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한국의 글쟁이들'은 저널리스트 작가 고종석을 다루고 있다. 출판칼럼니스트 최성일씨가 글을 썼는데, 반가운 마음에 옮겨놓는다. 나름대로 많이 읽고 잘 안다고 생각한 이 '글쟁이'의 특이한 면모도 읽을 수 있다. 가령 남의 소설을 안 읽는 기벽 같은 거. '방주'에 넣어두려다가 아끼는 마음에 '곁다리텍스트'로 분류하고 그에 걸맞게 후미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책 <감염된 언어>의 서문에서 일부를 옮겨놓도록 하겠다.

한겨레(07. 01. 26) 한국의 글쟁이들/(17) ‘저널리스트 작가’ 고종석

고종석(48)에게는 열성독자들이 만든 인터넷 카페가 있다. 2004년 문을 열어 270명이 회원으로 가입한 ‘고종석 팬 카페(cafe.daum.net/kjsfreedom)’는 인문서 저자로서 그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인문서 저자의 팬 카페는 손으로 꼽을 수 있다. 16권에 이르는 그의 책의 평균 판매부수는 5천부 안팎, 신간을 무조건 구입하는 고정 독자는 3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 요즘 같아선 인문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 진입이 무난한 ‘엄청난’ 숫자다.

인문서 저자=지금까진 <코드 훔치기>(마음산책·2000)가 제일 많이 팔렸다. 고종석은 책을 곱게 만들어준 편집자와 이 책을 논술교재로 활용한 논술학원 강사에게 그 공을 돌린다(*나 또한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논술을 가르치던 시절 가장 많이 복사해서 나눠준 자료이기도 하다. 하니 '그 공'은 내게도 있다). 하지만 그가 글을 쓰고 책을 엮는 것이 단지 ‘연줄’ 덕분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겸손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글과 책에 대한 독자의 호응을 ‘시장성’의 잣대로만 판단하고 싶진 않다. 그에겐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고종석은 출판계에서 “아주 정확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로 통한다. 아름다움보다 정확함을 특징으로 한다고 볼 수도 있으나, 고도의 정확성은 아름다움을 낳는다. 한 학생 독자는 “고종석의 책을 읽으면 똑똑해지는 느낌, 시야가 넓어진다는 느낌”을 전한다. 고종석의 절친한 벗인 강금실 전법무장관은 그의 시집비평집 <모국어의 속살>(마음산책·2006)에 대해 “고종석의 평론은 매우 균형잡힌 시각에서 정확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논평한다. 고종석의 글은 어느 대학 논술시험의 지문으로 나오기도 했다.

기자=고종석은 기자다. <코리아타임스> 기자로 언론계에 들어와 초창기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했다. <한겨레> 재직시절, 기사문답지 않은 기사가 논란을 빚기도 하였으나, 기자의 문체가 살아있는 기사문의 이정표를 세운다. 1990년대 중반 프랑스 주재기자 때는 철학자 질 들뢰즈의 죽음을 색다르게 해석해 전달한다. “고갈된 일흔 살 삶을 스스로 끝장냄으로써, 그 자신이 곧잘 ‘철학적 일화’로써 거론하던 엠페도클레스의 전설적 자살이 있은 뒤 2천5백년 뒤에, 서양 철학사에 또 하나의 일화를 보탰다.” 그 후 ‘친정’인 한국일보사에 복귀하였고,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지금은 객원 논설위원으로 있다.

“모르겠어요. 기자가 되겠다는 특별한 생각이 있어 된 것도 아니고, 우연히 모집공고 보고 시험 봐서 잡은 직장이거든요. 글쎄요.” 기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의 부족한 부분은 그의 장편소설 <기자들>(민음사·1993)에 나오는 ‘기자숙명론’으로 채운다. “기자는 기록하는 자이지만 그 기록은 자신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남에 대한 기록이다. 남의 삶을 엿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 자기가 엿본 것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광고충동, 그런 것들이 기자의 운명이 아닐까.”

소설가 장편 <기자들> 말고도 고종석은 단편소설집 <제망매>(문학동네·1997)와 <엘리아의 제야>(문학과지성사·2003)를 펴낸 바 있다. 소설은 왜 쓰게 됐나요? “기사가 사람 이야기를 그리긴 하지만 기사문의 언어는 그물코가 성긴 거죠. 빠져 나가는 부분이 굉장히 많아요. 사실일 수는 있어도 진실이 아닌 부분이 많이 있어요. 기사에서 새나가는 부분, 사회가 옳다 그르다 결정해주는 그런 선악·미추에 잡히지 않는 어떤 개인적인 선악과 미추, 개인적인 가치와 진실들은 기사가 잡아낼 수 없어요. 소설의 언어는 좀 달라요. 기사의 언어보다는 소설의 언어가 촘촘하지 않겠나, 덜 빠져나가지 않겠나 싶어 시작했어요.” ‘내 소설의 근간은 현실’이라는 고종석의 지론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기벽이라고 하긴 어려워도 고종석은 남의 소설을 잘 안 읽는다. 어느 출판사 사장의 목격담이다. 어떤 소설가의 출판기념 모임에서 소설가가 자신이 펴낸 책을 고종석에게 주자, 그는 이를 정중하게 사양하더란다. “고맙지만 나는 소설을 안 읽는다. 귀한 책 아끼기 위해서라도 다른 분께 주는 게 좋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집 두 권에 수록된 작품들이 더 낫다는 나의 독후감을 밝혔다. “소설이라는 장르에 계속 몸담을 생각이면 장편을 써야겠죠.”

언어학자=이글을 쓰기 위한 인터뷰를 하면서 해묵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고종석이 말한 “영어공용화의 반대가 지닌 계급적 함의”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계층간 영어능력의 격차를 줄이고, 언어가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점에 주목한 것이었다. 한동안 나를 헛갈리게 한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글의 한 구절이다. 이글은 <감염된 언어>(개마고원·1999)에서 볼 수 있다.

“영어가 공용어가 되든 안 되든,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은 자기 자식들에게 영어를 열심히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영어에 익숙해진 그들의 자식들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 지식과 정보에서 소외된 일반대중의 자식들 위에 다시 군림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특정집단에 의한 그런 식의 지식의 독점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정확한 한국어 사용자 아무튼 영어공용화의 긍정적 측면을 헤아리는 사람이 누구보다 분명하고 정확한 한국어 사용자라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명료한 개념 정의와 개념의 결을 세심하게 구분한 사례는 근간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개마고원·2006)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종석은 반미 친북 좌파가 고스란히 겹치는 것인지, 그 하나하나가 비난받을 일인지, 무엇보다 이런 딱지가 붙여진 이들이 정말로 반미 친북 좌파인지 되묻는다. “좌파는 친북보다도 훨씬 더 여러 겹의 뜻을 지니고 있지만, 그 핵심은 흔히 ‘복지’라는 말로 표현되는 사회연대를 조직하는 데 정부가 일정한 구실을 해야 한다고 믿는 세계관과 관련돼 있다.”

몇 해 전, 그가 엿본 출판사 편집자의 우직한 원칙주의가 빚어낸 엽기적 풍경에 그저 웃을 수만은 없다. 그가 읽던 고려시대 번역문집 문장 한가운데서 ‘미얀마제비’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사마귀란 뜻의 당랑(螳螂)을 옮긴 ‘버마재비’를, ‘버마제비’의 오자로 예단한 교열자는 버마의 바뀐 나라이름에 맞춰 ‘미얀마제비’로 바로잡았던 것. 편집자가 ‘버마재비’의 어원이 ‘범(호랑이)의 아재비(아저씨)’라는 걸 알았더라도 수난을 겪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는 그의 판단에도 공감하지만, 이글의 결론은 더 공감한다. “무릇 글쟁이는, 제 글이 고스란히 활자화될 땐, 그 글이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번역자=고종석이 우리말로 옮긴 책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마지막 작품 <이게 다예요>(문학동네·1996)가 전부다(*내가 읽은 고종석의 책들 가운데 유일하게 돈 아까운 책이었다). “번역은 정말 어려운 작업이에요. 문장 하나를 우리말로 만족스럽게 옮기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번역이야말로 제대로 한다면 뼈를 깎는 작업일 것 같습니다. 영어나 스페인말이나 프랑스말이나 어설프게 읽을 줄은 아니까 주변에서 ‘너, 왜 번역 안 하느냐?’ 하는데, 저는 책 한 권 번역하려면 평생 해야 할 것 같아요. 또 번역은 일종의 평론인데 그렇게 하긴 정말 어렵죠.”

정치평론인=고종석은 정치현상을 보는 눈이 밝다. 시평집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머리말의 한마디는 그런 눈이 흐려지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들게 한다. 그마저 “은근히 기대를 걸었”다니. 2003년 1월 중순 발행된 <인물과사상 25>(개마고원)에 실린 글을 통해 내가 서둘러 은근한 기대조차 접는데 일조한 그가 아니던가. “우선 그의 지지자들부터, 대통령이 된 것 이상의 업적을 그가 자신의 임기 중에 세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순순히 인정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그의 집권이 우리 사회의 멘탈리티에 줄 긍정적 충격을 생각하면, 그 집권 자체만으로도 눈부신 업적, 그의 지지자들이 그와 더불어 자랑스러워할 만한 업적이다.” 다시 돌아온 정치의 계절에 정치를 바라보는 그의 혜안과 안목을 접할 수 있을까?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긴 줄었죠.”

대표작 네 권을 꼽는다면= “<기자들>은 첫 책이라서, <제망매>는 내가 소설가가 됐구나, <자유의 무늬>(개마고원, 2002)는 내가 저널리스트구나, <감염된 언어>는 내가 약간은 언어학도구나 하는 느낌이 들게 했지요. 이 세 개가 제 정체성인데, 셋 다 얼치기이긴 하지만 이 책들에 기자로서, 소설가로서, 언어학도로서 정체성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럼, 이 셋을 합치면 뭐가 될까요? 문화전달자가 어떨까요? “모르겠어요, 제가 뭔지는.”(최성일/ 출판칼럼니스트)

07. 01. 26. 

 

 

 

 

P.S. 그의 첫소설 <기자들>은 절판이라서 알라딘에는 아예 뜨지도 않는다(나는 책을 갖고 있지만 그의 책들 가운데 드물게도 읽지 않았다). 대신에 가장 많이 팔렸다는 <코드 훔치기>(마음산책, 2000)를 '네 권' 안에 채워넣도록 한다. 나머지는 나도 모두 읽은 책들이다. 그 중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1999)에서 그가 (서문을 대신하여) 길게 쓴  서문 '서툰 사랑의 고백' 중 한 대목. 

사전 편찬자의 꿈을 접은 뒤, 나는 한때 외국어로 글을 쓰는 직업적인 글쟁이가 돼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몽상으로 그치고 말았다. 간단한 편지글 말고 내가 앞으로 외국어로 글을 쓸 것 같지는 않다. 또 내가 외국어로 기다란 글을 쓴다고 해도 이미륵이나 김은국만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지적 작업을 프랑스어로 수행한 뤼시앵 골드만이나 줄리아 크리스테바 같은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야 프랑스 땅을 밟았지만, 그 사람들은 동유럽의 조국에서 보낸 어린시절부터 프랑스어에 익숙했던 사람들이다. 반면에 내 유년기를 둘러싹 있던 언어는 오직 한국어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건 내 운명이다.(...)

이런 모든 꿈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버린 지금, 나는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로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다. 정확성과 아름다움으로 한국어의 가능성을 넓혔다고 평가받을 만한 글 말이다. 아직은 그것이 몽상에 불과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한국어로 글을 쓸 작정이므로, 이 꿈은 언젠가는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읽을 만한 한국어로 글을 써보겠다는 것은 10대 이래 내가 지녔던 몽상들 가운데 실현 가능성이 남아 있는 유일한 목표다.

실상,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얼른 떠오르는 이름만 해도 최인훈, 조세희, 김원우, 복거일, 이인성, 최윤 등 여럿이다. 그들이 대체로 번역 문투를 사용한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20세기 말에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한국어를 19세기 말의 한국어와 견주어보면,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어가 얼마나 변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 그 변화의 과정은 곧 감염의 과정이었다. 외국어와 외국 문화의 감염 말이다.

문화사는 곧 감염의 역사고, 그 문화를 실어나르는 언어의 역사도 감염의 역사다. 인공 언어가 아닌 한 감염되지 않은 언어는 없다. 최인훈에서 최윤에 이르기까지 외국어에 된통 감염된 한국문학은 세련과 풍요를 향한 한국어의 행진을 선도하고 있다. 내가 언젠가 그들만큼 볼품있게 한국어로 글을 쓸 수 있을까? 나는 애써볼 작정이다.(18-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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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6 0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01-26 08:15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고종석 씨의 정치적 입장이나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소설론은 흥미롭네요.

마늘빵 2007-01-26 08:17   좋아요 0 | URL
아 이거 가져갑니다. 저도 그 카페 회원입니다. ^^ 안간지 오래됐지만.

로쟈 2007-01-26 08:43   좋아요 0 | URL
**님/ 축하드립니다. 저까지 만족(?)스럽네요.^^ 알려주신 '보물창고'는 종종 들러보겠습니다.^^
기인님/ 짐작에 고종석보다는 더 왼쪽이시죠?^^
아프님/ 님이 안 가신다면, 누가?..

나비80 2007-01-26 09:46   좋아요 0 | URL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란 기준은 늘 모호하고 아슬아슬할 수 밖에 없는데, 고종석은 자신만의 판단 기준이 서 있는 모양입니다. 슬쩍 보면 언어의 역사성을 고려하는 입장이란 건 알겠지만 말이죠. 저는 몇 권 안되지만 제 주변에만해도 고종석의 3000명 안에 드는 녀석이 있답니다. ^^
그리고 저는 기인님과 고종석 가운데 끼겠어요!

도서관여행자 2007-01-26 10:45   좋아요 0 | URL
저도 퍼갈게요^^

로쟈 2007-01-26 15:18   좋아요 0 | URL
소이부답님/ 제가 보기에 고종석은 그가 거명하고 있는 어느 저자들 못지 않게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를 구사합니다. 더불어, 저는 고종석의 '자유주의'를 지지합니다. 더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의 포지션이 등장할 때까지는...
NOname님/ 이름을 안 갖고 계시군요.^^
 

한 영화의 자막을 번역하느라고 하루종일 집안에 붙박혀 있었다. 간간히 딴짓을 하기도 했지만 하루종일 한 가지 일에 매달려본 것도 오랜만인 듯하다. 그게 다 학기가 거의 종료된 시점이어서 가능한 일이리라. 어쨌거나 교정을 보기 전에 잠시 머리도 식힐 겸 단순작업을 하나 해둔다. 마땅한 일이 뭐가 있을까 둘러보다가 집어든 책이 두달 전에 출간된 장경렬 교수의 <코울리지: 상상력과 언어>(태학사, 2006)인데, 책은 장경렬(영문학), 김상환(철학) 두 교수가 기획위원을 맡은 '알레테이아 총서'의 첫권이었다.

'단순작업'이라고 한 건 책머리에 실려 있는 그 총서의 발간사를 옮겨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요즘도 새로운 기획의 총서들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발간사'를 표나게 내세우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데다가 관심 또한 나의 전공/적성과 맞아떨어지기도 해서 수고를 무릅쓸 만하다. 더불어, 총서의 제2권으로 근간목록에 올라 있는 김상환 교수의 <들뢰즈: 차이와 반복>의 출간을 고대하는 마음도 그 수고에 보태도록 한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인문학의 관점에서 볼 때 20세기의 가장 의미있는 사건 가운데 하나는 문학과 철학의 화해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후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던 문학과 철학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상대의 존재가 필수적임을 인정하고 서로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인문학적 사유방식들이 새롭게 조명되거나 싹트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에도 여전하다. 변화가 있다면 다양한 사유방식들에 대한 접근과 논의가 어느 때부터인가 개별 문화권을 뛰어넘어 세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실로 21세기는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새로운 노마디즘의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정황은 수많은 인문학도들에게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심각한 고뇌에 빠져들게 한다. 노마드의 삶은 본질적으로 방황의 삶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너무도 다양한 사유방식들 가운데 어느 쪽을 향해 갈 것인가 설사 선택이 문제되지 않더라도 문제의 사유방식을 어느 방향에서 접근해야 할 것인가, 또한 다시금 어느 사유방식을 향해 걸음을 옮겨야 할 것인가 등등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태학사의 '알레테이아 총서'는 이런 고민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 준비된 것은 아니다. 다만 노마드의 삶 앞에 펼쳐진 황야 저편의 밤하늘에 길잡이별을 띄우는 것이 어떤 형태로든 가능하리라는 믿음에서 준비된 것일 뿐이다. '알레테이아 총서'가 기본적으로 하나 또는 둘의 사유 개념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함은 이 때문이다. 요컨대, 인문학의 핵심 개념에 대한 이해가 일종의 길잡이별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알레테이아 총서'는 출발한다.(*아래 사진은 하이데거 부처와 라캉)

-하이데거는 '진리'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의 '알레테이아'를 어원에 충실하게 번역함으로써, '인식과 사실의 일치'라는 전통적 진리 개념을 뛰어넘어 '존재자의 탈은폐 또는 드러냄'으로서의 '진리'야말로 인문학의 다양한 사유 방식에 접근하는 데 기본원리가 된다고 믿기에 우리는 알레테이아를 총서의 명칭으로 택한다. '존재자를 드러내는 탈은폐'를 가능케하는 길잡이별을 저 노마드의 밤하늘에 띄우기 위해, 또는 그러한 별을 찾기 위해, '알레테이아 총서'는 존재할 것이다.

 

 

 

 

'알레테이아'로서의 진리에 대한 하이데거의 주석은 <이정표2>(한길사, 2005) 중 '진리의 본질에 대하여'란 글에 나온다. 자유를 '존재자를 존재하게 함'으로 재정의하면서 하이데거는 다시 이 '존재자를 존재하게 함'이란 말을 "각가의 존재자가 이미 그 안에 들어서 있고 또한 각각의 존재자가 이를 테면 수반하고 있는 저 열려 있음에 대해 관여함을 의미한다"고 적는다. 거기에 이어지는 대목이 '알레테이아'에 관한 구절이다.

"이 열려 있는 장을 서구의 시원적 사유는 타 알레테아, 즉 '비은폐적인 것'으로개념 파악한 바 있었다.우리가 알레테이아진리 대신 오히려 비은폐성으로 번역한다면, 이러한 번역은 그 낱말에 더 충실할 뿐더러, 진술의 올바름이란 의미의 진리의 통례적 개념을 달리 사유해보고 존재자의 탈은폐성과 탈은폐라는 저 아직 개념 파악되지 않은 것을 소급해 사유해보라는 지침을 포함한다."(107쪽)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자유 -->존재자를 존재하게 함 --> 존재자를 열려있는 장으로 데려감 --> 탈은폐(밝게 드러냄)가 된다. 곧 '밝게 드러냄'은 자유의 행사이자 진리의 당당한 자기주장이다(누드 비치가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그러한 '열림터'를 마려하는 게 '알레테이아 총서'의 역할이기도 하겠다. 책이 나오는 추세가 좀 굼뜨고 총서의 목록이 다 카바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여하튼 몇 걸음을 가더라도 족적은 남지 않겠는가...

06.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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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3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2-13 11:46   좋아요 0 | URL
**님/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읽어보니까 그것 말고도 오타 투성이네요. 제 타이핑 실력이 예전 같지 않은 모양입니다.^^;
 

가방을 뒤지다 보니까 그제 날짜 한국일보가 나온다. 나중에 읽으려고 넣어둔 것인데, 그 '나중 읽기'의 대상이 이어령 교수와의 인터뷰 기사였다. 이번에 문학사상사에서 '이어령 라이브러리' 30권이 완간되었고, 또 1956년 한국일보 지면으로 등단한 바 문필활동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도 열린다고 한다. 200여권의 저작 중에서 내가 읽은 이어령은 몇 권 되지 않지만(30권으로 줄여도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저항의 문학>을 읽었던 기억은 생생한 만큼 관련 기사들과 함께 몇 마디 군말을 덧붙여두도록 한다. '곁다리텍스트'로 분류한 것은 <저항의 문학>의 서문을 말미에서 읽어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먼저 읽을 건 한국일보와 중앙일보의 기사들이다.

한국일보(06. 10. 25)  문필활동 50년 전집으로 정리한 이어령

누군가 재미 삼아 세어보니 직함이 무려 15개였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대학교수, 신문 칼럼니스트, 문화부 장관, 문명비평가, 에세이스트…. 그 앞에 서는 사람은 누구나 어느 호칭을 사용해 그를 불러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오롯이 글 쓰는 사람으로 규정할 뿐이다. 00

문학과 정치, 문화와 문명을 가로지르며 쉼 없이 창조의 질주를 계속해온 우리 시대의 지성 이어령(72). 그의 50년 문필활동을 정리한 전집 <이어령 라이브러리>(문학사상사)가 이 달 30권으로 완간됐다. 1956년 5월6일 한국일보에 평론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지 꼭 50년. 그 반세기 동안 이어령이라는 이름을 저자로 달고 나온 200여권의 책 중 대표 작품들을 골라 묶어낸 전집이다.

-선생님의 다산의 창조력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난 어릴 때부터 ‘한 우물을 파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았어요. 갈증이 나니까 우물을 파는 건데, 해갈이 되면 그만 파고 다른 데로 가야지 왜 계속 팝니까. 창조에 대한 갈증으로 50년간 이 우물 저 우물 파온 거고, 그 속타는 갈증이 날 여기까지 오게 한 거죠. 그러다 보니 직함도 많아졌고.”

-그래도 타고난 성정이 아니면 책을 200권이나 쓰는 열정적 삶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중복된 것, 편저나 공저 등을 빼면 순수한 내 작품은 총 50권 정도인 것 같아요. 문단에 나온 지 50년이 됐으니 1년에 평균 한 권씩 쓴 셈인데, 글 쓰는 사람이 그 정도는 써야죠. 지금까지 <한국문학>에 <나신과 의상>을 연재하다 몸이 아파 그만두고 6개월 쉰 걸 빼면 글쓰기를 쉬어본 적이 없어요. 직업적으로 글 쓰는 게 몸에 밴 거죠.”

-선생님의 대표적인 이미지 중 하나가 ‘말의 천재’인데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두 가지가 있는데 수필가와 달변이에요. 수필을 폄하해서가 아니라, 엄연히 수필과 평론이 구분되고, 난 평론으로 문단에 나왔는데 장르를 바꿔버리니 싫은 겁니다. 달변이라는 말은 ‘내용은 없어도 청산유수’라는 말인데, 참 모욕적이에요. 강연 후에 누가 ‘청산유수시네요’하면 할 말이 없어요. 아무리 눌변이라도 말할 값어치가 있는 말을 해야지. 그래서 말의 천재라는 말이 참 싫어요. 내가 세상에 많이 알려진 만큼 손해 보는 부분인데, 그 말로 인해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몰라요.”

-‘달변의 수필가’라고 했다간 큰 일 나겠군요.

“큰 일 나지.(웃음) 대외활동이 많다 보니 선입견으로 나를 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과대포장됐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참 안타깝죠. 학계에서는 내 ‘공간기호론’ 같은 것은 정말 독창적이라며 오히려 내가 과소평가됐다고 하는 사람도 많아요. 내가 달변가, 수필가로 안 알려졌더라면 평가 받았을 저작들인데….”

-선생님의 50년 글쓰기가 갖는 시대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내 50년 글쓰기에는 나 개인이 아니라 우리나라 지성사, 글쓰기의 역사와 담론이 담겨 있습니다. 채집문명에서 농업문명, 산업문명, 정보문명, 이 네 가지를, 즉 인류의 1만5,000년 역사를 한 몸에 축약해 치러냈으니까요. 외국 지성에 비해 내 수준이 떨어질지 모르나 4개 문명을 다뤘다는 점에서는 누구도 나를 따르지 못할 겁니다. 이건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한 인간이 50년간 글을 쓰면서 네 문명의 체험을 담아내는 건 체험의 밀도 면에서 아주 희귀한 거예요. 자화자찬이 아니라 70대 중반에 이른 내 동료들을 대변해 그 가치를 얘기하는 겁니다.”

-선생님께서 만드신 <문학사상>이나 <이상문학상>이 우리 문단의 중요한 제도로 자리매김했는데도 선생님에겐 문학 권력의 이미지가 없습니다.

“나는 50년간 글쓰기를 해왔지만 내 패가 없어요. 이런 저런 문학파들이 많지만, 어디에도 ‘문학사상파’라는 것은 없죠. 정치, 경제, 사회 다 패를 이루어 하는 것이지만, 문학만은 외롭게 혼자 하는 것입니다. 문인은 구석기 사람이에요. 제 손으로 도끼를 만들어 저 혼자 토끼를 잡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건 문단이 아니라 ‘문당’(文黨)이죠.”

-아직 더 파야 할 우물이 있습니까.

“억울하게도 나는 소설을 써도 평론가가 여가로 쓴 소설이라고 폄하됐어요. 사실 시를 쓰고 싶었는데, 왜 진짜 하고 싶은 건 아까워서 못 하잖수. 서정주의 <시론>이라는 시에 ‘바다속에서 전복 따파는 제주해녀도/ 제일 좋은 건 님오시는 날 따다주려고/ 물 속 바위에 붙은 그대로 남겨둔단다’는 게 있잖아요. 내게 시는 그 숨겨진 전복이에요. 50년 글쓰기의 대단원은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포에지(시가 가지는 정취), 시가 될 겁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집 한 권 내고 싶어요. 내가 제일 아끼는 거니까 자비 출판을 해서라도 장정부터 다 내 손으로 한 권 만들고 싶습니다. 그 시집을 읽고 나면 이어령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구나 알 수 있는, 그 50년을 단번에 설명해 줄 그런 시집 말입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선생님처럼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경우는 흔치 않은데요. 아직도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까.

나는 한평생 오해를 받아왔어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나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나는 거만이 뭔지 몰라요. 끝없이 바닥에 있다고, 열등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죠. 그걸 언어로 위장하고, 때로는 폭로하고 한 겁니다. 너무 약하고 열등해서 언어라는 갑충의 껍데기를 가지려고 한 겁니다. 나를 찌르는 불행의 화살들로부터 나를 보호하려구요.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참 재밌는 게 나와요. 모차르트에겐 모든 창조하려는 자들이 가져야 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끝없는 존재의 열등감, 어린아이 같은 나이브함, 사회성이 없는 데서 오는 외로움. 이 세 가지가 없으면 글쓰기가 안돼요. 성경 <욥기>에 보면 욥이 마지막에 하는 말이 ‘이 고통을 반석에 새길 수만 있다면’이잖아요. 이게 얼마나 감동적인지 몰라. 불행에 한 발짝 더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특권, 그게 글쓰기죠.”

-글쓰기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습니까.

“정치, 이념이죠. 내게는 끝없는 딜레마였습니다. 정치에 말려들어 이념의 언어에 구속되면 창조적 글쓰기는 안 된다, 신분증 언어밖에 못 쓴다, 다짐하며 그걸 안 하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문학에서는 하지 말자, 1960년대에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마치 구석기를 살고 있는 것처럼, 시공에 얽매이지 않은 문학을 하자 했죠. 대신 현실과 관계 맺는 정치ㆍ사회적 발언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 지향의 일본인> 같은 문화, 문명론으로 쓴 겁니다. 그런데 그게 오해를 받아 순수ㆍ참여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참 외로운 거죠. 정략적 눈길처럼 나를 상처주는 것은 없어요. 나는 고독한 창조자로 있고 싶었는데, 인위적으로 패거리 속에 나를 넣어서 보니까 그때처럼 외로운 게 없습디다.”

 

 

 

 

-글쓰기 50년을 돌이켜보면 어떤 소회가 드십니까.

끝없는 오해와 자기모순의 50년이에요. 감사하는 건 내 이름의 프리미엄으로 모든 작품이 무대에 오르고 영화화했다는 겁니다. 외적 환경은 감사하지만, 콘텐츠를 놓고 보면 이해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외로운 50년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한, 외화내빈의 50년. 그게 내 50년의 아이러니죠. 글은 쓰는 순간 내다 버리는 쓰레기입니다. 이건 겸손이 아니에요. 내 글에 만족하면 또 쓰겠소. 전집 30권을 한데 묶어놓고 찍어놓은 사진을 보면 희열보다 멋쩍음을 느껴요. 숨기고 싶고 꼭 속옷 보여주는 것 같아 창피해요. ‘이게 전부냐? 네가 50년간 쏟아부은 게 이게 다냐’ 싶어 헛헛한 기분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전에는 하기 싫은 일은 절대 안 하고 남들 부탁도 매정하게 거절하고 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저 사람이 언제 또 나한테 부탁을 하랴 싶어 거절을 못해요. 그러다 보니 강연이다, 주례다, 인사말이다 스케줄이 너무 많아요. 초조한 게, 내 활동기간은 짧아지는데, 전복을 따야 하는데 잠수할 시간이 없어요. 막상 들어가면 숨이 차고.(웃음) 내년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런 저런 위원장, 고문 직함 다 정리하고 1년간 들어앉아 전복을 딸 겁니다. 시집 꼭 낼 겁니다. 또 대학에서 강연한 것들 묶고, 학술논문들도 정리해서 전집도 40권, 50권까지 이어가야죠. 글쓰기엔 정년도 고령화도 없으니까요.”(박선영기자)

한국일보(06. 10. 25) 이어령 "등단 글 <우상의 파괴>는 젊은 피울음"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한 출판기념회에서 고성을 질러가며 당대 최고의 문인들을 비판한 어느 당돌한 청년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한 서울대 학생이 서정주, 김규동, 조연현, 백철 등을 두고 그게 시냐고, 문학이냐고 목소리를 높여 짓뭉갰다는 것이다.

소문을 들은 당시 한국일보 문화부장 한운사씨가 그 청년에게 그 이야기를 글로 써보라고 제안했다. 청년은 끓어오르는 비분강개를 “설마 신문에 실릴까”싶은 마음으로 썼고, 그것이 <우상의 파괴>라는 제목으로 1956년 5월6일자 한국일보의 한 면에 전재됐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의 등장이었다.

“당시엔 추천이나 신춘문예가 아니면 제도 문학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죠. 하지만 나는 기성문단의 동의나 결재를 받고 싶지 않았어요. 내 힘으로 작가가 되겠다, 신춘문예나 추천, 투고 등을 통해 너희들로부터 승인받지 않겠다, 나는 너희들처럼 글 안 쓴다 하는 선언이었죠.”

그 글은 단지 문단의 우상들을 대상으로만 씌어진 글은 아니었다. “내가 유명해지려고 선배들을 짓뭉갰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우상엔 이승만 대통령 등 젊은이들을 짓누르는 기성의 모든 억압이 포함돼 있었죠. 한 마디로 한국전쟁 이후 정신적으로 말살되는 젊음을, 한 번밖에 없는 내 젊음을 당신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젊은 사람 살려’ 하는 절규였어요. 전쟁의 폐허 속에서 맨발로 쓴 젊은이의 피울음, 젊은이들의 첫소리였죠.”

그로부터 50년. 우상을 파괴하며 등장한 이 ‘앙팡 테리블’이 한국 지성사의 거목으로 우뚝 섰다. 그 거름이 된 50년의 글쓰기를 기념해 31일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이어령 교수의 글쓰기 50년>이라는 주제로 특별강연회가 열린다.(박선영 기자)


중앙일보(06. 10. 27) 시대의 지성 이어령 등단 50년

우리 시대의 지성 이어령(72.중앙일보사 고문) 선생이 등단 50주년을 맞았다.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란 글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글쓰기 인생이 어느새 반세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직업은 본래 문학평론가다. 그러나 뭇 사람은 88올림픽 개막식을 총지휘한, 그래서 굴렁쇠의 추억을 우리에게 안긴 문화기획자로 그를 떠올린다. 다른 이는 한국 헌정사 최초의 문화부 장관(90~91년)으로, 또 다른 이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등 베스트셀러의 저자로 그를 기억한다.

그래서 오늘은, 오히려 일반인에겐 생소할 수도 있는 문학평론가로서의 이어령을 조명한다. 전후문학 시대 젊은 문학의 기수로서, 60년대 참여-순수 논쟁을 이끈 평론가로서 이어령은 한국 문학사에 또렷한 발자국을 남겼다. 그 50년의 세월을 서울대 권영민 교수가 증언한다. 선생의 육성은 30일 '월요 인터뷰'에서 전달할 예정이다.

선생의 등단 50주년을 맞아 '이어령 라이브러리'의 30번째 권인 '나, 너 그리고 나눔'(문학사상)이 최근 발간됐고, 31일 오후 3시엔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특별 강연회가 열린다. 다음달 2일 정오엔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한.중.일 비교문화상징사전 발간 기념 강연회도 열린다.(손민호 기자)

 

 

 



중앙일보(06. 10. 27) 권영민 교수가 말하는 문학평론가 이어령

이어령 선생의 비평적 글쓰기는 1956년 시작된다. 선생은 반세기를 지내오는 동안 글쓰기를 멈춘 적이 없고, 문화 예술의 현장을 떠난 적이 없다. 문화 예술계를 대표하는 원로이면서도 선생은 언제나 현역 비평가를 자임한다. 칠순을 훨씬 넘긴 지금도 그 놀라운 지적 통찰력을 통해 우리 문화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는 새로운 인식의 틀을 제공하는 데에 앞장선다. 그러므로 이어령 선생의 글쓰기 50년은 우리 문화 예술의 정신사적 궤적에 해당한다.

이어령 선생의 첫 번째 비평집 '저항의 문학'(59년)은 우리 문학사에서 유별난 자리를 차지한다. 선생의 수많은 저서 중엔 이 책보다 훨씬 화제를 모으고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지성의 오설길''축소 지향의 일본인' 등이 있고,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추적하고 있는 '문화코드''디지로그'와 같은 최근의 화제작도 있다.

그러나 '저항의 문학'이 유별난 이유는, 이 책에서부터 비로소 우리의 문학 비평이 문학 자체의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문학 비평도 문학의 한 장르라는 논리와 인식의 지평이 열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항의 문학'은 그 유명한 '우상의 파괴'라는 비평적 명제를 처음으로 내세운 저작이다. 이 명제는 '작품 자체로 돌아가기'란 비평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우상의 파괴'란 명제는 50년대 문단에서 기성 작가들의 권위에 대한 신세대의 당돌한 도전으로 오해까지 받았던 테마이다.

이어령 선생은 당시 평단의 거목이었던 백철을 공박하고 조연현을 비판하고, 시단의 주역이었던 미당 서정주를 몰아치고 소설 문단의 김동리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전후 문단의 숱한 시인과 소설가들이 아무도 선생의 비평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러나 선생의 비평이 논쟁적이긴 했기만,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아주 단순하고도 간명했다. 문학 비평이 더 이상 작가의 주변을 맴돌아선 안 된다는 것, 오직 작품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어령 선생은 문학의 사회 참여 문제를 저항의 문학이라는 테마로부터 새롭게 제기한 적이 있다. '작가의 현실 참여'(59년)라는 선생의 평문이 던진 이 새로운 과제는 4.19를 거치면서 문단 전체의 쟁점으로 부각된다. 이 과정에서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비판하는 문학의 정신을 리얼리즘과 연결하며, 작가의 역사적.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참여문학론이 등장한다. 이에 대해 문학의 본질적 순수성을 옹호하는 문인들이 반발하면서 쟁점은'순수-참여 논쟁'으로 확대된다.

이 논쟁의 정점에 등장한 것이 바로 이어령 선생이며, 그 상대역이 시인 김수영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시인 김수영은 군사 독재의 사회 문화적 통제를 우려하면서 언론의 무기력과 지식인의 퇴영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참여론을 논리화한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은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먼저 문화 예술 자체의 응전력과 창조력의 고양을 주장했고, 시대의 상황 변화를 무조건 추종하는 문학인의 자세를 비판한다. 이 과정에서 문화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신념을 내세운 이어령 선생이 순수론의 옹호자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어령 선생이 문학평론가로서 가장 힘을 기울인 연구 중 하나가 '이상 연구'이다. 이상의 문학은 언어의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돼 있으며, 이들 사이의 갈등과 화해 속에서 비롯되는 긴장을 통해 전체적인 통일성이 유지된다는 것이 선생의 관점이다. 이상의 작품을 신비화된 그의 삶으로부터 분리한 선생의 비평적 작업은 이상 문학의 독자적인 의미와 구조를 미적 차원에서 해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은 좁은 의미의 텍스트주의자는 아니다. 선생의 문학 비평은 문학의 개념과 그 범위를 규정하는 방법과 관점에 따라 문학과 문화의 관계를 좁히기도 하고 넓히기도 한다. 선생의 비평적 글쓰기는 미시적인 언어 기호론에서부터 거시적인 비교문화론으로 확대된다. 이어령 선생의 비평적 글쓰기 50년을 정리하고 있는 130여 종의 저작을 살펴보면, 선생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회 문화적 현상 속에서 하나의 문화적 실천으로써 자신의 글쓰기를 폭넓게 지속하여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문화적 충동을 함께 아우르는 이 끊임없는 글쓰기를 통해 한 시대의 지성이 펼쳐놓는 새로운 '문화적 시학'을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독자의 자랑이다.(권영민 서울대 국문과 교수, '문학사상' 주간)

06. 10.20-21.

 

 

 

 

P.S. 집에 돌아와 <저항의 문학>을 찾아보니까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래도 박스보관 도서인 모양이다. 내가 갖고 있는 <저항의 문학>은 가장 먼저 나온 경지사판(1959)판도 아니고 가장 최근에 나온 문학사상사판(2003)도 아니다. 그밖에도 여러 판본이 있지만, 기린원에서 지난 1986년에 나온 책이 나의 소장본이다. 책은 지방의 시립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고서 나중에 <장미밭의 전쟁>(기린원, 1986)과 함께 구했었다. 지금은 모두 '이어령 라이브러리'로 보다 번듯하게 나와 있다.

기억에 표제가 된 평문 '저항의 문학'은 에드가 앨런 포우의 <절름발이 개구리>를 다룬 글이었다(내가 이 글을 읽은 지 15년이 더 되었다). 궁정 광대의 복수극을 다룬 포우의 단편을 '저항의 문학' 논리로 풀어나가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얼핏 '참여문학론'으로 전혀 손색이 없는 글인데, 1960년대 순수-참여 논쟁에서 순수 진영의 대표적인 논객이었다는 사실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권영민 교수의 표현을 빌면,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먼저 문화 예술 자체의 응전력과 창조력의 고양을 주장했고, 시대의 상황 변화를 무조건 추종하는 문학인의 자세"에 비판적이었던 것이 이어령의 입장이었다면, 사실 참여문학의 본뜻과 멀지 않다. 이어령의 방점은 '문학으로서' 참여하는 데 두어졌던 것이고, 따라서 '참여'에 방점을 둔 이들과는 대립각을 세웠던 게 아닐까.

 poster #1

요컨대, '빤스 입고 덥벼라'가 그의 문학론인 것이고, 이건 '빤스 벗고 덤벼라'와 성격이 다른 것이다(나는 후자의 경우를 '이념문학'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빤스 벗고 덤벼라'는 박광수 감독의 디지털 영화 제목이다). 그러니 전쟁을 하더라도 '장미밭의 전쟁'인 것이겠고. 그런 비유를 좀더 쓰자면, 요즘 한국문학의 '빤스'는 어디에 걸려 있는 것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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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더 2006-10-27 14:25   좋아요 0 | URL
평소 로쟈님의 글은 저에게 어려워서 대부분 조금 읽다가 pass 하는데;;(죄송요), 오늘글은 잘 보았습니다.ㅎ 퍼갈께요.

로쟈 2006-10-27 17:21   좋아요 0 | URL
이건 아직 제 글이 아닌데요(--;). 자료로서 퍼왔을 뿐이고 살을 좀더 붙일 예정입니다...

끼사스 2006-10-27 20:03   좋아요 0 | URL
일전에 친구에게 "오에 겐자부로는 텍스트주의자"라는 말을 듣고, 그 표현이 참 멋있다 싶으면서도, 텍스트주의(자)라는 개념을 이렇게 써도 되는 걸까 했었는데요…. 권영민 교수의 글 속에 "이어령은 텍스트주의자"라는 구절을 맞닥뜨리니까 다시금 그때의 의문이 떠오르는군요. 권 교수의 개념은 작품의 외부가 아닌 내부 그 자체에 주목하는 비평(자)의 태도를 말하는 것 같군요. 그런데 당시 친구의 발언은 오에가 디킨스, 단테, 말컴 라우리 등의 텍스트에 천착해 길어올린 의미를 형상화하는 소설적 방법론을 취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었구요. 텍스트주의(자)는 학문적으로 보통 어떤 의미로 해석되는 건가요? 아마도 권 교수께서 부여한 의미와 가까울 거라고 생각은 듭니다만…. 혹시 제 친구가 짚은 소설적 방법론을 일반화한 개념이 있는지도 궁금하네요.

로쟈 2006-10-27 20:25   좋아요 0 | URL
본문에 의하면, '작품 자체로'가 텍스트주의의 구호입니다. 그게 좁은 의미의 텍스트주의가 뜻하는 바인 듯하고, 넓은 의미의 텍스트주의는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고 공언한 데리다의 사례에서 찾을 수 있겠지요. 한데 이 경우는, 데리다 자신도 언급하고 있지만, 텍스트=컨텍스트이기에 좁은 의미의 '텍스트주의'와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저는 후자를 '텍스트의 바깥을 없게 하라'는 윤리적 요청으로 해석하는 편입니다. 오에의 경우는 제가 잘 모릅니다. 말씀대로라면, 오에 문학의 상호텍스트성을 가리키는 거 같은데, 그 또한 '텍스트주의'의 범주 안에는 들어갈 거 같습니다...

끼사스 2006-10-27 22:10   좋아요 0 | URL
'텍스트의 바깥을 없게 하라'. 제가 이해하고 있는 오에의 소설적 방법론을 적실하게 표현하는 구호인 것 같습니다. 덕분에 질문 드리면서 품었던 기대 이상의 것을 얻은 듯한 느낌입니다. 친절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
 

한 드라마에서 자주 흘러나오는 노래가 '돌리고 돌리고..." 하는 것인데, 요즘 자주 되뇌이는 말이 "밀리고 밀리고..."이다. 책읽기에 국한하더라고 읽을 책과 읽어야 할 책들이 연이어 밀리고 있다. 그래서 '밀리고 밀리고'인데, 이제 곧 '치이고 치이고' 국면으로 넘어갈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스케줄 속에서 이 모양이라면 간혹 바쁘다는 연예인들이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가고 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겠다. 하긴 먹는 건 다 챙겨먹으니까 나로선 이 정도 밀려서 쓰러지진 않겠다. 라면을 끓일 물을 올려놓고 막간에 몇 자 적는다. 그렇게 막간에 적기에는 제목이 좀 거창한다. 역사의 막간극이라...

 

 

 

 

다른 게 아니고 얼마전 <테오리아>란 책을 소개한 게 빌미가 되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다시 들춰보고 있다. '역사의 막간극'이란 표현은 그 서문에 나온다. 20세기의 가장 음울한 고전이라는 <계몽의 변증법>을 이번에 처음 손에 든 건 아니다. 사실. 내가 갖고 있는 국역본은 <계몽의 변증법>(문예출판사, 1995)이니까 최소한 10년은 됐다. 우리말로 이해가 잘 안 돼서 존 커밍의 영역본(1972)도 구했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질 않았다. <부정의 변증법> 영역본이 악명이 높은데, 영역본 <계몽의 변증법>도 사정이 크게 나아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새로 읽을 계획을 하게 된 건 2001년에 국역본 개정판이 출간되고 2002년에는 스탠포드대학에서 새로운 영역본이 출간되었기 때문이다(1997년에 나온 Verso판은 개역본이 아니다). 이 새 영역본을 구한 게 작년 봄이었는데, 아마도 다른 일들에 치어 부득불 책읽기가 미루어졌던 듯하다. 그러다가 이번에 다시 생각이 난 것이다. '계몽의 개념'에 대해서는 러시어본도 확보해놓은지라 나름대로는 '중무장'을 하고 도전장을 내민 형국이다.    

그리고는 읽은 게 두 저자가 1969년 4월에 붙인 개정판 서문이다. <계몽의 변증법>의 초판이 나온 건 1947년 암스테르담에서인데(이미지는 속표지이다), 책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오랜동안 절판상태였다고. 그런 사정을 밝히고 있는 게 이 서문의 시작이다. "<계몽의 변증법> 초판은 1947년 암스테르담의 퀘리도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는데, 현재는 상당 기간 동안 절판 상태에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 재출판을 결심하게 된 것은 수많은 요청에 답하기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이 책의 적지 않은 생각들이 오늘날도 유효하며 그후에 나온 우리의 이론적 노력에 이 책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믿음 때문이다."(문학과지성사판, 9쪽) 

참고로 말하자면, 국역본 문예출판사판과 문학과지성사판은 이 서문에 국한하자면 거의 동일하다. 처음 두 문장에서만 '쾌리도'가 퀘리도'로, '현재까지'가 '현재는'으로 '절판 상태에 있었다'가 '절판 상태에 있다'로 바뀐 게 전부이다. 반면에 영역판은 동일한 문장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전면 개역판이다.

아무려나 그렇게 해서 출간된 게 물론 독어본 개정판이고, 이후에 판을 거듭해왔을 이 책은 오늘날에는 아주 번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계속해서 서문은 두 저자간의 지적 기질이 일으키는 긴장이  책의 '생동하는 요소'라고 자부하는 대목에 이어서 책의 의의를 밝혀준다: "책 속에서 말해진 모든 내용을 오늘날도 아무 수정 없이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태도는 진리를 역사적 운동에 대치되는 어떤 불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역사성을 부여하는 이론에서는 있을 수 없다. 이 책은 나치 테러의 종말이 눈에 보이는 시점에서 씌어졌다. 사실 적지 않은 부분들이 오늘날의 현실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음을 느낀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는 그 당시도 '관리되는 사회'로의 전이를 그렇게 단순화시켜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책이 씌어지던 40년대말 나치시대와 '관리사회'로의  이행이 전면화되어가는 것으로 보이는 60년대 말 사이에는  사회문화적으로 큰 변화가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이 저작에서 '관리되는 시회로의 전이' 양상에 대해 과소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현실적인 유효성을 갖는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세계사의 참혹한 양상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세계가 거대한 세력 진영으로 나누어지고 이들이 필연적인 충돌을 향해 치닫는 시대에 참혹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3세계에서의 갈등과 새로이 커가는 전체주의는 <계몽의 변증법>에 따르면 그 시대에 파시즘이 그러했던 것처럼 역사의 단순한 막간극에 불과하다."(9-10쪽, 강조는 나의 것)

좀더 이어지는 문단을 여기에서 끊은 것은 뭔가 이상하기 때문이다. "'참혹함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와 "역사의 단순한 막간극에 불과하다"가 잘 호응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내가 갖고 있는 두 영역본과 대조해보았는데, 나로선 부정문이 긍정문으로 잘못 옮겨졌다고 밖에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설마 국역본과 영역본의 역자들이 각기 다른 독어본을 대본으로 사용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두 영역본에서의 번역문을 나란히 제시하면 이렇다(한번 날리고 다시 친다. 날리고 날리고).

"In a period of political division into immence power-blocks, set objectively upon collison, the sinister trend continues. The conflicts in the Third World and the renewed growth of totalitarianism are just as little mere historical episodes as, according to the Dialectic, was Fascism in its time."(1972판)

"In a period of political division into immence biokcs driven by ab objectlve tendency to collide, horror has been prolonged. The conflicts in the third world and the renewed growth of totalitarianism are not mere historical interludes any more than, according to the Dialectic, fascism was at that time."(2002판)

여러 번 대조해 읽어보았지만 아무래도 국역본은 오역인 듯싶다. 그리고 논리상으로도 국역본의 문장은 지지될 수 없다. <계몽의 변증법>이 과연 1930-40년대의 파시즘을 '역사의 단순한 막간극'으로 간주하는 것인지. 상식적으로 그 반대 아닌가? 파시즘을 계몽의 불가피한/필연적인 귀결로 간주하는 것이 <계몽의 변증법>이 제시한 통찰이고 두 저자의 음울한 결론 아닌가? 그러니까 근대적 이성의 필연적인 귀결이 아우슈비츠라는(최근에는 아감벤 또한 이런 식의 통찰에 합류하는 것이고).

해서 최소한 "제3세계에서의 갈등과 새로이 커가는 전체주의는 <계몽의 변증법>에 따르면 그 시대에 파시즘이 그러했던 것처럼 역사의 단순한 막간극이 결코 아니다." 정도로 옮겨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이 <계몽의 변증법>이 갖는 '현재성'과 결부되는 것임은 자명하다. 

모든 번역에 필연적으로 오역이 끼여들기 마련이지만 부주의로 말미암은 듯한 이런 류의 오역은 불가피한 오역이 아니다. "진보 앞에서조차 멈추지 않는 비판적 사유"라면 미심쩍은 대목들을 한번 더 확인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첫 페이지에서부터 이런 오역과 맞부닥치게 되면 이후의 여정이 빡빡하리란 예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저 '오역의 막간극' 정도이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이어지는 문단: "이 책에서 인식된 '총체적 통합'으로의 발전은 완전히 분쇄된 것은 아니지만 잠시 중단되고 있다. 그러한 총체적 통합은 독재와 전쟁을 거쳐 자신을 실현시키고 위협을 가한다. 이와 결부된 것으로서 계몽이 실증주의, 즉 실제 '일어난 사실의 신화'로 넘어가고, 마지막에는 지성이 정신의 적대자와 같아지는 현상을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역사관은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꿈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실증주의적으로 정보를 약탈하러 다니지도 않는다.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서 그러한 역사관은 철학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두 영역본의 참조할 때 첫 문장 또한 "이 책에서 인식된 '총제적 통합'으로의 발전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완전히 분쇄된/종결된 것은 아니다."가 의미에 더 적합하지 않나 싶다. 방점이 어디에 놓이느냐의 문제이다. 더불어, '총체성'이나 '전체성'에 대한 두 사람의 뿌리깊은 불신을 이런 대목에서는 떠올려보는 게 좋겠다. '전체는 비진리이다'라는 게 아도르노의 맥심이다. 그러니까 '총체적 통합으로의 발전'이라는 양상은 두 사람에게서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한 전체주의 비판과 맞물리는 것이 실증주의 비판이다. 실증주의란 '실제 일어난 사실' 그 자체의 존립과 인식이 가능하다고 믿는 입장이다(이 경우 철학은 불필요하다). 저자들은 그것을 '신화'로 치부한다. 두 사람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그들의 역사주의적 태도는 철학의 거부나 부정이 아니라 '철학 비판'이다(이 '철학 비판'이 곧 '비판이론'인 것인가?).

서문의 말미는 헌사와 바람으로 채워져 있다. 먼저, 책을 프리드리히 폴록(1894-1970)에게 헌정한다는 내용. 이건 1947년본에서나 1969년본에서나 마찬가지이다. 호르크하이머의 절친한 친구였던 폴록은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사회연구소 창립멤버였다. 이어지는 바람. 초판에 비해서 별로 수정된 사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저자는 이 책이 '일차적인 자료' 이상의 것이 되기를 희망한다. 물론 그러한 의미를 발견하고 확장시켜나가는 것은 이제 독자의 몫이 되었다...

06.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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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6-10-29 12:00   좋아요 0 | URL
확실히 72년 영역본이 2002년 영역본보다 문장이 어려운것 같네요.2002년판 문장에서.. "NOT~~~~ any more than~~~fascism"부분은 직역하면 "제3세계에서의 갈등과 새로이 커가는 전체주의는 계몽의 변증법에 따르면 파씨즘 이상은 아니다." 정도인것 같은데 로쟈님 말씀대로...그만큼의 전체주의적 문제점들을 전후세계도 가진다는 이야기가 맞군요..상대적으로 72년 영역본의 문장은...지금봐도 너무 난삽하게 영역한것 같네요...-_-

biocs는 blocks의 오자같네요..^^

로쟈 2006-10-29 12:06   좋아요 0 | URL
오타는 수정했구요, 제가 읽는 문장은 생략문입니다. "The conflicts in the third world and the renewed growth of totalitarianism are not mere historical interludes any more than, according to the Dialectic, fascism was (not mere historical interludes) at that time." A가 B가 아닌 것은 C가 D(=B)가 아니었던 것과 같다. 독어본의 문장도 비슷한 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yoonta 2006-10-29 12:4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깐 "제3세계에서의 갈등과 새로이 커가는 전체주의는 과거의 파시즘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단순한 역사의 막간극이 아니다.".라는 말씀 ^^ 사전을 뒤적여보니..not ~any more than구문은 no more ~ than 구문과 같은 뜻으로.."~이 아닌것은 ~이 아닌것과 같다"라고 되어있네요.. 독해연습 하나하고 갑니다..^^

로쟈 2006-10-29 13:03   좋아요 0 | URL
저는 아도르노를 술술 읽는 사람들이 경탄스럽습니다!..
 

책장 정리와 아이방 페인트칠 이후로 허리 통증에 시달리고 있는데 어제는 유치원 운동회에서 달리기에다 줄다리기까지 한 탓에 거의 '가사' 상태이다. 지난주 몇 차례의 음주와 만성적인 피로가 보태지니까 거동 자체가 불편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밀린 원고와 강의준비를 걱정하며 드러누워 있던 차에 눈에 띈 책이 김현 문학선 <전체에 대한 통찰>(나남, 1990)이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초판이 아니라 1993년의 3쇄본인데, 출간당시엔 수록된 평문들의 대부분을 읽었거나 이미 갖고 있는 형편이어서 따로 손길이 가지 않았다. 몇 년 후에 책을 산 건 '기념'의 성격에다 '선집'으로서의 유용성을 고려해서이다(이후에 절판되었던 이 책은 하드카버로 재출간되었지만, 그래서 지금도 구해볼 수 있는 책이지만, 알라딘에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는 김현이지만 편자는 그가 아니다. 그의 제자인 평론가 정과리이다. 편집의 말에도 밝혀져 있지만, 그는 1990년 6월 27일 새벽에 세상을 떠났으며 책이 나온 건 그해 11월이다. 그리고 책의 서문격으로 실려 있는 건 이 선집을 위해 따로 씌어진 것이 아니라 그해 5월 그가 수상하게 된 제1회 팔봉 비평문학상의 수상 소감이다. 기억에는 이 상을 주관한 한국일보에 실리기도 한 이 소감문의 제목이 '뜨거운 상징을 찾으며'이다. 제목만큼이나 이 소감문 자체도 평균적인 체온 이상의 열기를 포함하고 있는데, 나태와 안락의 유혹을 받을 때마다 한번쯤 읽어볼 만한 글이기도 하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선 이 상을 만드시 팔봉(八峰) 선생의 유족 여러분과 이 상을 공식적인 것으로 확대시킨 한국일보 여러분, 처음 제정된 상의 심사를 맡아하신 존경하는 여러 선생님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스승-선배-동료-후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 상을 공적인 평가의 표시로서가 아니라 사적인 공감의 표시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공적인 평가는 지나칠 수 있고 모자랄 수도 있지만, 사적인 공감은 그것이 지나치건 모자라건 언제나 개인적인 즐거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평가는 과분한 것일 수 있으나 즐거움은 과분한 것이 아니고 향유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저는 이 상이 올해 처음으로 제정되었다는 점에 큰 기쁨을 느끼며 이 상을 받습니다." 

여기서 팔봉은 회월 박영희와 함께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맹주로 활동한 바 있는 김기진(1903-1985)을 말한다. 비평가와 소설가, 그리고 언론인으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팔봉의 서거 이후에 198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김팔봉문학전집>(전6권)이 출간되었고 유족의 뜻에 따라 팔봉 비평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김현은 그의 비평집 <분석과 해석>(문학과지성사, 1988)으로 그 상의 첫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참고로, 김윤식이 제2회 수상자였으며, 정과리는 <무덤 속의 마젤란>(문학과지성사, 1999)으로 2000년 이 상의 제11회 수상자가 되었다. 팔봉비평문학상은 문학사상사가 주관하는 김환태평론문학상과 함께 국내에서 비평가에게 주어지는 가장 권위있는 상이지만 해마다 수상자를 선정하다 보니 이젠 '웬만한' 비평가들을 모두 수상자 목록에 올리게 됐다. 첫 수상자를 선정하며 이 상이 가졌던 '뜨거운 상징성'은 그 사이에 다 식어버린 셈이다. 김현의 소감대로 '공적인 평가'보다는 '사적인 공감'의 차원에서 상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흠을 잡을 것도 없겠지만. 김현의 수상 소감/서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팔봉 선생을 생각할 때마다 제 머리에 우선 떠오르는 것은 길 한복판에 시체처럼 팽개쳐진 팔봉 선생을 찍은 한 장의 사진입니다. 그 사진이 어떻게 찍힌 것이라는 것은 여러분들 모두 다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나는 그 '여러분'에 속하지 않는다. 문제의 사진을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인데, 짐작에는 6·25전쟁 때 공산치하에서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봉변을 당한 팔봉을 찍은 사진이 아닌가 한다. 팔봉은 기적적으로 회생했다고 하는데, 1961년에는 '나는 살아있다'라는 그의 실제 체험기에 근거하여 <인민재판>이라는방공홍보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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