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기차 안에서 마스크를 쓰고서 지젝의 <팬데믹>을 읽는다. 지젝이 인용한 헤겔의 통찰을 읽는다. 그에 대한 냉소는 지젝도 예상한 바인데, 그보다 먼저 헤겔이 적시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울 게 없다는 사실이라고 헤겔은 썼다. 그러니 감염병 덕분에 우리가 더 현명해지리라는 주장은 의심스럽다.˝

흠, 읽으면서 그리고 옮겨적으면서 고개를 갸웃한 대목이다. 헤겔은 무엇에 대해서 냉소하는 것인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울 게 없다? 헤겔이 역사 무용론자인가? 내가 한글을 잘못 이해하는 게 아니라면 이 부분은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헤겔은 썼다˝라고 옮겨져야 한다. 그러니까 문제는 역사가 아니라 우리다(유명한 문구이므로 이 문장의 영어 번역을 온라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The only thing we learn from history is that we learn nothing from history.˝

역자가 너무 무심하게 번역한 게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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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3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슬라보예 지젝의 <팬데믹 패닉>(북하우스)이 예상대로(어쩌면 예상보다 빨리) 번역돼 나왔다. ‘코로나 19는 세계를 어떻게 뒤흔들었는가‘가 부제. 이런 사안과 관련한 철학적 개입으로는 탁월한 순발력과 책임감을 보여준 철학자가 지젝이었기에 <팬데믹>의 출간이 놀랍지 않다. 그렇지만 놀랍지 않다고 해서 반가움이 주는 건 아니다.

팬데믹 혹은 코로나를 키워드로 하여 현 상황과 이후의 전망을 다룬 책들이 계속 나오고 있고(국내서로는 <코로나 사피엔스> 등이 있다) 이런 추세는 적어도 내년까지는 이어질 듯싶은데 그래도 내게는 지젝의 책이 기본서 역할을 해줄 것이다. 게다가 한국어판에는 한국어판 서문을 포함해 영어판 원저에 없는 글들도 추가돼 있다. 책에 대해서는 이번 여름에 강의 일정도 잡아보려 한다.

지젝의 서문은 ‘나를 만지지 마라!‘는 (부활한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했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란 문제로 시작한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고 자처하는 나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데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고 자처하는 나˝라는 말이 믿기지 않아서 원서를 찾아봤다. 지젝이 쓴 표현은 ˝an avowed Christian atheist˝이다. 역자가 무심코 잘못 번역했는데 ˝Christian atheist˝는 ˝Atheist˝와 구별되며 ‘기독교 무신론자‘라고 옮겨야 한다. 그게 어색하다면 ˝소위 기독교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나˝ 정도로 옮길 수 있겠다.

책을 읽는 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지젝에 대한 ‘오해‘ 같아서 읽다가 적어놓는다. 기차 안에서 마스크를 쓰고 지젝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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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y1717 2020-06-26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의일정 나오면 블로그에 꼭 알려주세요 :)

로쟈 2020-06-27 14:29   좋아요 0 | URL
네, 공지할게요. 8월중일 거 같아요.~

바람돌이 2020-06-26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오랫만에 인사드려요. 무수히 많은 로쟈님의 숨은 팬 중에 하나입니다. ㅎㅎ
저는 지젝 글 어렵건데 요 책은 좀 덜 어려울까요? ㅠㅠ

로쟈 2020-06-27 14:28   좋아요 0 | URL
네, 지젝의 책 가운데서는 가장 쉬운 편에 속합니다.^^

2020-08-31 0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31 1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로쟈 > 신체 없는 기관, 혹은 카메라의 눈

14년 전에 쓴 글이다. 그맘때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이 번역돼 나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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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들뢰즈에 대한 헤겔적 비역질

13년 전에 쓴 리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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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의 신간이 나왔다. <용기의 정치학>(다산초당). '우리의 삶에서 희망이 사라졌을 때'가 부제인데, 원제 'The Courage of Hopelessness'를 제목과 부제가 나눠가진 형국. 앞서 나온 책으로는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문학사상)와 짝이 될 수 있는 책이다(같은 역자가 옮겼다). 자본주의가 두 책의 공통 화두여서다. 그런 면에서는 <공산당 선언 리부트>도 같이 읽을 수 있다.

















"21세기 정치 지형부터, 경제, 종교, 정치적 올바름 운동까지, 지젝은 세계의 면을 폭넓게 살펴보며 거짓 희망이 어떻게 사회에 퍼져 있으며, 이 문제를 넘어 진정한 변화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탐구한다. <용기의 정치학>은 정치적 진화의 종착지로 여겨지던 세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뿌리부터 뒤흔들리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용기와 지혜를 선사한다."


초면의 독자가 읽기에는 용기가 필요할 것 같지만 지젝의 책과 구면인 독자들에게는 유익한 통찰과 정치한 정세 분석을 접할 수 있겠다. 
















원저는 재작년에 나왔는데, '슬라보예 지젝의 신간'이란 소개가 무색하게도 그 사이에 나온 책이 이미 여럿이다. 이달에 나온 책으로는 <판데믹>도 있는데, 책은 구입해서 읽어보려는 참이다. 여름에 나올 예정인 헤겔책도 구미가 당긴다. 도대체가 읽는 속도를 무색하게 하는 철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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