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다이어의 <지속의 순간들>(사흘, 2013)은 이미 '2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꼽아놓기도 했었는데, 책의 원서를 지난 주말에 받았다. 원서는 몇 종의 버전이 있는데(소프트카바는 두 종), 내가 고른 건 흰 바탕에 주유소 사진이 들어간 표지의 책이다.

 

 

암튼 다이어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저자이지만(영어권에서는 상당한 명망가라고) 이 책 한권으로 자신이 수전 손택과 존 버거와 롤랑 바르트의 레벨이라는 걸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개인적으로는 롤랑 바르트와 존 버거의 책에서 제프 다이어란 이름을 처음 접했다). 그런 만큼 독자로선 주의 깊게 음미하며 읽어야 하는 부담도 있다. 낚시하다가 '물건'이 걸렸을 땐 신중하게 낚아올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진에 관한 책인 만큼 많은 사진가들이 거명되는데, 일부는 국내에도 소개된 작가들이다. 서두에 나오는 워커 에반스나 도로시아 랭이 그런 경우다(번역본에서는 '도로테아 랭'으로 표기됐다). 로버트 프랭크도 번역됐지만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다이어가 맨처음 꺼내는 화제는 사진집의 구성밥법 혹은 사진의 분류학이다. 가령 에반스는 자신의 작업구상을 정리하면서 '노동자들의 무리에 둘러싸인 모든 계급의 사람들' '자동차들과 자동차가 있는 풍경들' 등의 목록을 설정한다. 다이어가 보기에 이런 목록과 비교되는 것이 루이스 하인의 사진집 <사회적, 산업적 사진들의 목록>이다. 하인은 '완전한 논리를 갖춘 엄격한 목록'을 구성한다. '이민자들' '일터의 여성 노동자들' 같은 주제어가 100가지가 넘고 그에 따른 하위 주제어가 800여 가지에 이르는 식이다.

그에 반해 에반스의 의도에 따라 구성된 목록은, 단일한 규칙에 의해 배열되고 조직된 목록이라고 보기에는 대단히 잠정적이고 우연적이며, 종국에는 지속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그밖의 많은 것들'이란 표현을 보라.) (14쪽)

이런 에반스가 1950년대에 친분을 쌓은 사진가 로버트 프랭크도 마찬기지였다. 프랭크는 자신이 찍을 사진들의 대상에 관한 목록을 이런 식으로 열거한다.

밤이 내린 도시, 주차장, 슈퍼마켓, 고속도로, 자동차 세 대를 소유한 사람과 한 대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 농부와 그의 아이들, 새 집과 기울어진 판잣집, 취향의 받아쓰기, 장엄한 꿈, 광고, 네온 불빛들, 지도자의 얼굴들, 그를 따르는 얼굴들, 가스탱크와 우체국과 뒤뜰들...(18쪽)

이런 분류는 바로 푸코가 <말과 사물>(영어본 제목은 <사물의 질서>)의 서두에서 인용하고 있는 보르헤스를 떠올려준다. '어느 중국백과사전'에서의 인용이라고 눙치면서 보르헤스는 이런 식으로 적었다. "동물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a)황제에게 속한 것. (b)술에 취한 것. (c)훈련받은 것. (d)젖먹이 돼지들. (e)인어들. (f)훌륭한 것. (g)길 잃은 개들. (h)이러한 분류에 속하는 것들. (i)미친 듯이 몸을 떨어대는 동물들. (j)수를 셀 수 없는 것들. (k)낙타의 털로 만든 세밀한 붓으로 그릴 수 있는 것들. (l)기타 등등. (m)지금 막 꽃병을 깨뜨린 동물들 (n)멀리서 보면 파리로 보이는 동물들."

 

이 연상은 제프 다이어 자신의 것이다. <말과 사물>과 똑같게 <지속의 순간들> 역시 보르헤스의 인용으로 시작한다. 그러한 분류에서 "영감을 받은 사람은 내가 첫 번째는 아닐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렇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진들은 이렇게 철저하게 엄격한 방식 혹은 별나고 기이한 방식의 분류법을 따르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진이 가진 무한히 다양한 가능성들을 좋은 뜻에서 무작위로 배열한 이전 사진가들의 시도를 보며 용기를 내어본다."(11쪽) 그 이전 사진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 이가 워커 에반스다. 에반스는 제임스 조이스나 헨리 제임스 같은 작가들은 '무의식적 사진가들'이라고 불렀다. 반면에 월트 휘트먼 같은 시인은 대놓고 사진을 찍는 쪽에 속한다.

 

 

그러나 월트 휘트먼은 자신의 시에는 무의식적인 요소가 없다고 단언했다. "<풀잎>의 모든 것들은 문자 그대로 촬영되었다"고 그는 주장했다.(12족)

번역문만 보자면 "<풀잎>의 모든 것들은 문자 그대로 촬영되었다"는 말을 휘트먼이 한 것처럼 보이지만 문맥상으론 워커 에반스의 말이다. "In the case of Walt Whitman there was nothing unconscious about it."를 첫 문장도 "월트 휘트먼의 경우에는 무의식적인 게 전혀 없다"고 해야겠다. 휘트먼의 대표시집 <풀잎> 같은 경우, 에반스가 보기엔 말 그대로 사진 찍기다. 왜냐하면 "그는 가끔, 사진 관련 카탈로그에서 항상 볼 수 있는 광고 문구처럼 읽히는 시"를 쓰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 게 휘트먼 스타일이다.

...

보라, 힘차고 빠르게 달리는 기관차가 기적을 울리는 모습을.

보라, 농부들이 쟁기질하는 모습을.

보라, 광부들이 갱도를 파내려가는 모습을.

보라, 수도 없는 공장들을.

보라, 공구를 들고 기계를 다루는 기술자들을.

...

에반스가 이런 휘트먼의 시에도 영감을 받았다는 얘기. 제프 다이어는 루이스 하인보다는 그런 에반스와 로버트 프랭크의 작업방식에 호감을 느끼며 그의 사진책(<지속의 순간들>) 또한 그렇게 구성하려고 한다. 무작위적으로 보일 만큼 느슨하지만 정말 무작위는 아닌 어떤 배열 혹은 질서를 사진들에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사진집을 구성하는 더 감각적인 다른 방식이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하인의 방법론적인 접근과 비교하면 대단히 우발적이고 일시적이며, 종종 아무렇게나 시도한 것처럼 보이는 이 책을 본보기로 삼았다.(19쪽)  

'더 감각적인 방식'은 'more sensible ways'를 옮긴 것인데, 사전적 의미도 그렇고 맥락상으로도 '더 분별 있는 방식' 혹은 '더 합리적인 방식'을 뜻한다. 임의적이지 않은 방식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은 부정확한 번역으로 'these ... attempts'를 옮긴 것인 만큼 '이런 시도들'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워커 에반스와 로버트 프랭크 같은 이들의 시도를 가리킨다. 

 

이상이 저자가 말하는 대략적인 방법론(사진의 분류학)이라면 서론에서 또 하나 밝혀야 하는 것은 책이 다루는 대상이다. 물론 사진이지만 어떤 사진이냐는 것. "이 책은 주로 - 그러나 전적으로는 아니다 - 미국의 사진들을, 적어도 미국에 관한 사진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22쪽) 처음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미국의 사진을 탐구하는 에세이가 됐다는 것.

 

끝으로 이런 책을 쓸 자격. 흥미롭게도 제프 다이어는 사진에 대해서 문외한이다. 찍는 걸 기준으로 하면 그렇다. "내가 전문적이거나 진지한 사진가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나는 카메라 한 대도 없는 사람이다. 내가 사진을 찍을 때는 여행객들이 부탁을 할 때뿐이다."(23쪽) 디카와 폰카 시대인지라 사진기 한 대도 안 갖고 있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나 역시도 사진을 거의 찍지 않으니 저자와 공감하는 바가 있다(그러면서도 그는 사진책을 썼고 나는 읽는다!). 사진에 문외한이면서 사진에 대한 에세이를 쓴다? 하지만 제프 다이어에겐 전력이 있다. 악기를 다룰 줄 모르면서 재즈에 관한 책을 쓴 전력이. 그건 핸디캡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다.

 

물론 내가 사진을 찍지 않는다는 사실은 장애가 될 수 있겠지만, 내가 일종의 순수한 입장에서 사진이라는 매체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내게는, 사진에 관한 글을 쓰면서도 사진을 찍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1980년대 후반에 재즈에 관한 책을 쓰면서도 악기를 하나도 다루지 않았던 것과는 다를 것이라는 예감이 있다.(23-4쪽)  

그가 쓴 재즈책이 <그러나 아름다운>이고 이건 우리말로 번역중이라 한다. 인용문의 두번째 문장은 오역이다. 원문은 "I also have a hunch that not taking photographs is a condition of writing about them in the same way that my not playing a musical instrument was a preconditon for writing about jazz in the late 1980s."다. "악기를 연주하지 않는 것이 1980년대 후반 재즈에 관한 책을 쓰는 데 전제조건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진을 찍지 않는 것이 사진에 대한 책을 쓰는 조건이라는 예감도 든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재즈에 관한 책을 쓸 때는 참고할 만한 책이 거의 없었지만 사진에 관해서는 좋은 책이 많이 나와 있다는 것. 그러면서 거명하는 이름이 수전 손택과 존 버거와 롤랑 바르트다. 그밖에 훌륭한 연구서나 에세이도 많고. "그러니 내가 쉽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바(bar)가 높이 걸쳐져 있으니 나는 그저 그 아래서 자유로이 거닐기만 하면 되니까." <지속의 순간들>은 그렇게 하여 쓰이게 된 책이다.

 

 

'시작하며'라고 따로 분절된 <지속의 순간들>의 서두를 간추려보았다(원저에는 따로 제목이 붙어 있지 않다). 사실은 페이퍼의 제목이 말해주듯, 제프 다이어가 쓴 영화책이 눈에 띄어 글을 시작한 것인데(겸사겸사 오역도 지적하고) 말이 생각보다 길어졌다(임시보관함에 넣어두면서 쓰기 시작한 게 일주일 전이다). 영화책이라고 했지만 정확하게 어떤 성격의 책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의 책 <조나>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잠입자>(<스토커>)를 다뤘다는 것만 알고 바로 주문했다. 

 

 

<잠입자>에 대해서 한권의 책을 쓸 정도의 저자라면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전폭적으로 지지할 준비가 돼 있다. 주문한 책은 3월에 받아볼 텐데, 기대가 된다. <지속의 순간들>로 우리에게 처음 소개된 제프 다이어는 올해의 첫 발견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13. 0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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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월간 공간(538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열화당, 2012)에 대해 적었는데, 마저 못 다룬 내용은 '글래머란 무엇인가'(http://blog.aladin.co.kr/mramor/5802399)란 페이퍼에서 다루기도 했다. 본문에서 언급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절판된 열화당판을 말한다.

 

 

 

공간(12년 9월호) 다른 방식으로 보기

 

“나는 이 책을 사십 년 전에 썼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책에 담긴 생각들을 믿고 있습니다.” 새롭게 번역된 <다른 방식으로 보기>(열화당, 2012)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 존 버거가 꺼낸 서두다. 1972년 영국 BBC 방송의 연속강의 ‘보는 방식들’(Ways of Seeing)의 대본이었으니 말 그대로 ‘사십 년 전’이다. 문제는 “이 책에 담긴 생각들”이 저자의 믿음대로 ‘아직도’ 유효한가이다. 

 

 


한국어로 번역된 종수로만 보자면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충분히 ‘고전’에 값한다. 그간에 각기 다른 제목으로 3종이 번역돼 나왔고,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란 제목이 붙었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번역자이기도 한 최민 교수는 제목을 그렇게 옮긴 이유에 대해 이 책이 “기존의 아카데믹한 보는 방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법이라고 알려지고 이야기된 기존의 것들이 어딘가 잘못된, 또는 편협한 방식일 수도 있다는 강한 뜻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제에서 ‘방식’(the way) 대신에 쓰인 복수형 ‘방식들’(ways)을 ‘다른 방식’(the other way)이란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

 


이 ‘다른 방식’은 좀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이미지에 대한 기존의 보는 방식, 혹은 지배적인 해석에 대한 도전을 뜻한다. 단적인 예로 버거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프란스 할스(Frans Hals)에 대한 권위 있는 연구서의 해설을 비판적으로 인용한다. 할스는 말년에 자선기관의 신세를 지며 연명하는 처지였는데, 이때 주문을 받고 그린 것이 '자선요양원의 이사들'과 '자선요양원의 여이사들'이란 작품이다. 버거가 보기에 이 두 그림에서 “남녀 이사들은 이미 명성도 다 잃고 자선단체의 도움으로 연명하는 가난한 늙은 화가를 응시하고 있다.” 이것이 두 그림이 보여주는 ‘놀라운 콘트라스트’고 드라마다. 하지만 정작 미술계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연구서의 저자는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개성적 시각을 의연하게 지키려는 할스의 노력은 우리 시대 사람들의 의식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생명력들을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줌으로써 우리의 감탄을 자아낸다.” 이러한 해설에 대해 버거는 “바로 이것이 신비화”라고 잘라 말한다. 그가 보기에 초상화가로서 할스의 의의는 문학에서 발자크가 이룬 성취에 비견할 만한 것으로 “자본주의에 의해 처음으로 생겨난 새로운 인물유형과 그들의 표정을 최초로 묘사한” 데 있다

 

버거는 또한 내셔널 갤러리에서 소장하고 있는 다 빈치의 소묘 '성 안나와 성모와 아기 예수와 세례 요한'이 한 미국인이 이백오십만 파운드에 사려고 하는 바람에 갑자기 유명해진 사례도 지적한다. 이후에 이 그림은 특별 전시실에 걸려 있는데, 버거는 “그 작품이 감동적이고 신비스러워진 것은 시장가격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이러한 예들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지만 버거는 기본적으로 사회학적 시각에서, 더 구체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미술을 바라본다. 미술이란 그것이 지닌 권위를 통해서 다른 형태의 권위를 정당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게 그의 기본 입장이다. 예술을 경험의 모든 측면과 관련시켜서 보는 ‘총체적인 접근’과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몇몇 전문가들의 ‘비교주의적(秘敎主義的) 접근’을 구분하자는 제안도 그런 입장에서 나온다.


총체적인 접근방식을 통해서 미술을 다르게, 다시 바라본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되는가. 버거는 누드화와 유화, 그리고 광고라는 세 가지 주제 혹은 영역에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실천한다. 그는 먼저 미술에 나타난 성차별적인 재현방식을 문제 삼는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남자는 능력에 따라 존재감을 갖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사회적 대우가 결정된다. 미술에서 이러한 차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누드화이다. 벌거벗음(nakedness)이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누드(nude)는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목적으로 전시되는 것이다. 곧 “누드는 복장의 한 형식이다.” 그런데 유럽의 누드화에서 보여지는 대상은 보통 여자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인 화가나 관객(소유자)은 보통 남자다.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가 아직까지도 우리 문화 깊이 각인돼 있다는 것이 버거의 주장이다. 그의 주장은 페미니즘 시각이론보다 앞서 나온 것이다.  


서양미술사에서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전성기를 누린 유화적 전통에 대해서도 버거는 그것이 재산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자본주의 문화와 깊은 상관성을 갖는 것으로 본다. “재산과 교환방식에 대한 새로운 태도에 의해서 궁극적으로 결정되는 세상을 보는 방식”이 유화를 통해서 시각적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유화의 본질적 특성에 따를 때 화가의 역할은 물질적 재산을 칭송하는 것에 불과했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바로 그런 전통의 규범을 깨뜨리고자 했고, 그렇기 때문에 렘브란트와 푸생, 샤르댕 고야 혹은 터너 같은 화가들은 진정한 후계자를 남길 수 없었다고 버거는 말한다. 


버거의 비판적 통찰은 현대의 광고를 유화와 연관 짓는 대목에서 더욱 빛나는데, 광고는 유화와 마찬가지로 이미지들이 보여주는 실제 사물들을 획득했다는 느낌을 보는 사람이 갖게끔 한다. 하지만 유화의 경우 소유주가 이미 향유하고 있던 무언가를 보여주는 데 반해서, 광고는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재 생활방식에 불만을 갖게 한다. “만일 당신이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이 광고의 메시지다. 그와 함께 광고는 의미있는 정치적 선택을 소비에서의 선택으로 대치함으로써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만든다. 비민주적인 모든 것을 은폐하면서 광고가 자본주의 문화의 꿈이자 생명으로 각광받는 이유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서양미술사에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지가 갖는 사회적 역할과 의미에 대해 매우 급진적인 견해들을 제시한다. 사십 년이 지났지만, 요즘 나오는 미술사나 시각이론서들이 오히려 온건해 보일 정도라면 여전히 필독의 가치가 있는 책이다.

 

12. 09.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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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통의동의 '갤러리 시몬'에서 오늘부터 10월 18일까지 황혜선 작가의 개인전 '서풍이 본 것(What the West Wind Saw)'이 열린다(02-549-3031). 몇년 전 개인전 도록에 작가론을 실은 인연으로 이번에도 전시회 도록 서문을 쓰게 됐다. 참고로 옮겨놓는다.

 

 

서풍이 본 것(What the West WInd Saw)

 

오랜만에 황혜선 작가에게서 연락을 받고 갤러리를 찾았다. 새 개인전의 서문을 부탁받은 참이다. 잠시 작가를 기다리는 동안 전시장 1층에서 ‘풍선들’과 ‘풍선을 든 아이’를 보았다. 풍선과 풍선장수라는 소재는 낯설었지만 곧 ‘황혜선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에 익은 스타일의 드로잉이었기 때문이다.


널따란 공간에서 인물들은 제각각 자기 몫의 풍선을 들고 서 있었다. 바람이 잔뜩 들어간 풍선들. 바람은 바람(風)이면서 바람(願)이다. 풍선들의 풍만함은 그 바람들의 풍만함이다. 우리가 손에 쥐고 있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날아가 버리려는 자세로 충만한 풍선들. 작가는 물론 이 풍선들을 대상으로만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감정이입이 없다면, 풍선과 풍선을 든 사람들은 한낱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한 ‘스냅’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 포착행위가 드로잉-조각의 입체감을 얻게 될 때 거기엔 어떤 의지가 개입한다. 그것을 오래 응시하고 보존하려는 의지 말이다.


어떤 것이 놀랍거나 진기할 때 그것을 오래 기억하고 간직하려는 마음의 충동은 본능적이다. 하지만 풍선이나 풍선을 든 아이는 그다지 놀랍거나 진기한 오브제가 아니다. 유원지에서 그런 풍경은 일상적이고 심지어 ‘상투적’이다. 작가는 아주 태연하게 그것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그리고 천연스레 우리는 모두 각자의 풍선을 들고 서 있는 것 아닌가요, 라고 묻는다. 아니 그 질문은 과거형으로 읽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풍선을 들고 서 있지 않았던가요?”


그렇게 각자가 든 풍선을 채우고 있는 바람이 서풍이다. 적어도 황혜선의 세계에서는 서풍이어야 한다. 작가는 드뷔시의 전주곡에서 ‘서풍이 본 것’이란 제목을 따왔다고 알려주면서, 거친 바람을 뜻하는 서양의 서풍과 달리 우리의 서풍은 ‘하늬바람’이라고 덧붙였다. 비유컨대 나무를 흔드는 바람이 아니라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이 서풍이다.


돌이켜보면 작가는 언제나 그런 세계를 작품으로 형상화해왔다. 지난 2010년 개인전의 제목이 ‘아주 잠깐, 조금씩만(For a moment, Just a bit)’이었던 것도 떠올려볼 수 있다. 예컨대 손으로 떠올린 물이 손바닥에 머무는 한순간을 작가는 포착하여 오래 보존하고자 한다. 그런 순간들에 영주권을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가 황혜선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주 조금씩만 변화해온 여정임에도 전시장 2층에서는 또 다른 황혜선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을 통해 만나는 황혜선이다. 그의 많은 드로잉-조각을 보아온 관객이라면 너무도 많은 ‘인물들’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어주어야 한다. 주로 일상의 사소한 소품들에 주목해온 작가가 주변의 사람들과 여행지에서 본 인물들을 드로잉-조각을 통해 보여주고 있기에. 물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인물들이 아니다. 작가는 아무런 준비 없이 무방비로 노출된 인물들의 한순간과 그 순간의 표정, 그리고 자세를 보여주고자 한다. 정작 그들은 기억하지 못할 한순간일 테지만, 이 전시공간에서는 그 순간들이 그들을 굳건하게 대변하고 있다. 은박거울에 에칭으로 새긴 풍경들이 그러한 것처럼.

 

 


‘서풍이 본 것’은 작가 황혜선이 본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같이 보게 된 것이다. 모두가 서풍이 되어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인가. 보도블록 사이에 핀 꽃을 잠시 내려다보는 순간, 그 ‘몇 초간의 여유’이다. 차를 마시는 아이, 책을 읽는 여인, 헤드폰을 끼고 뭔가를 듣고 있는 남자, 카페에서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노신사 등등 모두가 각자의 ‘몇 초간’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날들이 많지 않고, 그런 순간들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 순간들을 필사적으로 포착해내는 작가의 태도에서 그런 조바심을 읽어낸다면 과장일까.


전시장 3층에서 우리는 작가의 작업실 풍경을 엿보게 된다. 황혜선이 내다보는 풍경이면서 서풍이 지나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그 공간 속에 잠시, 다만 몇 초간이라도 머물러달라고 작가는 제안하는 듯싶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점으로 잠시 서풍이 되고 서풍의 바람맞이가 된다. 전시장 곳곳에서 우리 안의 나뭇잎이 잠시 흔들리는 소리를 당신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12. 0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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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늦게까지 쓴 원고는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열화당, 2012)에 대한 서평이었는데, 쓰다 보니 분량상 책의 뒷부분에 대해서는 간소하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정작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었음에도!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광고와 '글래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인데(예전 번역본들을 읽을 때 아마 이 대목까지는 읽지 않았던 듯싶다), '못다한 리뷰'를 쓰는 셈치고 막간에 간단히 소개한다.

 

 

 

먼저 글래머(glamour)에 대한 정의. 본래는 '매력'을 뜻하는 말이지만 요즘은 주로 여성의 성적 매력을 가리키는 말로 축소돼 쓰인다. 국어사전의 정의로는 "육체가 풍만하여 성적 매력이 있는 여성"을 가리킨다. 나도 그렇게 단순하게만 이해했었는데, 존 버거는 좀더 넓은 의미로 정의한다. 일단 글래머가 현대의 발명품이라는 지적.

 

글래머는 현대의 발명품이다. 유화의 전성기에는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아함이라든지 고상함, 권위라는 관념이 겉으로 보기에는 글래머라는 관념과 어느 정도 비슷한 것 같으나 근본적으로 다르다.(170쪽)

글래머가 과거에는 없었고 오직 현대사회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째서인가? 버거는 매우 매력적인 통찰을 제시한다.

글래머라는 것은, 한 개인이 사회에 대해 갖게 되는 선망이 사회 전반에 널리 퍼진 공통의 정서가 됨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로 향하다 중도에 멈춘 산업사회는 그러한 정서를 만들어내기에 안성맞춤인 사회다.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는 만인의 권리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실제의 사회적 환경은 개인으로 하여금 무력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그는 그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상태와 현재 그 자신의 상태와의 모순 속에 살고 있다. 그리하여 그 모순과 원인을 충분히 깨닫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인 투쟁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의 무력감과 함께 뒤섞여서 백일몽으로 융해되어 버린 선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야 한다.(171-2쪽)

어제 읽으면서 무릎을 친 대목인데, 일단 글래머가 탄생할 수 있는 조건으로 버거는 "민주주의로 향하다 중도에 멈춘 산업사회"를 지목한다. 우리는 모두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평등하다고 전제하는 민주주의 사회이니까. 하지만 현실적으론 소수의 가진 자만이 물질적 부를 향유한다. 대다수는 자신이 바라는 상태와 현재 상태 사이의 간극 앞에서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집을 얻으러 다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절감할 것이다). 그때 발생하는 것이 바로 선망의 대상으로서 '글래머'이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란 말은 거꾸로 글래머에 대한 선망의 보편성을 말해준다. 자기 안에 있는 선망(부러움)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가 문제되는 것이니까. 물론 우리는 이미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

 

 

버거가 보기에 광고가 바로 그러한 선망의 구조에 개입한다. "광고가 실제로 제공하는 것과 광고가 약속하는 미래 사이의 간극은,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 자신이 느끼는 현재의 처지와 그가 되고 싶어 하는 처지 사이에 벌어진 간극과 일치한다." 그 간극을 채우는 것이 광고가 부추기는 환상이고 백일몽이다. 그리고 이 백일몽은 노동자로 하여금 또다시 "의미 없는 노동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끝없는 현재"로 되돌아가도록 만든다. 다른 선택지는 없는가? 백일몽적 선망에 대한 다른 선택지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인 투쟁"이다. 소수가 아닌 다수가(혹은 모두가) 실질적인 행복을 성취할 수 있는 사회를 향한 투쟁이다(물론 그 다음 단계에선 행복에 대한 정의 자체가 바뀌어야 하겠지만). 그렇다면 광고는 민주주의와 대립하는가? 그렇다. 버거의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광고는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만들어냈다. 무엇을 먹을까, 무슨 옷을 입을까, 무슨 차를 탈까 하는 선택은 의미있는 정치적 선택을 대치하고 있다. 광고는 사회 내부의 비민주적인 모든 것들을 은폐하거나 보상해 주는 일을 돕는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의 또 다른 지역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은폐해준다.(173쪽)

이것이 광고의 중요한 사회적 기능이다. 그리고 이런 통찰의 제시만으로도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40년이라는 먼지를 떨어내고 제값을 한다(책은 1972년에 출간됐다). 글래머에 대해서 한 수 배웠으니까. 점심 먹어야겠다...

 

12. 08. 20.

 

 

 

P.S. 존 버거의 책을 간간이 구입해서 갖고 있지만, 정색하고 읽진 않았었다. 이번에 관심을 갖게 돼 몇 권의 책을 더 주문했다. <본다는 것의 의미>는 다시 주문했고 <포켓의 형태>는 알라딘에서 품절이어서 다른 인터넷서점을 이용했다. <시각의 의미>도 곧 주문할 예정. 다만 모두 동문선에서 나온 책들인지라 (번역을 신뢰할 수가 없어서) 원서도 같이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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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전문지 공간(535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미국 철학자 슈스터만의 <삶의 미학>(이학사, 2012)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미 소개된 책들과 함께 언제 통독해보면 좋겠다.

 

 

 

공간(12년 6월호) 삶의 미학

 

<프라그마티즘 미학>과 <몸의 의식>이 국내에 소개됨으로써 이름을 알린 미국 철학자 리처드 슈스터만의 새로운 책 <삶의 미학>(이학사, 2012)은 제목보다 ‘예술의 종언 이후 미학적 대안’이란 부제가 먼저 눈길을 끈다. ‘예술의 종언’론에 대한 비판과 ‘미학적 대안’의 제시가 저자의 주된 관심사라는 걸 시사해준다. 예술의 종언이란 무엇이고 가능한 미학적 대안이란 또 무엇인가.


예술의 종말에 대한 주장은 19세기초 헤겔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헤겔은 절대정신의 전개과정에서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던 예술이 더 고차원적인 단계에 그 역할을 인계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일종의 바통터치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고대의 예술과 중세의 기독교, 그리고 근대의 철학이 그렇게 정신의 역사라는 레이스의 주자들이다. 헤겔에 따르면 예술은 한때 예술에 형식적 힘을 부여했던 정신의 요구를 더 이상 충족시키지 못하며 그것을 감당하는 일은 기독교를 거쳐 철학의 몫으로 돌려진다. 전성기를 지난 예술은 비록 계속 존속하더라도 ‘과거의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곧 예술의 종말이다.


20세기 들어서 새로운 예술의 번성과 함께 잠시 주춤하던 예술의 종말론은 1930년대에 이르러 다시금 표명되기 시작한다. 발터 벤야민은 두 가지 종말론적 서사를 정식화하는데, 기술복제시대가 예술적 아우라의 쇠퇴를 가져옴으로써 예술이 가치의 숭고한 영역에서 물러나는 것이 종말의 한 양상이라면, 무질서한 정보의 범람 속에서 전통적인 미적 경험이 불가능해지는 것이 또 다른 종말이다.


분석철학자로서 이러한 종말론에 가세한 이가 아서 단토이다. 단토는 헤겔주의에 입각하되 예술의 독자적인 역사를 해명하고자 한다. 무엇이 하나의 대상을 예술로 만들며 그것이 왜 예술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그는 예술사의 진화동력을 ‘미메시스’로 규정한다. 얼마만큼 닮았는가가 예술적 형상화의 발전을 가늠하는 척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지 복제기술의 발전은 더 이상 닮음을 발전의 척도로 간주할 수 없도록 만들며 이에 따라 예술은 자연스레 종말에 이른다.


역사철학적 관점과는 별개로 제도적 시각에서 예술의 종말을 주장하는 쪽도 있다. 예술을 특별한 사회 역사적 제도로 보는 시각이다. 이에 따르면 예술은 18세기에 처음 등장하며 근대성의 기획과 함께 강화되다가 포스트모더니티의 도래와 더불어 종말을 맞는다. 예술이 근대성의 산물인 만큼 근대성의 종언과 함께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슈스터만은 이러한 예술 종말 서사를 용인하지 않는다. 제한적으로 규정된 예술의 종말이 예술 전체의 종말을 의미할 수 없으며 동시에 그것이 미적 경험의 종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의 조건 속에서도 미적 경험이 여전히 가능하다면 예술의 갱생 에너지는 다 소진된 것이 아니다. 폭넓은 미적 경험과 미적 가치 개념의 회복은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발견하도록 해준다는 것이 그의 기본 입장이다.  


슈스터만의 ‘프래그머티즘 미학’은 미적 경험이 근대성의 구획을 넘어서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근대성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적 경험은 그 이후에도 가능하다. 그런 관점에서 저자는 단토의 예술종말론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 ‘비식별성’을 비판한다. 단토는 예술작품과 비예술작품, 곧 워홀의 브릴로 박스와 상품 브릴로 박스를 지각적 속성만으로는 구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의 미적 경험은 예술을 적절하게 식별해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예술에 대한 정의는 ‘지각’이 아닌 ‘해석’의 몫이 되며 감성학으로서 미학은 이제 비평에 자리를 내준다는 것이다.  


단토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슈스터만은 이 비식별성 문제를 대상이 아닌 주체에 적용해보자고 제안한다. 매우 강렬한 예술작품에 대해서 동일한 해석을 제시하는 두 명의 관람자가 있는데, 한명은 그가 보고 해석하는 대상에 전율을 느끼는 인간이고, 다른 한명은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지각 정보를 처리할 뿐인 사이보그이다. 작품에 대한 해석을 제시할 수 있다고 해서 사이보그가 예술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면 핵심은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경험이다. “만족스러울 정도로 고양되고, 강렬하며, 유의미하고도 정감적인 경험”으로서 미적 경험을 산출하지 못한다면 그때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게 될 것이다. 거꾸로 미적 경험이 여전히 유효하며 계속 보존될 수 있다면 예술은 아직 종말에 이르지 않았다. 저자가 인용한 T. S. 엘리엇의 말을 빌면, “종말은 또 하나의 시발점이다.”


바로 그러한 견지에서 슈스터만은 자신의 이론적 기획이 “순수예술의 영역을 넘어서서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미적 경험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예술과 삶을 더욱 밀접하게 통합”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미학적 대안은 ‘프래그머티즘 미학’과 ‘몸미학’이란 이름으로 이미 정식화돼 있으며 <삶의 미학>을 그것을 더욱 확장하려는 시도들을 담고 있다. 엔터테인먼트에서 컨트리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베를린의 도시미학에 대한 성찰에서 문화다원적 자기창조에 이르기까지 미학적 실천은 여전히 살아있다.

 

12. 0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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