구에 비해 천만 관객을 훌쩍 뛰어넘은 영화들이 속속 등장했으며, 영화산업이 문화산업의 우두머리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문화가 곧 산업이 되고 화폐가 되는 현재의 시점에서 영화는 예술이 아니라 자본축적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

전방위적 사상가이자 문화평론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이 이제 영화를 말한다. ‘이제’라고 했지만, 『지정학적 미학』이 출간된 것은 1992년이니 ‘이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주장했던 정치적 무의식이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인식적 지도그리기(cognitive mapping)는 인문학 분야에서 이미 일반적으로 통용된 지 오래다. 또한 그의 문장 자체가 매우 난해해서 포스트모던적 글쓰기의 전범(?)으로 악명을 떨친 지도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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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자본주의의 질료, 영화
‘마지막’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리며 세계 체제와 사회적 총체성에 대해 심도 깊은 논의를 펼쳐왔던 그가 영화라는 대중문화를 분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야말로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상품이며, 영화야말로 권력과 집단의 이데올로기가 오롯하게 재현되고 있는 장르다. 지정학적 미학』의 추천사를 쓴 콜린 맥케이브의 말처럼, 영화는 “자본주의 초기단계의 완전한 발전을 감안하지 않고는 이해가 불가능한 가장 적절한 포스트모던 예술”이자 “가장 세련된 산업생산의 산물”인 “최후의 기계”다. 따라서 모든 텍스트를 정치적 판타지로 해석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에게 영화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총체성을 분석하는 중요한 대상이 된다.

프레드릭 제임슨에게 후기자본주의 세계 체제는 시간과 공간을 무너뜨리고, 그 시간과 공간의 분기점들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컴퓨터 미디어 테크놀러지가 요동치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의 총체성을 집약적으로 담고 있는 텍스트가 영화인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영화는 단순히 오락거리가 아니다. 그에게 영화는 “집단적 판타지의 심층적인 수준”을 파헤칠 수 있는 질료이다. 또한 영화는 전 지구적 세계 체제에서 벌어지는 “음모의 플롯”을 내장하고 있는 문화상품이기도 하다.

『지정학적 미학』은 영화를 매개로 정치적 무의식을 탐험하려는 저자의 야심찬 시도이다. 또한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시각화 된 인식적 지도그리기’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제1세계를 대표하는 미국의 영화를 비롯해 소련의 SF영화, 프랑스, 대만, 필리핀 등 무수히 많은 영화를 대상으로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재현의 문제를 거론한다.

이러한 영화를 읽어내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독법은 잠재적 징후들 속으로 파고들어 가서 그것을 현실의 장으로 끄집어내고, 그것을 세계 체제의 차원에서 재해석하는 일이다. 그가 영화의 내러티브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주장하고 싶은 것은 “지정학적 무의식”이다. 지정학적 무의식이란 “우리의 새로운 세계-내-존재를 파악하기 위해 민족적 알레고리를 하나의 개념적 도구로 재편하려는” 시도이다. 또한 그것은 민족적 알레고리의 차원을 넘어 전 지구적인 차원의 알레고리를 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음모이론’이다. 이는 그가 발 빠른 문화평론가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1990년대는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온라인상에서 다양한 음모이론들이 유통되고 있었다. 1993년에는 ‘엑스파일’이 20세기 폭스사에서 제작됨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마니아층이 형성됐다. 『지정학적 미학』에서 저자가 분석하고 있는 ‘대통령의 음모’, ‘비디오드롬’,  ‘콘돌’, ‘암살단’ 등에는 모두 우리의 일상 곳곳에 촉수를 뻗고 있는 음모를 폭로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더욱이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장면은 미디어를 통해 재현됨으로써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을 “독특한 역사 속에서 서로 묶어 며칠 동안을 하나의 거대한 집단성으로 이끌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유토피아적 공공영역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프레드릭 제임슨에게 음모라는 서사는 후기자본주의 시대에 사는 인간들, 즉 분열되고 파편화된 주체들을 전 지구적으로 묶어주는 매개체인 것이다.



민족적 알레고리와 지정학적 무의식
이 순간에도 음모이론은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 찬 인류에게 매혹적인 내러티브를 제공해 준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미드(미국드라마) 열풍’의 일등공신이었던 ‘CSI’는 공중파를 타고 한국인들의 안방을 공습했다. 특히 미국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이 테러를 당하자 곧바로 ‘CSI:뉴욕’이 제작돼 공중파와 인터넷을 타고 전 세계로 송출됐다. 더군다나 ‘CSI:뉴욕’의 주인공인 맥 테일러 반장은 해병대 출신이자 9·11테러로 아내를 잃었다. 뉴욕의 안전을 지키는 맥 테일러가 지칠 때 마다 찾는 곳은 ‘그라운드 제로’이고, 바로 그 ‘장소’에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다. 지난 10월 5일 방송에서는 또 하나의 신화가 탄생했다. 발칸반도 출신의 미국 유학생들이 플라스틱 폭탄으로 세계 평화의 상징인 UN본부를 테러하려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CSI:뉴욕’뿐만 아니라 ‘24’, ‘앨리어스’ 등은 한국에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 드라마다. 그런데 이 드라마들의 공통적인 점은 보이지 않는 ‘가상의 적’과 ‘음모’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도깨비 방망이라는 것이다. ‘CSI’의 과학수사대 요원, ‘24’의 대테러 요원(CTU), ‘앨리어스’의 CIA 요원 등이 한국의 ‘미드 폐인들’을 숨 가쁘게 음모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이를 프레드릭 제임슨은 “세계의 경찰이라는 사명감으로 거듭 태어난 미국의 재탈환”이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드라마라는 미디어는 영화와 함께 우리의 인식을 점령하는 새로운 무기가 됐다. 할리우드 시스템과 미드 열풍이 ‘합작’해낸 ‘세계 문화산업의 미국화’라는 뻔히 보이는 ‘음모’에 맞설 수 있는 문화적 창조성은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이승원 / 한양대 연구교수·국문학)

07. 12. 13.

P.S. 제임슨 읽기의 곤혹스러움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그걸 좀 덜어주는 국역본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난삽한 문장들도 문제지만 이런저런 부주의도 거기엔 한몫한다. 가령 <지정학적 미학>의 경우에도 저자 서문의 첫번째 각주에 제임슨이 '다국적 자본주의 내에서의 제3세계 문학'이란 에세이에서 "아프리카 영화 <우스만 셈벤>에 대해서도 아주 간단히 다루었다."라고 해놓았는데, '우스만 셈벤'(1923-2007)은 영화명이 아니라 감독명이다. 그러니까 우스만 셈벤의 영화들에 대해서 몇 마디 적어놓았다는 얘기다. 나도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이 세네갈의 영화감독은 '아프리카 영화의 아버지'로까지 불리는 인물이다. 영화명으로 처리해놓고 넘어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이다. 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이런 부주의가 번역서에 대한 신뢰를 침식해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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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07-12-14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이 페이퍼를 읽고 불현듯 드는 생각은, 태안 원유 유출 사고와 총기 탈취 사건이 괜한 게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명예훼손이라고 할까봐 말은 못하겠지만, 여론의 관심을 다른 곳에 돌리고 구렁이 담넘어 가듯 넘어가려고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해서요...ㅎㅎ

로쟈 2007-12-14 08:34   좋아요 0 | URL
그게 사건마다 다 해명되지 않는 의문점들이 계속 남으니 음모론의 신세를 지더라도 도리가 없겠습니다. 그리고 음모론의 3%는 진짜라고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