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들레르와 모더니티'라면 하도 많이 다루어진 주제라서 무슨 새로운 얘기가 있을까 싶은데, '담론비평'에서 이 주제에 관한 새로운 학위논문을 요약해주고 있다. 자세한 건 논문을 읽어봐야 알겠지만 관심있는 독자라면 챙겨둘 만하다.   

담비(07. 04. 04) 아방가르드와 결별한 21세기 보들레르

보들레르는 19세기 중엽 새롭게 등장한 '현대적 삶'이 예술에서의 변화를 요청한 장본인이라는 독자적인 인식에 근거하여 그러한 요청에 답하는 예술론을 모더니티 개념을 통해 정식화해냈다. 보들레르의 문제의식은 전통적인 재현론을 대체한 새로운 예술론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로, 이미 도덕적 가치를 내재한 대상들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이 동시대 변화된 삶의 제 양상을 재현하는 방식으로서 부적절하다는 것이었따.

보들레르가 보기에 범죄자나 정치적 모사꾼, 혹은 첩과 같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현대적 삶을 재현하는 것이 새로운 예술의 임무이기에 도덕적으로 무의미한 그런 인간군상을 심미화하는 것, 즉 도덕으로부터 미적인 것을 분리시키고 심미적인 것에 완전한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이 새로운 재현론의 성격이었다.

이런 보들레르의 예술론은 그가 프랑스혁명 이래 제2공화정 기간 누구보다도 공화주의에 헌신한 진보주의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혁명의 실패, 연이은 국민투표가 입증한 프랑스 국민들의 정치적 무능함과 기만성, 그 결과물로서의 제2제정 사회의 등장 및 나폴레옹 3세의 등극을 보면서 보들레르는 혁명과 대학살, 진보와 데카당스가 반대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이라고 믿게 됐다.

보들레르는 물직적인 풍요로움에 근거하여 역사의 진보에 심취해 있는 동시대인들의 타락한 면모를 비판하기보다는 진보의 신화에 가리워진 동시대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전개했다. 이런 글쓰기를 통해 그가 제시한 대안적 삶은 댄디즘이다. 개인이 따를만한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가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의 자율성과 독자성은 보존이나 발굴이 아니라 발명의 문제라고 보들레르는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산업화, 문명화된 동시대 삶이나 예술의 일차적인 조건 혹은 사실은 일시성이었다. 도시적 삶은 덧없이 스러져가는 순간에 대한 경험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것. 과연 일시성과 순간성이 경험의 조건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예술은 어떻게 영원성에 헌신하려는 노력을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를 스스로에게 제기한 뒤 보들레르는 일시성으로부터 영원성을 끌어내는 임무를 '현대적 삶의 화가'에게 부여하게 된다.

따라서 보들레르의 관심은 들라크루아나 마테나 쿠르베와 같은 위대한 화가들이 아니라 신문에 삽화를 그리는 풍속화가 기의 작업방식에 대한 성찰로 나타난다. 기를 통해 보들레르는 일시성으로부터 영원을 끌어낼 수 있는 화가의 힘을 보았고, 예술가 주관의 심미적 변형의 능력이 일시성을 영원성의 위치로 승격시킬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모더니티 개념에 담긴 이러한 보들레르의 생각은 20세기에 들어서 아방가르드 개념의 영향력 아래에서 잊혀져 버리고 보들레르의 모더니티는 그저 일시성의 미학으로서 제한적으로 해석, 수용되었다. 그 결과 보들레르의 모더니티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시작을 알리는 이른바 새로움 숭배의 기원으로 잘못 평가되었다.

이런 보들레르 수용에 반성이 인 것은 1970년대 들어서다. 기존 보들레르 문학에 대한 제한된 해석을 수정하려는 것과 보들레르 모더니티 개념의 본래적 의미를 새롭게 발굴하려는 노력이 이어졌고, 아방가르드 모더니즘과 맺어진 끈도 떨어져나갔다.

양효실 서울대 강사는 최근 이러한 요지를 담은 박사학위논문 '보들레르의 모더니티 개념에 대한 연구'(2006, 서울대학교)를 제출했다. 그는 보들레르의 모더니티는 아방가르드 개념처럼 미래를 위해 현재를 부정하는 데 헌신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현재의 부정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구제일 수 있는 방식을 모색했으며 형식 개념처럼 예술의 자율성을 위해 삶과의 연관성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예술의 독자적 가치를 동시대 삶의 맥락 안에서 모색한 예술론이라고 결론 내린다. 아방가르드 모더니즘과 형식주의 모더니즘을 둘 다 뛰어넘는 예술적 인식론을 보들레르를 통해 새롭게 정초해보자는 제안인 것이다.(리뷰팀)

07. 04. 04.-05.

P.S. 이 리뷰 기사에 눈길이 간 건 마침 새로 편집돼 나온 벤야민의 보들레르론 <현대적 삶의 작가(The writer of modern life : essays on Charles Baudelaire)>(2006)을 구해보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벤야민과 보들레르에 관한 글도 언젠가는 쓰고 싶은데, 그 '언젠가'는 언제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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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 2007-04-05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케이드 프로젝트> 보들레르 장을 읽고 뒤늦게<악의 꽃>을 구입하려 한다는 사실이 너무 후회됩니다(너무 뒤쳐져서 부끄럽기도).

그러나 로쟈님의 벤야민과 보들레르 너무 기대 됩니다. 그 언젠가를 기다리전 보들레르에 대해 어느정도 소양을 갖추기 위해 분발해야겠네요. 건강하세요 ^^

로쟈 2007-04-05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어도 <아케이 프로젝트>는 남들보다 빨리 읽으신 것 아닌가요? 자기 나이에 맞게 읽고 생각하게 되는 거라면 굳이 남들과 견줄 이유는 없을 거 같습니다.^^ 거창하게 '벤야민과 보르레르'라고 적었지만 실상은 '지나간 여인에게'란 시를 중심으로 두 사람 얘기를 몇 자 적는 게 취지였고, 얼마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일주일 정도의 여유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일 뿐입니다.--;

2007-04-07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원래는 주말에 해놓으려고 했던 정리인데 다소 지체된 일을 해치우려고 한다. 볼프강 벨슈의 <미학의 경계를 넘어>(향연, 2005)에서 아방가르드와 일상의 심미화를 대비시키고 있는 대목을 간단히 정리해두는 게 일차적인 목표이지만 곁다리 얘기들도 포함될 듯하다(이브 미쇼의 책들이 함께 다루어질 만하다). 다른 일들에 발목뿐만이 아니라 허벅지까지 붙들린 상태이지만 <일상생활의 혁명>에 관한 리뷰를 옮겨오면서 다시금 등떠밀리며 떠올리게 된 일부터 처리하는 수밖에.

 

 

 

 

먼저, 볼프강 벨슈(벨쉬)는 <우리의 포스트모던적 모던>(책세상, 2001)로 먼저 소개되었던 독일 철학자이며 현재는 예나대학교에 재직중이라고 한다. 그의 <포스트모던적 모던>은 이미 여러 차례 개정판이 나왔을 정도로 현지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는 듯하고, <미학의 경계를 넘어서>도 그의 책으론 처음 영역(1997)되면서 학문적 성가를 널리 알린 책이다. 역자에 따르면 "현재 독일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미학자 중 한 명"이다.  

Cover Art for Undoing Aesthetics

원저인 독어본이 1996년에 출간됐으니 영역본은 바로 이듬해에 나온 셈이다. 그리고는 또 8년 후에 한국어본이 나온 것이고. 국역본이나 영역본 표제에서도 암시받을 수 있지만, 저자는 "전통 미학의 관점에 안주하기보다는 미학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미학자"이며, "현대 예술, 건축, 음악 및 디지털 전자 매체 세계에 대해서도 미학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확장을 통해 미학의 경계를 허물고자 시도"한다. 그러고 보면, 역자인 심혜련 교수의 <사이버스페이스 시대의 미학>(살림, 2006)은 이 책의 문제의식을 자연스레 연장한 것으로도 보인다(역자 자신이 벤야민 전공자이기도 하지만).

전체 3부로 구성된(영역본은 2부로 재구성돼 있다) 책의 제1부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미학의 '새로운 시나리오', 곧 현대의 심미화 과정이 낳은 이러저러한 결과들에 대한 점검이다. 그 중에서도 첫번째 장은 심미화 과정들 일반에 대한 검토와 비판적 전망으로 채워져 있다. 그 '심미화 과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는 지금 미학의 열기를 체험하고 있다. 이는 개인적인 꾸미기를 넘어서 도시 조형과 경제를 거쳐 이론에까지 이르고 있다. 현실의 많은 요소들이 점점 더 심미적으로 재형성되고 있으며, 현실은 점점 더 심미적인 가설로서 중요시되고 있다."(21-2쪽)

'개인적인 꾸미기'란 자기 스타일의 창조를 말한다(저마다 제멋에 겨워 사는 게 현대인들 아닌가?). '심미적인 가설'이라고 번역된 건 영역본에 따르면 'aesthetic construct'이다. 마지막 문장을 영역본을 토대로 옮기면 "현실의 점점 더 많은 요소들이 심미적으로 치장되고 있고, 현실이란 것 자체가 우리에게 점차 심미적 구조물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심미화 경향을 벨슈는 '표면적 심미화(surface aestheticization)'와 '심층적 심미화(deep-seated aestheticization)'으로 구분하고 이에 대해서 상술한다(물론 그의 초점은 '심층적 심미화'에 맞추어진다).

저자가 표면적 심미화로 분류하고 있는 항목은 (1)현실의 심미적 장식, (2)문화의 새로운 모체로서의 쾌락주의, 그리고 (3)경제적 전략으로서의 심미화, 세 가지이다. "표면적인 측면에서의 심미화는 현실을 심미적 요소로 치장하고 심미적인 분위기로 실재를 아주 달콤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확실히 이러한 표면적 심미화는 아름다운 현실과 우리의 감각과 우리가 원하는 형태에 상응하는 현실에 대한 기본적이고 오래된 요구와 연관되어 있다."(23-4쪽)

뒷문장은 영역본에 따르면 "This certainly takes up an old and elemental need for a more beautiful reality corresponding to our senses and feeling for form"(2쪽)이고, 이걸 다시 옮기면 "이것은 형태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느낌에 부합하는 보다 아름다운 현실에 대한 오랜, 그리고 기본적인 요구와 확실히 연관되는 것이다." 정도가 될 것이다.

 

 

 

 

벨슈도 인용하고 있는 책이지만 이러한 심미화 경향의 짝을 이루는 것은 '심미적 인간'이다(뤽 페리의 이 책은 <미학적 인간>(고려원, 1994)으로 번역/소개돼 있다). "심미적 인간은 예민하고 쾌락적이며 교양 있는 인간이다. 그리고 특히 뛰어난 취향을 가진 인간이며 타인의 취향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 논쟁하지 않는다."(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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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전시회가 '또' 개최되는 모양이다. '또'라고 한 것은 지난 연말에 '앤디 워홀 그래픽'전이 개최된 바 있기 때문이다(관련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1026004). 이름하여 '앤디 워홀 팩토리'. 실제고 워홀 자신이 이끈 예술가 집단을 '팩토리'라고 불렀다. 전시회 소식은 아침에 '필름2.0'에 '앤디 워홀의 영화세계' 기획기사가 다루어지고 있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여기서는 한국일보의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참고로, 그의 영화들은 국내에서는 이번에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라고 한다. 워홀과 팝아트 애호가들에게는 '굿뉴스'이겠다.

한국일보(07. 03. 19) 팝아트 거장 '앤디 워홀 팩토리' 展

‘팝 아트의 왕자’ 앤디 워홀(1928~1987)이 죽은 지 20년, 그의 작품 세계를 돌아보는 대규모 회고전 <앤디 워홀 팩토리>가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15일 시작됐다. 워홀의 고향인 미국 피츠버그의 앤디 워홀 미술관에서 시기별 대표작 200여 점을 가져왔다.지난해 가을 서울대미술관과 쌈지길 전시로 불기 시작한 워홀 붐에 정점을 찍는 대형 전시다.

워홀은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만개한 팝아트를 대표하는 작가다. 팝 아트는 신문ㆍ잡지ㆍTV 같은 대중 매체, 상품 광고, 쇼윈도 등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만화 주인공, 영화 배우 등 대중적인 요소를 작품에 끌어들여 순수 예술과 대중 예술의 이분법을 무력화했다. 작품을 만드는 기법도 실크스크린처럼 상업 광고 등에 자주 쓰는 대량 복제 인쇄 방식을 썼다.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고 했던 워홀은 자신의 작업실을 ‘팩토리’(Fctory), 즉 ‘공장’ 이라고 불렀다. 그는 ‘공장’에서 작품을 대량 생산했다. 똑 같은 이미지를 실크스크린 방식으로, 그러니까 손 작업이 아니라 기계를 써서, 많은 조수를 부려서, 공산품 제조하듯 지겨울 만큼 반복적으로 찍어냈다. 마릴린 먼로, 마오쩌둥 같은 유명인이나 캠벨 수프 깡통 같은 일상 용품의 이미지를 수없이 복제해서 나열했다. 그는 작가의 독창성이나 개성, 감정까지 없애버린 대량생산물로서의 예술을 원했다.

왜 그랬을까. 아니, 그런 것도 예술인가. 친절한 설명은 아니지만 워홀이 했던 말이 있다. “나는 지겨운 것들을 좋아한다. 왜냐고? 당신이 곧이곧대로 똑 같은 것을 더 많이 쳐다보면 볼수록, 의미는 더욱 더 사라져 없어지고, 당신은 더욱 더 텅 빈 상태가 되어 더욱 더 좋은 기분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마오쩌둥이나 캠벨 수프 이미지로 벽을 도배하고 동선을 이리저리 엇갈리게 배치하는 등 워홀의 공장 분위기를 살려 공간을 독특하게 연출했다. 60년대 캠벨 수프 통조림 연작부터 꽃, 마릴린 먼로, 재클린 케네디 등 유명인의 초상 복제, 교통 사고나 추락사, 케네디 암살 사건 등의 신문 보도 이미지를 복제한 재난 연작, 다빈치나 보티첼리 등의 르네상스 명화를 차용한 작품 등 워홀의 주요 작품을 망라하고 있다.

특히 죽음의 이미지를 다룬 재난 연작은, 얼핏 화려하거나 경박하게 느껴지는 워홀의 세계가 지닌 깊은 어둠 혹은 정신적 외상의 흔적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들 연작은 끔찍한 사고나 죽음조차 대중 매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내보임으로써 일상적인 것으로 소비시키고 마는 현대의 상황을, 미동도 하지 않고 차갑게 보여준다. 가발을 쓰거나 여장을 한 채 찍은 자화상도 인상적이다. 실크스크린 작품들 외에 드로잉, 사진 작품, 전시 포스터 등도 볼 수 있다.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은 워홀이 찍은 영화 8편을 상영한다. 워홀은 1960년대 후반부터 100편이 넘는 장편 영화를 제작했다. 감정을 배제한 채 장시간 꼼작하지 않고 극히 일상적인 장면을 관찰하고 기록한 그의 필름은 연출과는 거리가 멀다.

워홀은 스타가 되고 싶어했고, 소원대로 스타가 되어 지금도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다.돈도 왕창 벌었다. 그가 남긴 재산은 무려 1조 달러다. 작업실로 유명인들을 불러 시끌벅적 파티를 할 때도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며 일을 했던, 일 중독자이기도 하다.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워홀이 왜 그리 대단하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번 전시는 그런 질문들에 흥미로운 열쇠를 제공한다. 6월 10일까지.(오미환 기자)

07. 0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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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3-20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주 한국방송 토요일 문화다큐시리즈 주제가 앤디 워홀이었어요.아기 앉고 왔다 갔다하면서 봤는데....잭슨 폴락 이야기 보다가 아기가 울어서...워홀 이야기는 별로 못봣다는.^^

로쟈 2007-03-20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기를 '앉고' 계셨다니 쇼킹합니다.^^; 그가 벌어들인 돈 액수로도 확인되는 것이지만 자본주의와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예술가형이 아닌가 싶어요...

드팀전 2007-03-20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아기를 안고...ㅋㅋ
 

가십 기사가 하나 눈에 띄어 옮겨온다.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했던 일러스트레이터' 노먼 록웰의 도난당한 그림 한 점이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사무실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인데, 소장자인 스필버그는 '장물'인 줄 알지 못하고 구입했다고. 하지만 나의 흥미를 끈 건 록웰도 스필버그도 아니고, 그림의 제목인 '러시아 교실'이다. 실제로 러시아(당시엔 소련) 학생들의 수업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뉴시스(07. 03. 03) 노먼 록웰의 도난작품, 30여년만에 스필버그 감독의 사무실에서 발견돼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했던 일러스트레이터, 노먼 록웰(미국, 1894 - 1978)의 작품 한 점이 도난당한 지 30여년 만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사무실에서 발견됐다고 미 연방수사국(FBI)이 2일(현지시간) 밝혔다. '러시아 교실(Russian Schoolroom)'이란 제목의 이 그림은 지난 1973년 6월25일 미 미주리주의 클레이튼 미술관에서 사라졌었다.

지난 1989년 합법적인 경로로 이 작품을 구입한 스필버그 감독은 영화 제작자 중 한 명이 FBI에 수사를 의뢰한 지난 주까지 이것이 도난 작품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FBI는 전했다. 미술품 감정사들과 FBI의 조사 결과 진품으로 판명된 이 작품의 초기 감정가는 약 70만달러(약 6억 6000만원).



공산주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의 흉상이 놓여진 교실에서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러시아 학생들의 모습을 그린 이 유화 작품은 "처분이 결정될 때까지" 스필버그 감독의 소유로 남아 있을 것으로 드러났다. 이 작품이 도난당할 당시 클레이튼 미술관에 근무하던 메리 엘렌 쇼트랜드는 작품이 사라지던 날 "록웰의 석판화를 주제로 한 특별전이 진행되고 있었다"며 "이 작품은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함께 전시됐던 것"이라고 말했다.

미주리주의 한 고객에게 2만 5000달러에 팔릴 계획이었던 이 작품은 그러나 구매가 결정된지 며칠만에 미술관에 침입한 괴한들과 함께 사라졌다. 쇼트랜드는 "그들이 가져간 것은 이 작품뿐"이었다며 "이 작품만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 후 종적이 묘연해진 이 작품은 지난 1988년 뉴올리언스 주의 한 경매소에서 7만 400달러에 보험금 10%의 조건으로 낙찰된 것으로 확인됐다. 쇼트랜드는 약 15년 전 뉴욕의 한 소규모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판매한다는 광고를 보고 클레이튼 미술관의 모회사인 시카고의 '서클 파인 아트'에 연락을 취했으나 '러시아 교실'을 되찾는데는 실패했다고 말해다.



일상생활의 소소한 순간에 드러나는 인생의 의미를 표현하는데 뛰어났던 록웰의 작품은 '가장 미국적'이란 평가와 함께 많은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록웰은 '러시아 교실'이 사라진지 5년 후인 1978년, 84세의 나이로 작고했다.(정진하기자)

07. 03. 04.

P.S. 생소한 이름이지만(미국은 넓다!) 찾아보니 록웰은 국내에도 소개돼 있다. 어깨가 좁고 얼굴이 긴데다가 수척해보이는 듯한 인상이 '미국식' 그림들과 잘 어울려 보이지는 않지만 아래의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같은 그림은 '아메리카니즘'의 상징으로도 읽힌다. 관련서가 더 소개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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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도 두어 차례 다녀간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매트릭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1929- )의 책들은 나는 부지런히 사들였었지만 언제부턴가 자제하고 있다. 번역서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영역본과 같이 읽지 않을 경우엔 읽는 게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아마도 기억엔 7년전 <예술의 음모>(백의, 2000)가 출간된 이후에 나름대로 주의를 기울이게 된 듯하다. 책을 읽을 수 없었으니까.

 

 

 

 

사실 <예술의 음모>는 출간당시 얇은 분량에 너무 고가이기도 했다. 내 재정형편을 고려하면 더더욱. 보드리야르의 예술론 6편과 보드리야르론 5편을 묶은 이 책을 나는 어제서야 다시 대출했는데(책은 이미 품절됐다), 그건 지난주에 책의 영역본을 구했기 때문이다(지난 2005년에 나온 영역본을 나는 작년에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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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본 또한 제목은 '예술의 음모'라고 돼 있지만 보드리야르의 짤막한 예술론들을 모아놓은 책의 제목이 국역본과 같은 것은 우연의 일치로 보인다. 왜냐하면 국역본이나 영역본 모두 불어본 원저를 번역한 게 아니고(불어본은 없다!) 각각 두 편(역)자가 잡지 등에 실린 보드리야르의 예술론들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제목이 같은 것은 '예술의 음모'란 표제의 글이 그의 예술론을 집약해서 보여주기 때문인 듯하다.

겨우 6편의 글을 모아놓은 국역본과는 달리 영역본은 보다 본격적이어서 인터뷰를 포함해 전부 21편의 글을 싣고 있다. 분량으론 2-3배 차이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얼마나 읽을 수 있느냐이지만. 예컨대, 표제글인 '예술의 음모'(1996)의 첫문단은 이렇다.

만약 욕망의 환상이 주위의 포르노그라피에 몰입했다면, 환상의 욕망은 현대 예술에 몰입했을 것이다. 포르노는 더 이상 만족스럽지 못하다. 모든 욕망의 대향연과 해방 후에, 우리는 성의 투명성의 의미에서 성전환으로 옮겨갔으며, 또한 성의 모든 비밀과 모호함을 없애버리는 기호와 이미지로 옮겨갔다. 즉 성이 욕망의 환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이미지의 하이퍼리얼리티와 관련이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성전환으로 옮겨간 것이다.(7쪽)

지극히 '보드리야르스러운' 문장들인가? '지적 사기'라는 비아냥의 표적이 되기도 했을 만큼 보드리야르의 후기 저작들은 난삽하고 현란하다. 새로운 개념들을 마구 쏟아내는 것도 그의 트레이드마크이면서 독해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한데, 그런 거 다 고려하더라도 인용문은 해독이 잘 안된다(나의 한국어 독해력에 문제가 있는 건가?). 독자의 무능인가? 영역본은 어떤가?

The illusion of desire has been lost in the ambient pornography and contemporary art has lost the desire of illusion. In porn, nothing is left to desire. After the orgies and the liberation of all desires, we have moved into the transsexual, the trasparency of sex, with signs and images erasing all its secrets and ambiguity. Transsexual, in the sense that it now has nothing to do with the illusion of desire, only with the hyperreality of the image.(25쪽)

내가 영역본을 갖다놓고 불어나 독어 번역의 오역을 지적할 때면 그게 아무래도 '중역'과 같은 것이어서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하는 분들이 있는데, 내가 바라는 건 그분들이 갖는 관심이나 걱정만큼 이런 일에 동참해주시는 거다(나도 이런 수고를 좀 덜고 싶다). 옮겨적은 영역본이 국역본과 갖는 차이점이라면 적어도 무슨 말인지는 이해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그리고 보드리야르의 생각이 재밌다는 것도 알겠고). 그럼 한 문장씩 대조해보기로 하자.

만약 욕망의 환상이 주위의 포르노그라피에 몰입했다면, 환상의 욕망은 현대 예술에 몰입했을 것이다. The illusion of desire has been lost in the ambient pornography and contemporary art has lost the desire of illusion.

먼저 'ambient' 같은 단어는 사전을 찾을 만한데, '주위의'란 뜻이고 'ambient air'하면 '주변 공기'를 말한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니까 그만큼 널려있다는 것이겠다. 구문상 병치되고 있는 것은 '욕망의 환상'과 현대예술이 갖고 있는 '환상에의 욕망'이다. 이때 '환상(illusion)'이란 말은 곰브리치의 <예술과 환영>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예술이란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라고 할 때의 '환영으로서의 예술' 말이다. 영역본의 문장은 내 식으로 다시 옮기면, "욕망에 대한 환영이 주변의 포르노에 푹 빠져있다면 현대예술은 환영에 대한 욕망을 잃어버렸다."

포르노는 더 이상 만족스럽지 못하다. In porn, nothing is left to desire.

불어 원문이 어떻게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번역이다. 영역본으로 보자면, "포르노는 욕망에 더이상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는다." 즉, 욕망을 다 탕진시킨다, 정도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말이 되는 것 아닌가? 욕망이란 원래 금지의 베일 때문에 작동하는 것인데, 포르노는 모든 베일을 벗겨내는 것이니 욕망이 남아나질 않는 것이다. 해서 더이상 욕망할 게 없다!

모든 욕망의 대향연과 해방 후에, 우리는 성의 투명성의 의미에서 성전환으로 옮겨갔으며, 또한 성의 모든 비밀과 모호함을 없애버리는 기호와 이미지로 옮겨갔다. After the orgies and the liberation of all desires, we have moved into the transsexual, the trasparency of sex, with signs and images erasing all its secrets and ambiguity.

국역본에 아무런 강조 표시가 돼 있지 않지만, 영역본에 따르면 여기서 'transsexual'은 보드리야르가 '신조어'로 도입하고 있는 말이다. 적어도 그는 이 단어를 다시 정의한다. 한데 웬 '성전환'? 바로 다음 문단에 나오지만 보드리야르는 현대예술이 환영에 대한 욕망을 상실했으며 따라서 '초미적'(transaesthetic)이게 되었다고 말한다(국역본은 이 단어의 불어를 'transthetique'라고 오기했다). 그러니까 그가 오늘날의 예술적 상황을 지시하기 위해서 도입하고 있는 용어가 transaesthetic'이며 이것은 'transsexual'와 병렬적 관계에 놓인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transsexual'은 '성전환'과 무관하며 '성을 넘어선', 곧 '초성적인'이란 뜻이다. 발가벗은 성, 아무런 비밀/베일이 없는 성, 방탕 혹은 난교파티 이후에 도달하게 되는 '투명한 성'을 가리키는 말이 보드리야르에게선 '트랜스섹슈얼'인 것이다. 이성(들)의 육체와 성기를 봐도 '무심한' 상태 말이다. 그런 맥락으로 다시 옮기면, "모든 방탕과 욕망의 해방 이후에 우리는 성에서 모든 비밀과 모호함을 다 제거해버린 기호와 이미지 들과 함께 '초성적인' 상태, 성의 투명성에 도달했다."

즉 성이 욕망의 환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이미지의 하이퍼리얼리티와 관련이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성전환으로 옮겨간 것이다. Transsexual, in the sense that it now has nothing to do with the illusion of desire, only with the hyperreality of the image.

"이제 욕망의 환영과는 무관하고 단지 이미지의 하이퍼리얼리티하고만 연관된다는 의미에서 '초성적인' 상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현대)예술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 보드리야르식 통찰이다: "예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술 역시 모든 것을 미적 평범한 것에 이르게 하기 위해 환상의 욕망을 없애버렸으며, 따라서 초미적인 것이 되었다."(8쪽) The same is true for art, which has also lost the desire for illusion, and instead raises everything to aesthetic banality, becoming transaesthetic.

 

 

 

 

'평범한 것의 미적 변용'은 미국의 철학자 아서 단토의 연구서 표제이기도 하다(이 책은 국역본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이 계열의 가장 대표적인 예술가들이 마르셸 뒤샹이나 앤드 워홀 이후의 팝아티스트들이다. 단토는 워홀의 '브릴로 박스'와 함께 예술이 종언을 고한 것으로 보았는데(<예술의 종말 이후>), 보드리야르의 입장도 대동소이하다. 그런 걸 기점으로 해서 미학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초미적인' 상태에 우리가 도달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다시 옮기면,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 또한 환영에 대한 욕망을 상실하고 대신에 모든 것을 미적인 평범함(범속함)으로 끌어올리면서 '미를 넘어선 것', '초미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 주변엔 포르노만큼이나 예술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예술이 범람하게 되었다. 보드리야르가 얘기하는 '예술의 죽음'이란 그러한 과잉과 범람을 가리킨다. 모든 것이 예술이 됨으로써 예술이란 말의 의미 자체가 실종돼 버리는 현상, 그리고 그런 시대.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가? 혹은 그런 시대로 진입해들어가고 있는가?..

07.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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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2-13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보드리야르를 읽고 있는데 이해가 잘되지 않는게 제 머리탓만은 아니군요.ㅎㅎ

로쟈 2007-02-13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교육을 받고도 읽을 수 없는 책의 80%는 번역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고난도여서 어려운 책은 세상에 20% 미만일 테니까요...

yoonta 2007-02-15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esire for illsuion--->desire for illusion ^^
정말 그런 경우가 종종 있더라구요. 독어본을 해석했다는 책들이 영어본보다도 읽기 힘든 경우. 영어본을 해석한 중역본이 더 읽기가 좋은 경우..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물론 영어본 자체에도 번역상의 오류가 빈발한다고는 합니다만..

로쟈 2007-02-15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했습니다(yoonta님도 꼼꼼히 읽으시는군요^^). 영역본이건 독역본이건 오역이야 다들 있겠죠. 하지만 우리만큼 날림으로야 하겠습니까? 중국번역의 현황을 잘 모르고 제가 '중국산'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번역서들이 최소한의 기본과 성의를 보여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