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 미들리의 <본성과 양육>(김영사, 2004)은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된 책이고 나는 나중에야 구해놓았다. 교양과학서 서가에 꽂아두기만 했었는데 도킨스 덕분에 다시 꺼내들었다. 국역본에서 챙기고 있지 않은 책의 부제는 '유전자, 경험,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Genes, Experience, and What Makes Us Human)'이다(국역본의 부제는 '인간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이다). 도킨스 왈, "도중에 놓기 힘든 책이다. 얼마나 훌륭한 작가인가. 그는 갈수록 발전하는 것 같다."


 

 

 

저명한 이 과학저널리스트/저술가의 책들은 국내에 네 종이 번역돼 있는데(<붉은 여왕>의 경우는 개역본이 나왔다) 나는 물론 모두 챙겨두었고 <이타적 유전자>는 영어본도 갖고 있다. 참고로, <HOW TO READ 다윈>(웅진지식하우스, 2007)과 <리처드 도킨스>(을유문화사, 2007)의 저자/편자인 '마크 리들리'는 혼동하기 쉽지만(내가 예전에 혼동했었다) 또 다른 '리들리'로서 도킨스의 제자이자 현재는 옥스포드대학 동물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12인의 털보들(Twelve Hairy Men)'은 <본성과 양육>(원제대로 하면 <양육을 통한 본성>)의 '머리말'이다. 지난 2001년 '게놈' 발견의 가져다 준 충격이 이후에 씌어진 것인데 전체적인 요점을 미리 짚어주면서, 동시에 '흥미로운' 과학서는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시사점도 던져준다.  

먼저 요점은 이렇다: "나는 인간의 행동이 본성과 양육 모두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어느 쪽도 편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용의 도'를 취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게놈은 실제로 엄청난 변화를 몰고왔지만 그 변화는 논쟁이 종료되었거나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누르고 승리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논쟁의 양쪽이 중간에서 만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주장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유전자가 인간 행동에 미치는 영향과, 반대로 인간 행동이 유전자에 미치는 영향이 밝혀지면 논쟁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더 이상 본성 대 양육 논쟁이 아니라 양육을 통한 본성 논쟁이 될 것이다."(17-8쪽) 

그리고 시사점. 리들리는 가상의 사진 한 장을 떠올려보자고 제안하는데, 1903년에 찍힌 이 사진은 "가령 바덴바덴이나 비아리츠 같은 휴양지에서 열린 국제회의의 기념사진이다." 이 가상의 사진이 국역본 속지에 들어 있는 것인데(그러니까 인물들은 모두 조합된 것이다) 거기엔 '1903년 4월 1일 프랑스 바이리츠에서'라고 돼 있다(만우절에 찍은 사진이다!). 비아리츠는 프랑스 남서부의 해변 휴양지이다. 즉 아래 사진 같은 곳에서 국제회의를 연 걸로 치자는 것이다.  

참석자는? "사진 속 인물들은 남자들이지만 어린 소년도 있고, 아기도 있고, 유령도 있다(*실제 나이를 고려하면 그렇다는 얘기이다). 나머지는 중년이나 노인이고, 모두 부유한 백인이다. 모두 12명인데, 나이에 걸맞게 대부분 수염을 기르고 있다. 미국인, 오스트리아인, 영국인, 독일인이 각각 2명이고, 네덜란드인, 프랑스인, 러시아인, 스위스인이 1명씩이다."(18쪽) 이 사진의 모델이 된 건 "1927년 솔베이에서 찍은 물리학자들의 유명한 단체사진(아인슈타인, 보어, 마리 퀴리, 플랑크,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디렉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이건 진짜 사진이다!).

이 물리학자들의 단체사진과 견주기 위해 리들리가 불러모은 "12명은 20세기를 지배하게 될 중요한 인간 본성 이론을 완성한 사람들이다." 이 가상의 사진을 옮겨올 수 없으므로 다만 상상만 해보시길(국역본에 들어 있는 사진은 모두가 서 있는 걸로 보아 리들리가 상상해본 사진과는 다른 버전으로 보인다. 국역본 편집자들의 작품인가?).

"우선 머리 위에 떠 있는 유령은 찰스 다윈(1809-1882)인데, 이 사진을 찍기 11년 전에 죽었기 때문에 턱수염이 가장 길다. 다윈의 생각은 원숭이의 행동에서 인간의 특성을 찾는 것으로, 가령 미소 같은 보편적 인간 행동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진 왼쪽 끝에 꼿꼿이 앉아 있는 노신사는 그의 사촌인 프랜시스 골턴(1822-1911)으로, 81세의 나이에도 매우 정정해 보인다. 양쪽 뺨에는 구레나룻이 흰쥐처럼 매달려 있는 골턴은 유전의 열렬한 옹호자다."

"그 옆에 앉아 있는 미국인 윌리엄 제임스(1842-1910)는 61세인데, 각지고 어수선한 턱수염을 기르고 있다. 본능의 옹호자인 그는 인간이 가진 충동이 다른 동물보다 적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다고 주장한다."

"골턴의 오른쪽에 서 있는 식물학자는 인간 본성과 관련된 모임에 참가한 것이 못마땅한 듯 헝클어진 턱수염에 찡그린 인상을 하고 있다. 그는 55세의 네덜란드인 위고 드브리스(1848-1935)로, 유전의 법칙을 발견했지만 30여년 전, 모라비아의 수사 그레고르 멘델이 자신보다 10년 먼저 그것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안 후로는 늘 우울한 표정이다."

"그 옆에 선 54세의 러시아인 이반 파블로프(1849-1936)는 회색 턱수염이 유난히 무성하다. 경험주의 옹호론자인 그는 마음의 열쇠가 조건 반사에 있다고 믿는다."

"그 앞엔 유일하게 말끔히 면도한 존 브로더스 왓슨(1878-1958)이 앉아 있다. 파블로프의 이론을 '행동주의'로 발전시킨 그는 단지 훈련만으로도 성격을 임의대로 바꿀 수 있다는 주장으로 유명하다."

"파블로프의 오른쪽에는 통통한 체격에 안경을 쓰고 콧수염을 기른 독일인 에밀 크레펠린(1856-1926)과, 깔끔하게 턱수염을 기른 비엔나 출신의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가 서 있다."

"47세의 동갑인 두 사람은 후대의 정신병 의사들에게 '생물학적 설명에서 벗어나 개인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는 각자의 이론을 가르치는 중이다."

"그 옆에는 사회학의 개척자, 에밀 뒤르켐(1858-1917)이 있다. 45세의 나이에 덥수룩한 턱수염을 기른 그는 사회적 실체가 그 부분들의 총합 이상이라고 열심히 주장한다."

"이 점에 있어서 정신적 파트너에 해당하는 사람이 그의 옆에 서 있다. 45세의 프란츠 보아스(1858-1942)는 축 늘어진 콧수염과 결투의 상처가 보이는 위세 당당한 얼굴을 똑바로 들고, 인간 본성이 문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인간 본성을 만든다고 목소리 높여 주장한다."

"맨앞의 어린소년은 스위스에서 본 장 피아제(1896-1980)로, 그의 모방과 학습이론은 세기 중반에 결실을 맺을 것이다."

"유모차 속에 있는 아기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콘라트 로렌츠(1903-1989)다. 1930년대가 되면 그는 하얀 염소 수염을 자랑하면서 본능에 대한 연구를 부활시키고 각인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설명할 것이다."

세기의 학자들을 이렇게 다 불러 모아놓고 저자 리들리가 제기하는 주장: "나는 이 12명에 대해서 아주 놀라운 주장을 제기하고자 한다. 즉 그들은 모두 옳았다. 항상 옳은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며, 도덕적으로 옳다는 얘기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진실의 씨앗을 간직한 독창적인 개념으로 인간 본성의 과학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옳았다. 그들 모두 거대한 벽에 벽돌을 놓았던 것이다."(21쪽)

요컨대 "인간 본성은 다윈의 보편성, 골턴의 유전, 제임스의 본능, 드브리스의 유전자, 파블로프의 반사, 왓슨의 연상, 크레펠린의 역사(개인사), 프로이트의 형성적 경험, 보아스의 문화, 뒤르켐의 노동 분업, 피아제의 발달, 로렌츠의 각인이 모두 결합된 결과물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마음속에 합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중 하나라도 없으면 인간 본성에 대한 어떤 설명도 부실해질 것이다."  

여하튼 그만하면 화려한 캐스팅이다. 우리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거울 여행'을 매트 리들리와 함께 시작해볼까...

07. 08. 05.

P.S. '12인의 털보들' 가운데 '에밀 크레펠린(Emil Kraepelin)'은 개인적으로 처음 알게 된 이름이다. 그밖에 골턴과 드 브리스, 그리고 왓슨과 보아스도 국내에는 소개된 바가 없지 않나 싶다(왓슨의 경우엔 그의 제자인 B. F. 스키너가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다윈과 프로이트도 제외하고 나머지 5명의 책들만 꼽아보도록 한다(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책의 한계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 <심리학의 원리> 외

 

 

 

 

이반 파블로프

 

 

 

 

에밀 뒤르켐,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 외


 

 

 

장 피아제, <교육론>

 

 

 

 

 콘라트 로렌츠, <솔로몬의 반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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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2007-08-05 23:58   좋아요 0 | URL
와.. 꼬장꼬장한 분들 많이 모아놓았네요. 그런데 책 재밌겠어요.^^

로쟈 2007-08-06 00:17   좋아요 0 | URL
인간 본성론에 관심을 갖고 계시다면 핑커의 <빈 서판>과 같이 읽어볼 수 있는 책이죠...

수유 2007-08-06 14:58   좋아요 0 | URL
<본성과 양육> 아주 흥미로운 책이네요..구입해서 읽어보렵니다.
삐아제 양반 얼굴을 수십년만에 다시 보는 감회..
12명의 털보들.. 그들의 수염은 그들의 벽돌 만큼이나 멋지네요^^;;

로쟈 2007-08-06 16:50   좋아요 0 | URL
출간된 지는 꽤 된 책이지요.^^;

심술 2007-08-06 19:34   좋아요 0 | URL
프랜시스 골턴이 저렇게 생겼구나. 주식투자하는 데 도움 된다고 해서 피터 번스틴의 리스크라는 책을 읽다 중간에 포기했는데 거기에도 골턴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수유님이 말씀하신 벽돌이란 뭔지요? brick을 말씀하신 건 아닌 듯 한데...

로쟈 2007-08-06 20:24   좋아요 0 | URL
본문에 "그들 모두 거대한 벽에 벽돌을 놓았던 것이다"란 문장이 있습니다.

심술 2007-08-07 18:47   좋아요 0 | URL
아, 다시 읽어 보니 보입니다.
 

어제 구내서점에 들렀다가 집어든 몇 권의 책들 가운데 하나는 마루야마 마사오(1914-96)의 <일본의 사상>(한길사, 2003). 본래 1998년에 나온 책의 초판 3쇄였다. 요즘은 잘 눈에 띄지 않았었는데 어디선가 재고도서가 들어온 듯싶었다. 짐작에 마루야마의 다른 책들과 함께 박스에 보관돼 있는 책이지만 확인해볼 도리가 없는 데다가 당장 참고할 부분도 있어서 손에 들었다. 그리고는 아예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문학동네, 2007)도 주문해버렸다(그의 사상을 개관하고 있는 <오스까 히사오와 마루야마 마사오>(삼인, 2005)는 도서관에서 대출해야겠다).

 

 

 

 

역자는 두 권 모두 김석근 교수인데 사실 한국에서의 '마루야마 마사오' 번역/소개는 거의 전적으로 그에게 빚지고 있다. 그 이전에 <일본의 현대사상>(종로서적, 1981) 등이 소개된 바 있지만 마루야마의 주요 저작들이 단기간에 한국어판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역자의 노고 덕분인 것이다. 물론 내가 마루야마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도올 김용옥의 책들에서였지만.

그렇게 손에 든 책에서 '옮긴이의 말'과 마침 이 번역이 마무리될 즈음 세상을 떠난 마루야마 마사오의 부음에 부쳐진 '마루야마 마사오의 삶과 사상을 생각함'을 읽었다. 역자로서의 소회를 밝히고 있는 '옮긴이의 말'에서 몇 가지 인상적인 대목이 있어서 따라가본다. 어느새 10년도 더 전의 사정이라는 점이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일본의 사상'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반성하도록 해준다.

역자가 마루먀아를 처음 접한 건 대학원 석사과정 3학기 때라고 하는데, 본래 정치외교학 전공인 저자가 '한국정치사상사'를 공부하기 위한 방책으로 철학과를 기웃거리다가 맞닥뜨리게 된 에피소드. 마침 대학원 철학과에 '일본철학사'라는 과목이 개설되었었는데, '대학원의 높은 자리'에 있던 분의 이견으로("일본에 무슨 철학이 있냐?") 과목명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 해서 '일본사상사'로 바꾸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서("일본에는 사상도 없다!") 결국엔 '일본문화사'로 낙착되었다는 것(철학과에서 웬 문화사?).

 

 

 

 

비슷한 사례가 될 만한 또다른 일화는 "주체적인 학문의 길을 주장"한 '어떤 선생님'과 관련된 것인데, 저자와 저서명을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짐작에 조동일 교수의 <우리 학문의 길>(지식산업사, 1993)의 내용이다. 그 책에서 저자는 "'일본에 철학사가 있는가' 하는 재미난 화두를 하나 던지고 있습니다. 그 분의 논지를 여기로 다 끌어올 수는 없겠습니다만, 요컨대 일본에는 '사상(사)'은 있지만 (보편성을 추구하는) '철학(사)'은 없다는 식으로 이해하시면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27쪽) 요컨대, 이러한 '부인'의 제스처가 알게 모르게 우리의 무의식을 잠식하고 있다는 게 필자의 문제의식이다.

물론 이후에 '일본의 철학'을 다룬 책들이 여러 권 버젓이 나오게 됐으므로 그러한 문제제기가 여전히 유효한 듯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역자가 체험한 한 시절의 풍경은 그러하다. 이것이 다소 넌센스인 것은 "애초에 '哲學'이란 단어 자체가 일본인 니시 아마네가 영어의 Philosophy를 번역하여 한자로 새로이 만들어낸 조어(造語)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동아시아문화권에서는 '철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재했던 것이다."(28쪽) 말하자면 '철학'이란 말 자체는 근대 일본의 발명이고 고안이다. 하지만 "니들에게 철학은 없다"?

여기서 필자가 인용하고 있는 건 <일본정치사상사연구>(통나무, 1995)에 붙인 김용옥의 해제의 한 대목인데, 예전에 읽은 기억이 나지만 여전히 흥미롭다.

"그것은 매우 거칠게 말해서 '한국철학'과 '일본사상'의 성격을 유비적으로 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사상', '일본철학'이라는 말이 부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통학문을 연구하는 시각이나 방법의 성격상 한국에서는 '한국철학'이라는 말을 즐겨쓰고, 일본에서는 '일본사상'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한국에서는 '한국사상'이라고 하면, 그것은 철학에 못 미치는 좀 엉성한 체계, 그리고 철학의 소양이 부족한 2류의 학인들이 자신없이 내거는 명칭으로밖에는 인식되지 않는다. 하나 일본에서는 '일본철학'이라고 하면, 역시 좀 학문적 가치가 떨어지는 국수주의자들의 사변체계, 군국주의시대의 '코쿠타이'(國體)를 연상시키는 '미기'(右翼) 사상가들의 억지주장 냄새가 난다."

해서 요컨대, "한국에서의 사상은 좀 처지는 놈들의 엉성한 논변이요, 일본에서의 '철학'은 항상 우익의 냄새를 피울 우려가 도사리고 있다."(김용옥의 해제 28-29쪽) 그러니까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국에서 '사상'은 좀 모자란 것이고 일본에서 '철학'은 좀 덜 떨어진 것이다.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실제로 '한국철학'이란 표현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사상은 '실학사상'이나 '계몽사상' 등의 표현으로나 쓰인다). 혹은 '철학사상'. '일본의 사상'이란 표현이 낯설게 여겨지지 않는 데 비해서 '한국의 사상'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렇게 서로 다른 관행 탓인 듯싶다(거의 개와 고양이 수준 아닌가? 똑같은 꼬리 흔들기가 각각 반가움과 경계심의 표시라는).

잠시 옆길로 갔는데, 다시 필자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저는 그것을 '철학'이라 부르느냐 아니면 '사상'이라 부르느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또 다른 제3의 이름으로 부른다고 해서 뭐가 크게 달라지겠습니까. 그리고 철학이나 사상이 없다든가, 사상은 있으나 철학은 없다는 식의 논지와 일본은 '있다' '없다'라는 식의 주장 사이에는, 그 성격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왠지 사물을 보는 시각 내지 생각하는 방식과 패턴 같은 것에서는 너무나도 닮아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저로서는 쉽게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29-30쪽)

"졸렌(Solen)을 말하기 전에 먼저 자인(Sein)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필자의 주장에 기대면, 그가 비판하는 우리의 관행적 시각 내지 생각하는 방식은 일본이란 '존재'를 정확하게 알기 전에 일본은 이렇다, 저렇다고 당위적으로/선험적으로 규정하는 태도를 가리키겠다. 그걸 경계하자는 얘기이고, 그때 필요한 건 일단은 읽는 것이다. 물론 일본사상인지 철학인지가 더 많이 소개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고(마루야마가 평생 사투했다는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오규 소라이(1666-1728)나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의 책을 한국어로 얼마나 읽을 수 있는가?). 

한편, 책의 후기를 대신하여 쓰인 '마루야마 마사오의 삶과 사상을 생각함'에는 지난 1996년 마루야마의 타계 이후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추모 열기를 소개하는 기사를 인용하고 있다. 한 유력 일간지의 도쿄 특파원이 작성했다는 기사는 가관이다.

"세계적인 석학으로 평가받으면서 이미 70년대 그의 저작들이 영문으로 번역돼나오기 시작했지만 한국에서의 소개는 약간 늦은 편이어서 1981년 <일본의 현대사상>을 시작으로 <현대일본정치론>(1988), <중국근대혁명사상>(1989), <섹스원죄 어디까지인가>(1995), <섹스법정>(1996) 등이 출판됐을 뿐이다..." 

필자의 지적대로 앞의 두 권은 마루야마 마사오의 책이지만 <중국근대혁명사상>(예전사, 1989)은 마루야마 마쓰유키의 저작이며, 전혀 난데 없이 들어가 있는 <섹스> 어쩌구 하는 책들은 마루야마 마사야의 책으로 보인다. 같은 마루야마 집안 사람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신문기사가 '장난'이 아닌 이상 이런 무식하고도 무책임한 내용이 아무런 여과없이 일간지에 게재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이런 게 우리의 평균적인 현실이라면 희비극적인 일이다). '일본은 없다'고 말하기 이전에 한국에는 입만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볼 문제이다(과연 우리에겐 '한국의 마루야마'가 있는가?).

 

 

 

 

이러한 한일 철학/사상에 관한 몰이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관련서들이 더 많이 소개되고 읽힐 필요가 있겠다(찾아보니 금장태 교수의 <도와 덕>(이끌리오, 2004)이 다산과 오규 소라이를 비교한 연구서이다). 최근에 출간된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김영사, 2007)는 그래서 눈에 띄는 책인데, 한겨레의 서평(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19266.html)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에서는 무인들이 상급 무사인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따라야 하는 도라 할 수 있는 ‘무사도’가 있다. 충과 효의 덕목에, 스스로에게 엄해야 하고 아랫사람에게는 인자해야 한다. 사적 욕심을 버려야 하고 부귀보다 명예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이 조항들 가운데 ‘패배한 적에게 연민을 베풀어야 한다’는 내용만 제외하면 ‘선비의 도’라 불러도 별 무리가 없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지은이는 이런 동질성의 계기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 성리학의 일본 전파를 꼽았다. 임진왜란 이전만 해도 일본 무사들은 주군에 대한 윤리적 충성의식이 높지 않았다. 주군과 가신들의 주종관계가 의리나 신의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계약관계였기 때문이다. 무사에게는 주군을 바꿔 다른 주군을 모실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유학자 강항과의 교류를 통해 일본에 성리학의 계통이 학립됐다. 이를 계기로 유교적 윤리인 인(仁)·충(忠)·효(孝)가 무사들에게 요구되는 규범이 되었다는 것이다. 강항에게 성리학을 배운 일본 근대 성리학의 시조 후지와라 세이카는 존왕론 주창으로 나아갔다. 천황의 역사를 성리학적으로 해석한 ‘미토학’ 태동의 지반도 성리학이었다. 미토학은 에도 막부 말기에 새로운 ‘천황중심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이념적 지주가 되었다고 지은이는 본다. 무사들이 ‘천황’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막부를 타도하겠다고 나선 메이지 유신은 “성리학의 명분론을 빌린 혁명”이었다. 이전까지 무사정권 교체는 명분론과는 무관한 패권다툼의 결과였다. 

기사에서 언급된 사무라이들의 반란 혹은 '혁명'은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2003)의 소재이기도 한데, 이 영화에서 그려진 사무라이상에 대한 유익한 비평은 아래 기사에서 읽을 수 있다.   

영화에서 주장하는 ‘사무라이 반란’은 일본에서는 ‘세이난(西南) 전쟁’으로 알려진 반란이고, 가쓰모토의 모델은 그 반란의 주모자였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입니다. 여러분 사이고 다카모리가 누구인지를 아십니까. 그는 메이지유신을 성사시킨 사쓰마, 조슈, 도사 3개 한(藩)의 하급 사무라이 중 사쓰마를 대표하는 이였습니다. 메이지유신은 폐쇄적 쇄국을 진취적 개국으로, 쇼군(將軍)중심의 봉건적 막부 정치체제를 천황 중심의 한 서양적 의회민주제로 개혁을 이룬 것을 말합니다. 그런 메이지유신의 핵심인물이 서양 문물의 홍수에 맞서서 일본의 전통을 지키려고 목숨을 받쳤다? 왠지 어색하지 않습니까.

사이고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의 핵심에는 ‘조선침략’이 놓여있습니다. 그는 일본이 서양열강과 맞서기 위해서는 문물이 뒤떨어진 한국을 공략해 식민지화해야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다 같은 사쓰마 출신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조슈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등의 반대에 부딪히자 사쓰마로 낙향합니다. 그러나 그를 추종하는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지도자로 나섰다가 패배해 자결한 인물입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인격적 감화능력이 탁월해 당시 뿐 아니라 지금도 그를 존경하는 일본인들이 많습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는 문구를 좋아했고, 일체의 사욕을 버리고 공리를 쫓았던 면모도 분명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이라는 혁명의 선두에 설 수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는 시대착오적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메이지유신에 나섰던 이유는 ‘일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쓰마인’을 위해서였고 ‘사쓰마’가 일본 최고의 번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때문에 일생을 마치는 순간에는 ‘사쓰마파벌’의 영수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위에 인용한 글처럼 사쓰마는 오늘날 일본 사무라이의 원형을 세계에 수출한 곳입니다. 사쓰마의 다이묘가문인 시마즈 가문은 도쿠가와 막부성립기 때 줄을 잘못 서서 반 도쿠가와 편에 섰습니다. 그렇지만 번 전체가 똘똘 뭉친 단결력과 외교수완의 결과로 번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또 일도필살의 전투력으로 인해 도쿠가와도 건드리기 싫어했던 고슴도치 같은 존재였습니다. 사쓰마는 도쿠가와 막부시절에도 다른 번, 심지어 막부의 중앙관료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을 만큼 폐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함흥차사’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사쓰마로 떠난 파발’이라는 말까지 등장했을 정도입니다.

오늘날 서양인의 뇌리에 박힌 사무라이상도 이 사쓰마 산입니다. 사쓰마의 사무라이들은 1862년 에도(지금의 도쿄)를 방문중이던 주군의 행렬에 무례하게 끼어든 영국인 사업가 일행을 일본도로 참살했습니다. 격분한 영국이 사과를 요구하자 영국과 단독으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것이 ‘사영전쟁’입니다. 놀라운 것은 비록 일본의 한개 번으로 대영제국함대의 함포사격에 맞선 사쓰마는 비록 전쟁에 패했지만 영국군에 유례없는 타격을 가했다는 점입니다. 영국군은 63명의 사상자가 난 반면 사쓰마측 피해는 1명 사망, 7명 부상이었다고 합니다. 영국신문들은 놀라서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고, 유럽인들에게 ‘일본 사무라이는 세다. 고로 잘못 건드리는 것은 피하는 게 좋다’라는 인상을 팍 심어줬던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사무라이’운운하며 사쓰마를 영화의 무대로 삼은 것은 핵심에 다가섰다고 평할만합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군국주의로 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또한 이 사쓰마의 ‘주군이 죽으라 하면 죽는다’는 식의 돌쇠형 충성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일본 군부를 장악한 것은 대부분 조슈와 사쓰마 출신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메이지유신을 민주화와 개방화 혁명이 아니라 천황에 대해 충성을 다 받치는 배타적 군국주의 혁명으로 오도했습니다. 사이고야말로 이런 일본 골수우익의 세계관 형성에 결정적 기여를 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동아일보 권재현 기자)

따라서 '성리학의 명분론을 빌린 혁명'이라고는 하지만 메이지 유신의 이면도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 성리학과 무사도, 혹은 '선비 철학'과 '사무라이 사상' 간의 차이에 조응하는 것은 아닐까? 한겨레의 리뷰를 마저 읽어본다.  

하지만 두 세계의 차이도 명확하다. 가장 두드런 예가 교육이다. 조선 선비들은 성리학의 이상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외부에서 이물질만 들어오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포교 개념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사들은 늘 적을 상정해 만반의 대비를 했다. 조선선비 교육의 근본이 ‘학예일치’였다면 사무라이에게 학문은 무예의 보조적 기능에 불과했다. 선비가 글을 읽고 시를 읊을 때 사무라이는 학습 시간의 70%를 무예로 채웠다. 이런 전통은 지금까지도 두 나라의 교육방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일본에서는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초등학교엔 반드시 수영장을 설치해야 하고 수영 교습도 필수다. 중·고교에선 스포츠 동아리가 매우 활발하다. 2006년 여름 일본 전국고교야구대회에 출전한 고등학교 수는 전체 5400개교 가운데 76%에 이르는 4112개교다. 한국의 3%와 비교할 때 엄청난 격차다.

지은이는 맺음말에서 일본이 성리학에서 받아들인 가장 큰 부분은 ‘명분 쌓기’라고 규정했다. 일본은 이런 명분을 군사 행동의 정당화에 활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 성리학의 중심인 심성론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게 지은이의 생각이다. “일본과 일본인이 인간 심성의 중요성을 깨달을 때 한국인들은 아시아와 세계평화에 대한 믿음을 비로소 가지게 될 것이다.”(강성만 기자)

 

 

 

   

한데, 우리에게 그런 심성론이 제대로 전수/학습되고 있는가, 란 의문을 문득 갖게 된다. 나부터도 퇴계의 <성학십도>나 율곡의 <성학집요>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조선 유학의 전통에 대해서도 교과서적 지식 외에 알고 있지 못하다. 이러면 공부가 '명분 쌓기'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사실 이런 깨달음을 전해주는 것은 일본이란 타자이다. 한국 철학의 자기인식이 일본 사상이란 타자를 경유해야 하는 이유이다. '퇴폐천국' 일본이란 이미지만으로는 부족하다...  

07. 07. 04.

P.S. 귀가길에 한 서점에 들러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김영사, 2007)을 손에 들었는데, 이 책이 맞느냐고 점원에게 물어볼 뻔했다. 알라딘에는 분량이 472쪽이라고 돼 있어서 9,900원이라는 정가가 꽤 저렴하다고 생각했었는데(그래서 부담없이 구입하려던 것이었고) 웬걸 고작 220쪽 짜리 책이었다. 입력자의 착오로 보이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 싶은 '뻥튀기'이다. 교정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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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04 12:49   좋아요 0 | URL
"마침 대학원 철학과에 '일본철학사'라는 과목이 개설되었었는데, '대학원의 높은 자리'에 있던 분의 이견으로("일본에 무슨 철학이 있냐?") 과목명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 해서 '일본사상사'로 바꾸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서("일본에는 사상도 없다!") 결국엔 '일본문화사'로 낙착되었다는 것(철학과에서 웬 문화사?)."

하핫. 재밌습니다. 사실 철학계에서도 그렇게 말하죠. 일본철학은 없다라고. 일본을 무시하거나 폄하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철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반면 한국의 경우는 세계적인 철학학회에서도 이미 '한국철학'이라고 지칭하고 있다고 하고요. 대부분은 중국으로부터 영향 받은 것이지만, 나름 독창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뭉뚱그려 중국철학이라 하지 않고, 한국철학을 그와 별개로 나누는 듯 합니다. 머머철학 앞에 나라이름을 붙일 수 있는 국가는 몇 안되지요. 이 점에서 자부심을 느껴도 될 듯 합니다.

최근 위에 올려놓으신 책들과 같이 한국철학에 대한 괜찮은 대중서들이 꽤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몇 권 구입해 살펴봤는데 재밌더군요. :)

로쟈 2007-07-04 13:09   좋아요 0 | URL
한국에서 하는 자화자찬이겠지요. 브리태니커백과사전에 'Japanese Philosophy' 항목이 버젓이 등재돼 있다고 합니다. 한데, 그렇게 대단한 걸(한국철학)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마루야마'도 변변찮은 한국철학사도 못 갖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마늘빵 2007-07-04 15:24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그렇담 있는걸 애써 무시하거나 낮게 평가하는건가요. 음. 사실 일본철학이라고 할 만한 개론서나 어떤 것을 접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주변에서 듣고, 또 책에서 보고 저는 그리 알고 있을 뿐이지요. 정말 일본철학이라는게 체계가 잡혀있다면 한번 공부해보고 싶습니다. 아! 저 위에 일본근대철학사 라는 책이 눈에 띄는군요.
 
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장마철이지만 서재의 스크린을 여름 휴가 모드로 미리 바꾸고(휴가를 갈 일이 없을 듯해서 기분만 내본다) 서핑하는 사진도 갖다 붙여놓는다. 보기에 제법 시원하군... 

6월 한달을 거의 파도타기로 보낸 듯하다. 서핑 수준의 그런 폼나는 파도타기가 아니라 바닥에 발들 딛고 있다가 파도가 밀려오면 살짝 발을 떼어 균형을 잡는 '파도타기' 말이다. 재미를 제외한다면 그런 파도타기의 목적은 순전히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보전하는 것이다(소위 물먹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해수욕장에 나가 그런 파도타기를 해본 건 10년도 더 전의 일 같지만 여하튼 그 '실감'을 오랜만에 느끼던 와중에 한달이 훌쩍 다 지나가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밀린 잠을 보충하고 일어나니 밀린 책들이 수십 권이다. 이런 경우에 순서를 따지는 건 무의미해서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을 몇 페이지 읽다가 벨르이의 소설 <페테르부르크>를 몇 페이지 들춰보고(읽어야 하는 러시아어본이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다시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문학동네, 2000)에도 손길이 갔다. 아직 국역본이 완간되지 않은 '이 빠진' 번역서와 함께 영역본을 빼놓고(내겐 러시아어본도 있다) 새롭게 시작하는 뜻으로 오늘은 서론을 읽어두기로 했다. 예전에 얼마간 읽었지만 따로 정리는 해두지 않았다는 게 이유이다(그땐 구 영역본을 참조했는데, 지난 2004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파도타기 말고 진짜 공부를 위한 자세도 가다듬을 겸. 

  

책에서 먼저 읽게 되는 건 가다머가 제사로 쓴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의 시구이다. 제목이 따로 붙어 있지 않은 한 후기시의 전반부라는데, 우리말 번역은 이렇다.

그대가 스스로 던진 공을 받아 잡는 동안은
모든 것이 그대의 솜씨요, 그대 노력의 대가이지만;
영원한 공연자(共演者)가 그대에게
그대의 중심으로 정확하고 민활한 스윙 동작으로
신이 만든 거대한 다리의
저 곡선들 중의 한 곡선을 따라 던진 공을
그대가 불시에 잡게 되는 경우
그때 공을 잡을 수 있음은 그대가 아닌
세상의 능력이라오.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에는 이 시에 대한 해설이 따로 붙어 있지 않지만 국역본에는 간략한 해제가 달려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시는 "만년의 스위스 시절에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돌보아준 나니 분덜리-폴카르트 부인에게 헌정된 시이며, 전집 제2권에 실려 있다." 이어지는 해설. 

"'중심'이란 말이 이 시의 요체이다. '중심'은 개인적인 중심과 영원성 혹은 신의 '중심'으로 구별되고 있다. 여기서 '중심'은 공간적인 중심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힘으로서 타자로부터 다가오는 중심을 말한다. '영원한 공연자'가 '그대의 중심'을 향해 공을 던질 때, 다시 말해 우리가 협소한 중심에서 벗어나 일반적인 중심을 상대할 때, 비로소 '공을 잡을 수 있음'은 그대만의 것이 아닌 '세상의 능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다머는 이 시에서 공을 잡는 행위를 해석 행위로 풀이하고 있는 듯하다."

중심의 형이상학이 이 시의 요체인가는 좀더 생각해볼 문제이지만 눈대중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은 이 시에서 두 가지 공잡기가 대비되고 있다는 것. 그 하나는 자기 스스로가 던진 공을 받는 것이다. 즉 자가-포구(self-catching)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그러니까 부메랑처럼 자기가 던지고 자기가 받는 것인데, 그건 (당연한 말이지만) 순전히 "그대의 솜씨요, 그대 노력의 대가"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자가-포구는 혼자서 하는 파도타기에 가깝겠다.

다른 하나는 좀 다른 종류의 공잡기이다. 그건 공을 던진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영원한 공연자'이기 때문이다. 영역본에서는 '영원한 공연자'를 'eternal partner'라고 옮겼다(러시아어본에서는 이를 여성명사로 받았다). '영원한 파트너'라고 해도 무방할 텐데, 문제는 이 공연자/파트너가 '그대의 중심'을 향하여 정확하고 민활한 스윙 동작으로 던진 공,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공을 받는/잡는 것이다. 그럴 경우 "why catching then becomes a power -/ not yours, a world's." 즉, 그때 공을 잡는 것은 그대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세상의 능력이라는 것. 왜 아니겠는가? 

"가다머는 이 시에서 공을 잡는 행위를 해석 행위로 풀이하고 있는 듯하다"라고 해설에도 적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 '해석행위' 혹은 그것을 중심적으로 다루는 해석학이란 게 텍스트의 이해와 해석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는 점. 가다머가 서론에서 주장하고 있다시피 "텍스트의 이해와 해석은 학문의 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명백히 인간의 세계 경험 전체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 경우 '인간의 세계 경험 전체'는 '공잡기'의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내가 써놓은 걸 읽는 게 아니라 누군가(혹은 영원한 파트너가!) 써놓은 걸 읽고 이해하는 일이 곧 우리 '세계 경험'의 요체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와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고 구성하고 축적하는 행위로서의 공부는 공을 제대로 잘 잡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다. 제대로 된 프로텍터와 미트도 준비해서 다양한 투구폼과 구속과 구질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영원한 파트너께서 던지는 공은 사인도 없이 날아올 때가 많기에 밥 먹으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미트를 벗어서는 안될 터이다...  

서문을 읽겠다고 해놓고 잠시 딴전을 피웠다. 다시 가다머의 묵직한 공을 받기 위해 책상머리로 가야겠다(그는 영원의 나라에서도 현란하게 공을 뿌려대는군!). 이건 혼자서 파도타는 것과는, 자리만 보전하는 것과는 양상이 좀 다르다. 이 여름에도 중무장을 하고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건 내가 공을 잡게 되더라도 그건 세상의 능력 덕분이고, 밥상을 차려준 사람들의 노고 덕분이라는 것. 결코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그런 생각을 하는 놈들은 공부가 부족한 것인바 곧장 'X카바'로 들어가야 한다). 이크, 공이 벌써 날아오고 있다!..

07.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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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이번에 새로 출간된 <율리시스>(생각의나무, 2007)을 배송받았다. 출간 소식은 예전에 페이퍼로 다룬 바 있는데 그게 계기가 되어 햇빛비둘기님이 선물로 보내주신 것. 수십 장의 화보를 포함하여 1,320여쪽에 이르는 이 방대한 번역서는 단순히 두툼한 책이 아니라 아주 '무거운' 책이어서 어제 집으로 들고 오자마자 저울에 무게를 달아보았을 정도였다. 디지털저울이 아니어서 정확하진 않지만 2킬로그램, 적어도 세 근 정도는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21그램쯤 나간다는 우리들 '영혼'의 무게를 고려하면 책에는 얼추 100여명의 영혼이 숨쉬고 있는 걸로 계산할 수도 있겠다).

 

 

 

 

이 번역본과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책장(원래는 신발장)에서 옥스포드판 <율리시스>(1998) 원서를을 꺼내놓았다. 이 페이퍼백 원서 또한 70쪽의 서론(작품해설)까지 포함하면 1,05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페이지당 행수는 원서가 37행이고, 국역본이 30행이다. 거기에 활자 크기 또한 국역본이 훨씬 크다. 그럼에도 분량에서 대차가 나지 않는 것은(무게에선 물론 대차가 난다!) 양장본 국역본의 판형이 원서의 두 배이기 때문이다(요즘 대세를 이루고 있는 듯한 21-2행짜리 허허실실 책들을 나는 혐오하는 편이다. 노안의 독자나 초등학생들을 위한 배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우화적' 조판은 너무 낭비적이다. 깨알 같은 활자들이 촘촘하게 박힌 책들이 나는 그립다. 이건 자세의 문제이다. 어지간한 영어 원서들은 페이지당 대개 40행 가량이다).

아무려나 만든 품새에 있어서나, 그리고 역자가 40년간 이 작품 번역에 쏟아부은 노고에 있어서나 기념비적인 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몇 페이지 읽은 소감과 함께 역자인 김종건 교수의 서문(옮긴이의 글)을 조금 음미해보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기념비성에 대한 나의 인사치레이다.

'언어적 주술의 아수라장에 대한 반 세기의 도전'이란 제목이 붙은 '옮긴이의 글'에서 역자가 먼저 고백하고 있는 것은 번역의 경과, 곧 번역사이다. "<율리시스>의 첫 한국어 번역본(정음사 간)은 1968년에 출간되었다. 이는 여러 해에 걸친 번역 작업의 첫 결실이었지만, 결코 완전한 것이 못되었다. 두번째 번역본(범우사 간)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88년판으로, 가블러 신판 원서에 기초하여 약 5천여 개의 원문 오류를 교정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제 또다른 2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세번째로 신판본(3정판)을 출간한다."

하지만, 조이스의 작품이 갖는 '끊임없는 언어유희'를 우리말로 옮기는 것은 지난한 일이어서 "이번 번역 또한 완미(完美)와는 아스라이 먼 존재이며, 앞으로도 계속해야 할 '진행중 작업'임이 틀리없다."는 게 역자의 토로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 번역상의 난점에 관한 것이다.  

"조이스는 '무엇을' 묘사하느냐에 앞서 '어떻게' 묘사하느냐를 중요시한 작가다. 그는 이러한 미학적 장치를 강조하고 몸소 실험하면서, 현대의 작가는 바다의 항해사처럼 '배의 침몰'과 같은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고 했다.(...) 조이스의 다양한 상상력을 건드리려면 다양한 형식을, 그리하여 형식 뒤에 숨겨진 인간 심리와 새로운 조망, 비전과 현현을 탐구해내야 한다. 이는 이번 개역본의 기본정신이기도 하다."

 

 

 

 

 

 

 

 

 

 

 

 

 

동아일보(07. 03. 26) '율리시스’ 세번째 번역판 내놓은 김종건 교수

“사람들은 ‘율리시스’가 난해하고 비극적이라는 선입관을 갖지 실상은 아름다운 ‘사랑의 찬가’이자 배꼽 잡도록 재밌는 코미디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제임스 조이스(1882∼1941)의 ‘율리시스’ 세 번째 번역판(생각의나무)을 내놓은 김종건(73) 전 고려대 교수를 만난 뒤 그 어렵다는 조이스의 작품이 꿀단지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비록 그 자신은 서문에서 “지난 근 반세기를 조이스 연구와 그 번역, 특히 ‘율리시스’의 번역을 위해, 마음 밑바닥이 무거운 쇠사슬로 묶인 듯 허우적거리며 살아왔다”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같은 자리를 맴도는 ‘핀에 꽂힌 벌레’에 비유했지만.  

그와 ‘율리시스’의 만남은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국내 최초로 ‘율리시스’ 원어 강독을 시작한 조지 레이너 교수를 만나면서였다. “조이스는 ‘율리시스 속에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와 퀴즈를 감춰 뒀기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죠. 당시 난 학자로서 평생을 바칠 작품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딱’이었어요.”  

‘겁 없는 마음’으로 도전한 그는 1968년 국내 최초로 ‘율리시스’(정음사)를 번역했다. 그 공로로 이듬해 한국번역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제대로 번역했는가 하는 회의가 끊이지 않았다. 1984년 독일 뮌헨대 교수인 헤다 가블러가 조이스 친필 원고를 바탕으로 5000여 개의 오류를 바로잡아 가블러판 ‘율리시스’를 출간했다. 김 전 교수는 이를 토대로 해 1988년 제임스 조이스 전집(범우사)의 하나로 재판을 냈다.  

다시 근 20년이 흘러 4000여 개의 주석과 48쪽의 희귀 화보, 외설 시비 때문에 금서령이 내려졌던 이 책의 미국 내 출간을 허용한 존 M 울지 판사의 판결문 등까지 합쳐 1323쪽에 이르는 세 번째 번역판이 출간된 것이다. “1988년 전집에는 사실 한 권이 빠져 있었어요. 조이스가 17년에 걸쳐 집필한 ‘피네간의 경야(經夜)’였죠. 무려 65개국의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번역 불가’라는 낙인이 찍힌 작품이었는데 2002년 세계에서 네 번째로 번역에 성공했어요. 그때 조이스의 언어유희에 새롭게 눈을 뜬 부분이 있어서 ‘율리시스’의 번역에 다시 도전했습니다.”  

‘율리시스’는 고대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전쟁을 마친 뒤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의 10년에 걸친 모험을 그린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의 내용을 토대로 현대인의 내면적 방황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율리시스란 오디세이의 라틴어 이름이다.  

“조이스는 엄청난 독서광이라 말년엔 밀턴처럼 눈이 멀 정도였습니다. 그런 그가 가장 좋아한 문학작품이 오디세이였어요. 그는 오디세우스를 3가지 면에서 가장 이상적 인물로 봤거든요. 인격적으로 가장 원만한 인간이자 집에선 가장 성실한 가장, 밖에선 가장 훌륭한 군인이라는 점에서였죠.”  

‘율리시스’의 독창성 중 하나는 10년에 걸친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단 하루로 압축해 냈다는 점이다. 조이스는 아일랜드 더블린을 무대로 1904년 6월 16일 단 하루 동안 벌어진 평범한 광고회사 외판원이자 한 집안의 가장인 리오드 블룸의 일상 속 의식의 방황을 장편소설로 엮어 냈다.  

“오늘날 ‘블룸스데이’라고 축하받는 이날에는 아내 노라에 대한 조이스의 깊은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6월 16일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노라와의 첫 데이트에 성공한 날이었거든요. 당시 노라는 가방 끈 짧은 호텔 여직원에 불과했지만 조이스는 ‘내가 사랑하는 것은 오직 그녀의 영혼’이라며 평생 아내 곁에 머물렀죠.”  

그러나 ‘율리시스’는 뭇 여성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오디세우스, 정숙한 아내 페넬로페, 아버지를 우상시하는 아들 텔레마코스라는 오디세이의 행복한 삼위일체 구조를 철저히 무너뜨린다. 블룸의 아내 몰리는 남편이 가장 경멸하는 남자와 달콤한 불륜에 빠져 있다. 블룸은 이를 눈치 채고도 한마디 말도 못한 채 마사라는 여성과 익명의 연애편지를 교환하고 해변을 산책하다 만난 소녀를 훔쳐보며 수음을 통해 울분을 해소하는 소심한 남자다. 블룸의 정신적 아들이라 할 만한 스티븐 데덜러스는 블룸의 ‘부성애’를 뿌리치고 ‘가출’을 감행한다.  

“‘율리시스’에 대해선 ‘현대인의 분열된 영혼과 가족의 붕괴를 그린 비극적 세계관이 담겼다’는 부정적 해석이 지배적인 게 사실이죠. 하지만 몰리의 독백으로 이뤄진 마지막 18장이 ‘Yes’로 시작해서 ‘Yes’로 끝난다는 점을 상기해야 됩니다. 블룸은 숱한 상처를 받으면서도 끝내 가정을 버리지 않습니다. 데덜러스도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암시를 남기죠. 조이스에겐 ‘결혼의 축가’와 다름없는 이 작품은 비극이 아니라 부정을 뛰어넘는 긍정의 미학이 담긴 코미디입니다.”  

그는 ‘율리시스’의 이런 긍정적 세계관을 작품의 고향인 더블린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블룸스데이엔 공영방송이 일기예보도 접고 아침부터 30시간에 걸쳐 율리시스를 낭독하는데 더블린 사람들은 이 방송을 듣다가 폭소를 터뜨리기 일쑤라는 것이다. 100여 명에 이르는 등장인물의 모델이 더블린에 살던 실존인물이기 때문이다. 또 조이스 동상을 더블린 시내의 시장 바닥이라는 ‘저 낮은 곳’에 세움으로써 그가 학자들의 작가이기에 앞서 대중소설가임을 상기시키고 있다고 한다.  

“흔히 ‘율리시스’를 모더니즘 예술의 절정으로 꼽지만 가장 포스트모던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언어유희뿐 아니라 공상과학과 판타지, 스릴러, 코미디가 함께 담겨 있거든요. 그래서 조이스 연구자들에게 포스트모던은 탈(脫)모던이 아니라 속(續)모던이라고 할 수도 있죠.”  

“조이스 작품은 처음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빠져나오기는 더 힘들다”고 털어놓는 노학자의 경기 용인시 자택 서재에는 여백마다 빽빽한 글귀를 적어 놓고 다시 번역 중인 ‘피네간의 경야’ 원서가 펼쳐져 있었다.(권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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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denuit99 2007-04-05 21:45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좋은 리뷰 항상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저도 옥스포드 판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 김종건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판은 Vintage Books에서 나온 가블러 판이더군요.(영문학계에서는 이 책을 주로 사용하더군요. 저도 이 책으로 공부했습니다) 일전에 딱 한 번 율리시스 강독회에 간 적이 있어서 선생님 옆에 앉을 기회가 있었서 슬쩍 보았더니 책이 정말 새까많고 너덜거릴 정도였습니다.

첫번째 에피소드를 보니 가독성이 훨씬 좋아졌더군요. 다만 사소한 오자들과 누락이 좀 있었습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올려볼까 합니다.

로쟈 2007-04-05 22:39   좋아요 0 | URL
전공하신 분이 댓글을 달아주셔서 반갑네요.^^ 저야 관견을 몇 자 늘어놓을 따름이고 보다 진득한 리뷰는 따로 기대해 보겠습니다. '천천히' 올려주신다니까 '천천히' 기다려보겠습니다.^^
 

어제 받은 책들 중의 하나는 들뢰즈의 <시네마1>(시각과언어, 2002)이다. <시네마2>는 갖고 있지만 <시네마1>은 이전 번역본인 <영화1>(새길, 1996)을 갖고 있어서 따로 구입해두지 않았었다. 한데, <시네마>를 자세히 읽어두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참고삼아 <시네마1>도 마저 구입한 것. 이 국역본들 외에 내가 갖고 있는 건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이다.

 

 

 

 

책은 출간 당시에 구내서점에서 한번 들춰보고 따로 확인해보지 않았었는데, 집으로 오는 전철칸에서 서문 등을 읽어보고 좀 짜증이 났다. 역자가 만 스물아홉에 '현역 번역병'으로 복무하면서 틈틈이 번역한 것이라고 '옮긴이의 글'에 적어놓고 있는데, 딱히 그런 것과 연관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번역이나 책의 만듦새가 일견 엉성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글은 주로 그 서문 읽기에 할애될 것이다.

일단 서문의 첫문단부터가 눈에 거슬렸다: "이 연구서는 영화사가 아니다. 이것은 분류학이며 이미지와 기호의 분류에 대한 수기이다. 그러나 이 첫번째 권은 요소들, 심지어 분류의 오직 일부분의 요소들을 규정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 책의 장르가 '수기'란 말인가? 가관인 건 책의 뒷표지는 같은 대목을 또 다르게 옮겨놓았다는 것: "이 연구는 영화사가 아니다. 이것은 영화에 나타난 이미지와 기호들의 분류에 대한 시론이다." 편집자의 불찰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자신이 시도하고 있는 게 영화사가 아니라 이미지와 기호의 분류학임을 천명하고 있는 대목인데, 물론 맞는 쪽은 '수기' 아니라 '시론'이다(영역본은 'an attempt'라고 옮겼다). 짐작에는 베르그송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donnees immediates de la conscience)>이라고 할 때의 그 '시론'(Essai)을 갖다쓴 게 아닌가 싶다. '한번 해본다'는 뜻의 '에세(이)' 말이다. 그건 '수기'와는 종류가 다르다고 해야겠다. 

영역본을 옮긴 새길판은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이 연구는 영화의 역사학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분류학, 이미지와 기호들을 분류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 제1권은 분류의 요소들을, 그나마도 단지 한 부분의 요소들을 결정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 '영화의 역사학'이 아니라 그냥 '영화사(a history of the cinema)'로 충분하다.

이어지는 문단: "우리는 자주 미국의 논리학자인 퍼스(1839-1914)를 참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이미지와 기호의일반적 분류를 수립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분명 가장 완전하고도 다양성을 지난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학에서의 린네의 분류와도 같은 것이며, 또는 화학에서의 만델례예프의 도표와 같은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문제에 새로운 관점들을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새길판: "우리는 미국의 논리학자 퍼스(1839-1914)를 자주 참조하게 될 것인데, 이것은 그가 이미지와 기호들에 대한 일반적인 분류법을 확립하였으며, 이 분류법이 의심할 바 없이 가장 완전하고 가장 다채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사에서의 린네의 분류법이나 화학에서의 멘델레프의 표와 비교될 수 있다."

들뢰즈가 영화에서의 이미지와 기호의 분류학을 시도하면서 최적의 참조대상으로 삼는 것은 미국의 논리학자/철학자 퍼스인데, 퍼스의 기호 분류학이야말로 린네의 종 분류법이나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에 비견할 만하다는 게 인용문의 내용이다. 내가 불만스러워한 것은 러시아 화학자의 멀쩡한 이름 'Mendeleev'가 '만델레예프'라고 엉뚱하게 표기돼 있는 것('멘델레프'라고 옮긴 새길판도 정확한 건 아니다). 불어로는'Mandeleiev'라고 병기해놓으면서(실제로 그런가?). 너무도 상식적인 이름이어서 오히려 읽는 독자가 당혹스럽다.

참고로, 마지막 문장 "영화는 이러한 문제에 새로운 관점들을 강요하고 있다"는 영역본과 새길판에 빠져 있는데, 러시아어본에는 "하지만 영화는 이 경우에(=이 분류학에 있어서) 얼마간 새로운 접근법을 요구한다."라고 돼 있다.

 

 

 

 

이어지는 문단: "여기에는 그 못지 않게 필연적인 또 다른 난제가 있다. 베르그송은 1896년 <물질과 기억>을 저술했다: 그것은 심리학의 위기에 대한 치료였다. 사람들은 더이상 외부세계의 물리적 현실로서의 운동과, 의속 속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미지를 대립시킬 수 없었다. 운동-이미지, 더 심오하게는 시간-미이지에 대한 베르그송의 발견은 오늘날까지도 그것의 의의를 모두 이끌어낼 수 없을 만큼의 풍부함을 지니고 있다."

새길판: "또다른 비교가 이에 못지 않게 필요하다. 베르그송은 1896년에 <물질과 기억>을 쓰고 있었다. 그 책은 심리학에서으 위기에 대한 진단이었다. 외적인 세계의 물리적 실재인 운동과 의식 속의 심적인 실재인 이미지는 더 이상 대립될 수 없었다. 운동-이미지와, 더 심오한 것으로 시간-이미지의 베르그송적인 발견은, 과연 이 발견으 결과들이 모두 도출되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을 정도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풍부함을 갖추고 있다."

시각과언어판에서 '또 다른 난제'가 무엇의 번역인지는 모르겠지만 문맥상 어울려 보이진 않는다. 그리고 '치료'도 다른 번역서들에서는 모두 'diagnosis'에 해당하는 번역어들이 쓰이고 있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에 대한 베르그송의 발견이 들뢰즈의 영화론에서 핵심적이라는 것. 그러니까 들뢰즈의 <시네마>를 읽기 위해서는 퍼스와 베르그송에 대한 참조가 필수적이다.

비록 베르그송 자신은 영화이론의 구성에 있어서 자신의 기여/지분에 대해서 의식하지 못했었지만: "나중에 베르그송이 영화에 대해 행한 지나치게 간략했 비평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루었던 방식대로의 운동-이미지와 영화적 이미지를 연관짓는 일을 가로막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시각과언어판) "베르그송이 얼마 있지 않아 가했던 영화에 대한 다소 성급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것도 그가 숙고했던 것과 같은 운동-이미지와 영화적 이미지의 만남을 방해할 수 없다."(새길판)

베르그송의 '지나치게 간략했던 비평'은 영역본에서 '다소 성급한 비판(rather overhasty critique)', 그리고 러시아어판에서는 '지나치게 피상적인 비판'으로 옮겨지고 있다. 문맥상 '간략했던 비평'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들뢰즈가 <시네마>에서 하고자 하는 일은 운동-이미지, 시간-이미지 같은 베르그송 자신의 개념들을 그가 간과/무시했던 영화적 이미지들과 접속시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그는 제1권에서 운동-이미지를, 제2권에서는 시간-이미지를 다룬다.

그렇다면 (고상한) '철학자' 들뢰즈가 왜 굳이 (하찮은)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거창한 프로젝트를 작동시키는가? "우리가 보기에 영화의 위대한 작가들은 화가나 건축가, 음악가들뿐 아니라 사상가들에 비견될 만하였다. 그들은 개념 대신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를 가지고 사유한다."(시간과언어판) "우리가 보기에, 위대한 영화감독들은 화가나 건축가 및 음악가들분만 아니라 사상가들과도 비교될 수 있다. 그들은 개념 대신에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들을 가지고 사유한다."(새길판) 그러니까 위대한 영화감독들 자신이 바로 '위대한 사상가들'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들뢰즈의 자부심: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글을 위해 삽화가 될 어떠한 복제물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우리 각자가 많든 적든 기억과 감동, 또는 지각을 공유하고 있는 위대한 영화들의 삽화가 되고 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글이기 때문이다."(시각과언어판) "우리는 이 책에 어떤 복제사진도 도판으로 제공하지 않고 있다. 우리들 각자가 많든 적든 그것에 대한 기억과 감동 또는 지각을 보유하고 있는 그 위대한 영화들의 도판이 되기를 열망하는 것은 사실 이 책 자신이기 때문이다."(새길판) 

이 '글'과 '책'은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에서 모두 '텍스트(text)'이다. 따로 영화의 스틸사진 등을 제공하지 않은 것은 들뢰즈의 텍스트 자체가 그가 다루는 위대한 영화들의 '도판'이길 바라기 때문이라는 것. 그게 말하자면 들뢰즈와 이 책 <시네마>의 자부심이겠다. 덕분에 우리는 400쪽 안팍의 책을 아무런 이미지의 도움없이 읽어내려가야 한다. 마치 이미지들인 양!..

07. 02. 15 - 18.

P.S. 널리 알려진 건 아니지만 철학자 들뢰즈의 딸 에밀 들뢰즈(1964- )가 영화감독이란 사실은 더이상 비밀도 아니다(아버지를 많이 닮은 얼굴이다). 그녀의 첫 장편 데뷔작 <새로운 시작>이 국내 TV를 통해서 방영된 바도 있기 때문이다(단편영화는 1986년작이 데뷔작인 듯하다). 바로 재작년 2월 19일의 일이었다(나는 잠깐 보았었다). 당시 한 신문의 소개기사는 이랬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딸인 에밀 들뢰즈(41)의 1999년 장편 데뷔작으로 칸영화제 비평가상을 받았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과 인간관계에서 아무런 느낌과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된 한 남자가 새로운 출발을 시도한다. 그는 또 한 인간과 새로운 소통을 희망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인간들 사이의 소통의 벽, 인간 존재의 독자성 등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영화는 전문배우와 비전문배우를 한데 섞어 사실적인 연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에릭 로샹 감독의 <토틀 웨스턴>에 출연했던 사무엘 르 비앙이 주연을 맡았다.

서른 살의 알랭(사무엘 르 비앙)은 세상이 지리멸렬하다. 아내와 딸은 그를 사랑하지만 그는 이렇다 할 감흥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견디지 못할 것같은 무게감에 짓눌린 알랭은 지금까지의 모든 인간 관계를 버리기로 결심한다. 비디오 게임 테스터였던 이전 직업을 버리고 포클레인 기사가 되기 위해 직업훈련 센터를 다니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누’라는 남자를 만나면서 또 다른 변화를 겪게 된다."

그녀의 최신작은 <미스터 V.>(2003)이다. 그녀가 언젠가 자살로 생을 마친 '아버지 들뢰즈'에 대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짓궂은 기대이지만 그런 기대를 갖는 건 또한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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