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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관련 글들이 많아져서 따로 카테고리를 만든다. '번역과 번역가'라고 이름을 붙였다. 최근 번역가들에 대한 주목도 늘어나서 한 일간지에서는 '번역가의 서재'란 꼭지도 연재하고 있다. 번역과 번역가에 대한 관심이 우리의 일상적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확장되고 심화되면 좋겠다. 인문서의 경우 현재 출간되는 책들의 절반 이상이 번역서라는 점은 번역에 대한 관심이 결코 사소한 관심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는지? 여하튼 그래서 따로 카테고리를 만들었다는 것이고 관련 페이퍼들은 시간이 나면 모아놓도록 할 생각이다. 첫 꼭지는 전문번역가 정영목씨를 다룬다. 이미 유명한 번역가이지만 내가 특별히 주목하게 된 건 올해 나온 몇 권의 책들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 아주 두툼한 융 평전이 나온 걸 보고는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알라딘에는 아직 입고되지 않은 듯). 다행히 얼마전에 일간지에 게재된 장문의 인터뷰기사가 눈에 띄어 수고를 많이 덜었다. 충분한 소개가 될 듯싶다.

매일경제(08. 07. 05) “이 사람이 손대면 10만부가 더 팔린다”

“사람이니 실수도 많이 한다.” “칼 융의 책을 번역했을 때인데 황금 당나귀(ass)를 황금 엉덩이라고 옮겼다. 몇 번을 봤는데도 실수를 발견하지 못하고 넘어갔다. 책이 나간 뒤 어떤 분이 점잖게 지적해서 고쳤다. 그런데 번역가를 모델로 소설을 쓰고 있던 한 친구가 주인공의 실수 사례로 그 얘기를 넣었다.”

웬만한 작가보다 더 유명한 번역가 정영목(47)이 털어놓은 실수담이다. 유명인사가 됐지만 그는 여전히 실수도 할 줄 아는(?) 보통사람이다. “때로는 단어를 잘못 보는 경우도 있다. 한번 잘못 본 단어는 눈에 무언가 씌워졌는지 계속 그렇게 본다. 교열을 몇 번 봐도 신문에 오탈자가 계속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보통사람이 현재 손꼽히는 번역가가 된 비결은 무엇일까. 그의 손을 거친 책에는 아주 다양한 표현들이 등장한다. 분명 정확한 우리말인데도 많이 접하지 못한 것들이 곳곳에서 고개를 내민다. 그는 그런 단어나 표현들이 결코 도를 넘어서지는 않았다고 강조한다.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뜻을 가장 충실히 나타내는 단어를 선택해 옮긴다는 것이다. 그런 노력과 능력이 오늘날 그를 가장 잘 나가는 번역가로 만든 셈이다.



번역가의 길

정영목은90년대 초 첫 번역서로 ‘세계 미스테리 걸작선’을 낸 뒤 지금까지 100권 정도를 옮겼다. “숫자 감각이 없어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 정도 될 것”이라고 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그가 옮긴 책들은 대부분 베스트셀러 대열이 끼였다. 마이클 클라이톤 원작의 ‘쥬라기 공원’이나 ‘펠리칸 브리프’ ‘가스실’ 등 존 그리샴 원작의 스릴러물 등이 그랬다. 가장 최근에 나온 게 코맥 매카시의 ‘로드’ 역시 베스트셀러 대열에 들었다.

정씨는 소설 뿐 아니라 비소설 번역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미 ‘마르크스 평전’이나 칼 융의 ‘사람과 상징’ 등을 옮겼다. 지금도 두 가지 번역을 하고 있는데 둘 다 비소설이다. 그중 하나는 칼 융 평전의 성격을 띤 내용인데 ‘융-분석심리학의 창시자’라는 제목으로 곧 나올 것이라고 했다. 또 하나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라는 것으로 러시아와 영국이 중앙아시아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던 내용이라고 했다.

90년대 초 처음으로 번역한 책이 나왔지만 사실 그의 번역인생은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정 씨는 평범한 삶을 원해 부모가 원하던 법대나 상대를 마다하고 영문과에 진학했다. 80학번이니 시절이 뒤숭숭할 때다. 학교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번역 일을 했다. 대학 졸업 후 잠시 문예진흥원을 다니던 그는 공부를 더 하려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렇지만 공부는 진척이 더뎠다. 그렁저렁 지내면서 ‘새벗’이라는 잡지에 실릴 글을 번역했다. 이 인연으로 한 지인이 출판사를 소개해줘 본격적으로 번역에 손을 댔다.

정 씨는 89년에 결혼을 했는데 이것이 본격적인 번역 인생을 살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고 한다. “91년 첫 아이를 낳았다. 그 무렵부터 번역이 생계의 중심이 됐다.”  지극히 평범한 대한민국 가장의 전형이다. 우연한 기회에 번역 일을 시작해서인지 그는 “한참 뒤에야 ‘업’ 의식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직업의식이 투철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는 것. 그는 스스로를 중간(2세대 번역가)세대로 분류한다. 본업으로 하고 있지만 의식은 철저하지 못하다는 것. 지금 번역을 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본업으로 의식을 갖고 해서인지 아주 철저하다고 한다. 반면 선배들은 또 다르다고 했다. 안정효, 김석희 씨 등 1세대 번역가들은 소설가로 글을 쓰면서 겸업 형태로 번역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세월은 보통사람인 그를 전문가로 만들었다.

‘그들은 누군가가 팔짱을 끼는 것을, 초조한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이를 잡고 흔드는 것을,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한쪽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을 살피며, 계속 그런 행동을 해주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존 그리샴 ‘사라진 배심원’에서, 2003년 번역)

‘호수 건너편에서 어떤 생물이 둑 모양의 돌로 둘러싸인 웅덩이에서 물이 뚝뚝 듣는 입을 들어올리더니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거미알 같은 희끄무레한 눈으로 빛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물은 보이지 않는 것의 냄새를 맡으려는 듯 물 위로 낮게 고개를 숙였다. 벌거벗은 채 웅크린 생물은 창백하고 투명했다. 설화석고 같은 뼈가 뒤쪽 바위에 그림자로 비쳤다. 내장과 고동치는 심장도. 흐릿한 유리 종 안에서 팔딱이는 뇌도. 생물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낮은 신음을 토하더니 비틀비틀 몸을 돌려 소리 없이 어둠 속으로 성큼성큼 뛰어 갔다.’ (코맥 매카시 ‘로드(The Road)’에서, 2008년 번역)

9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나온 그의 번역물들을 보면 문체나 단어 선정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진전된 것을 볼 수 있다. 원저의 차이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작가가 사용한 단어나 표현 등을 훨씬 더 잘 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엔 만족하지 않는 그의 자세가 잘 반영되고 있다. 가장 잘 된 번역을 꼽으라고 하자 그는 “앞으로 나올 것이다”라고 했다.

“내고 나면 늘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보면 볼수록 고칠 것이 많아져서 점점 더 여러 번 보게 된다. 이렇게 하다가는 아마 무한히 고치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는 보다 완벽한, 보다 실수 없는 번역을 위해 정신을 집중한다. 그게 “굉장한 압박으로 다가온다”고 했다. 그렇지만 조금은 다른 이유로 술을 즐긴다. “옛날 사식집 다니고 할 때는 책 나오면 술을 나눴다. 지금은 웬만한 것은 이메일로 처리하니 그 때보다 교류는 줄었지만 그래도 작은 출판사들은 거의 동호인처럼, 친구처럼 만나서 일하기 때문에 지금도 책이 나오면 술잔을 건넨다.”

대신 건강은 등산으로 다진다고 했다. “앉아만 있으면 푹 가라앉기 때문에 자주 간다. 재미도 있고 몸에도 좋고. 북한산을 주로 가는데 가끔 멀리 가기도 한다.” 빨리 걸으면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일산의 친구 사무실 한 귀퉁이를 얻어 쓰고 있는 그는 매일 출근한다. 또 거의 매일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간다. 이렇게 해야 일 년에 4~6권 정도를 낼 수 있다고 했다. 책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초고잡고 검토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만만찮은데다 출판사에서 보고 다시 역자교정까지 보아야 하므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

최근 여러 권이 나온 것은 전에 번역했는데 출판사에서 들고 있다가 한꺼번에 내놓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공한 번역가지만 그는 경제적으로 크게 여유는 없고, 그렇다고 특별히 아쉽지도 않은 정도라고 했다. 비슷한 나이의 직장인들 월급과 비교하면 많지 않은 수입이라는 것. 그렇지만 대우는 예전보다 나아졌다. “(원고료는) 매절(저작권을 통째로 넘기는 것)로 받기도 하고 인세를 받기도 한다. 옛날에는 매절 밖에 없었지만 요즘엔 섞어서 받는 게 많다. 돈도 돈이지만 아무래도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조금은 더 신경을 쓰지 않겠나.”

번역한 책 가운데 추천할만한 책을 꼽으라고 하자 그는 “글쎄. 다들 괜찮은 책인데”라면서 “꼭 꼽으라고 한다면 코맥 매카시 의 ‘로드’나 마커스 주삭의 ‘책도둑’, 존 반빌의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등이 어렵지만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독자의 수준이 높아져서 어려운 책도 좋은 책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독자의 토양은 우리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넓고 또 열려 있다는 얘기다.

정영목의 번역론

“말이란 게 의식과 무의식을 합한 것의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어떤 게 좋은 번역인지는 답이 없는데 구지 말한다면 ‘빙산의 일각’인 말을 풍성하게 반영한 게 아닐까. 작가가 쓴 글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번역가는 그중 한 가닥만 가져올 수도 있고 또 피상적으로 가져올 수도 있다. 그 의미를 충실히 옮기는 게 좋은 번역이다.”

좋은 번역에 대한 그의 정의다. 그렇지만 그는 번역가의 ‘절제’도 강조한다. “원문을 얼마나 충실히 따랐는가를 중시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표현도 원문이 그렇지 않다면 과잉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번역을 할 때 작가가 튀는 표현을 쓰면 나도 튀고, 작가가 가라앉는 표현을 쓰면 나도 가라앉고, 작가가 진부하게 하면 나도 진부하게 한다. 작가가 진부하게 간다면 거기엔 나름대로 진부하게 간 뜻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래도 그의 손을 거친 책에는 참신한 표현이나 단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에 대해 그는 “튀는 표현은 아니다”고 못 박았다. “가령 로드에 나오는 ‘빗방울이 뚝뚝 듣다’라든가 ‘우듬지’ ‘날빛’ 등의 표현이나 단어들은 생소할지는 몰라도 제법 쓰이는 것 들이다. 문맥에 맞으면서 그 정도면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해 사용했다.”

외국 글을 옮기면서 이런 표현들을 동원할 수 있는 비결을 그는 소설에서 찾았다. “우리나라 소설을 보면서 배우려고 애를 쓴다. 소설가들은 우리말 전문가들이다. 소설은 좋은 표현의 보고이다.”
주위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그때그때 좋은 표현들을 메모하고 기억하는 것은 또 다른 그의 숨은 노하우다.

우리말의 어휘가 영어의 어휘에 비해 부족하다는 느낌은 받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 ‘눈’에 대해 에스키모들은 여러 가지 표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특수한 경우는 예외이겠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영어 어휘가 꼭 많은 것만은 아니다”고 말한다. 많은 경우 단어라는 알갱이가 정형화되지 않고 뿌옇게 안개처럼 싸여있다는 것. 이 때문에 “번역은 블록을 끼우듯 단어를 맞춰나간다고 되는 게 아니다”고 한다. 단어 하나하나를 끊어가며 최대한 살려내는 게 중요하지만, 때로는 단어를 1대1로 대응시키는 것 이상으로 문맥을 읽어내는 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영어에만 있고 우리에겐 없는 표현이 나왔을 때 그는 ‘최악의 경우에 쓰는 비법’을 공개했다. “영어를 있는 그대로 써주고 주석을 다는 방법”이다.

그는 좋은 번역을 하는 또 다른 노하우도 공개했다. 다름 아닌 ‘역량 있는 좋은 편집자를 만나라는 것.’ “편집자는 제1독자로서 번역한 글을 처음에 보고 리드를 해 준다. 어떤 표현이 ‘생경하다’거나 ‘참신하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데 편집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책이 달라진다.” 편집자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수정을 요구하기도 하고 부족한 집중력을 보완해주기도 하는데 “다행히 출판업이 다른 산업에 비해 박봉인데도 뜻과 사명감을 가진 양질의 인력이 많다”며 그는 낙관했다.

그러면서 번역의 길을 걸으려는 후배들에게 조언도 했다. “먼저 많이 읽어야 한다. 연애할 때 한 마디 듣고 파악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말에 담겨진 뜻을 파악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 “다음으로 좋은 편집자를 만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기 원고를 객관화해주는 사람이 편집자이다. 좋은 편집자를 만나는 게 운이기도 하지만 일정부분은 자신의 노력도 따라야 한다.”

‘번역은 머리가 아닌 엉덩이로 하는 것’이란 지론을 펼치는 그는 유능한 번역가가 되는 비결 역시 ‘시간’에서 찾는다. “절대적 시간을 투여하지 않으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게 번역이다. 한번 보는 것보다 두 번 보는 게 나으니 어쩔 수 없다.”

많은 책을 번역해 냈지만 그는 책을 쓰고 싶은 욕심은 없다고 했다. “번역은 작가보다는 배우나 연주자와 비슷하다. 언어를 다룬다는 점은 같지만 작가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시나리오 작가는 자기 목소리가 있지만 배우는 자기 목소리가 있으면 안 된다. 번역가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책을 쓰라는 것은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쓰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워낙 이 길을 오래 걸어서 다른 길로 간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한다고 했다.

■ 정영목은
서글서글한 눈매에 강원도 억양이 약간 섞인 정감어린 말투. 정씨를 처음 접했을 때의 이미지다. 서울서 나서 서울서 자랐다. 말투는 원주가 고향인 부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 관악고와 서울대 영문과(80학번)를 나왔다. 1년 남짓 문예진흥원에서 일하다 공부를 더 하려고 들어간 서울대 대학원을 늦깎이로 졸업했다. 최근엔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겸임교수로 강의도 하고 있다. 첫 작품인 ‘세계 미스테리 걸작선’을 비롯해 ‘펠리컨 브리프’와 ‘쥬라기 공원’ ‘가스실’ ‘마르크스 평전’ ‘서가에 꽂힌 책’ 등 수 많은 책들을 번역해왔다. 최근에 ‘책도둑’과 ‘로드’ 등을 번역했다. 전문 번역가로 출판사에서 의뢰가 왔을 때 자신이 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거절할 수 있을 정도로 입지를 굳혔다. 그렇지만 번역은 팀으로 하는 것보다 단독으로 하는 것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글·사진 = 정진건 기자)

08. 0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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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8-07-30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분 덕을 많이 봤어요.. 책이 술술 읽힙니다. ㅎㅎㅎ

로쟈 2008-07-31 15:41   좋아요 0 | URL
요즘 들어서 더 좋아진 게 아닌가 싶어요...

paviana 2008-07-30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스테리걸작선부터 봤으니 저 분 책 알게 모르게 참 많이 읽었네요. ^^

로쟈 2008-07-31 15:41   좋아요 0 | URL
알게 모르게 팬들이 많군요.^^

hnine 2008-07-30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보다 훨씬 나이가 많으신 분인줄 알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로쟈 2008-07-31 15:41   좋아요 0 | URL
아직 40대니까 '젊은' 편이죠...

perky 2008-07-31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에 대해 깐깐하기로 유명한 '강대진'씨가 '잔혹한 책읽기'에서 정영목씨의 번역에 대해 칭찬을 아주 많이 하셔서 이분이 번역하면 무작정 신뢰부터 가더라구요. (사실 번역의 질도 과히 수준급이구요.) 평소 궁금했더랬는데, 정영목씨 이렇게 생겼군요. ^^

로쟈 2008-07-31 15:43   좋아요 0 | URL
그런 대목이 있었나요? 여하튼 좋은 번역자들이 인정받는 풍토가 마련돼야겠습니다...

아프락사스 2008-07-31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 하면 최악의 번역을 쏟아내는 번역가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죠. 특히 SF팬덤 사이에서 그런 평가가 강한데, 일각에서는 정성호 씨와 엮어 '정 Bros.'라고 부를 정도더군요. 왕년에 정영목 씨 번역으로 <낙원의 샘>이 출간되었을 때는 최용준 씨가 번역전문평론서 <미메시스>에서 무자비한 혹평을 가하기도 했죠. "얼치기가 감히 SF를 번역할 꿈도 꾸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는데, 귀담아들을만한 내용입니다. 최용준 씨 본인이 번역 관련 상을 여럿 수상한 적도 있는, SF팬덤 내부에서는 상당히 신뢰받는 역자 중 하나라는 걸 감안하면 더욱 그렇죠.

뭐, 번역 전문 비평서라 하는 미메시스도 그 간행처인 열린책들이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오역 사태에 휘말리면서 더이상 간행되지 못하고 폐간되어버렸으니 이 또한 재미있는 일이긴 합니다만.

로쟈 2008-07-31 15:45   좋아요 0 | URL
기사에도 있지만 번역자들도 시행착오를 거치지요. 저도 <영원한 이방인>은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지젝이 만난 레닌>을 읽으면서 감탄했습니다. 일부 실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단기간에 그렇게 가독성 높게 이론서 번역을 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라서...

노이에자이트 2008-07-31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의 대결에 대한 번역을 준비 중이라니 정말 기다려집니다.제가 러시아와 영국의 팽창정책이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저는 작년부터 중동이란 단어 안쓰기로 했어요)에서 충돌한 데 대해 관심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로쟈 2008-07-31 15:45   좋아요 0 | URL
저도 기대가 되는 책입니다.^^

람혼 2008-08-01 0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golden ass'를 '황금 당나귀'가 아니라 '황금 엉덩이'로 번역하는 '실수'를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김소진의 소설에서 나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게 번역가 정영목의 진짜 이야기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차용해 쓴 '한 친구'가 김소진이었다는 사실, 그런 것들이 이 글을 읽는 여담으로서 개인적으로 참 흥미롭습니다.^^

로쟈 2008-08-01 12:21   좋아요 0 | URL
얼핏 기억이 나네요. 김소진이 2년 후배였겠는데요...

달리는여자 2009-04-27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영목 선생님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입니다. 인터뷰 내용 보니 새삼 반갑네요- 제 미니홈피로 퍼갑니다- (감사)
 

교수신문에서 인터넷 번역비판과 관련한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461). 나 자신도 관련돼 있고 지난주에는 기자의 간단한 이메일 설문에 답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기자는 지난번 한국일보 기사에 힌트를 얻은 듯하다(http://blog.aladin.co.kr/mramor/2144892). 인터넷 번역비판과 논쟁의 장을 조금씩 열어가는 일에 이 블로그도 한몫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확인하게 된다(사실 주변에서는 무슨 '뻘짓'이냐는 시선을 더 많이 받고 있지만)...    

교수신문(08. 06. 30) '장미밭에서 춤추기’를 더 긴장케 하는 블로거의 힘

인터넷이 번역 비판과 논쟁의 장을 조금씩 열어가고 있다. 다른 매체에 비해 분량, 형식, 시기 등의 제한이 없으며 많은 사람들과 소통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터넷 서점 블로그는 오역 제기의 근원지로 톡톡히 한몫하고 있다.

파리8대학 명예교수인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2007)의 오역 비판은 명예 훼손 고소 사건으로까지 번진 케이스다. 도저히 읽지 못할 번역이라는 게 ‘번역 비평 누리꾼’들의 한결같은 비판이었고, 이 책의 번역자 백승대씨가 알라딘 서점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쟈’, ‘FTA반대balmas’, ‘람혼’ 등을 고소한 것. 이들 중 ‘로쟈’, ‘FTA반대balmas’는 ‘이유없음’으로 현재 고소가 기각된 상태이고 ‘람혼’은 그 이후 다시금 자신의 블로그에 이 책 서론 전체에 대한 장문의 번역 정밀 독해를 올렸다. 지금 이 책은 전량 회수돼 판매 중지에 들어간 상태다.  



오역 정밀 지적해 번역서 전량 회수
백씨가 공개한 이력에 따르면, 그는 2001~2002년 교보증권에 근무했으며 2002년부터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주식투자에 대해 연구했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그는 “프랑스 철학에 대해 공부해본 적은 없지만, 인터넷에서 번역할 만한 책을 찾아보다 제목이 특이해서 저자를 알아보니 유명한 사람이라서” 번역하게 됐고 “불어 실력은 그다지 없지만, 사전 보고 한글로 옮기는 수준은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워낙 논쟁할 상대들이 아니라서 응대를 하지 않았다. 번역 문제라기보다 그들이 나를 음해하려 했기 때문”에 고소한 것이라고 밝혔다. 문제가 불거지자 인간사랑 출판사 편집부 홍성례씨는 “비전공자에게 번역을 맡긴 것에 대해 책임을 느낀다”며 “번역자와 합의가 되면, 새로 번역자를 모색할 계획”이라고 입장을 정리했다.



앞선 사례처럼 거센 반발도 있지만, 대부분은 역자나 출판사측이 침묵으로 일관한다는 게 ‘번역 비평 누리꾼’들의 중론이다.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체계이론1·2』(한길사, 2007)에 대한 번역 비판을 <연세대 대학원신문>(제157호)에 기고하고, 분량 상 지적하지 못한 오역들을 인터넷에 올린 블로거 ‘바다라네’는 출판사나 역자에게서 “전혀 반응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Gesellschaft’를 ‘공동체’로 옮긴 것은 최악의 번역어 선택이었고 그 외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번역어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문장 오역도 2권 후반부에 이르면 거의 한 단락에 하나 이상씩 나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번역자 박여성 제주대 교수(독일학과)는 “(오류를) 잡아내지 못한 부분이 일부 있었지만, 번역 용어상의 차이 부분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답했다. 더불어 한길사 편집부 배경진씨는 “이후 역자와 상의해 잘못된 부분은 고칠 것”이라고 밝혔다.



인터넷의 장점인 상호 소통력이 번역 논쟁에 활력을 불어 넣기도 한다. 지난달 말께 콜럼비아 대학에서 미학을 가르치는 아서 단토의 『일상적인 것의 변용』(한길사, 2008)의 번역 몇 구절을 놓고 ‘노이에자이트’, ‘qualia’, ‘제레카폴’, ‘규’, ‘carboni68’ 등의 블로거들이 댓글을 통해 논쟁에 참여했다. 50여개가 넘는 댓글이 이어지다 ‘qualia’가 세 가지 쟁점을 간추려 아서 단토 교수에게 메일로 질문을 보내 답신을 받아냄으로써 논쟁은 마무리 됐다. 그 결과, 역자가 ‘하찮은 대상들’로 번역한 ‘these unedifying objects’는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대상들’로, ‘가장 가당치 않은 곳(the least likely places)’의 ‘places’도 역자가 선택한 ‘전시장’이 아니라 ‘qualia’가 지적한 것처럼 ‘전시물’로 이해하는 게 올바른 것으로 판정났다. 



흔치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인터넷 상의 오역 제기로 인해 번역서가 재출간 돼 ‘책 리콜’에 들어간 사례도 있다. 새뮤얼 이녹 스텀프, 제임스 피저의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열린책들, 2004)는 지난해 11월말께 ‘히드라’라는 블로거에 의해 오자, 오역이 900여 군데 넘게 지적당했다. 예전 종로서적에서 출판된 것(2판)을 다시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재출간하는 과정에서 새로이 번역 저본으로 삼았다고 한 7판 내용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결과였다. 얼마 전 개역된 이 책은 그간 출간된 1쇄~9쇄까지의 책들을 대상으로 지난 23일부터 교환에 들어갔다. 열린책들측은 “많은 독자들이 읽어 주셨던 만큼,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이번 책 리콜은 출판사로서 당연한 조처였다”고 밝혔다. 자세한 교환방법을 알려면, 이 출판사의 홈페이지(http://www.openbooks.co.kr)를 참고하면 된다.
 
번역비평에 관한 인식 개선돼야

그간 인터넷을 통해 번역 비평을 해온 누리꾼들은 번역 질 향상을 위해 인터넷의 장점을 보다 적극적으로 살려야 할 필요를 강조했다. 이를테면, 번역 문제를 다루는 전문 매체를 인터넷상에 운영해 서평을 겸하면서 번역 문제를 검토하거나 저작권이 없는 고전들의 경우 공동 번역과 비평을 인터넷을 통해 활성화 하는 방안도 모색해 볼만하다는 의견을 줬다. ‘바다라네’는 “출판사로서는 모험이겠지만, 오역 지적이 이루어지고 역자와 직접 논쟁을 가능케 하는 공간을 인터넷상에 마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출판사를 통한 ‘오역 공개 접수처/논쟁장’에 미치지 못하지만 자신의 역서에 대한 정오표를 인터넷 상에 스스로 공개한 번역자들도 있다.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등을 번역한 ‘FTA반대balmas’와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 등을 번역한 강유원씨가 그들이다. 

물론, 인터넷이 ‘오역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 전에 번역 출판·비평에 대한 인식 전환과 토대 구축이 시급하다. ‘로쟈’는 “역자, 편집자, 독자가 서로 생산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저마다의 몫과 역할을 인정해주는 문화가 정착되면 좋겠다. 인문 번역자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나아져야겠고, 번역비평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개선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FTA반대balmas’는 “번역물의 향상을 위해서는 선진국처럼 ‘총서’ 체제를 도입하는 게 시급한 과제다. 학계의 유능한 학자들이 전공과 관련된 ‘총서’를 맡아서 운영하면 번역의 질도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고 밝혔다.

자신이 번역한 ‘역자 후기’만을 모은 두 번째 책을 지난달 펴낸 번역가 김석희씨는 번역 작업을 고통과 쾌락이 공존하는 ‘장미밭에서 춤추기’라고 표현 한 바 있다. 번역자가 장미 가시에 많이 찔릴수록 그 번역서를 읽는 독자들은 장미 향기를 보다 진하게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인터넷을 통한 번역 비판과 논쟁에도 장미의 가시와 향기가 공존하고 있다.(김창한 객원기자)

08. 07. 01.

P.S. 기사에서 언급된 루만의 <사회체계이론> 번역비판은 최근 출간된 <니클라스 루만으로의 초대>(갈무리, 2008)의 역자이자 루만 전공자인 정성훈씨의 것이다. 루만의 대저를 읽을 계획이 있는 독자라면, 미리 이 '입문서'부터 읽는 게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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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7-0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산적인 '뻘짓'을 하고 계신 ^^ 로쟈님이 좋습니다. 위에 언급된 발마스님과 다른 분들도. 돈도 안되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지만 의미있는 일을 하고 계신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

로쟈 2008-07-01 17:06   좋아요 0 | URL
뻘짓을 하더라도 '생산적'이려고 애는 쓰고 있습니다.^^;

주니다 2008-07-01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저도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교환해야겠습니다.『일상적인 것의 변용』은 원서도 복사해놨는데, 읽을 시간과 정신적 여유가 없네요. 로쟈님의 여름방학은 언제나처럼 바쁘시겠죠?^^

로쟈 2008-07-01 17:05   좋아요 0 | URL
단토의 책 자체가 후기 저작들보다 읽기 까다롭더군요. 사실 오늘부터야 방학이긴 한데(계절학기가 있지만) 밀린 일들이 '쓰나미' 수준으로 덮쳐오고 있습니다. 살아남아야 할 텐데...

노이에자이트 2008-07-02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서 단토 논쟁에서 저는 별로 댓글 분량도 많지 않았는데 첫번째로 참여했다고 이런 기사에 나오는군요.

로쟈 2008-07-02 00:13   좋아요 0 | URL
^^

람혼 2008-07-02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운 기사로군요.^^

로쟈 2008-07-02 00:49   좋아요 0 | URL
람혼님이 더 반갑습니다.^^

열매 2008-07-02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수신문같은데서 이런 이슈를 상세히 다루어줘야 하는데 이제라도 공론화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학술계의 다양한 첨예한 이슈들이 학술계 내에서의 자정작용으로 걸러져야 하는데 그런 필터링의 기능을 할 곳도 마땅히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을 해야할 곳이 딴짓만 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니 답답합니다.
<철학과 현실>이라는 철학자들이 내는 잡지를 보면 무슨 보수우파들의 집산지같습니다.
한국 기성의 철학과 교수들의 현실 파악이 얼마나 나이브하고 우파적이며 기성권력에 굴종적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학술적 기능이라도 제대로 하면 좋으련만 그렇지도 못하니 '철학'을 잡든 '현실'을 잡든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해주십사 부탁드리고 싶은 심정으로 한번씩 도서관가면 훑어봅니다. 볼 때마다 실망하구요.

로쟈 2008-07-02 01:11   좋아요 0 | URL
저도 안본 지 오래됐는데, 점점 얇아지고 있더군요...

Kitty 2008-07-02 0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 철학에 대해 공부해본 적은 없지만, 인터넷에서 번역할 만한 책을 찾아보다 제목이 특이해서 저자를 알아보니 유명한 사람이라서” 번역하게 됐고 “불어 실력은 그다지 없지만, 사전 보고 한글로 옮기는 수준은 된다” <- 눈을 믿을 수가 없네요. 이게 정말 번역자가 한 말인가요? 대담하다고 해야할지 솔직하다고 해야할지 어떤 의미에서는 존경스러운(?) 분이네요. 출판사는 또 뭐랍니까...

로쟈 2008-07-02 19:18   좋아요 0 | URL
좀 어이없는 경우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02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을 둘러싼 논쟁이 법정까지 가다니...무서워요.

아열대 2008-07-03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밥벌이가 바빠서 확인을 못한 사이 기사까지 나갔군요. ;;
그나저나 기사는 'places'를 전시장이 아니라 전시물이라고 못을 박아 놓았네요. 저는 아직까지도 전시장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
단토의 답장을 보아도 - once we set the object at an aesthetic distance, i.e., once we cannot use it, then we might begin to see that the object is beautiful. The urinal that Duchamp tried to exhibit in 1917 might have been set at an aesthetic distance by virtue of its placement in an exhibition space, like a gallery-라고 되어 있는데 이 구절의 어디를 보아 'places'를 전시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인지 요령부득이로군요. 단토의 설명은 변기라는 오브제가 뒤샹에 의해 전시장에 놓였기 때문에 오직 '사용'의 관점이 담길 뿐인 일상의 눈으로는 발견하지 못할 미적 거리가 생겨나는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로쟈 2008-07-19 11:02   좋아요 0 | URL
덕분에 다시 읽어보니 모호함이 다 가시는 건 아니군요...

김상호 2008-07-14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 철학에 대해 공부해본 적은 없지만, 인터넷에서 번역할 만한 책을 찾아보다 제목이 특이해서 저자를 알아보니 유명한 사람이라서” 번역하게 됐고 “불어 실력은 그다지 없지만, 사전 보고 한글로 옮기는 수준은 된다”와 정말 대단하네요 @.@

로쟈 2008-07-19 11:03   좋아요 0 | URL
'올해의 번역자' 후보입니다...
 

'美 저명 미학자 아서 단토의 책 오역논쟁'이란 기사 타이틀이 있기에 뭔가 해서 클릭해봤더니 '로쟈의 저공비행'에서 벌어진 일을 정리해놓은 기사다(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806/h2008061802344784210.htm). '알라딘통신'에나 들어갈 만한 내용이 일간지에 실려 있어서 흥미롭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필경 기사거리가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 하더라도 관심있게 읽어주는 분들이 있다는 건 불쾌한 일이 아니다. 기사를 자료 삼아 '창고'에 넣어둔다. 

한국일보(08. 06. 18) 美 저명 미학자 아서 단토의 책 오역논쟁

미국 저명 미학자ㆍ미술평론가인 아서 단토(84)의 국내 번역 저서를 둘러싼 인터넷 상의 오역 논쟁에 저자까지 가세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최근 국내 소장학자 및 번역가들이 인터넷을 통해 펼치는 번역비평의 수준과 활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발단은 ‘로쟈’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러시아문학 전문가 이현우씨가 지난달 21일 자신의 알라딘 블로그(http://blog.aladin.co.kr/mramor)에 지난달 번역 출간된 아서 단토의 <일상적인 것의 변용>(김혜련 옮김)의 일부 구절에서 발견한 오역을 지적한 일이었다. 이 책은 한길사에서 1996년부터 출간 개시한 고전 시리즈 ‘그레이트북스’의 100번째 책이다.

이씨는 남성용 소변기를 ‘샘’이란 제목으로 미술전에 출품하는 등 일상적 소재를 예술 영역으로 끌어들인 작업으로 유명한 프랑스 조각가 마르셀 뒤샹의 예술 세계를 설명하고 있는 이 책 57쪽의 두 문장을 오역 사례로 제시했다. 해당 구절은 이렇다. “그(뒤샹)의 행위는 하찮은 대상들을 모종의 미적 거리 안에 배치했고, 그 결과 그것들이 미적 향수(享受)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간단하게 평가할 수도 있다. 즉 가장 가당치 않은 곳에서 모종의 아름다움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하려던 시도로 볼 수 있다.”

이씨는 두 문장이 얼핏 봐도 모순적이라며 번역자가 앞 문장 ‘그 결과…’ 이하 구절에 해당하는 원문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에서 ‘improbable’(가능할 것 같지 않은)의 반어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 결과 가능할 법하지 않은 그것들(빗자루, 병걸이, 자전거 바퀴, 소변기 등)을 미적 향수의 대상으로 연출했다’로 번역해야 옳다는 것.

글이 게재된 다음날부터 ‘노이에자이트’ ‘juin’ ‘규’ ‘qualia’ ‘carboni68’ ‘palefire’을 각각 필명으로 쓰는 알라딘 블로거가 차례로 ‘댓글 논쟁’에 가담했다. 이 중 ‘지방 중소도시에 사는 번역가’로 자신을 소개한 ‘qualia’는 이씨의 지적에 동의하면서 문제의 두 문장에서 두 개의 쟁점을 새로 제시하며 논쟁을 주도했다.

하나는 번역자가 ‘하찮은 대상들’로 번역한 ‘these unedifying objects’는 ‘미적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대상들’로 표현해야 정확하다는 점, 또 하나는 ‘가장 가당치 않은 곳(the least likely places)’에서 ‘places’를 ‘전시장’으로 해석하는 다른 논쟁자들에 맞서 그 단어는 소변기, 빗자루 등 뒤샹의 ‘전시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자기가 듣고 본 것들을 몇 문장에 투사해 과시 대회 같은 분위기로 흘러간다”면서 논쟁에서 빠지겠다고 쓴 한 블로그를 “뜻하지 않게 서로 감정을 다치게 했더라도 끝까지 가는 것이 토론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득, 마음을 돌리기도 했다. 인터넷 논쟁 문화의 성숙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50개의 댓글이 달리며 열흘 넘게 진행된 논쟁을 끝맺은 사람은 저자 아서 단토였다. ‘qualia’가 지난달 25일 세 쟁점에 대한 해답을 요청하며 보낸 이메일 질문지에 이달 2일 답신을 한 것. 단토는 “관심과 열정에 감사한다. 복잡하고 평이한 문장을 함께 구사하는 내 글쓰기 스타일에서 비롯된 의문 같다”면서 질문마다 명확한 입장을 밝혔다. 모든 쟁점에서 ‘qualia’의 손을 들어주는 답장이었고, 논쟁은 유익하고 평화롭게 마무리됐다.(이훈성기자)

08. 06. 18.

P.S. 내가 쓴 페이퍼는 '앤디 워홀의 비누상자'(http://blog.aladin.co.kr/mramor/2102426) 이고, qualia님의 관련 페이퍼는 '아서 단토 교수님, 답장을 보내주시다'(http://blog.aladin.co.kr/qualia/2120870) 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Gene님의 의견은 http://geneghong.blogspot.com/2009/01/9.html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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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문제에 관한 원고를 쓸 일이 있어서 관련자료들을 좀 모아놓아야 한다. 지난달 기사이지만 참고삼아 아래기사도 스크랩해놓는다.  

대학신문(08. 04. 12) '번역 선진국’을 향한 발걸음

고등학교 시절 국사와 세계사에 매력을 느껴 국사학과에 입학한 김혜진씨(가명). 그는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Herodotos)의 『역사(Historiai)』를 사려고 서점을 찾았다. 하지만 『역사』의 유일한 완역본이 일본어 중역본일뿐더러 역사학 전공자가 번역한 것도 아니었다. 책은 무리없이 읽을 수 있었지만 원전 번역이 단 한 권도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Leopold von Ranke)의 책을 사려고 발걸음을 옮겼다가 더욱 놀랐다. 완역된 랑케의 책이 한 권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번역출판계는 부실공사?=대한출판문화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2007년 출판된 신간 중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23%(12,321종)에 달했다. 하지만 이 통계는 ‘납본(새로 발간된 출판물을 해당기관에 제출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데 평균적으로 출간된 책 중 73%만이 납본된다. 이를 감안하면 서점을 통해 독자들에게 다가간 번역서는 약 1만7천여 권이다. 하지만 번역서 중 대부분은 실용서나 가벼운 에세이류다. 실제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판매부수 상위 30위권 내에서 번역서는 16종에 달했지만 『시크릿』, 『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50가지 비밀』, 『마시멜로 이야기』 등 소위 고전과 거리가 먼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번역은 반역인가』의 저자 박상익 교수(우석대·사회교육학과)는 “국민의 기초교양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서양의 고전들이 번역되지 않고 있다”며 “다들 중요하다고는 말하지만 잘 팔리지 않아 출판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에는 노벨상 수상자 테오도르 몸젠(Theodor Mommsen)의 대표작 『로마사』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신학대전』 등의 완역본이 없는 실정이다.

번역된 책들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미 번역된 책을 표절해 재번역인 것처럼 출판하는 중복출판, 대리번역 문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영미문학연구회에서 번역평가사업단을 구성해 출판된 영미문학 번역서를 검토한 결과 표절본이 48%에 육박했다.

오역 역시 큰 문제다. 지난 2005년 이재호 명예교수(성균관대·영어영문학과)는 번역가이자 소설가로 활동 중인 이윤기씨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 “신화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오역”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오역 논쟁’으로 이어져 학계와 대중 모두의 관심을 끌었다. 지금도 각종 번역서의 오역문제가 인터넷카페 ‘비평고원’이나 개인 블로그 등을 통해 꾸준히 제기되고 있지만 출판사의 피드백은 잘 이뤄지고 있지 않다. 저작권이 살아있는 경우에는 오역이 발견되고 학자들의 수정의지가 있어도 수정하거나 재번역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척박한 번역계 현실=현재 전문 번역가들은 대부분 번역가 이외의 직업을 갖고 있다. 번역료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번역가들은 원고료를 인세 혹은 매절의 형식으로 받는다. 역자인세는 평균적으로 판매가의 5%정도다. 1만원 짜리 책 한 권을 몇 개월에 걸쳐 번역해도 1천권이 팔려야 50만원을 받는 셈이다. 물론 1천권이 팔리기 위해 몇 년이나 걸리는 책들은 허다하다. 매절은 원고지 1매당 일정액을 받는 형식인데 매당 3~4천원 정도가 일반적인 액수다. 출판사와 역자는 책의 성격에 따라서 둘 중 한가지 방식을 혹은 둘을 결합한 방식을 협의해서 선택한다. 그러나 소수의 ‘스타 번역가’들을 제외한다면 번역료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부당한 대우는 번역이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는 번역가들이 다른 일을 병행할 수밖에 없어 번역에 투자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으로 이어져 번역의 질은 더 저하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번역학회 총무이사 최희섭 교수(전주대·영미언어문화전공)는 “번역가를 일종의 창작자로 대우하는 외국과는 달리 한국 출판시장에서 번역가는 창작자에 종속된 것으로 평가받는다”며 “‘번역 선진국’으로 평가되는 일본에서는 번역가들이 번역료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해당 분야의 지식을 갖춘 편집진을 보유하지 못한 출판사도 좋은 번역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이런 출판사들은 교정·교열 이상의 편집이 힘들다. 이제이북스 전응주 대표는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번역한 원고와 원문을 대조해가며 검토할 수 있는 편집진을 갖춘 출판사가 적다”며 “그만한 능력이 있는 인재들은 출판계보다 수입이 더 많은 분야를 선호한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하나 둘 싹트는 대안들=관계자들은 번역시장의 각종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번역비평 문화의 활성화’를 꼽았다.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다빈치 코드』는 공론화된 번역비평이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낸 사례로 평가받는다. 『다빈치 코드』의 번역비평은 학계가 아닌 대중으로부터 시작됐다. 웹상에서 원문과 번역본을 비교하며 오역을 지적하는 누리꾼들이 하나 둘 모였고 급기야는 공개사과를 요구하는 누리꾼들도 있었다. 이에 출판사인 베텔스만코리아는 “흐름에 영향을 줄 만큼 심각한 오역은 아니었다”면서도 25쇄부터 외국소설 전문 번역가의 감수를 거친 개역판을 출간했다.

지난해 한국번역비평학회는 번역시장에서 전문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번역비평』 창간호를 발간했다. 회장 황현산 교수(고려대·불어불문학과)는 학회 창립 학술대회에서 “공개적·객관적으로 번역을 논의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학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번역에 대한 학계의 인식도 차츰 나아지고 있다. 교육부(현재 교육과학기술부)는 지난해 5월 발표한 「인문학 진흥 기본계획」에서 “논문형 작품만 학위논문으로 인정해온 관행을 바꿔 동서양 고전을 번역하더라도 박사논문으로 인정하는 제도를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학술진흥재단이나 대학에서도 번역을 연구실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학술진흥재단 인문학지원팀 정혁씨는 “사업에 따라 다르지만 번역서가 저서와 같은 대우를 받는 분야도 있다”며 “오는 7월에 신청을 받기 시작하는 ‘명저번역지원’ 사업 등을 통해 학술기반을 구축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이진환기자)

08. 0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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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5-15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여년 전 나온 김용옥<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우리나라도 번역을 연구실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제 그렇게 되나보군요.하지만 제대로 되려면 대학원생들 시켜 찢어쓰기 번역하고 교수이름만 붙여 책내는 관행이 없어져야 한다고 봅니다.이는 우리나라 특유의 더러운 위계질서가 없어져야만 가능하죠.저는 대학원을 안 가봐서 모르겠는데 박노자 씨 책에서 보고 깜짝 놀랐어요.조폭의 위계질서 같다는...
그리고 삼성문화문고에서 레오폴드 폰 랑케<젊은이를 위한 세계사>번역본이 있는데 역자해설이 전혀 없어서 완역인지 발췌역인지는 모르겠네요.

로쟈 2008-05-15 23:58   좋아요 0 | URL
대학원을 안 가셨다니 의외인데요. 저는 역사학쪽으로 박사학위라도 하신 걸로 알았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5-16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웬 박사? 그냥 독학했습니다.앞으로도 대학원 갈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저는 이병철 씨 최대의 공헌은 수출이 아니라 삼성문화 문고를 만든 거라고 생각합니다(특히 이 책이 진중문고로 군대로 들어간 것은 정말 잘된 일이었습니다).좋은 책들이 꽤 많죠.국한문 혼용과 세로줄 문고의 추억...지금도 헌책방에서 몇 권 씩 구합니다.
문화 강국은 좋은 사전과 좋은 번역이 많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아...그리고 도서관 사서의 자질도 빼놓을 수 없죠.

로쟈 2008-05-16 00:35   좋아요 0 | URL
(삼중당문고가 아닌) 삼성문화문고가 키워낸 인재시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5-16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중당 문고도 좋아해요.20년 전부터 가로줄로 나오더군요.거기는 문학쪽이 많고 인문사회 쪽은 삼성문화문고가 많죠.두 문고에 모두 신세지고 있습니다.지금도...그리고 을유,박영사,탐구당에서 나온 문고본도...이젠 헌책방에서나 가끔 만나지만요...
장정일 씨에겐 삼중당 문고라는 시도 있더군요.

로쟈 2008-05-17 00:01   좋아요 0 | URL
유명한 시죠.^^

여울 2008-05-16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쉽더군요. 새로운 흐름에 대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로 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개념도 정립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날림번역을 하는 일들. 번역자에게도 독자에게도 모두 좋지 않은 길로 접어드는 것 같아요. 공동번역도, 번역문화와 생계해결도...논의가 활성화되면 좋겠다 싶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로쟈 2008-05-17 00:01   좋아요 0 | URL
상황이 반전되면 좋겠는데, 좀더 지켜봐야겠습니다...

구미웅 2008-06-04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진환입니다.

가끔 로쟈님 서재에 오는데 늘 도움 많이 받습니다.

로쟈 2008-06-04 18:18   좋아요 0 | URL
지금 확인하신 걸 보면 아주 가끔 들르시는군요.^^
 

한국고전번역원의 박석무 원장과 한국문학번역원의 윤지관 원장이 번역의 의미와 두 번역원의 과제 등에 대해서 나눈 대담을 스크랩해놓는다. 눈길이 가는 건 '번역에 대한 처우와 번역가 양성' 쪽이다. 우리 고전과 문학 번역에만 한정시킬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한겨레(08. 03. 10) "우리고전 세계에 알리려면 두 번역원 협력해야죠”

한국고전번역원이 지난해 12월 공식 출범했다. 박석무 초대 원장이 부임해서 그동안 민족문화추진회 이름으로 해 왔던 고전 국역 사업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한편, 고전의 대중화·생활화를 위한 방안 마련에도 애쓰고 있다. 한편 지난 2001년에 문을 연 한국문학번역원은 문학작품의 번역을 중심으로 한국 문화의 해외 소개에 주력하고 있다.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장과 윤지관 한국문학번역원장이 지난 6일 오후 한겨레신문사 회의실에서 만나 두 번역원의 현안과 상호 협력 방안, 번역을 둘러싼 사회적 여건 및 개선 방안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 번역의 의미와 고전의 세계화

박석무(이하 박): 먼저 번역이란 무엇인가 하는 원론적인 얘기로부터 시작해 보자. 사실 해방 이후 우리 역사는 전쟁과 독재의 회오리 속에서 우선 먹고사는 문제에 급급하다 보니 삶의 질을 논할 수 있는 바탕은 매우 취약했다. 70년대 이후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서 비로소 문화라는 것에 관심을 가진 게 아닌가 싶다. 번역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같은 맥락인데, 2001년에 한국문학번역원이 설립된 것이라든가, 그에 앞서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고전 국역 사업을 펼친 것은 역시 삶의 질과 문화를 찾는 국민들의 욕구에 부응하기 위한 시대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윤지관(이하 윤): 박 선생님 말씀에 대체로 동의하면서 좀 더 보충하고 싶다. 문화의 측면을 놓고 볼 때, 우리는 일방적으로 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처지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쌍방향적 소통의 중요성이 좀 더 부각되게 되었다. 양쪽 다 넓은 의미의 번역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이 40년 전부터 민족문화의 현대화 작업을 수행해 왔기 때문에 그를 바탕으로 세계와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박: 한국문학번역원과 한국고전번역원이 긴밀히 협조해야 할 분야가 바로 우리 고전의 세계화 작업이다. 사실 현재의 고전 번역 수준은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고전 번역은 시, 문, 인문·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이 두루 결합된 종합학문에 가깝다. 그만큼 까다로운 것이다. 다산 같은 걸출한 학자가 거의 외국에 번역돼 있지 않은 것은 그런 어려움 때문이겠지만, 매우 안타까운 노릇이다. 다산을 비롯한 소중한 우리 고전의 해외 소개를 위해서는 한국문학번역원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하다.

윤: 한국문학번역원은 문학번역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 기관이지만, 고전번역에 대한 지원 역시 꾸준히 해 오고 있다. 지금은 인문·사회 분야만이 아니라 한국어로 된 모든 텍스트의 해외 번역 및 소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문 고전을 제대로 한국어로 옮겨 놓은 게 드물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한국고전번역원의 역할이 절실하다고 본다. 2003년에 한국문학번역원에서 고전 번역 권장도서 100권의 목록을 작성, 발표한 적이 있는데 사실 목록 작성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맡는 식의 분업이 필요한 일이었다.

■ 번역에 대한 처우와 번역가 양성

박: 번역이 어려운 것은 양쪽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어느 한쪽만 능통해서는 훌륭한 번역이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 학계에서는 번역을 중요한 연구 업적으로 평가하는 데 인색하다. 내 얘기를 해서 안됐지만, 내가 번역한 다산 책들을 참조해서 쓴 논문들이 숱하게 나왔다. 그것으로 박사 되고 교수 되는 이들은 많아도 내 번역은 학문적 업적으로 이해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내가 한국학술진흥재단(학진)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학진에서는 번역을 연구 업적으로 인정하도록 제도를 만들었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도 성균관대나 고려대 등과 협력관계를 맺어서 번역을 연구업적에 포함시키도록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국가 차원에서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다.

윤: 저 역시 영문학자이면서 번역도 하는 처지에서 박 선생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사실 제대로 된 번역을 하나 하는 데 웬만한 논문 몇 편 쓰는 것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번역이 기초학문이라면 논문은 일종의 실용학문이라 할 수 있다. 번역의 바탕이 있어야 논문도 쓸 수 있다는 뜻이다. 각 전공 분야의 학자 중에서 유능한 번역 인력이 나올 수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그럴 만한 여건이 안 돼 있는 형편이다.

박: 번역이 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질 높은 번역이 나와야 한다는 게 전제조건이다. 그러기 위해 시급한 것이 번역자 양성이다. 나는 한국고전번역원장 일을 맡으면서 어떤 사업보다 번역자 양성과 교육에 치중하자고 생각하고 있다. 당장 몇 권의 번역서를 내는 것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번역 역량을 갖춘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전국의 한학자들을 수배해서 그들이 젊은 세대를 직접 교육하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윤: 저 역시 처음 한국문학번역원 일을 맡았을 때, 임기 동안 당장 드러나는 성과가 없더라도 번역가 양성을 위한 토대는 마련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실 한국문학작품을 외국어로 번역할 수 있는 외국인 번역자 수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 영어에 10명 이내, 불어와 독일어도 각각 다섯 명을 넘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올해 9월 가칭 번역아카데미라는 번역 교육기관을 설립하기로 하고 얼마 전에 공청회를 열기도 했다.

■ 번역 평가와 국가적 번역 관리 시스템

윤: 역량 있는 번역가 양성과 함께 필요한 것이 기존 번역에 대한 평가 작업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영미문학연구회 공동대표로 있으면서 영미소설번역평가 사업을 시행한 적이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장을 맡고 나서도 평가의 필요성을 절감해서 우선 영어로 번역된 소설 50종과 주요 시 작품들에 대한 평가를 하기로 했다. 소설에 대한 결과는 이미 나와서 곧 공표할 예정이고, 시 부문의 결과도 올해 말까지는 나올 것으로 보인다.

박: 한국고전번역원 역시 번역 평가는 필수적이다. 그러려면 예산도 필요하고 평가 전문가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평가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큰 일이다. 올해 안에 평가 시스템을 구축해서 실행에 들어갈 예정이다.

윤: 한국문학번역원은 우리 문학과 문화의 해외 번역 소개에 관한 유일한 정책기구로 구실하고 있다. 그러나 문학번역에 대해서야 어느 정도 역량이 갖추어져 있다고 해도 다른 문화예술 분야에는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국립극장과 관광공사, 영화진흥위원회 등과 업무협약을 맺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국가 차원의 번역 시스템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박: 그 때문에 유관 기관끼리의 협조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만 해도 한국학중앙연구원이나 국사편찬위원회, 학술진흥재단 등과 사업 중복 여부와 용어 통일 문제 등을 논의할 협의체가 필요한 실정이다. 더 나아가 북한과 중국, 일본, 베트남 등 한자문화권과 협조관계를 맺을 필요도 있다. 특히 북한과는 양쪽의 번역 역량을 결합시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한다. 기회가 닿으면 북한 사회과학원을 방문해서 쌍방의 고전 번역 성과물을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도를 논의하려 한다.

윤: 한국문학의 해외 번역에서도 북한과 협력할 일은 많다고 본다. 북한은 특히 과거 소련 및 동구권 국가 출신 번역자들을 양성해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지금도 그쪽의 유능한 한국문학 번역자들은 북에서 훈련받은 이들이 대부분이다.(정리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장은 전남대 법과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3, 14대 국회의원과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 단국대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다산연구소 이사장과 성균관대 석좌 초빙교수로 있다. 번역서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다산산문선> <역주 흠흠신서>(공역) 등이 있고, 저서로 <다산기행>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 1, 2>가 있다.

■ 윤지관 한국문학번역원장은 서울대 영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미문학연구회 공동대표, <실천문학>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덕성여대 영문과 교수로 있다. 번역서로 <톨스토이냐 도스토옙스키냐> <오만과 편견>(공역) <이성과 감성> 등이 있고, 저서로 <근대사회의 교양과 비평>과 평론집 <민족현실과 문학비평> <리얼리즘의 옹호> 등이 있다.

08. 03.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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