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책들과 씨름했다. 이때 '씨름'은 물론 비유적인 의미에서 쓴 것이지만 비유만은 아닌 게 책을 읽고 이해하느라 고투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책장의 있는 책들을 모두 빼서 다시 정리하느라 진땀을 뺐다는 의미에서의 '씨름'이기 때문이다(그 결과 삭신이 쑤신다). 딸아이의 방을 만들어주려고 몇 주전부터 진행중인 프로젝트의 하이라이트로서 3단 책장 6개와 5단 책장 3개에 꽂혀 있던 책들을 모두 거실(혹은 베란다)로 빼내고 그걸 기화로 아예 서재의 책들까지도 전부 재배열했다. 전쟁터 같은 집안 풍경이 다소나마 정리된 게 어젯밤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칠하느니 마느니 갈피를 못 잡다가 결국 딸아이의 방에 칠할 '친환경' 페인트를 구했고 그 사이에 날은 저물었다. 어젯밤과 오늘 오전에 본 비디오를 반납하러 나갔다가 편의점에서 조간신문을 사들고 온 게 조금 전이다. 읽은 시간상으론 '석간'이라 해야 할 그 신문이 수요일자 한국일보이고 내가 읽은 건 고종석의 '말들의 풍경'이다. 특별히 오늘은 '文靑 사로잡은 비평의 신화' 김현을 다루고 있기에 여기에 옮겨놓도록 한다. 김현, 김윤식이란 이름은 내 청춘의 10년을 사로잡았던 '신화'이기도 했었기에(사실 고종석이 '말들의 풍경'이란 제명 자체를 빌어온 김현에 대해서는 연재의 말미에서나 다루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칼럼의 서두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이 불세출의 비평가가 세상을 뜬 지도 열여섯 해가 되었다. 그의 부고기사를 신문에서 읽고 어떤 막연한 의무감에 영안실이 안치돼 있다는 병원에 전화를 걸었던 기억마저 나는 갖고 있다(짧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만 되뇌었던가). 책장 정리를 다시 하면서 가장 가까운 서가에 그의 책 대여섯 권을 아직 꽂아둔 것도 그런 '인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인지도 모르겠다. 그 중 손이 닿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책이 <말들의 풍경>(문학과지성사, 1993 5쇄본)인데, 그가 세상을 떠난 1990년 12월에 나온 초판이 아닌 것은 내가 어떤 사정으로 이 책을 한번 더 샀기 때문이다(초판은 내가 군복무시절에 산 책이어서 지방에 놓아둔 것으로 기억된다).

사후적인 회고가 되겠지만, 언제부턴가 지난 90년대 문학을 '김현 이후의 문학'으로 나는 기억/규정한다. 마땅한 당대의 비평가를 갖지 못한 문학의 허전함을 나는 지우지도 채우지도 못하겠다. 칼럼의 중간에 나오는 고종석의 말을 미리 빌자면 "사실 김현은 문학평론을 그 자체로 읽을 만한 텍스트로 만든 거의 첫 비평가고, 어쩌면 마지막 비평가일지도 모른다." 그보다 목소리 큰 비평은 많고 그보다 예민한 비평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비평도 '문학'이라는 걸 확증시켜준 (어쩌면) 마지막 비평가였고, 그래서 그의 부재는 아쉽고 유감스럽다. 최근 '근대문학의 종언론'에 기대어 비평의 종언을 시비하는 이들도 없지 않지만 만약 비평에 종언이 있(었)다면 그건 지난 1990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4.19 세대가 소위 한국사의 '근대' 혹은 '근대 시민정신'과 '학생운동의 정신'을 웅변하는 세대였다면 김현이야말로 4.19세대의 가장 대표적인 비평가였고, 지난 1990년은 그가 세상을 떠난 해이니까.   

한국일보(06. 10. 04) [말들의 풍경]<31> 김현, 또는 마음의 풍경화

문학비평가 김현(1942~1990)이 돌아간 지 16년이 되었다. 16년이면 한 사람의 생애와 정신의 궤적을 감정의 동요 없이 되돌아보기에 꽤 넉넉한 시간적 거리다. 그에 대한 친구들의 사랑도, 적들의 미움도 그 격렬함이 많이 잦아들었을 테다. 그가 작고하고 세 해 뒤에 16권으로 완간된 ‘김현문학전집’의 종이빛깔도 제법 누렇게 되었다.

김현 이후 16년 세월은 이른바 ‘문지 동아리’ 안에서 김현 신화가 더욱 굳건해진 세월이기도 했고, 그 동아리 바깥에서 김현 신화가 사뭇 바랜 세월이기도 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치달은 이 세월의 힘 가운데, 더 큰 것은 뒤쪽이었던 듯하다. 그것은 생전의 김현이 누린 권위가 워낙 컸던 탓이기도 하다. 정점에 이른 자에겐 또 다른 상승의 가능성보다 추락의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아닌게아니라, 그 16년 세월은 김현 글의 모자람을 드문드문 드러낸 세월이었다.

그 모자람은 김현 둘레 사람들의 글과 견주어서도 더러 드러난다. 김현 이후 16년은 김현의 제자나 후배 비평가들의 나이를 김현보다 더 먹게 만들었다. 그가 아끼던 후배 김인환과 황현산은 이제 그들의 선배보다 훨씬 더 나이를 먹었고, 그가 아끼던 제자 정과리는 스승이 도달했던 마지막 나이에 이르렀다. 그 제자와 후배들의 글들 옆에 나란히 놓일 때, 김현의 글은 어쩔 수 없이 낡아 보인다. 사실 이런 ‘낡음’은 이미 김현 생전에도 기미를 드러냈다. 김현의 어떤 글은 정치함에서 김인환만 못해 보이고, 자상함에서 황현산만 못해 보이며, 화사함에서 정과리만 못해 보인다.

생전에 낸 마지막 평론집 ‘분석과 해석’의 서문에서 김현은 청년기부터 그 때까지 자신의 변하지 않은 모습 가운데 하나로 ‘거친 문장에 대한 혐오’를 거론했으나, 그 혐오를 철두철미하게 실천한 것 같지는 않다. 청년 김현의 글에서는, 청년 정과리의 글에선 찾기 어려운 유치함과 허세 같은 것도 읽힌다. 현학은 ‘배운 청년’이 흔히 앓는 병이지만, 청년 김현은 그 병을 좀 심하게 앓았던 듯하다. 물론 김현은 이내 그 병에서 회복되었다.

그러나 김현의 글은, 이 모든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이 후배와 제자들의 글보다 훨씬 더 맛있게 읽힌다. 그의 윗세대나 동세대 평론가들의 글과 견주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사실 김현은 문학평론을 그 자체로 읽을 만한 텍스트로 만든 거의 첫 비평가고, 어쩌면 마지막 비평가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김현이, 적어도 30대 이후의 김현이, 비평이란 수필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드문 비평가였다는 사실과도 관련 있을 테다.

그에게 비평은 논리와 지식의 전시장이 아니라 직관과 감수성의 연회였다. 김현은 비평을 제 앎을 드러내는 자리로 사용하지 않고, 마음(의 파닥거림)을 주고받는 자리로 사용했다. 작품론이나 작가론에서, 김현은 (초기 글들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불문학 교양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김현 특유의 직관과 감수성이, 모든 뛰어난 비평가에게 그렇듯, 오래 축적된 문학 교양과 어찌 관련이 없으랴?

김현이 자신의 직관과 감수성으로 작품에서 길어낸 의미가 늘 옳았던 것 같지는 않다. 다시 말해, 한 작품이 김현의 손길을 통해 늘 제 비밀을 고스란히 드러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 말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한 작품에는 고정된 의미(들)만 있다는 속 좁은 문학관이 그 속에 웅크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생전의 김현이 결코 동의하지 않았던 견해다. 그러니 이 말을 이렇게 바꾸자. 김현이 작품에서 길어낸 의미가 늘 표준적이었던 것 같진 않다고. 사실은 그 반대다. 김현의 말 읽기, 마음 그리기는 거의 언제나 독창적이었고, 바로 그 독창적인 의미화를 통해 한 작품을, 한 작가의 정신세계를 두텁게 만들었다. 모든 독창적 해석이 누군가에게는 오해로 받아들여진다면, 김현은 오해의 대가였다고도 할 수 있다.

김현은 한 작품을 그 안으로부터만 읽어내지 않았다. 그는 한 작품을 그 작가의 다른 작품 전부와의 맥락 속에서 읽을 줄 알았고, 무엇보다도 한 세대 내 또는 세대간 영향(의 불안)이라는 커다란 맥락 속에서 읽을 줄 알았다. 그것은 유년기 이래 평생 이어진 그의 글 허기증 덕분이었다. 김현은 동시대 비평가들보다 글을 훨씬 많이 썼지만, 진짜 잊어서는 안 될 점은 그가 동시대 비평가들보다 글을 훨씬 많이 읽었다는 사실이다.

설령 그가 이런저런 작품들에 매긴 자리(생전의 김현은 ‘자리매김’이라는 말이 싫다고 고백한 바 있다. 자리매김이란 관계맺기, 관계짓기보다 훨씬 고착적이어서, 한 번 자리가 매겨지면 변경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상자 기사의 ‘말들의 풍경’ 서문은 그의 이런 생각을 매혹적인 한국어로 펼쳐 보이고 있다)가 늘 공정하게 보이진 않았다 할지라도,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넘나들며 작품과 작가에게 그럴듯한 자리를 마련해준 것은 김현 이전에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후에 출간된 독서일기에서, 김현은 자신의 글을 괴팍하다고 평한 어느 소설가의 말을 거론한 뒤, “괴팍하다니.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며, 남들도 다 쓸 수 있는 글들을 쓰는 것을 삼갔을 따름이다”라고 적고 있다. 김현의 이 자부심은 온전히 정당하다.

김현의 글은 어느 순서로 읽어도 술술 읽힐 만큼 자기완결적이지만, 시간축을 따라 읽을 때 그 저자의 ‘인간적 매력’을 한결 또렷이 드러낸다. 그 ‘인간적 매력’이란 지적 정서적 윤리적 성숙의 여정이다. 청년 김현의 글에서 설핏설핏 보였던 문장의 어설픔, 현학 취미와 자기애는 만년 글에서 거의 말끔히 걷혀지고, 단정하되 윤기 있는 문체가, 타인에 대한 배려와 겸양이 독자를 맞는다. (물론 그는 자신의 ‘앎’에 대해서는 겸손했으나 자신의 ‘감식안’에 대해선 끝내 겸손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감식안을 감식하지 못하는 한국 문단을 슬그머니 타박하기도 했다.) 기분 좋은 일이다.

지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윤리적으로든, 나이가 늘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이와 함께 푹 익은 인격을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한 분야의 세속적 정점에 이른 이의 인격일 때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게다가, 생전의 마지막 평론집 ‘분석과 해석’과 유고 평론집 ‘말들의 풍경’에 묶인 글들은 한국어 산문이 도달한 아름다움과 섬세함의 꼭대기를 보여준다.

 

 

 



김현은 문학이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정치적 문인이었지만, 그의 문학평론은, 특히 만년에 이르러, 폭력의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의 고갱이를 건드리곤 했다.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1987)와 그 즈음의 몇몇 평문에서 그가 탐색한 폭력의 의미는, 깊숙한 수준에서, 1980년 봄과 관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김현이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과, 역시 깊숙한 수준에서, 무관치 않았던 것 같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전라도 지식인들이 흔히 그렇듯, 김현도 ‘억눌린 자’와 ‘억누르는 자’ 사이에서, 아니 보편(적 지식인 됨)과 특수(한 소속감) 사이에서 정서적으로 동요하고 있었다. 제임스 쿤의 ‘눌린 자의 하나님’을 읽고 쓴 1986년 5월27일치 일기의 한 대목은 이렇다.

“나는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나 자신에 대해 숙고했다. 때로는 혐오하면서, 때로는 연민을 갖고서,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도피의 마음으로.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하숙을 거절당한 것, 사투리 때문에 놀림받은 것, 전라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80년 이후에도 조용하다는 것…… 등의 것들이 뭉쳐져 내 가슴에 밀려들어왔다. 쿤의 책은 내 경험세계의 신학적 의미를 되묻게 만든다. 나는 억눌린 자인가? 아니다. 억눌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완전히 지배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문학장’ 속에서 권력을 효과적으로 획득하고 합리적으로 행사하는 방법을 알았다는 점에서 김현은 매우 정치적이기도 했다. 대학시절의 ‘산문시대’에서 ‘사계’와 ‘68문학’을 거쳐 ‘문학과지성’으로 이어지는 그의 동아리 운동에는 세대 전쟁과 세계관 전쟁이 버무려져 있었고, 김현은 늘 제 캠프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다. 그가 문학의 고유성과 (은밀한) 위엄을 그리도 강조한 것은 바로 그 자신이 ‘문학’이었기 때문이리라.

서가에 꽂혀 있는 김현 전집 가운데서 아무 거나 뽑아 들어 띄엄띄엄 읽노라면 문득 가슴이 울렁거린다. 거기에 내 글의 원형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서나 그 눈길을 담아내는 문체에서나 내 글은 김현의 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리고 격조와 깊이에서 도저히 김현의 글과 견줄 수 없지만, 그 근원은, 행복해라, 김현의 글이었다.(고종석 객원논설위원)

● '말들의 풍경' 서문 (앞부분)

말들은 저마다 자기의 풍경을 갖고 있다. 그 풍경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다르다. 그 다름은 이중적이다. 하나의 풍경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풍경들의 모음도 그러하다. 볼 때마다 다른 풍경들은 그것들이 움직이지 않고 붙박이로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변화로 보인다. 그러나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말들이 갖고 있는 은총이다.

말들의 풍경이 자주 변하는 것은 그 풍경 자체에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풍경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자꾸 변화하기 때문이다. 풍경은 그것 자체가 마치 기름 물감의 계속적인 덧칠처럼 사람들이 부여하는 의미로 덧칠되며, 그 풍경을 바라다보는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마치 빛의 움직임에 따라 물의 색깔이 변하듯 변한다. 풍경은 수직적인 의미의 중첩이며, 수평적인 의미의 이동이다.

그 중첩과 이동을 낳는 것은 사람의 욕망이다. 욕망은 언제나 왜곡되게 자신을 표현하며, 그 왜곡을 낳는 것은 억압된 충동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본능적인 충동이 모든 변화를 낳는다. 본질은 없고, 있는 것은 변화하는 본질이다. 아니 변화가 본질이다. 팽창하고 수축하는 우주가 바로 우주의 본질이듯이. 내 밖의 풍경은 내 충동의 굴절된 모습이며, 그런 의미에서 내 안의 풍경이다. 밖의 풍경은 안의 풍경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안과 밖은 하나이다.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만물을 낳는다는 말의 참뜻은 바로 그것이다...

06. 10. 04.

P.S. 이 칼럼/페이퍼를 '곁다리텍스트'로 분류해놓는 것은 이전에 옮겨놓은,김윤식의 서문집에 대한 고종석의 칼럼('나는 '쓰다'의 주어다')과 짝을 맞추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또 (지극히 정당하게도) 칼럼 말미에 인용돼 있는 <말들의 풍경> 서문 때문이기도 하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6-10-05 00:48   좋아요 0 | URL
어머 그 많은 책정리를...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정말 책과의 씨름이었네요. 김현의 말들의 풍경 서문도 잘 보고 갑니다. 이 페이퍼 담아갈게요. 로쟈님, 감사합니다.^^

페일레스 2006-10-05 18:59   좋아요 0 | URL
저 역시 로쟈님이 풀어내는 '책들의 풍경'을 흥미롭게 읽다 가곤 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조각글(혹은 곁다리-텍스트)이 아니라 잘 정돈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진 로쟈님의 '말들의 풍경'을 손 안에 쥐고 싶다는 소망을 조심스럽게 가져봅니다...

로쟈 2006-10-06 00:39   좋아요 0 | URL
배혜경님/ 자업자득이니까 저로선 유구무언입니다. 할말이 많은 사람들은 주변의 가족들이지요(^^;)...
페일레스님/ 곁다리텍스트의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한권의 책'이 채 되지 못하는...
 

 

'소풍의 감동을 기리며'는 작가 성석제(1960- )의 <소풍>(창비사, 2006)에 '책머리에'라고 붙어 있는 서문이다(그러니까 이 또한 곁다리텍스트이다). 요일로 치자면 '소풍'에 해당하는 일요일 아침에 우연히 들춰보게 됐는데, 그것만으로도 거의 '브랜드화' 된 성석제를 읽을 수 있었다. 아니 이 경우엔 '맛볼 수 있었다'라고 적어야겠다. 한국 작가들의 책을 읽는 데 다소 소홀한 내가 그의 산문집으로 마지막에 읽었던 건 아마도 <쏘가리>(가서원, 1998)이었던 듯한데, 뒤져보면 쏘가리 매운탕에 관한 글도 산문집 어딘가에서 얼큰한 맛을 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대체로 음식에 관한 이 책은 '구수한 사람' 성석제의 '맛깔진 세상이야기'에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 거기에 덧붙은 서문은 아마도 '입가심' 같은 글이겠다. 그걸 맨처음 읽을 독자들에게는 '입맛다심'일테고. 그걸 약간만 따라가보겠다. 그러고픈 생각이 든 것은 이 서문이 작가의 문학관을 응축해 놓고 있어서이다.

"이 책에 든 글들은 대체로 음식에 관한 것이지만 음식만 이야기하려 한 것은 아니다. 음식을 통해서 새삼 깨닫게 되는 사람과 세상에 관해 썼다. 소풍 가서 나무 그늘에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고(食) 샘물을 마시는(飮)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낌(感)이 움직이는(動) 것을 공유하고 싶었다(*그러니까 이 글의 취지는 '식음감동'의 공유이겠다). 숙제를 해치우듯 먹어본 음식은 맛을 느낄 수 없었고 그렇게 해서는 음식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음식을 먹는 것이 소풍이라면 음식이야기 역시 소풍이며, 무릇 이야기란 또한 우리 삶의 소풍과 같은 것이다."(6쪽, 강조는 나의 것) 

그러니까 음식은 책에서 (수사법으로 치자면) 일종의 제유로 쓰였다. 사람과 세상에 관한 이야기 '전체'를 대신하는 한 '부분'이란 뜻이다. 더불어 그가 제안하는 건 '음식을 먹는 것'과 '음식이야기를 하는 것' 모두 소풍이라는 은유이다. 그걸 더 확장시켜서 그는 '무릇 이야기란 우리 삶의 소풍과 같다'라는 직유까지 동원한다. "거기에 소풍 가서 나무 그늘에 둘러앉아..."라는 문장은 환유적 연상에 기초하고 있다.

요컨대, 이 한 문단에 시의 주요 수사법이라 할 은유, 환유, 직유, 제유가 총동원되고 있는 것. 그들이 마치 동원예비군에 소집된 예비군 아저씨들처럼 모여서 작당하고 늘어놓는 음식이야기가 바로 <소풍>이라 해도 억지는 아니겠다. 그리고, 그들이 주거니받거니 하는 잡담 속에서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우리 삶은 소풍이다'라는 것(동원훈련을 소풍 가는 기분으로 가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자, 그럼 소풍이란 무엇인가? "먹고살기에 급급한 때가 있었다. 살기 위해 먹는 처지에 좋은 것과 나쁜 것, 마음에 들고 들지 않고를 가릴 형편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 우리는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해서 음식을 먹지는 않는다. 좋아하는 음식을 찾아서 맛을 본다는 건 바로 소풍 같은 것이다."(5-6쪽)

즉, 소풍이란 먹기에 좋은 것과 나쁜 것, 마음에 들고 들지 않고를 가릴 만한 형편이나 처지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필요, 곧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해방됨을 의미하는 것. 거창하게 말하자면, '역사의 종말' 이후가 되겠다. 작가의 제안대로, '소풍'을 '문학'으로 환치하면 어떻게 되는가? "요즘 우리는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해서 소설을 쓰는 게 아니다. 좋아하는 소재를 찾아서 즐감할 만한 물건을 만들어놓는 것이 문학이다." 

미식가란 일종의 쾌락주의자이며, 좋아하는 음식을 찾아서 기꺼이 얼마간의 수고를 감내하는 작가의 모습은 '구수한 쾌락주의자'의 그것이다. 이때 구수한 것은 그의 입담이지만, 그 입담은 필요를 벗어난/넘어선 곳에서 장기를 발휘하는지라 시류와 역사에 얽매이지 않는다. 종횡이다. 나는 거기에 성석제 문학의 공공연한 비밀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류와 역사야 말로 근대소설의 '본류'라는 의미에서 성석제의 '이야기'들은 소설과 무관하거나 소설의 무늬만을 갖고 있을 따름이다. 작가 김훈이 무늬만 소설인 에세이들을 쓰듯이 시인으로서 먼저 등단했던 성석제는 무늬만 소설인 시를 여전히 쓰고 있는 것 아닐까? 이쯤에서 보다 '본격적인' 그의 문학론을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한국일보의 인물탐구란에 연재됐던 글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이다. 옮겨놓고 나니까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나는 글인데, 특이하게도 작가는 호랑이 발자국과 대면했던 체험담을 자기 문학의 '기원'에 놓고 있다(인용문의 강조는 모두 나의 것이다).

 

 

 

 

-내가 본 ‘호랑이 발자국’ 믿게 하려고 쓴다. 어느날 나는 호랑이 발자국을 보았다. 엉덩이를 돌려대고 발자국을 찍는 호랑이를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그 발자국은 호랑이가 남긴 것이었다. 스무 살의 싱싱한 직감과 생생한 정황에 의한 명백한 결론이었다. 그래서 그 뒤부터 나는 사람들에게 호랑이, 또는 호랑이 발자국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 때는 나마저도 남한에서 호랑이가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는 둥 호랑이가 왜 발자국 하나만 남기고 주변에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겠느냐는 둥 호랑이의 세력권이 천리인데 왜 천리 사방에 그런 이야기가 없느냐는 둥 해가며 그때의 그 발자국을 부정하는 대열에 합류하려고 했다. 이처럼 나는 내가 보고 겪은 것, 만난 사람과 그때의 느낌을 남은 물론이고 스스로 믿을 만한 것으로 여기게 하기 위해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더 범위를 넓혀 말하자면 누구나 인생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호랑이, 혹은 호랑이의 발자국 같은 ‘그 무엇’ 때문에 문학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성석제의 문학이 알레고리적 성격을 많이 띠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일반화'의 결과이지 않을까 싶다). 나의 호랑이 발자국은 내 고향인 경상북도 상주군 공성면 하고도 어느 산자락에 나 있었다. 1980년에서 81년 사이의 겨울이었는데 대략 81년 1월초였다. 12월 중순에 그 곳으로 들어간 건 알지만 산중에는 달력이 없어 날짜를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겨울에는 스님들이 큰 절로 가는 바람에 비는 자그마한 암자가 있었고 그에 딸린 요사채가 내 거처였다.

-요사채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어 출입문을 닫으면 방안은 그대로 캄캄절벽이 되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불을 밝히려면 초를 켜야 했다. 그래서 문을 닫아놓고 있으면 밤인지 낮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문을 열면 어느 때는 눈에 반사된 겨울 햇빛이 눈에 시려서, 어느 때는 정말 눈이 시리도록 맑은 겨울밤의 별빛에 신음 소리를 내곤 했다. 그때는 사물과 사물의 경계선이 조리개를 한껏 조이고 찍은 사진처럼 선예도(線銳度)가 높았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물을 뜨러 양동이를 들고 요사채에서 백 걸음쯤 떨어진 계곡으로 향했다. 이틀에 한 번 정도는 가는 길이라 아무 생각 없이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길 가운데 무슨 발자국이 하나, 그 길이 자신의 소유임을 주장하는 낙인처럼, 아니 낙관이라 해도 좋고 문장(紋章)이라 해도 상관없다, 찍혀 있는 것이었다. 그 발자국을 보는 순간 나는 머리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을 느꼈는데 그건 내 머리털이 곤두서는 소리였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자연에 직면한 연약한 한 인간이 느낄 그런 공포, 양동이 하나로 온몸이 무기인 희대의 살인마를 상대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한 개인이 느낄 법한 전율이 그럴까(*그러니까 이 작가에게 트라우마적 역할을 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거대하고 압도적인 자연'이다. 아마도 '운명'은 그것의 다른 이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석제 스타일의 최대치는 <노인과 바다> 류가 아닐까?).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내 발을 그 위대한 발자국 위에 얹어 보았다. 길 위에 단 하나밖에 찍혀 있지 않은 그 발자국은 눈이 녹았다 얼었다 하면서 원래의 크기보다 훨씬 커졌을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컸다. 농구화를 신은 내 발이 쑥 들어갈 정도였으니까. 그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달려 방으로 뛰어들었다. 두께가 십 센티미터쯤 되는 굵은 나무로 테를 두른 육중한 방문, 도대체 절간의 요사채에 왜 그런 성문 같은 방문이 필요한지 알 수 없게 만들었던 그 방문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그로부터 이틀 동안 눈이 내렸다. 겁이 나서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물이 필요하면 방문을 살짝 열고 팔을 내밀어 코펠로 눈을 긁어 담아 녹여서 썼다. 다행히 요사채 부엌으로 나가는 문이 따로 있어서 황송하게도 부엌을 화장실 대용으로 쓸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살다가 행복하게 늙어죽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사흘이 한계였다.

-나흘째 되는 날, 나는 가지고 온 옷을 몽땅 꺼내 입고 요사채 벽에 걸려 있던 암자 소유의 털옷까지 겹쳐 입었다. 싸구려 화학섬유로 만든 그 털옷은 백결선생(百結先生)이 두고 갔는지 온통 기운 자국이었고 한 번도 빤 적이 없는 듯 소 덕석 같은 냄새가 났다. 털옷까지 껴입은 건 날이 추워서가 아니었다. 호랑이가 혹시 나를 잡아먹으려고 들 때 고생 좀 하라고, 호두처럼 알맹이를 꺼내 먹기가 쉽지 않도록 하려고 껴입은 것이었다. 부엌에는 불을 땔 때 장작을 다듬기 위해 들여놓은 손도끼가 있었다. 또 전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해우소를 치울 때나 쓸 법한 장화를 마루 밑에서 찾아 신고 한 손에 손도끼를, 한 손에는 기특하게도 양동이를 들고 나는 호랑이 아가리 또는 발자취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의미를 모르는 이상한 고함을 내지르며.

-공포의 그 발자국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워낙 단단히 얼어붙어 내린 눈이 쌓이지를 못하고 바람에 쓸려간 듯 했다. 나는 여전히 입속말로 ‘이이이이’ 하는 소리를 내며 그 발자국 속에 장화 신은 발을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크기가 비슷했다. 무섭지 않았다. 사흘동안 그 발자국을 화두로 면벽수도를 한 뒤라 그런지 실물을 보니 반갑기까지 했다. 겨울산 오후의 잔양 속 어디고 호랑이, 혹은 호랑이 같은 존재의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계곡으로 가서 물을 떴다. 방으로 돌아와 사흘 만에 밥을 지어 먹었다.

-배가 부르고 정신이 돌아오자 내가 본 것을 말해주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성석제 이야기의 기원이다!). 산중의 유일한 이웃인 고개너머 채석장에 갔더니 사람들은 일 나가고 없었고 밥 해주는 아주머니는 자고 있었다. 내친 김에 마을까지 내려갔다. 마을회관의 새마을 구판장에서 막걸리를 마시다 저녁이 되었고 동네 청년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청년들이 건네주는 고구마를 낫으로 깎아먹다가 손가락을 깊이 베었다. 피를 막고 붕대를 감고 소독을 하는 의미에서 한 잔 더 마시고 취해서 구석에 오그리고 자느라 바빴다. 그래서 소설적인 가감 없이 순수한 호랑이, 또는 호랑이 발자국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 이후 나는 관념이나 정신의 모험은 일생 분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생각하면 진짜 도사는 못되었다. 자꾸 그 이야기를 떠들면서 허풍선이가 되는 데는 성공했다.’ 인용부호 속의 글은 ‘나는 왜 자꾸 집을 나가는가’라는 요지의 글의 일부분인데 글을 쓴 시기는 십여 년 전이다. 그때는 소설을 쓰지 않고 품고만 있었을 때다. 품고 있는지 몰랐을 때이기도 한데 그 겨울 그 호랑이 발자국을 본 때로부터 십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 나는 시를 쓰고 있었다. 오로지 시만 생각하고 살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시가 제일의 의의였음은 확실하다. 그런데 일생 분의 모험, 진짜, 도사, 허풍선이 같은 단어들은 시적이지 않다. 이런 불순하고 수상쩍은 것들은 한 이틀 조용히 내린 눈처럼 순수한 세상에 조금만 섞여도 그 세상 자체를 불순하게 만든다. 돌아보니 그 때 이미 시에서도 삶에서도 불순은 각오하고 있었다. 지금보다 혈기가 방장해서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시는 불온하다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 나는 소설은 불순하다고 말하고 싶다(*나는 그가 '불순한 시'를 쓰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쓰는 소설은 불순하다고, 원래는 순수했는지 모르지만 웬 놈의 호랑이 발자국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가 물 뜨러 가는 길 위에 찍힌 이후, 모든 길이며 겨울 오후며 시며 소설이며 양동이며 부엌이며 요사채, 손도끼마저 불순해졌다고.

-90년대 중반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제 제 길을 찾았다는 말을 참 많이도 들었다. 말을 듣는 김에 더욱 잡스러워지려고, 이른바 크로스오버로 놀아보려고 노력했다. 잡(雜)은 잡대로 재미와 의의가 있다. 불순이 내면적인 것이라면 잡은 외부의 조건이다. 또는 외부와의 관계에서 비롯하는 성향이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명제가 있다. 나는 잡스러운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잡의 세계에는 ‘세계 콤플렉스’ 따위는 아예 없기 때문이다.

-하늘의 섭리인지 잡종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한다(*<소풍>에서 "무릇 이야기란 또한 우리 삶의 소풍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해놓으면, 그는 갈 데까지 간 것 아닐까?). 가령 내가 아는 최고의 멧돼지 전문 사냥개는 투견과 수렵용 개의 혼혈인데 자신의 형질을 물려받은 새끼를 낳지 못하고 있다. 지금 명견으로 이름을 떨치고는 있지만 그 명성도 당대에서 그치고 말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또 어떤가, 당대를 넘어설 그 무엇이 불순한 운명에 있을까. 내가 멧돼지 사냥개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더 사납고 더 예민하고 더 흉악스럽기를 바라겠다, 멧돼지에게만은.

-왜 소설을 쓰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한동안은 호랑이 덕분이라고 답할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내가 호랑이 등에 올라타 있는 건지, 호랑이 발자국에 가만히 발을 넣어보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작가는 호랑이 발자국을 본 자신의 체험을 "누구나 인생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호랑이, 혹은 호랑이의 발자국 같은 ‘그 무엇’ 때문에 문학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일반화하지만, 그것이 그만의 지극히 개인적인, 그리고 특별한 체험이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더불어 그 체험은 성격상 소설적이라기보다는 시적이다('호랑이를 찾아서'라는 다큐를 구성한다면 보다 소설에 근접하겠지만). 비록 <호랑이를 봤다>(작가정신, 1999/2002)를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가 이야기라는 틀거리를 빌어서 불순하게, 혹은 잡스럽게 늘어놓는 것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이야기시에 가까울 듯하다. 

대범하게 말해서, 성석제의 이야기는 역사 이후, 탈역사 시대에 속하며(그가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건 시기적으로 사회주의 몰락 이후이다), 개인사적인 비유를 들자면 '현역소설'이 아닌 '예비군소설'의 범주에 든다(그런 점에서 그는 제대 후에도 '현역'임을 자임하는 이창동 류와는 얼마나 다른 것인가!). 그의 거리두기, 그의 풍자, 그의 냉소, 그의 입담, 그의 연민 등 모두가 역사의 부록 시대를 살아가는, 병역의 여생을 살아가는 예비군소설에 잘 부합하는 것 아닌가? 

먹고살기에 급급하지 않은 '예비군 소설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뭘 맛본다는 것, 맛을 기억하며 소요(逍遙)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이고 방심한 상태에 스스로를 처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도 밥 먹을 때는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소요와 소풍이 그의 나날일 듯하다. 지난 10여년간 그는 한국문학 골목에 소문난 '맛집' 하나를 냈으며(이젠 그에게 '낯선 길'을 물을 게 아니라 낯선 음식점을 물어야 한다), 그로써 그 나름으로 자비행을 실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음식을 만들고 나누어 먹는 것이 바로 자비이며 삶의 일부를 교환하고 서로 느낌을 공유하는 행위"(6쪽)이니까. 

하지만, 세상엔 여전히/아직도 배가 고픈 이들이 있는 법이며, 그들에겐 맛집보다 하루의 끼니가 더 소중할 법하다. 그리고 삶이 두루 막막할 법하다. <초록물고기>(1997)에서 이제 막 제대하고 돌아온 막동이처럼 말이다. 서로에 대해 품고 있던 원망을 터뜨리는 바람에 엉망이 되어버린 이 막동이 가족의 '소풍' 풍경은 또 얼마나 잔인한 장면이었던가. 그러니까 예비역이라고 해서 다 같은 예비역은 아닌 것이다. 정리하자면, '초록물고기'와 '호랑이 발자국' 사이는 소설과 시(이야기) 사이이며, 역사와 탈역사 사이이고 삶과 여생 사이이다. 더불어 '니가 인생에 대해서 알아?'(문성근의 대사)와 '삶에 감사한다'(<소풍>, 7쪽) 사이이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어디 계십니까, 선배님?"  

06. 07. 02.

P.S. <소풍>을 소개하는 기사 두 개를 덤으로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6. 05. 15) 소설가 성석제씨가 겉절이에 밥 비벼먹는 방법이다. “숟갈을 두 개씩 양손에 나눠들고 ‘썩썩’ 비빈다. 이 ‘썩썩’이 중요한 점이다. 황소가 풀을 먹을 때처럼, 싸리 빗자루로 마당을 쓸 때처럼 힘있고 숙달된 자세, 힘의 낭비가 없되 힘있게, 숨이 죽는 동안 삼투압 작용으로 겉절이에서 나온 물이 비비는 일을 쉽게 한다.(…) 향긋한 맛. 이건 참기름의 공로다. 산뜻한 질감. 이건 배추의 공덕이다. 혀를 바쁘게 하는 양감. 이건 밥의 은혜다.(…) 대부분은 과식을 한다.”

-그의 신작 산문집 <소풍>(창비 발행)의 한 대목이다. 그가 먹은 음식의 맛, 함께 한 사람들의 맛, 어울렸던 세월의 맛을 한 데 ‘썩썩 비빈’ 책이다. “소풍을 가듯 시간의 한 부분을 툭 끊어서 길을 떠났다. 뭘 맛본다는 것, 맛을 기억하며 소요(逍遙)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이고 방심한 상태에 스스로를 처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도 밥 먹을 때는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른다.”(‘책 머리에’에서)

-위에서 인용한 군침 돋구는 겉절이 찬가 끝에 그는 1980년 휴교령으로 고향으로 내려가 친구들과 모내기를 돕다 논두렁에서 먹었던 겉절이 비빔밥 - 그야말로 ‘입속에 가득차는 환희 - 의 기억을 슬쩍 버무려 둔다. 그런 식이다. 그는 “음식을 만들고 나누고 먹고 이야기하는 것, 이 모두가 ‘음식’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진다고 할 때 음식은 추억의 예술이며(…) 감각 총체 예술이다. 음식에 관한 기억과 그에 관한 이야기는 필연코 한 개인의 본질적인 조건에까지 뿌리가 닿아 있다”고 적었다. 그리고, 음식의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숙제를 해치우듯’ 먹어서는 안 되며 ‘소요하듯’ 즐겨야 한다고, 그래서 ‘소풍’이라고 했다. “음식을 먹는 것이 소풍이라면 음식 이야기 역시 소풍이며, 무릇 이야기란 또한 우리 삶의 소풍과 같은 것이다.”

-너비아니 김밥 닭개장 부대찌개 등 끼니 음식(1부), 냉면 라면 등 국수류(2부), 김치 석화젓 등 곁다리 음식(3부), 국화차 소주 등 마실 거리(4부), 해서 그가 들려주는 음식 이야기는 50여 편이다. 미국 보스턴 월든 호숫가 소풍 길에 먹었던, 있는 대로 김과 밥과 김치로만 싼 소박한 ‘정신의 왕족 헨리 데이비드 소로 영감 김밥’의 맛, 이동갈비 2인분을 거의 혼자 다 먹어치우는 친구 이야기, 중국 베이징의 한 백화점 찻집에서 맛 본 국화차의 맛을 떠올리며 그는 “그 국화차는 어쩌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적고 있다. ‘같은 공간의 같은 침묵, 같은 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 순간, 그 사람을 맛보았다는 느낌으로 행복하다. 슬프다.”

-지난 해 북한에서 열린 남북작가대회의 고된 일정 중 삼지연공항에 들렀을 때, 땡볕을 피해 그늘진 돌 바닥에 퍼질러 앉아 현지에서 산 북한 음식 자료들을 펼쳐놓고 흡족해 하던 그가 떠오른다.(최윤필 기자)

 

 

 

 

경향신문(06. 05. 16)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힘> 등을 통해 우리 시대 사람 사는 이야기의 풍요로움을 되살린 소설가 성석제씨가 음식에 얽힌 추억을 담은 산문집 <소풍>(창비)을 펴냈다. 저자는 “음식이란 추억의 예술이자 오감이 총동원되는 총체예술이며 필연코 한 개인의 본질적인 조건에까지 뿌리가 닿아 있다”는 지론을 펴며 평범하지만 추억이 깃든 한식 위주의 음식들을 한 상 가득 차려낸다.

-소설가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은 결코 정갈하고 비싼 요리가 아니다. 1,000원짜리 김밥, 양은냄비에 담겨 나오는 부대찌개, 클럽 앞 손수레에서 팔던 순두부, 겨울밤 이웃끼리 나누던 제삿밥, 도랑물을 받아 짚단에 불을 지펴 끓여 먹은 라면…. 음식이란 단순히 혀를 즐겁게 하고 살을 찌우는 것을 넘어서 사람과 장소에 얽힌 추억 한자락이자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닫게 한다.

-너비아니부터 묵밥까지 한끼 식사로 적당한 음식이 1부에 담겼고 저자가 특히 좋아하는 냉면과 라면 같은 국수류가 2부에, 김치나 홍시·석화젓 등의 곁다리 음식과 국화차·소주 같은 마실거리에 관한 이야기는 3·4부에 나눠 실렸다. 식성대로, 글맛대로 골라 읽어도 무방하다. 책에 실린 글들은 사실에 기반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동안 써 온 음식 관련 이야기를 다 모은 겁니다. 직접 겪은 것, 전해 들은 이야기, 허구가 골고루 섞였어요. ‘불순한 비빔밥’인 셈이죠.(웃음) 원래 음식 이야기는 허구가 좀 있어야 재미있잖아요. 책의 3분의 1 정도만 실화입니다.”

-음식에 관한 책을 썼을 정도니 식성도 남다를 것 같은데…, 역시 그랬다. “평생 안 먹던 것을 한번 입에 대기 시작해 몇 개월씩 매일 먹는 버릇이 있습니다. 지난 가을부터 굴을 먹기 시작해서 이른 봄까지 굴만 먹었고요, 스물 아홉 살 가을에는 처음 병어를 먹기 시작해서 그 겨우내 병어만 먹었어요. 일종의 벽(癖)이 아닌가 해요. 아직도 정복해야 할 음식이 많습니다.”

-성씨는 향후 차, 커피, 술 등 “배 안 부르면서 비싼” 기호품에 대한 산문도 쓸 것이라고 했다.(이상주 기자)

(*)솔직히 작가의 마지막 멘트는 약간 우려되기도 한다. '성씨' 또한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으로 빠지는 게 아닌가 싶어서이다. 그가 발을 담그고 있던 소설의 물이 얼마나 얕은 것이었나를 확인시켜주는 일은 아닐까? 그렇다고 '배 안 부르면서 비싼' 글을 쓰겠다는 작가를 건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6-07-04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곁다리 텍스트에 관해 미뤄놓은 이야기들 중 하나를 해치우기로 한다. 점심을 먹은 포만감이 좀 가라앉을 때까지. 이런 잡담을 늘어놓는 대신에 가벼운 산책이라도 하면 좋겠지만, 날은 약간 후덥지근하고 아파트 단지를 대낮에 반바지만 입고 돌아다니는 것도 좀 우스운 꼴이 아닐까 싶어서 나는 '좋은 걸' 포기한다. 그래도 이번 토픽은 괜찮군. 문학의 성감대라..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런 몽상을 바로 깨게 되어 미안하지만, 내가 읽은 건 <유종호 깊이 읽기>(민음사, 2006)에 실린 한 대담이다. 책은 이 원로 비평가에게 바쳐진 문집 형태인데, 편집을 맡은 비평가 정과리의 서문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게 상식적인 진리라고 한다면 유종호 비평이야말로, 정보의 팽창과 역사의 붕괴 그리고 이론의 폭발이라는 오늘의 상황 속에서, 규정하는 힘인 존재에게 규정당하는 의식이 개입해 존재의 운동에 정지와 성찰과 교정을 촉박하는 역류의 힘으로 작용하는 희귀한 덕목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이의 비평을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읽히게 하는 원천은 이 덕목에 있을 것이다."(8쪽)

비록 문법적으로 비문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 유종호 비평의 가장 큰 덕목은 이런 '난삽한' 문장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인용문은 유종호 비평의 미덕을 정확하게 반증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평이한 언어와 상식에 맞는 감각에 근거하여 깊이와 기품을 겸비한 작품 읽기와 해석을 제시해왔던 것. 책은 바로 그런 그의 면모를 동료/후배 비평가들과 문인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집약해놓고 있다(개인적으로 처음 알게 된 것은 평론가 유종호와 시인 신경림 사이의 깊은 사적인 인연이었다).

 

 

 

 

한데, 이 '깊이 읽기'에 대한 리뷰는 이 페이퍼의 목적이 아니다(아직 다 읽지도 못했다). 제목과 관련된 대목은 이런 것이다. 평론가 이남호와의 대담에서 민음사에서 1974년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를 첫권으로 하여 간행하기 시작한 '오늘의 시인총서'에 관한 질문을 받자 유종호는 이렇게 응대한다. 

"그건 김현 씨가 발간 취지문을 쓰고 김현 씨 아이디어가 많이 들어간 기획물이에요. 오늘의 시인총서 뒤 표지의 '기획의 변'을 내가 써다고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쓴 게 아니에요. 거기에 보면 '문학의 성감대'라는 말이 있는데 옛날부터 나는 '성감대'라는 말을 안 썼어요. 그건 김현 씨의 아이디어에요."(20쪽)

이 '기획의 변'이 고 김현(1942-1990)의 '작품'으로 알고 있었던 나로선 별로 새로울 게 없는 얘기지만, "거기에 보면 '문학의 성감대'라는 말이 있는데 옛날부터 나는 '성감대'라는 말을 안 썼어요."라는 지적은 유종호다운 취향과 감식안을 드러내주는 것이라 흥미를 끈다(그러니까 김현 비평과 유종호 비평의 차이는 이 '성감대'에 있다. 두 비평가는 프로이트와 정신분석비평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상대적인 무관심에 따라 각기 다른, 정반대의 이론적 포지션에 배치된다. 시읽기에 관해서라면 각기 일가를 이룬 비평가들인지라 이러한 차이는 음미해볼 만하다). 그는 한 단어의 쓰임새만으로도 텍스트의 의미를 길어올리고 꿰어내는 것이 유종호 비평의 특장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기획의 변' 혹은 '오늘의 시인총서를 내면서'의 내용은 무엇인가? 텍스트 바깥(뒷표지)에 박혀 있는 이 '곁다리텍스트'는 이런 내용으로 돼 있다(이 기획의 변은 김현의 나이 32살에 씌어진 것이겠다).

"문학이 그것을 산출케 한 사회의 정신적 모습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면, 시는 그 문학의 가장 예민한 성감대를 이룬다.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한 사회의 이념과 풍속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을 개인의 창조물 속에서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이해하는 것이 지식인들의 중요한 작업이 되어있는 오늘날, 시인들의 창조적 자기표출을 예리하게 감득하지 못하는 한, 그것도 한낱 도로에 그칠 가능성을 갖는다. 시인의 직관은 논객의 논리를 뛰어넘어 어떤 것을 그 작품 속에 표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의 시인총서>를 발간하기로 결정한 것은 시인들의 그 날카로운 직관을 통해 한국사회의 정신적 상처와 기쁨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강조는 나의 것)

즉, 시는 '문학의 성감대'이며(포에티카는 에로티카이다. 그러니 시를 읽으면서 '찌릿찌릿'하지 않다면 당신은 불감증일 가능성이 높다), 한 개인의 창조물로서의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한 사회의 이념과 풍속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을 이해하는 것이다(킨제이 버전으로 말하자면, 한 여자/남자의 성감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여자/남자의 존재 전체에 대한 이해가 걸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전제하에 기획자 김현이 힘주어 강조하는 것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이해하는 것이 지식인들의 중요한 작업이 되어있는 오늘날, 시인들의 창조적 자기표출을 예리하게 감득하지 못하는 한, 그것도 한낱 도로에 그칠 가능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한국 시인들의 창조적 자기표출을 예리하게 감득/이해하지 못한다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짱 도루묵이다. 이건 생각보다 파격적인 발상이고 발언이다(고전적 인문주의자로서 유종호라면 보다 겸손한 의의와 역할을 시에 할당했을 것이다).

그에 공감을 표하면서, 내가 새로이 던지게 되는 질문은 이것이다. "한국사회의 정신적 상처와 기쁨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시들이 씌어지고 있는가? 혹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기꺼이 "시인들의 그 날카로운 직관"에 동참하고 있는가? 이건 철지난 질문인가?..

06. 06. 22.

P.S. '오늘의 시인총서' 1, 2권인 <거대한 뿌리>와 <처용>은 내가 대학 1학년 여름방학때 급조한 시들로 자작시집을 만들어 판매한 수익으로 제일 먼저 산 시집들이다(나는 시를 읽고 시를 쓴 게 아니라 시를 쓰고 시를 읽었다). 그날 두 권의 시집을 사들고 가는 나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비평가 김현이 아닌 불문학 교수 김현을 나는 1989년 한 강의실에서 잠깐 볼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불어 동사 활용형을 말하는 목소리이다(!)... 아래는 목포 자연사박물관 뒤뜰에 있는 김현 문학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자 한국일보(06. 06. 14)의 연재물, 고종석의 '말들의 풍경'은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김윤식 서문집>을 다루고 있다. 제목은 "나는 '쓰다'의 주어다". 본문에서도 언급되지만, 서문이란 대표적인 '곁다리텍스트'이며, '곁다리텍스트'는 이 카테고리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반가운 마음에 옮겨놓는다.

 

 

 

 

-<김윤식 서문집>(2001, 사회평론)은 놀라운 책이다. 그 놀라움을 낳는 것은 텍스트의 내용이라기보다 형식이다. 아니, 텍스트 너머에 어른거리는 긴 세월의 고된 글 노동에 대한 상상이다. 이 책은 국문학자 김윤식(70)이 1973년부터 2001년까지 낸 책들의 서문을 모아놓은 것이다(*물론 이후에도 그는 많은 책, 많은 서문을 썼다). 어느 프랑스 비평가는 한 책을 이루는 여러 물질적 요소 가운데 본문을 뺀 나머지(서문이나 발문, 헌사, 판권 난, 저자 소개, 표제, 부제, 제사, 차례 따위)를 곁다리텍스트(파라텍스트)라 부른 바 있다. 그러니까 ‘김윤식 서문집’의 텍스트는 곁다리텍스트만으로 이뤄진 텍스트다.(*나의 '곁다리텍스트를 위하여' 참조) 

-도대체 한 저자가 제 책의 서문만으로 또 한 권의 책을 만들자면 얼마나 많은 책을 써야 할까? 서문의 길이도 천차만별이고 책의 두께도 그럴 테니 섣불리 일반화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김윤식 서문집>을 기준으로 어림짐작해보자면 100권 안팎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는 저자가 낸 책 95권의 서문이 묶였다. 그 모두가 순수한 저서는 아니다. 책 끝머리에 모인 7편의 서문은 역서와 편서의 서문이고, 나머지 서문 88편에도 아주 드물게 같은 책의 개정 증보판 서문이 끼여들긴 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빼도 이 책에 제 서문을 빌려준 김윤식 저서는 80권이 넘는다.

-그것만해도 보통 저자라면 엄두도 못 낼 양이다. 그런데 김윤식은 2001년 이후에도 기운차게 책을 내고 있다. 그러니까, 2001년까지의 저서 가운데 ‘김윤식 서문집’에 그 이름이 빠진 책이 없다 쳐도, 김윤식이 지금까지 쓴 책은 100권에 바짝 다가간다. 거기에 편서와 역서를 보태면 김윤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온 책은 100권이 훌쩍 넘는다. 이 책들 대다수가 가벼운 읽을거리가 아니라 학문이나 비평의 영역에 속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놀라움은 더욱 커진다.

 

 

 

 

-<김윤식 서문집>의 서문, 다시 말해 서문들의 서문은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을 모으면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러니까 김윤식 생각에 책의 서문이란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다. 물론 이 표현은 겸양에서 나온 것이겠으나, 서문을 곁다리텍스트로 여긴 프랑스 비평가의 생각과 통하는 데가 있다.

-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 앞에 다시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붙이면서, 저자는 1962년 ‘현대문학’ 8월호에 실린 자신의 ‘천료(추천 완료) 소감’을 옮겨놓고 있다. 문학청년의 치기가 묻어나는 그 소감에는 “노예선의 벤허처럼 눈에 불을 켜야만 나는 사는 것이었다”라는 문장이 보인다. 그의 지난 반세기 글 노동을 지탱한 것이 바로 ‘눈에 불을 켜야만 살 수 있는’ 운명이었을 테다.

 

 

 

 

-이렇게 많은 글을 쓴 저자가 글쓰기 자체에 대한 성찰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글쓰기란 무엇인가? 혼자 하는 작업이다. 한밤중 원고지 앞에 앉아 있노라면, 그것이 우주만큼 넓고 아득하여 절망한다. 그렇다고 어디로 도망칠 곳도 없다. 우주가 나를 가두었던 것. 이 속에서의 작업은 일종의 게임인데, 상대는 누구이겠는가. 운명이란 이름의 나 자신이었던 것”(<김윤식 평론 문학선>, 1981, 서문).

 

 

 

 

 -김윤식은 말하자면 자신을 상대로 한 그 외로운 게임의 중독자였다. 요즘 젊은 세대 말로 글쓰기 ‘폐인’이었다. 김윤식이라는 이름은 동사 ‘쓰다’의 주어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문학사가이자 문학비평가다. 다시 말해 그의 방대한 텍스트들은 다른 텍스트들을 분류하고 배열하고 논평하는 텍스트들이다. 그러니, 김윤식이라는 이름은 동사 ‘읽다’의 주어를 겸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읽기는 20세기 이후 한국에서 ‘근대’의 표지를 지닌 채 발설된 모든 문학 텍스트를 향했다. 임화와 이상과 김동리가 보여준 이념의 엇갈림도, 이광수에서 신경숙에 이르는 세대의 엇갈림도 김윤식이 보기엔 근대성 안의 엇갈림일 뿐이었다.

 

 

 

 

-‘쓰다’와 ‘읽다’의 붙박이 주어 김윤식에게 소위 ‘명문(名文)’이라는 것은 어떤 뜻을 지녔을까? “명문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아예 가져본 적이 없다. 다만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문장이기를 바랐을 따름이다”(<문학사와 비평>, 1975, 서문). 이것이 겸양에서 나온 말인지는 또렷하지 않다. 자신이 엮은 <애수의 미, 퇴폐의 미- 재북 월북 문인 해금 수필 61편 선집>(1989)의 서문에서 그가 ‘명문’에 대한 경멸을 거리낌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조금 말해볼 수는 있습니다. 곧 명문이란 없다는 점. 설사 그런 것이 있더라도 대수로운 것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을 임화의 ‘수필론’과 서인식의 ‘애수와 퇴폐의 미’가 조금 말해놓고 있지 않습니까. 뜻을 전달하기 위해 말이 있다는 점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는 일이 그것이지요. 말을 바꾸면, 되지도 않는 자기 감정을 질펀하게 노출시켜 남을 감동시키고자 덤비거나 대단치 않은 스스로의 주제를 돌보지 않고 흡사 무슨 도사의 표정을 짓는 짓 따위에서 벗어나, 자기 분석을 겨냥하는 일이 그것이지요. 자기 성찰과 자기 도취의 형식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도 수필이라는 이름의 산문 형식이 필요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진술은, 소설문학에 대한 그의 다른 발언, 곧 “(문학작품에 대한) 절대적 평가기준이란 무엇인가. ‘언어’가 그 정답이다. 언어의 밀도가 작품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김윤식의 소설 현장 비평>, 1997, 서문)는 말과 통한다.

-이 기준들은 보기에 따라 꽤 엄격하다. 김윤식의 문장은 이 기준들을 넉넉히 채우고 있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아니라는 쪽에 걸겠다. 문제는 명문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중기 이후 텍스트에서 사뭇 가시기는 했으나, 김윤식 텍스트는 ‘문법에서 벗어나는’ 문장들을 너무 많이 품고 있다. 그의 웅장한 학문적 성채의 적잖은 부분은 읽어내기 힘들만큼 조악한 한국어를 벽돌로 삼아 세워졌다.

 

 

 

 

-한 세대에 걸쳐 김윤식이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문학 교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문법에 대한 그의 이 대범함은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직업적 나태였다 할 만하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의 문장에서 끝없이 되풀이되는 ‘~란 무엇이겠는가’, ‘~가 아닐 것인가’ 같은 표현은 그가 경멸해 마지않는 ‘자기 도취에 빠진 도사의 표정’에서 얼마나 멀까? ‘언어의 밀도’를 잃어버린 ‘명문’의 허세에서는 또 얼마나 멀까?

-김윤식이 ‘쓰다’의 주어일 뿐만 아니라 ‘읽다’의 주어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의 글쓰기 무게중심이 중기 이후 ‘연구자의 논리’(근대문학 연구)에서 ‘표현자의 사상’(현장 비평)으로 조금씩 옮아가면서, 그 읽기 대상도 쉼 없이 쏟아져 나오는 당대 소설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갔다. “‘표현’과 ‘인식’의 완전한 일치”(<작은 생각의 집짓기들>, 1985, 서문)라 스스로 정의한 비평에서 이 원로 비평가는 성실했는가? 아니 그 비평의 전제인 읽기에서 그는 성실했는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고희의 나이에도 이어지고 있는 월평들은 김윤식이 이 시대의 가장 열정적인 소설 독자(가운데 한 사람)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문단 한편에서 들추듯, 그의 비평은 해석의 타당성을 떠나 작품의 줄거리 자체를 그릇 잡아내는 일이 드물지 않다. 너무 많이 읽는 탓에 읽기의 ‘밀도’가 낮아졌는지도 모른다. 한국 근대문학 연구의 최고 권위자가 건네는 눈길은 아직 이름을 세우지 못한 작가들의 가슴을 한껏 설레게 하는 격려가 될 테다. 그러나 이 원로의 독서가 날림으로 이뤄지고 있다면? 그는 권위라는 자산을 너무 함부로 쓰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나 이런 트집이 무슨 소용이랴? 20세기 한국문학 텍스트를 김윤식만큼 많이 읽은 사람은 없다. 20세기 한국문학에 대해 김윤식만큼 많이 쓴 사람도 없다. 그가 아니었으면 도서관 한 구석에 처박혀 세월을 보내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텍스트들이, 그리고 그 텍스트들의 저자들이, 김윤식의 손을 거쳐 한국문학사에서 제 자리를 얻었다. <김윤식 서문집>은 그의 이 끝없는 읽기-쓰기의 그림자다. 한국문학은 이 불세출의 독자-저자에게 큰 경의를 표해 마땅하다.(*짐작에 그의 저작을 30-40권쯤 갖고 있는 나 또한 그에게, 혹은 한 '주어'에게 경의를 표해 마땅하다.) 

06. 06. 14.

P.S. 고종석이 '또다른 다산(多産) 저자들'로 꼽고 있는 고은과 강준만에 대한 군말도 마저 옮겨온다.

-다산성에서 김윤식과 겨룰 만한 저자가 한국에 있을까? 있다. 얼른 생각나는 사람이 시인 고은(73)과 언론학자 강준만(50)이다. 고은 저서의 저자 소개에 ‘저서 1백여 권’이라는 표현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1990년 무렵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고은 자신이 이미 그 무렵부터 저서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해온 데다, <김윤식 서문집> 같은 ‘물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인보>나 <백두산> 같은 서사시들의 낱권을 각각 한 종으로 친다면, 고은의 저서가 1백 종이 넘는 것은 확실하다. 저서의 다수가 시집인 터라, 글자수로 따져서 고은이 김윤식과 겨루기는 어렵겠지만.

 

 

 

 

-고은의 산문은 한 시절 수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지만, 김윤식이 ‘명문’과 관련해 빈정거린 ‘도사의 표정’과 ‘자기도취의 형식’을 짙게 지니고 있었다. 또 청년 김윤식의 글보다 훨씬 더 문법에 대범했다. 그러나 이 약점들은 고은 특유의 주정적(主情的) 문체 속에서 서로를 지워내며 기이한 매력을 만들어냈다. 말하자면 일종의 강점이 되었다.

 

 

 

 

-강준만은 그 저서 수에서 이미 김윤식을 앞지른 듯하다. 강준만 저서의 적잖은 부분은 자료의 가공/재구성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점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눈길도 있지만, 그것은 강준만이 김윤식에 뒤지지 않는 ‘읽다’의 주어이자 실증주의자라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강준만이 사실과 현실에 바짝 붙어서 (미시)이론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가 여느 이론가와 달리 대중의 언어를 쓰는 데 대해서도 탐탁지 않은 눈길이 있지만, 그것 역시 이론을 학자들의 닫힌 담론 공간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건강한 욕망과 결부시킬 수 있겠다.

-고은 같은 탐미 취향은 없으나, 강준만은 그 대신 ‘문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문장’을 구사한다. 이것은 그 같은 다산 저자에게 드문 강점이다. 강준만의 글은 김윤식이 강조한,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말이 있다는 점에 많은 관심을 갖는” ‘자기 성찰’의 글에 가까워 보인다.

 

 

 

 

-문법적으로 단정할 뿐만 아니라, 심미적으로도 반들반들 닦인 글을 쓰는 다산 저자는 없을까? 있다. 고은처럼 시와 산문을 넘나드는 김정환(52)이 그다. 그러나 그의 저술 양이 고은이나 강준만에 미치지 못하는 걸 보면, 아름답게 쓰면서 많이 쓰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8-19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곁다리텍스트(paratext)로 가장 먼저 다룰 텍스트는 바흐친의 <말의 미학>(도서출판 길, 2006)의 서문 역할을 하고 있는 '예술과 책임'이다. 미하일 바흐친(1895-1975)이 1919년, 그러니까 24살 때 발표한 이 두 쪽짜리 텍스트는, 그러나 '최초의 공식 문건'이라는 바흐친 개인사적 의의 이상의 무게감을 갖고 있는 중요한 텍스트이다. 개인적으론 12년 전에 대학원에서 바흐친 강의를 들을 때 가장 먼저 읽은 텍스트이기도 하다(나는 그때 이미 바흐친보다 더 나이를 먹었었다!). 아래 사진은 1920년대의 청년 바흐친.

한데, 역자 해제에서 지적되고 있는 바대로, 책에 실린 대다수 논문들이 그렇기는 하지만, '예술과 책임'은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쓴 완성본(이라기)보다는 이후 출판을 위한 초고적인 성격의 글로서 완전히 전개되지 않은 미완성본 성격의 글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곁다리텍스트로 분류할 수 있지만, '예술과 책임'은 한편으론 바흐친의 이론적 작업 전체의 방향을 시사해주는 마니페스토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 텍스트의 그러한 의의는 '미적 활동에서의 작가와 주인공' 등을 발췌한 영역본의 제목이 <예술과 책임(Art and Answerability)>(1990)인 것에서도 간접적으로 시사받을 수 있다. 참고로 영역본의 서문을 쓴 저명한 바흐친 연구자 마이클 홀퀴스트는 바흐친의 이론적 세계를 아예 '책임의 건축학'이라고 규정짓고 있기도 하다. 바흐친의 기념비적인 저작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제문제>는 이로부터 10년후인 1929년에 출간된다(개정판이 나오는 건 1963년이며 국역본은 이 개정판의 번역이다).  

참고로 이 텍스트는 <바흐찐의 소설미학>(열린책들, 1988)에 이미 한번 번역/소개된 바 있다. 하지만, 번역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한편 당시는 <장편소설과 민중언어>(창작과비평사, 1988),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한겨레, 1988) 등이 앞서거니뒤서거니 출간됨으로써 국내에 1차 바흐친 붐이 조성되던 때였다(이젠 바흐친 전집도 기획중이라고 하는데, 바야흐로 새로운 붐이 마련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청년 바흐친이 '예술과 책임'이란 글에서 주장하는 바는 무엇인가? 짧은 분량이므로 내용을 따라가보겠다. 첫 문단이다: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개개 요소들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단지 외적인 연결로만 결합되어 있을 뿐 의미의 내적 통일로 충만되어 있지 않을 경우, 그 전체를 기계적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전체의 부분들은 비록 나란히 놓여 있고, 또 서로 접촉하고 있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서로 이질적이다."

바흐친이 첫 문단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외적인/기계적인 결합이다. 이 경우에 서로간에 접촉은 있다 하더라도 낯설고 이질적인 관계로 남게 된다. 현대사회에서의 이웃관계처럼 필요한 경우에 서로 아는 체는 하지만 서로간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인간적인 교제는 대충 생략하는 것. 그게 외적인/기계적인 결합관계이다. 예술과 삶의 관계가 그러한 결합관계가 돼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 문화의 세 영역인 학문과 예술과 삶은 그것들을 자신의 통일성으로 결합하는 개성 속에서만 통일성을 얻는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은 기계적이고 외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일은 실제로 대단히 자주 일어난다. 예술가와 인간은 순진하게 또 대개는 기계적으로 하나의 개성 속에서 결합된다... 예술은 너무나 뻔뻔스럽고 자만에 빠져 있으며, 너무나 감상적이고, 당연히 그런 예술을 따라잡을 수 없는 삶에 대해 눈곱만큼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 우리에게 예술이 무슨 소용이야?' 하고 삶은 말한다. '그건 예술이란 것이고, 우리에게 있는 건 일상사의 산문이라구.'"

 

 

 

 

인상적인 구절은 "예술은 너무나 뻔뻔스럽고 자만에 빠져 있으며, 너무나 감상적이고, 당연히 그런 예술을 따라잡을 수 없는 삶에 대해 눈곱만큼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구절이다. 근대의 예술, 그러니까 예술의 자율성을 획득/확보한 시대의 예술은 너무나 잘난 예술이어서 더 이상 산문적이고 천박한 삶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한국 근대문학의 경우 '아티스트' 김동인의 문학/예술관이 이를 가장 잘 보여준다). 그것이 모더니즘 예술의 엘리트주의이며 '비인간화'(오르테가 이 가세트)이다. 이 고상한 것들은 삶을, 우리를 책임져주지 않는다. 엘레강스한 언니들처럼(사진은 <욕망의 모호한 대상>, <내겐 너무 이쁜 당신> 등의 영화에 출연한 프랑스의 여배우 겸 샤넬의 모델 캐롤 부케).

물론 근대 예술이 정치권력에의 종속으로부터 탈피해온 과정 자체는 진보적인 것이었지만, 삶의 요구로부터 멀어지면서 예술의 자율화는 자기 소외의 과정이 되어버린 것('랄랄라 하우스'는 그 궁극적 귀결이다. 오락은 삶을 책임지지 않는다). 문학의 자율성을 전제로 한 러시아 형식주의에 대해 바흐친이 비판의 포화를 늦추지 않는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이다. 삶과 예술의 분리, 기계적인 결합이 문제였던 것이다('기계로서의 예술'은 초기 형식주의자들의 모델이기도 했다).

그렇게 될 경우, "인간은 예술 속에 있을 때에는 삶 속에 있지 않고, 삶 속에 있을 때에는 예술 속에 있지 않다. 그것들 사이에는 어떤 통일성도 없으며, 개성의 통일성 속에서 내적으로 서로에게 속속들이 스며들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개성을 이루는 요소들의 내적 결합을 보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책임의 통일이다. 내가 예술에서 체험하고 이해한 모든 것이 삶에서 무위로 남게 하지 않으려면 나는 그것들에 대해 나 자신의 삶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책임은 죄과와도 결합되어 있다. 삶과 예술은 서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죄과도 떠맡아야 한다... 인격은 전적인 책임성을 가져야 한다. 개성의 모든 요소들은 그저 삶의 시간적 연속 속에서 나란히 배열되는 것을 넘어서, 죄과와 책임의 통일 속에서 서로에게 속속들이 스며들어야 한다." 

여기서 책임은 영역본에서 'responsibility' 대신에 쓰인 'answerability'가 잘 말해주듯이 '응답'하는 것이다. "너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과 호소에 알리바이를 대지 않고 응답하는 것, 출석하는 것, 그것이 책임이다. 삶과 예술은 서로 독립적이지만 우리의 인격 속에서 그러한 상호책임의 관계로 통합된다. 그 책임이 서로에 대한 죄과도 떠맡아야 한다는 바흐친의 주장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반향을 읽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그는 오래지 않아 곧 최고의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서를 쓰게 될 것이다). 

더불어 레비나스(1906-1995)의 윤리적 주체도 상기시켜준다. 바흐친의 미학은 레비나스의 윤리학과 상통한다. 레비나스가 자기보존적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맥락에서 바흐친은 예술의 자율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미 바흐친과 레비나스를 비교하는 논저들이 여럿 나와 있다). 삶과 예술은, 그리고 나와 타자는 서로에 대한 책임과 죄과를 떠안아야 한다(레비나스의 경우에는 1인칭 '나'가 절대적으로 더 많은 책임/죄과를 떠안아야 한다. 왜? 'first person'이니까).  

"무책임을 정당화하기 위해 '영감'에 의지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삶을 무시하고, 그 자신이 삶에서 무시당하는 영감은 영감이 아니라 사로잡힘이다. 예술과 삶의 상호관계, 순수예술... 등등에 대한 모든 오래된 문제들의 거짓이 아닌 진짜 의미, 그 물음들의 진정한 파토스는 그저 삶과 예술이 서로의 과제를 가볍게 해주고, 서로의 책임을 벗겨주려는 데 있을 뿐이다. 삶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창조하는 것이 더 쉽고, 예술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으로 '예술과 삶의 관계'나 '순수예술'에 관해 말해져온 것들은 모두 그러한 책임으로부터 '면피'하기 위한 간계들일 뿐이다. 분명, 삶을 책임지지 않는 예술이나 예술을 책임지지 않는 삶은 보다 편한 삶이고, 보다 쉬운 예술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안락한 삶'이다. '안락사'로의 여정만을 남겨놓은.

바흐친은 그러한 삶을 좀 불편하게 만들고자 한다. 이성복의 시구를 빌자면, "詩를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에 대해서 시는, 예술은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책임의 통일성하에서라면 예술의 자기종결성은 가능하지 않다(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비종결성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하여, 결론: "예술과 삶은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 안에서, 나의 책임의 통일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긴 이러한 대사는 우리의 '어린왕자'도 말한 적이 있다: "… 내 꽃… 나는 꽃에 책임이 있어! 그리고 그 꽃은 너무 약해! 너무 순진해… 이 세계와 맞서 제 몸을 지킬 가시 네 개 뿐이야…" 그러한 책임을 방기할 때 잘난 예술은 기교가 되고 못난 삶은 일상이 된다. 삶은 예술을 경멸하고 예술은 삶을 혐오한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대답은 자명하다. 비록 그 대답에 책임을 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06. 04. 29.

P.S. 이 텍스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두 가지를 덧붙인다. 첫째는 본문에서 예술과 삶의 결합 방식이 두 가지만 언급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세 가지를 읽어내야 한다는 것. 즉, (1)삶과 예술의 외적/기계적 결합, (2)삶과 예술의 내적 결합(이념에 의한 통일), (3)삶과 예술의 내적 결합(책임에 의한 통일). 이 세가지 입장을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1)형식주의 (2)맑스주의 (3)대화주의가 된다(이 대화주의를 미학적으로만 독해하는 것은 오류이다. 그것은 미학이면서 윤리학이다). 여기서 두번째 결합방식은 소비에트 시기의 공식 이데올로기로서 문학/예술에 가해진 요구였다(그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귀결된다). 바흐친은 이 두번째 방식/경향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바흐친-도스토예프스키는 내내 소비에트의 '비주류'였다.

그리고 둘째는 인간 문화의 세 영역 가운데, 바흐친이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고 있는 '학문과 삶의 관계'이다. 이 또한 마찬가지이다. 다시 반복하자면, "학문과 삶은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 안에서, 나의 책임의 통일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건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삶과 학문이 서로에 대한 죄과와 책임을 떠맡지 않는다면 그건 각각 허접한 삶이고 빈곤한 학문이다('직업으로서의 학문'이 전부가 아니다). 비록 얼굴에 기름기 흐르는 삶이고 돈벼락에 허우적거리는 학문이라 할지라도...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waits 2006-04-30 03:13   좋아요 0 | URL
로쟈님, 오늘도 감사~ 올리시는 글마다 너무 혹해서 아예 'from 로쟈'라는 비공개 카테고리를 만들어버렸어요..^^;;;

로쟈 2006-04-30 09:43   좋아요 0 | URL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책임감이 느껴지는군요.^^

기인 2006-04-30 13:09   좋아요 0 | URL
늘상 고민하고 있었던 문제에 대해 하나의 방향이 된 것 같습니다. ^^ 삶-문학, 삶-학문을 '나의 책임의 통일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일'.
answerability는 바흐찐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라고 고민했던 문제인데, 응답가능성 정도로 생각했었습니다. 읽으면서 이것도 도움이 되었네요 ^^
바흐찐 전집은 연대 최건영 선생님 팀이 금년 안에 출간 시작할 것이라고 들었는데, 워낙 꼼꼼하신 선생님이라서 언제 '진짜'로 나올지는 잘 모르겠네요. 생각해보니 작년에 '올해 나올 것이니까 국문학도들에게 널리 알려요'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_-;

기인 2006-04-30 13:13   좋아요 0 | URL
아 그리고 퍼 갑니다. ^^

로쟈 2006-04-30 13:17   좋아요 0 | URL
기인님/ 바흐친을 좀 읽으셨군요.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