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아프간 사태에 관한 칼럼을 아침에 읽고 늦게서야 시간을 내 옮겨놓으려 하다가 그만 딴데 눈길을 팔게 되었다(칼럼은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707/h2007073017584024400.htm). 강렬한 원색이 잠시 뒤숭숭한 상념과 착잡함을 잊도록 해준 탓인 듯하다. '텍스트 인 바디스케이프'란 전시회 소식을 대신 옮겨놓는다(그러고 보니 같은 시립미술관에서 하는 모네 전시회에도 못 가봤군)...

경향신문(07. 08. 01) 작가 27명의 ‘텍스트 인 바디스테이프’ 전

미술작품들은 대부분 다양한 소재를 통해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드러낸다. 문학이나 음악 등도 마찬가지다.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로 화가나 시인, 음악가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한길 사람 속’을 나름대로 표현한다. 그 작품들로 관객, 독자, 청중들은 감동하고, 느끼고, 비판과 공감을 통해 또 스스로의 내면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서울시립미술관의 ‘텍스트 인 바디스케이프(Text in Bodyscape)’전은 작가들이 인간의 몸, 신체를 통해 이야기하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끝 없는 욕망이나 욕구, 기억, 지울 수 없는 상처, 꿈이나 희망, 고민, 향수, 불안한 심사 등이 다양한 신체의 풍경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미술관 본관 1층에 마련된 전시장에는 모두 27명의 작가가 회화, 영상, 사진, 조각, 설치작품 80여점을 선보이고 있다. 작가마다 독특하게 드러내는 다채로운 내면세계가 한 여름의 한 때를 뜻깊게 한다. 한 공간에서 다양한 매체를 동시에 선보이면서 매체 간의 특성들도 비교해 흥미롭다.

김윤경은 인도에서 기증 받은 많은 옷들을 큰 하나의 옷으로 재구성한 설치, 곽윤주는 징그러운 칼자국의 상처를 여자의 등에 표현하고 이를 찍은 사진을 통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과거의 사건과 그 흔적을 이야기한다. 한 켤레의 하이힐과 흑백의 여행지 풍경을 담은 안경 등으로 구성된 영상(황혜선)에서도 기억과 연결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느껴진다. 밥그릇을 머리맡에 놓고 바닥에 엎드린 인물상의 조각작품(이종빈)은 배고픈 시절의 한 장면. 녹이 잔뜩 낀 밥그릇에 관객들은 동전과 지폐까지 던져넣고 있어 작품과 관객이 잘 소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 속에 사진작업 당시 상황을 쓴 설명 팻말을 삽입한 김나음의 작품은 촬영 당시의 한 순간을 관객으로 하여금 되살리게 한다.

안재홍의 구리선으로 만든 거대한 인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어쩌면 불안정한 현대인의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것 아닐까. 젖병의 고무 젖꼭지를 활용한 김주연의 설치, 컴퓨터 그래픽으로 벌거벗은 몸 위에 화려한 문신을 그려넣은 김준의 사진, 무한정한 번식을 괴기스럽게 담아낸 이희명의 설치 등은 원초적인 욕망, 욕구의 표현이다.

전시장에는 또 가는 스프링 줄에 인체 일부를 프린트해낸 설치(홍성철), 센서를 통해 관객의 몸짓을 따라 움직이는 눈동자 영상작업(전인혁) 등 작가들의 신선한 아이디어와 독특한 재료 등도 눈길을 끈다. 이종구 구경숙 민재영 이윤태 이배경 정소영 박진호 김병직 송은영 이건용 이수경 김선주 백기은 박수만 전수경 김재옥의 작품도 볼 수 있다. 이은주 큐레이터는 “몸, 신체 담론이 풍성하다”며 “그러나 이번 전시회는 몸 담론과 관계된다기보다는 작가들이 몸이 담고 있는 내면을 어떻게 풀어내는지 보자는 취지”라고 밝혔다. 12일까지.(도재기 기자)

07. 0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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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판 경향신문에서 옮겨온 연재이다. 문광훈 교수의 '천천히 사유하기'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인데, 문학/예술의 종언론이 횡행하는 시대에 아직도 문학/예술에 뭔가를 기대한다면 그건 '세계시민적 공동체'(혹은 '세계공화국')에 대한 기여 지분과 관련해서가 아닐까 싶다. 너무 점잖은 글이긴 하나 카스파 프리드리히의 그림도 구경할 겸 스크랩해놓는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얼음바다’(1823년경)는 얼음덩이 아래 가라앉은 배의 잔해를 보여준다. 칼날처럼 치솟은 얼음조각이 보여주듯, 인간의 노력은 자연의 위력 앞에 쉽게 좌초되고 만다. 그러나 가없는 수평선은 지금의 좌절이 한 때의 일일수도 있음을, 그리하여 더 나은 세계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국가적 단위 속에서 이 국가를 넘어 서로 교류하는 이상적 상태-세계시민적 공동체는 이 ‘더 나은 세계’의 한 예가 될지도 모른다.

경향신문(07. 06. 30) [천천히 사유하기]예술과 세계시민적 공동체

거창한 제목은 날 불편하게 한다. 그래서 망설이게 된다. 그러나 길을 가면서도 때로는 주위를 살펴야 하듯, 한 주제도 그 맥락을 고려할 때 온전해진다. 이 지면을 통해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다루건 그 밑에는 늘 심미적 경험의 가능성이 자리했지만, 예술의 좌표를 제대로 짚으려면 그 환경-내외적 현실조건을 살펴야 한다.

2007년 6월의 한국은 몹시 불안정해 보인다. 흔히 말하듯 그것은 지난 40여년에 걸친 압축성장의 결과겠지만, 그래서 그동안 억눌려온 많은 것들이 하나씩 곪아터져 나오는 까닭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더 길게 보면 우리 사회가 정상화되어 가는 징표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단계에서 간과되거나 희생되는 면을 어떻게 최소화하느냐일 것이다. 그러나 당장 치러야 할 소모와 낭비는 너무 커 보인다. 여전히 불안정한 부동산 가격이나 대선을 앞둔 정파들의 이전투구, 아이들의 지옥같은 학교생활, 가계부채의 증가는 그 몇가지 예일 뿐. 사람들의 눈빛은 우리가 전투하듯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고, 그 어깨는 누군가가 만든 대열 속에 이 다음의 전선으로 끌려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런 불안정은 나라 밖에도 있다.

전쟁과 테러, 미국의 일방주의, 국제기관의 무능, 불공정한 노동조건, 종교분쟁과 문화갈등, 그리고 환경오염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당면 문제는 어느 것 하나 간단치 않아 보인다. 다국적 자본은 후진국의 값싼 노동력으로 이윤을 늘리지만, 일하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정당한 몫을 나눠갖지 못한다. 이 불안은 물가상승과 구조조정으로 더 가중되고 있다. 모두가 불안하다면 중간층이라도 튼튼해야 하는데, 이들 역시 허약하다. 이런 상태에서 많은 잠재된 문제는 ‘불균등하게 작용할’ 공산이 크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U. Beck)은 새로운 유토피아-신자유적이거나 복고적이지 않은 ‘세계시민적인 좌파’가 필요하다고 최근에 말했다. 그에 의하면, 이전에는 권력의 획득이 유토피아의 포기로써 가능했다면, 이젠 유토피아의 포기란 곧 권력포기가 된다. 따라서 이 이상을 실행할 새로운 사회민주주의적 시대가 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독일 사민당 당수의 ‘사회적 세계화’를 언급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 한편의 과제일 수는 없다. 그것이 진보정당이나 시민단체에서 더 본격적으로 논의되겠지만, 보수당이나 일반대중에게도 열려 있다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이런 개방성조차 변질될 수 있다. ‘구조조정’이나 ‘노동유연화’에서 드러나듯, 오늘날의 많은 언어는 원래의 함의를 잃어버렸다. 구조조정이란 이름 아래 이 땅의 비정규직은 노동인구의 절반을 넘어섰고, 힘겹게 쟁취한 노동권은 ‘개혁’의 기치 아래 다시 박탈되고 있다. ‘유연화’가 노동권과 인권을 얼마나 경색시키는 것인지 우리는 잘 안다. 위험사회적 조건은, 벡이 지적하듯 오늘날엔 국내외를 막론하고 더욱 철저히 실현되고 있다. 많은 사상적 종교적 문화적 가치들은, 정부의 것이건 민간단체나 세계기관의 것이건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다. 편재화된 ‘정당성 결손(Legitimationsdefizit)’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시작하여야 하는가? 예술의 방법은 무엇일까? 시를 읽고 그림을 보며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무엇보다 ‘느낀다’. 이전에는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 글로 쓰여 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지금껏 눈여겨보지 못한 것이 화면 위에 그려져 있음을 보게 되고, 무덤덤했던 가슴이 어떤 선율로 울렁댐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듯 어떤 건축물에서는 사람 사는 공간이 이렇게 구획되고 구성될 수도 있음을 새삼 겪는다. 예술은 그 나름으로 심정을 어루만지며 감각에 호소한다. 그것은 정서적 인습을 뒤흔들어 세계를 더 본래의 모습으로 느끼게 한다. 이런 감각적 진동은 사고의 변화로 이어진다. 심미적 경험은 삶의 넓이와 깊이를 다시 느끼게 한다.



예술경험에서 중심은 주체-자아-개인이고, 이 개인의 변화 가능성이다. 그것은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조용하고 미묘한 움직임이다. 예술에는 자연의 원형상(Urbild)-본래적 형식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형식은 지금의 많은 것이 화석으로 남을 거라고 말한다. 반대로 버림받는 어떤 것은 언젠가 존중될 것임을 알려준다. 생성의 맥락을 잇는 가운데 그것은 이미 비판적 이미지를 담는다. 예술과 만나면서 자아는 “섬세하게 조율된 영혼”(쉴러)으로 주형될 계기를 얻는 것이다. 이 계기는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것도 아니고, 강제로 해야 될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느끼는 한’ 하는, 느끼지 않으면 안 해도 되는 무엇이다. 심미적 각성은 철저히 개인의 의사에 맡겨진다. 이 점에서 도덕이나 윤리 또는 법률의 구속과는 다르다. 예술에서 나는 나 밖에 선다.

예나 지금이나 물질적 토대는 더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가 그렇듯이, 증가된 재화가 조화된 세계를 보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시대에서도 왜곡과 폭력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현실에의 항소가 멈출 수는 없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감각의 신선함이고, 이 신선함으로 유지되는 깨어있는 의식이다. 예술은 바로 이 신선함을 불러일으킨다. 예술에는 상투성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이다. 상투성이 타성의 반복이라면 예술은 타성의 경계를 넘어 경험의 배후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다시 물러나자. 예술의 새로움도 오늘날에는 대개 오염되어 있다. 시장과 자본의 개입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과 다르게 느낀다면 우리의 자유는 좀더 넓어지고, 새로 생각하는 만큼 더 깊어질 수도 있다. 이 에너지로 우리는 생활세계 안에서 조금 다르게-편견을 줄이고 거짓을 삼가며 서로를 더 배려할 수 있게 될까? 미시적 실천 속에서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예술은 자유와 자율, 그리고 관용을 연습하게 한다. 생기를 잃지 않은 영혼만이 부당함에도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나와 세계 사이에 조율된 심성이 있다면, 예술을 통한 이 길은 이렇듯 에둘러 있다.(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07.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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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교양서로서는 드물게도 국내 필자에 의한 단독 저작이 나왔다. 다루는 시기도 현대미술이 아니라 16-17세기 서양미술, 종교개혁 시기의 '시각문화'다(전문저술가인 노성두씨의 책들을 참고해볼 수 있지만 대부분이 입문서나 소개서이다). 신준형 교수의 <천상의 미술과 지상의 투쟁>(사회평론, 2007)이 그것이고 '가톨릭 개혁의 시각문화'가 그 부제이다. 알고보니 나도 갖고 있는 책 <파노프스키와 뒤러>(시공사, 2004)의 저자이다. 드물게도 장문의 리뷰기사가 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세계일보(07. 06. 23) 르네상스, 바로크 명화를 읽는 또 하나의 눈!

‘천상의 미술과 지상의 투쟁’은 개신교와 가톨릭이 벌였던 이념투쟁의 역사가 당시의 시각문화를 어떻게 형성했는지 묻고 있다. 16세기는 르네상스의 시기이자 또한 종교개혁의 시기였다. 종교개혁이 1500년 교회의 전통에 중대한 의문을 제기한 이후 두 세기 동안 가톨릭미술은 자신이 그려내는 천상과 지상의 모습을 재확립하고 교회의 의식과 신도들의 신앙수행에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기능함으로써 결국 가톨릭의 교세를 복구하는 사업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것이 이 책의 주제다. 종교개혁의 도전 이후 가톨릭미술이 전개되어 나간 방향과 양상, 즉 가톨릭개혁의 미술사인 것이다.

종교미술은 양식분석이나 도상해석보다는 종교문화의 시각적 분야로서 그 기능의 측면에 주목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모든 종교는 시각체험의 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시각체험은 영성에 도달하기 위한 강력한 방법론으로 흔히 사용된다. 바로 이러한 종교의 시각 영역이 가장 잘 표현되는 곳이 종교미술이다. 따라서 가톨릭개혁의 미술도 사실 미술이라는 말보다는 가톨릭의 시각체험, 시각문화라는 용어로 불러야 더 적합하다.

▲명화(名畵)라는 단어에서 악센트는 이름에 있을까 아니면 그 그림에 있을까?
르네상스와 바로크는 흔히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점의 시기로 생각된다. 따라서 미술사를 배우지 않은 사람들도 라파엘, 카라바조, 티치아노, 루벤스 같은 거장들의 이름쯤은 상식으로 안다. 또한 이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에는 ‘미술’이 아니라 ‘이름’을 보려고 찾아온 관람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르네상스 바로크 미술은 박물관이라는 일종의 보물창고에서 삼엄한 경비와 보안장치의 호위를 받으며 절대적 미의 상징이자 값을 매길 수 없는 문화재로서 군림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와 장치들은 르네상스 바로크 미술을 무언가 고귀한 것, 초월적인 것으로 만든다. 박물관은 신전이며 이 작품들은 시공을 초월한 미의 신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기독교 주제의 작품들을 박물관의 보안장치와 인공조명의 무대에서 떼어내 당시의 시대로, 원래의 장소로 돌려놓고 바라본다. 16-17세기, 종교투쟁의 시기에 만들어진 이 작품들은 미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들이 말해주는 것은 천상의 구원을 향한 열망과 투쟁으로 점철된 인간의 삶이다. 구원과 투쟁, 천상과 지상이라는 양극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공존하는 패러독스의 세계,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 바로크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당시의 세계이고 삶이다.

▲천상의 구원을 향한 열망과 투쟁으로 점철된 인간의 삶
이 시기 미술가들은 예술가라는 자의식과 종교투쟁의 사회가 부과하는 요구 사이에서 저항하기도 했고 타협하기도 했다. 미켈란젤로와 티치아노는 교회와 세속 군주라는 거대 권력을 업고 예술적 성취와 세속적 출세 두 가지를 함께 추구했던 화가들이다. 이들에게 권력의 요구는 기회를 의미했다. 루벤스는 교회와 세속 권력 모두로부터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던 행운아였지만 그가 경탄해 마지않았던 천재 카라바조는 어느 쪽에서도 환대 받지 못한 채 피로와 고독 속에 떠돌다 생을 마쳤다. 미술의 자연주의적 호소력을 추구했던 베로네제는 종교재판의 권위 앞에서 자신의 그림 제목을 바꾸어야 했지만, 그러나 그림은 지켜냈다.

한편 엘 그레코와 보로미니처럼 종교적 열정에 영감을 받아 극단의 환영주의를 추구했던 보다 ‘예술가적인’ 인물들도 있었다. 이처럼 명화의 판테온에서 지상으로 내려진 작품들에서 우리는 당시의 삶을, 당시의 고통과 희열을, 좌절과 성취를 읽는다. 결국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거장의 ‘이름’들이 아니라 이들의 그림으로 결정(結晶)화된 당시의 삶이다. 이들의 그림을 통해 우리도 당시의 고통과 희열을 시각으로 체험하려는 것이다.

▲국내에서 처음 출판된 종교개혁▪가톨릭개혁의 미술사
16-17세기 가톨릭개혁의 미술사는 우리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는 유럽이 제3세계로 뻗어나가던 시기였고, 특히 남미와 동양으로 진출했던 이들이 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가톨릭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제3세계 전도의 첨병은 예수회였으며, 이들은 이미 16세기에 중국과 일본에 왔다.

예수회는 작은 나라인 조선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18세기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가톨릭을 서학이라는 이름하에 중국에서 들여왔다. 이로써 조선은 전 세계에서 자발적으로 가톨릭을 받아들인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18세기에 가톨릭이 조선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개신교에게 유럽의 상당 부분을 잠식당한 가톨릭이 제3세계에 영토를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중국 선교에 엄청난 노력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가톨릭이 들어왔고, 개신교의 유입은 더욱 늦었으나, 현재 동양에서 기독교가 확고히 자리 잡은 나라는 중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이다. 도대체 왜 한국에서 기독교(개신교와 가톨릭 모두)가 그토록 번성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역사적․사회학적 해석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학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구원의 메시지가 이 땅의 문화에 결여되어 있던 그 무엇인가를 채워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기독교가 유럽을 떠나 전 세계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던 종교개혁과 가톨릭개혁의 문제, 또 그와 결부된 미술의 문제는 기독교가 이미 18세기에 들어와 굳건히 자리 잡은 한국의 역사나 문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뿌리내리고 존재하는 한 종교개혁, 가톨릭개혁의 시각문화는 ‘서양인’, ‘타인’들의 문화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역사와 문화의 연장선상에서 우리의 현재로 이어지는 보편적인 유산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보편적 유산으로서의 16-17세기 유럽 기독교미술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다.

천상의 황홀경과 지상의 투쟁 사이에 너무나 먼 간극이 존재하듯이 르네상스 이래로 이들이 품게 된 예술가라는 자존의식과 혼란의 사회가 부과했던 요구 사이에도 화해하기 힘든 거리가 있었다. 이들이 져야 했던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무게는 이들에게 짐과 멍에이면서 동시에 성공과 출세의 기회이기도 했다. 실제로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베르니니, 루벤스 같은 이들은 이 기회를 영리하게 붙잡아 미술사에서 전무후무한 지위와 권력을 누렸다. 자신의 공방에 들어온 12살 소년 틴토레토를 열흘 만에 쫓아낸 거장 티치아노의 비정함, 소년의 재주와 천재성에 경악한 티치아노는 호랑이 새끼를 기를 수는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구원의 약속과 세속적 성취가 공존할 수 있었던 시기, 성공과 명성을 향한 인간의 욕망과 예술의 이상이 공존할 수 있었던 패러독스의 시기가 바로 르네상스였고 바로크였다.

이 책이 출발하고 있는 시점인 하이-르네상스는 전통적인 미술사에서 너무나 이상화되어 있는 시기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예술가라는 자의식이 깨어나고, 인문주의의 부흥으로 인간 존재의 존엄과 아름다움이 글과 그림으로 표현되고, 결국 인류 문명의 최고 정점으로서 이후의 온갖 세대와 제 민족들이 본받을 영원불멸의 규준canon으로 남게 된 이상의 시기가 르네상스라는 것이 고전적 이론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르네상스는 자본주의와 식민주의, 유럽중심주의의 시작이며 무한경쟁과 물질적 성취가 긍정되었던 매우 냉혹한 시기이다. 화가들 개개인의 삶도 리얼리즘의 극치다.

이 책은 신비화된 르네상스를 지상으로 끌어내린다. 이상의 시대라기보다는 투쟁의 시대로서의 르네상스를 조명하고 있다. 르네상스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종교개혁과 가톨릭개혁의 미술사를, 종교투쟁의 시각체험을 글로 재현한 것이다.

저자 신준형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에서 미술사 석사학위를, 위스콘신 주립대학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명지대학교 인문대학 미술사학과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조정진 기자)

국민일보(07. 06. 23) ’천상의 미술과 지상의 투쟁’낸 신준형 교수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서양 미술 관련서는 대부분 초보자용 교양서다. 좀더 깊이 있는 책을 보려면 번역서밖에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신준형(38·사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가 ‘천상의 미술과 지상의 투쟁’(사회평론)을 내놓았다. 16세기 르네상스와 17세기 바로크의 미술사를 추적한 이 책은 이상화된 당시의 미술을 종교문화, 종교체험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르네상스 하면 인문주의나 인본주의를 떠올리게 되는데요, 사실 이 시기는 종교개혁의 시기입니다. 당시 그림들의 70% 이상은 종교화거든요. 인간에 대한 재발견이 이뤄지고 인체의 묘사가 자유로워졌다지만 이들 그림은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신앙심을 호소하는 선전선동용입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는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점의 시기로 생각된다. 미술사를 배우지 않은 사람들도 미켈란젤로, 라파엘, 카라바조, 티치아노, 베르니니, 루벤스 등 거장의 이름은 상식으로 알 정도. 또한 이들의 작품은 지금도 수많은 박물관에서 문화재로 우대받는다. 하지만 저자는 이 작품들은 ‘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천상의 구원’을 향한 인간의 열망과 투쟁의 결과라고 지적한다. 루터로 시작된 종교개혁 이후의 가톨릭 미술이 바로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벌였던 이념투쟁의 역사가 당시 시각문화를 어떻게 형성했는지 초점을 두었어요. 종교화라고 하면 중세시대의 아이콘(성상화)을 떠올리지만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역시 그 앞에서 기도하거나 명상하기 위해 그렸어요. 이것이야말로 당시 그림의 본질을 이해하는 길입니다.”

이 시기의 화가(조각가)들은 예술가라는 자의식을 가진 인물들로 미켈란젤로 등 몇몇 인물들은 불굴의 의지를 지닌 천재로 묘사된다. 하지만 저자는 당시 예술가들이야말로 교회와 군주라는 거대 권력을 업고 세속적 출세를 추구했던 부류하고 역설한다.

당시 예술가들은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게 되면서 무한경쟁의 시대로 들어갔습니다. 그 경쟁에서 살아남은 예술가들이 지금 우리가 아는 거장들입니다.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루벤스 등의 일생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정치적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기독교가 굳건히 자리잡은 한국에서 르네상스와 비로크 미술은 더 이상 이질적인 문화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서양인(타인)들의 문화가 아니라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우리의 현재로 이어지는 보편적 유산입니다.”(장지영 기자)

07. 0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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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교보에 갔다가 예술코너에서 본 신간은 래리 쉬너의 <예술의 탄생>(들녘, 2007)이다. 읽어볼 만한 책이겠다 싶었지만 요즘 여유가 없는지라 구입은 미루었는데, 일단은 관련리뷰를 챙겨두도록 한다. 알라딘의 소개에 따르면, "순수예술의 근대적 개념과 제도들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를 보여주는 책. 시각예술만 논하던 기존의 좁은 스펙트럼에서 벗어나, 좀더 넓고 깊은 역사적 맥락에서 예술에 대해 논했다. 현상학과 시각예술의 권위자인 래리 쉬너 교수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집필했다."고 한다. 물론 '예술'이라고 옮겨진 'Art'는 예술 일반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순수미술'을 가리킨다. 그 근대적 개념의 탄생과 예술제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경향신문(07. 05. 25) 왜 예술이 어려워졌을까

요즘처럼 미술이 일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며칠 전에는 박수근의 작품이 경매에서 최고가를 경신하면서 또 한 번 주목을 끌었다. 이러한 열기 속에서 미술에 관심을 갖고 전시장을 찾는 일반 관람객들의 발길도 늘어나는 추세다. 그럼에도 전시장에서 만나는 많은 관람객들은 여전히, 미술은 너무 난해하여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을 한다. 캔버스에 점 하나 찍은 작품이 왜 예술인지, 옷가지며 쓰레기들을 쌓아놓은 것이 왜 작품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들 한다. 이런 이야기는 비단 미술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난해한 현대음악이나 현대무용에 대해서도 관람자들은 비슷한 불만을 토로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예술인 것일까. 예술은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아니면 혹시 어려워진 것일까. ‘예술의 탄생’은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저자는 예술이 어려워진 결정적 계기를 예술가와 장인이 분리된 시점으로 봤다. 이때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 개념이 창안된 시점이기도 하다. 즉, 과거에는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생활 속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던 미술품들이 18세기 이후, 제도적인 변화 속에서 기능적인 작품들과 그렇지 않은 작품들로 분리되면서 예술과 공예가 나뉜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셰익스피어 등 걸출한 예술가들이 순수한 작가정신의 표상으로써 작품을 창작했던 것이 아니라, 후원자나 주문자의 요구에 맞게 작품을 ‘제작’했다는 사실을 예로 들면서, 예술이 과거에는 뚜렷한 기능과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오늘날 위대한 예술가로 평가받는 이들의 예술품들이 ‘주문제작품’이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일반적인 ‘예술’의 개념 속에서 생각했을 때는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지금은 분리된 ‘장인’과 ‘예술가’가 원래는 한 뿌리였으며, 순수미술과 공예 역시 하나였다는 사실을 강변한다.

장인과 예술가가 결정적으로 분리되는 18세기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시기다. 예술관광객이 등장하고, 미술시장과 개인 콜렉션 문화가 자리잡았다. 미술경매, 미술전시회, 미술관 등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예술과 예술을 둘러싼 제반 환경이 형성되었던 때가 바로 이 시기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작품 자체를 즐기는 문화가 싹트기 시작한다. 기술적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진 장인은 폄하되고, 영감, 상상력, 자유, 천재성 등의 ‘시적’ 속성을 발휘한다고 믿어지는 ‘순수예술’은 칭송받기에 이르렀다.

번뜩이는 영감과 독창적 천재성을 바탕으로 정신적인 세계를 담는 예술은 더 이상 우리의 일상 가까이에서 함께 숨쉬는 ‘생활’이 아니었다.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습이 필요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예술을 교양있는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고귀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음악과 미술을 통해 품위 있는 사회로 입성할 수 있다는 믿음도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이것이 바로 예술이 어려워진 이유인 것이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예술은 예술과 공예의 구분 논쟁뿐 아니라, 상위 문화와 하위 문화로까지 구별되면서 점점 일상생활 속에서의 실용성과는 멀어져간다. 뿐만 아니라 실용성이라는 것은 열등한 것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흐름을 모두가 그대로 수용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저자는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이나 바우하우스 등의 예를 통해, 끊임없이 세분화되어 가는 현상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 또한 언급하고 있다.



결국 저자는,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예술과 공예가 분리되어 가는 과정에 얽힌 이야기들을 다양한 에피소드로 펼쳐보이면서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이라는 개념이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정의에 불과하고, 그렇기에 언제라도 소멸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내가 무비판적으로 믿고 수용하는 모든 것을 다시 한번 의심해보도록 유도한다. 결국, 오늘날 ‘예술’의 역할 가운데 하나가 날카롭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세상의 틈새를 들여다보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우리는 18세기에 태어난 예술의 개념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점 진보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김지연|가나아트센터 큐레이터)

07. 05. 26.

P.S. <예술의 탄생>과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로 떠오르는 것은 스타니스제프스키의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현실문화연구, 2006개정판)이다(나는 책의 초판에 대한 리뷰를 쓴 적이 있다). "미술'은 근대의 발명품이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이 생산한 뛰어난 건물들과 물품들은 우리의 문화에 의해 '차용'되어 미술로 변형된 것이다. 우리가 아는 미술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나타난 현상으로, 미술관에 전시되고, 박물관에 보존되며, 수집가들이 구매하고, 대중매체 내에서 복제되는 그 무엇을 말한다."라고 책은 시작하는데,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데 있어서 유익한 준거점 역할을 해줄 것이다...

덧붙여, 지난주에 나온 예술분야 신간들 가운데 돈이 좀더 있다면 소장해두고 싶은 건 <앤디 워홀의 철학>(미메시스, 2007). 1970년대 중반에 출간된 그의 자전 에세이이다. 구할 엄두조차 못낼 그의 '예술'들에 비하면 '철학'은 상대적으로 아주 저렴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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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이스라엘 작가 에프라임 키숀의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마음산책, 2007)은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이다. 예전에 같은 제목으로 디자인하우스(1996)에서 출간된 바 있기 때문이다. <개를 위한 스테이크>(디자인하우스, 2001)가 작년말 마음산책에서 다시 출간된 데 이어 이번에는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가 말을 바꿔타게 된 것인데, 디자인하우스의 에프라임 키숀 판권을 마음산책에서 모두 인수한 모양이다.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개를 위한 스테이크>는 오래전에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수준에 맞아서가 아니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학원강사를 하던 시절, 초등학생들의 논술교재로 사용했기 때문. 그때 쓴 교재로 아직 기억에 남는 것이 로알드 달의 <마틸다>와 키숀의 <개를 위한 스테이크>이다. 한두 편씩 읽히고는 줄거리와 감상을 쓰게 한 것이 강사로서 내가 한 일이었다. 언젠가 적은 듯하지만, 고등학생들에겐 고종석의 <코드 훔치기>(마음산책, 2000)를 주로 복사해서 나누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 또한 마음산책에서 나온 책이로군.

이번에 판을 바꾸면서 몇 가지 교정을 가했다고 하니까 새로 구입하시는 분들이야 손해는 없을 듯하지만, 디자인하우스판을 갖고 있는 사람과는 무관한 얘기이다. 다만, 현대미술에 관한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연관된 기사('전지현과 낸시 랭 누가 더 예술적인가')가 눈에 띄기에 콜라주를 해보았다.  

한겨레(07. 04. 06) 현대미술은 사기다!

현대미술이여, 침을 뱉어라! 유치원생이 긁적거린 듯한 그림을 보며 고등교육을 받았음직한 사람이 꽤 심각한 표정으로 “모든 사람이 좋다고 하니까 필시 저 그림 뒤엔 뭔가가 있을 거야”라고 중얼거린다. 별로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 뒤엔 벽 밖에 없다. 당신은 지적 야바위꾼에게 ‘낚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전람회의 그림’은 관람객의 지적능력을 시험에 들게 하고 인내력의 극한을 체험하게 한 뒤, 이윽고 그 난해함 앞에 “꿇어!”라고 윽박지른다. 풍자가 아니면 자살이다. 조롱과 야유는 끝이 없다. 현대미술 앞에 무력한 개인은 뭔가를 통해 그 답답함과 모욕감을 털어내고 싶어 이를 박박 간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미술 마피아와 작가에게 업신여김 당하는 하나의 ‘오브제’일 뿐이니.

풍자소설 <개를 위한 스테이크>로 널리 알려진 에프라임 키숀은 이 책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를 통해 복잡하고 난해한 현대예술의 죄악에 대해 유쾌하게 까발리며 대중들에게 퍽(!) 쓸 만한 반격무기를 쥐어준다. 1996년 반성완 교수가 같은 이름으로 번역했던 이 책은 그 동안 절판돼, 소수의 알음알이 입소문을 타고 돌려보았다고 한다. 개인 블로그에서도 종종 “00도서관에서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를 드디어 빌렸다”라는 포스트를 볼 수도 있다. 11년만에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고 잘 읽히게 손질했다고 한다.

피카소전을 보러 가면 그림보다 앞사람 뒤통수를 더 극사실적으로 감상할 만큼 붐비고 피카소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논술시험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저기 길모퉁이를 돌면 바로 피카소 미술학원이 보일 만큼 현대미술은 우리 삶 가까이 있다. 그렇지만 예술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술가 자신이 아니라 좌절된 지식인으로 구성된 작은 국제 마피아조직이라고 지은이는 힘줘 말한다.

그렇게 해서 유명해진 화가들은 엉터리 궁정광대가 되거나 아니면 기성 미술화단의 엉터리 어릿광대가 된다. 지은이는 파카소나 앤디 워홀, 마르셀 뒤샹 등을 앞 뒤 분간 못하는 유머리스트라고 못 박는다. “그들 작품의 오락적 가치를 인식해 마음껏 즐겨라. 실컷 웃음을 터뜨려라.” 이것이 지은이가 말하는 유쾌한 한마디다.

자, 이제 지적 사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마음껏 즐겨’ 보자. 앞의 것은 비평전문용어고 괄호 안은 실제의 예술대상이다. 자기도취적으로 끓어오르는 힘의 유희가 만들어낸 팽창하는 부드러운 구조(왼쪽 모서리의 갈색 얼룩), 리듬을 넣은 선의 아폴론적 완성(두개의 테두리 줄), 시대를 초월한 변용으로 인해 우주적으로 상승하는 세포(무 無), 멜로디의 과잉에 대한 시각적 거리두기로서의 미리 구성한 진테제(뒷면에 작가 사인이 있는 텅 빈 캔버스), 원형적인 비의와 키메라적인 비의의 나선적이고 유동적인 대립(다섯 개의 녹색 사각형), 태아에 근접하는 파괴계수의 폭발을 예고하는 기하학적이고 몽유병자적인 의식의 형태(부풀어 오른 콘돔).

재미있다면, 몰래카메라 얘기 하나 더. 텔레비전은 침팬지 두 마리가 물감으로 뭔가를 마구 그리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이 그림을 ‘제3세계 젊은 미개인전’에 출품한다. 교양있(는 척 하)는 관객들은 추임새 넣듯 주기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참석한 예술전문가들은 최대 찬사를 사용해가며 이 기발한 예술작품을 칭찬하는데 침이 마른다. <디 차이트>에는 “미로의 영향을 부인할 수 없지만 나는 만족과 존경심을 가지고 이 그림을 감상했다”는 평이 실린다. 함부르크 시립미술관장은 “젊음의 신선함과 패기,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작가는 최소한의 도구, 네 가지 색만 사용하는데 처음에는 파란 색만 쓰다가 대칭을 맞추기 위해 위와 아래에 빨간색을 칠했다. 완벽하다.” 몰카임을 알고나서 그들은 카메라를 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을까. 이 소동은 글자 그대로 미술관 옆 동물원이다.(손준현 기자)

낸시랭, < 터부요기니 - 명성황후>, 캠퍼스 위에 혼합매체, 162x110cm, 2006

컬처뉴스(07. 04. 04) 전지현과 낸시 랭 누가 더 예술적인가

낸시랭을 둘러싼 일련의 소동은 나에게 의아한 사건이었다. 처음에 낸시랭에 대한 언론보도를 봤을 때, 나는 무엇이 그를 “주목할 만한 차세대 예술가”로 비치도록 만드는 건지 정말 궁금했다. 그를 ‘특이한 예술가’라고 규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과문한 탓인지, 내 눈에 그의 행위예술이라는 것에서 그 어떤 ‘특이성’도 발견할 수 없었다. 작년에 그가 발간한 책을 읽어봐도 마찬가지였다. 뭐가 ‘도발적’이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도발적인 걸 꼽자면, 미국 유수대학의 의대생이었다가 플레이보이 잡지 모델이 된 이승희보다 못한 게 아닌가 싶었다. 현상의 측면에서 본다면, 낸시랭은 여러 모로 이승희를 닮았는데,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여성해방을 동일시하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진보적’이라는 언론이나 인사들이 의아할 정도로 그에게 친절한 것도 그랬다. 물론 다른 것도 있었다. 낸시랭은 이승희보다 더 노골적으로 돈을 밝혔는데, 해괴하게도, 한국 화폐가 아니라 ‘달러’만을 돈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래서 그는 “미술은 돈”이라고 말하지 않고 “미술은 달러”라고 말했다. 과연 여기에서 그는 피카소를 패러디하고 싶었을까? 모를 일이다. 다만 확실한 건 그에게 달러는 절대적 가치 또는 지고의 쾌락을 뜻하는 하나의 기호라는 사실이다.

내가 놀라웠던 건, 이런 낸시랭의 천방지축에 대해 거의 누구도 적절한 비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강명석이나 진중권 같은 이들이 낸시랭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긴 했지만, 모두 완곡한 태도로 “좀 더 지켜보자”는 수준에서 주춤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이 낸시랭에 대한 비판을 유보하도록 만드는 걸까? 어떤 수컷도 애교 떠는 암컷 앞에서 이빨을 드러낼 수 없다는 동물행동학의 논리를 적용해서 설명한다면, 의외로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다. 어떤 기자 말대로, “애교는 에너지”니까. (참으로 부끄럽지만, 이게 한국의 문화부 기자 수준이다) 그러나 이런 장난이나 치려고 내가 낸시랭을 들먹이고 있는 건 아니다. 정말 낸시랭에 무언가 있는 걸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렇게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낸시랭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본다.

 

 

 

 

 

 

 

 

 

 

  

  

만약 우리가 굳이 낸시랭을 ‘의미 있는 예술가’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이 지점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거다. 그의 작업은 확실히 “예술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세계사적 맥락에서 운위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원에서 그런 게 아니다. 그의 ‘예술’은 예술 따위가 필요 없는, 예술성 같은 건 물 말아 먹어도 시원찮아 할 세계를 드러낸다. 낸시랭에게 ‘예술’은 상품교환체계 속에서만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 낸시랭에게 중요한 건 예술이 아니라, 그 예술이 잘 팔려서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예술성이 아니라 “비즈니스 마인드”다. 그냥 쉽게 말하자면, 그에게 예술은 자본의 축적 수단이다. 상품이 되어버린 예술, 이걸 낸시랭은 “진짜 예술”이라고 부른다. 낸시랭은 확실히 예술의 죽음을 보여주는데, 그 죽음의 집행자는 자본주의다. 그러나 낸시랭은 예술의 죽음을 증언하고 이에 항의하는 게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자본주의에 ‘솔직하게’ 투항해버린다. 이런 솔직한 태도가 낸시랭에 대한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지점에서 여러 가지 곤혹스러운 사태가 발생하는 것 같다.

낸시랭에 대한 착시현상은 여러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황우석 사태와 유사한 맥락에서 낸시랭을 둘러싼 일련의 현상들 또한 ‘여론’에 약한 한국 지식사회의 포퓰리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불어 돈과 쾌락에 대한 낸시랭의 태도는, “즐겨라!”라는 자본주의적 초자아의 명령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따라도 될 것 같은 해방감을 선사한다. 그런데 이는 결국 자본주의로부터 계속 쾌락을 얻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재확인하고 여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낸시랭은 충실한 자본의 전도사다. 왜 건담과 명품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하는가 하는 질문에 낸시랭은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세상살이가 로봇의 차가운 갑옷처럼 강한 척 하고 살아야하는 거잖아요. 거기에 조합시키는 기생은 조선시대의 잔 다르크 같은 존재였다는 걸 부각시키고 싶어서예요. 아이의 얼굴을 붙인 건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사람의 모습을 대변하고 싶어서죠. 아,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평론가들의 말이에요. 저는 그냥 좋아하는 이미지들을 모은 거예요. 특히 명품요. I love 명품! 구찌를 특히 사랑하죠.”

낸시랭이 전하는 평론가들이 쏟아낸 그 말들이 민망하기 짝이 없는 건 둘째치고라도, 이 평론조차 ‘너무 심각하다’고, 자기는 아무 생각 없이 좋아하는 이미지를 그냥 모은 것뿐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낸시랭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그러나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낸시랭이 체현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내포되어 있는 본질적 특성이다. 자본주의는 원칙적으로 해방에 대한 요구를 내재하고 있고, 권위주의와 에고이즘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한다. 이런 맥락에서 ‘박애’같은 고통에 대한 반응을 도덕적 표준으로 등재하기도 한다. 한미FTA에 대한 현 정부의 집착도 이런 자본주의의 해체적 속성에서 자신의 ‘진보적’ 신념을 추인해줄 어떤 ‘실재의 응답’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한다.

낸시랭이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이런 자본주의의 ‘아방가르드적 특징’ 때문이다. 자본주의만큼 예술과 삶의 일치를 주장했던 아방가르드는 없었다. 현대 자본주의의 광고는 아방가르드적 감수성과 상업주의가 결합한 거다. 예술의 산업화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건 산업의 예술화다. 산업은 부르주아의 예술이고, 기계는 부르주아의 작품이다. 이렇게 자본주의 자체가 ‘예술’이 되어버린 상태, 다시 말해서 ‘예술 없는 자본주의’가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낸시랭은 보여주고 있는 거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바로 낸시랭에게 비극일 수밖에 없다.

모든 예술이 광고이고 상품이라면, 낸시랭과 전지현 중 누가 더 ‘예술적’이겠는가?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 질문이다. 낸시랭을 가능하게 만든 그 조건은 낸시랭의 무가치함을 증명하는 역설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비평의 양심 같은 게 아직 남아 있다면, 이제 ‘이건 아니잖아’를 외칠 시간이 된 것 같다.(이택광_문화평론가)

07. 04.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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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7-04-06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는 뱉을라고 했는데 뱉으라고 하니까 잘 뱉을 거 같아요. (그러니까, 이런거죠. 현대미술.)

2007-04-06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4-06 0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06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oule님/ 미술쪽에 관심이 있으시군요.^^
**님/ 뭐 대단한 것도 아니니까 나중에 천천히 읽어보시면 되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톰 울프도 신랄하죠. 아쉬운 건 이런 비판들이 좀더 두툼하고 체계화된 형식으로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인데요, 그런 게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