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후마니타스의 서평 강좌가 엊그제 마무리되었는데, 강좌에서 서평도서로 다룬 책 가운데 하나가 <능력주의는 허구다>(사이, 2015)이다. '21세기에 능력주의는 어떻게 오작동되고 있는가'를 부제로 한 책으로 출간 당시 언론 리뷰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른바 수저론이 지난해 한국사회의 핵심 키워드이기도 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과학 분야의 서평도서로 골랐던 이유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윌밍턴 캠퍼스의 사회학과 교수 두 명이 21세기 능력주의 신화의 문제점과 그 부작용, 위험 등을 낱낱이 파헤친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이 성공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가정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개인의 능력과는 무관한 비능력적 요인들이 우리 삶에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능력주의는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이러한 요지만으로도 책을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강의를 준비하면서 도서관에서 원서를 구해 대조해본 결과 번역본은 원저와 너무 차이가 났다. 말을 만들자면 전반적인 '번역 성형'이 가해졌다. 원저 자체는 3판까지 나왔고 판이 바뀔 때마다 적잖은 첨삭이 이루어졌다(알라딘에 소개된 정보를 기준으로 판단하자면). 가령 분량만 놓고 보자면 1판(2004)은 240쪽인데 반해 2판(2009)은 285쪽으로 45쪽 가량이 늘어나며, 3판(2013)은 264쪽으로 다시 20쪽이 줄었다. 번역본은 3판을 옮긴 거라서 내가 참고한 1판과는 얼마간 차이를 보일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번역본은 너무 많은 삭제와 윤문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 번역에 대한 신뢰를 심각하게 잠식할 정도다.

 

일단 목차가 모두 바뀌어서 원저와 번역본을 대응시켜서 읽기도 어려운데, 그 때문인지 원저에 실린 장별 참고문헌과 색인이 번역본에서 모두 누락되었다(참고문헌과 색인이 빠진 번역서는 일단 의심해봐야 한다). 원저가 갖고 있는 학술서적 성격이 번역본에서는 모두 제거되고 시사적인 읽을 거리로 탈바꿈했다. 강의에서는 두 대목을 지적했다. 먼저 저자들이 '능력주의'란 말을 '아메리칸 드림'의 동의어로 쓴다는 걸 알게 해주는 대목이 번역본에서는 이렇게 옮겨졌다.   

교육기회의 평등은 능력주의 시스템에서 중요한 부분이지만 교육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진 적은 거의 없다.(80)

이에 대한 원문은 이렇다.

Equality of educational opportunity is a crucial component of the American Dream, but it has never come close to existing in America. 

미국 사회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는 책을 한국사회에도 통할 만한 얘기로 바꾸려고 하다 보니 '아메리칸 드림'이란 말은 번역본에서 모두 지워졌다. 원저의 경우 (1판에서는) 1장의 제목이 '아메리칸 드림: 기원과 전망'인데 반하여 번역본은 '금수저, 흙수저, 릴레이 경주, 그리고 능력주의 신화'로 되어 있다. 물론 내용 자체가 맞대응하지 않기도 하지만, 금수저/흙수저를 들먹인 것도 원저와 무관하다. 영어에는 우리도 알고 있듯이 '은수저'란 개념만 있고 책에서도 '은수저(실버 스푼)'만 나온다.   

 

대체적으로 번역이 잘 읽히기 때문에 원저에는 충실하지 못한 책이더라도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어수룩하게 옮겨진 부분도 적지 않다. 가령 아래 대목.  

사회적 자본에 대해 최초로 진행된 현대적인 연구 중 하나로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1980년대에 발표한 분석이 있다. 부르디외는 특정 그룹에 소속되고 원하는 자원을 직접 만들겠다는 목적을 갖고 사회적 관계를 발전시키려는 계획적인 시도를 함으로써 개인이 얻는 이익에 초점을 맞추었다. 가치 있는 사회적 자본을 만들어내는 전략은 개인의 능력을 암시하거나 반영하지는 않는다. 부모, 친인척, 멘토 등 타인이 투자를 한 자본일 경우에는 특히 더 그렇다.(88-89 

어떤 내용인지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아 원저에서 해당 대목을 찾았는데(이것도 시간이 걸렸다. 원저 색인에서 '부르디외'가 나오는 페이지들을 찾아 하나씩 대조해보는 방식을 취했다), 뜻밖에도 상당히 긴 문단이었다.    

The social science community is just beginning to catch up to the folk wisdom on this issue. The first systemic modern analysis of social capital was produced in the 1980s by the French sociologist Pierre Bourdieu(1986, 248). Bourdieu focuses attention on the benefits that accrue to individuals from their participation in groups and deliberate attempts by individuals to foster social relations for the purpose of creating this resource. Despite peoples’s efforts to draw social networks to enhance their power, wealth, or status, Bourdieu points out that these investment strategies do not always work. Further, those strategies that are successful, that is, those that produce valuable social capital, are not necessarily attributable to individual merit, especially in cases in which investments are made by others (parents) or involve substantial economic capital that is inherited or otherwise unearned. Through social capital, individuals can get access to economic resources such as desirable jobs, subsidized loans, investment tips, protected markets, and the like. They can increase their cultural capital through contacts with experts or individuals of refinement. In addition, they can affiliate with institutions that confer valued credentials, such as diplomas or degrees.

1판을 기준으로 하면, 이 전체 문단이 번역서에서는 1/3도 안 되게 축약되었다. 부정확하고 불성실하며 그냥 얼버무리는 식의 번역이다. 이것이 원저 1판과 3판 사이의 차이라고는 믿기 어렵다(오히려 3판은 1판보다 분량이 24쪽 더 많다). 나로선 매우 불량한 번역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실상에 맞게 말하자면, <능력주의는 허구다>란 번역서는 <능력주의 신화>라는 원저를 저본으로 하여 입맛에 맞게 변형/각색한 책이다(그러면 그렇다고 적시해야 할 게 아닌가).

 

이런 식의 번역이 출판계에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언제까지 '관행'으로 방치할 것인가. 정부가 국민을 호구로 아는 것처럼 출판사도 독자를 그저 호구로 생각하는 것인가. 우리는 좀더 나은 책을 읽을 권리가 있다...

 

16. 0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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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 올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의 <위대한 탈출>(한국경제신문, 2015)이다. 그리고 어제 알라딘으로부터 받은 문자는 바로 이 책과 관련한 것이었다. "구판 구매자 중 새 번역본으로 교환을 원하는 분들께서는 2015년 12월 31일까지 고객센터 또는 1:1문의를 통해 연락 주시면 무료로 교환해 드립니다." 오역과 악의적인 서문의 해제 때문에 항의를 받고 다시 나온 개정판을 구입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 '교환'과 관계가 없다, 가 아니라 관계가 있다. 작년 9월에 나온 초판도 이미 구입한 독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노벨상 발표 이후에 궁금해서 구입한 터였다.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는 번역본의 부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수상 이후에는 똑같이 '201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사실을 띠지로 둘렀지만, 초판의 부제는 '불평등은 어떻게 성장을 촉발시키나'였고, 개정판의 부제는 '건강, 부 그리고 불평등의 기원'이다. 달라도 많이 다르다. 그건 초판본이 저자의 원의를 악의적으로 왜곡해서 빚어진 일이다.

소득 불평등 문제를 제기한 토마 피케티 교수의 <21세기 자본>이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우리가 현재 목격하고 또 경험하고 있는 이 불평등이 인류 역사 300년 동안 처음 경험하는 수준이라 한다. 하지만 프린스턴대 경제학자 앵거스 디턴의 책 <위대한 탈출>을 보고 나면 세계가 그 어느 때보다 평등해졌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견해가 맞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각 국가를 하나씩 살펴보느냐, 아니면 세계 전체를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국가 내의 불평등, 특히 부유한 국가들 내에서의 불평등은 지난 몇 십년간 개발도상국에 있는 수십억 명의 극심한 수준의 빈곤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게 만들었다. 미국 혹은 부유국에서의 불평등을 증가시킨 요인이 다른 국가에서는 수십억 명에게 더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단 뜻이다 

디턴의 이 책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 장본인은 서문을 실은 현진권 자유경제원장이고, 이에 따라 책의 내용을 편의적으로 생략하거나 뜯어고쳤다. 이에 대해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이 블로그를 통해 비판하고(http://socialandmaterial.net/?p=33921) 이것이 기사회되었다(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713967.html). 급기야는 원저를 펴낸 프린스턴대학 출판부에까지 이 사실이 전달되고 프린스턴대 측은 이에 대한 시정을 요구했다(한 언론은 이를 '글로벌 망신살'이라고 표현했다).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 프린스턴대 교수의 <위대한 탈출>(한경BP) 한국어 번역본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위대한 탈출> 번역본이 원서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고(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출판사는 일부 축약·생략은 있었지만 의도적 왜곡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고맙게도 원서를 출판한 프린스턴대 출판부가 논란에 쐐기를 박았다. 프린스턴대 출판부는 “한국어판은 원문을 정확히 반영하지 않는다”며 기존 번역본의 판매 중단을 요구했다. 특히 디턴을 <21세기 자본>의 토마 피케티와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묘사한 현진권 자유경제원장의 한국어판 서문의 삭제를 콕 집어 요구했다. 해외 출판사가 국내 번역서의 오류를 직접 지적하며 판매 중단을 요구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디턴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을 때부터 일부 언론은 “불평등은 되레 긍정적 경제성장에 도움”(매일경제), “‘위대한 탈출’은 피케티의 허구 드러낸 역작”(한국경제)식으로 보도했다. 디턴이 불평등이 경제 성장을 자극한다고 주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득 불평등이 정치적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 역시 깊이 우려했다. 해외 학계에서는 디턴과 피케티가 대립한다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라고 보고 있다.(경향신문)

 

이것이 부랴부랴 개정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그리고 내가 원서와 함께 두 가지 판본의 <위대한 탈출>을 갖게 된 이유다. 그렇지만, 먼저 구입한 초판을 개정판과 교환하고 싶지는 않다. 이미 개정판을 구입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초판은 악의적이고도 졸렬한 왜곡 번역본으로서 '기념비적' 의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올해의 오역서'를 꼽자면 따 놓은 당상이다(무려 노벨경제학상의 후광을 거느린 오역서다). 그러니 어찌 쉽사리 교환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초판은 액면가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는, 개정판보다도 훨씬 '가치 있는' 책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자료적 가치, 먼훗날 사료적 가치까지 가질 터이니 말이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이것이 출판계만의 스캔들은 아니라는 점. 국정교과서 논란을 비롯해서 요 몇년 간 한국사회에서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수작의 한 징후일 뿐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국정원을 필두로 하여 왜곡과 조작이 이 정부의 주특기가 되었다는 건 상식 있는 국민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다. 바야흐로 이 거대한 조작과 졸렬한 왜곡의 구렁텅이에서 '위대한 탈출'이 필요한 시기다...

 

15.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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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주문한 책은 이화인문과학원에서 엮은 <동아시아 근대지식과 번역의 지형>(소명출판, 2015)이다. 동아시아학 분야의 책이면서 번역학에도 속하는 책. 이 분야의 책이 대개 그렇듯이 학술서 범주에 속한다('동아시아'란 말이 제목에 들어간 책 대부분이 그렇다고 보면 된다).

 

 

제목으로도 알 수 있지만 소위 '근대의 번역' 내지 '번역으로서의 근대'라는 문제의식을 깔고 있는 책인데, 비슷하게 묶일 수 있는 책이 몇 권 나와 있다. 이번주에 나온 <근대번역과 동아시아>(박문사, 2015)도 그렇고, <동아시아, 근대를 번역하다>(점필재, 2015)도 그렇다. 보통은 이런 주제의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그 결과물을 단행본으로 펴내기에 대학연구소 이름으로 많이 나온다(무슨무슨 학술총서라는 타이틀이 부가적으로 붙고). 관심분야이기에 다른 불만은 없지만 학술서 형태로 나오기 때문에 책값이 좀 비싸다는 부담은 있다.

 

 

'동아시아' 얘기가 나온 김에 관련서를 몇 권 더 호출하자면, 근대 동아시아 문학의 지리와 지평을 검토한 <동아시아 한국문학을 찾아서>(소명출판, 2015), 최원식 교수의 정년기념논총으로 나온 <민족문학론에서 동아시아론까지>(창비, 2015), 동아시아의 공동/공통의 '기억의 장'을 모색하는 <동아시아 기억의 장>(삼인, 2015) 등이 이번 봄에 나온 책들이다. 주로 전공자들의 손에서나 들려질 법한 책들이지만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꽤 쏠쏠해 할 만하다...

 

15.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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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학 분야의 고전으로 얼마 전에 조르주 무냉의 <부정한 미녀들>(아카넷, 2015) 출간 소식을 전했는데, 그 사이에 두 권의 책이 더 나왔다. 하나는 번역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앞장 서고 있는 조재룡 교수의 <번역하는 문장들>(문학과지성사, 2015)이고, 수잔 바스넷의 <번역의 성찰>(동인, 2015)이 다른 하나다.

 

 

<번역의 유령들>(문학과지성사, 2011)에 이어지는 <번역하는 문장들>은 번역에 관한 다양한 쟁점들을 '풀세트'로 모아놓은 듯한 책으로 이론과 실제, 양면으로 종횡무진의 모험을 보여준다(전체 4부와 보유로 구성된 책에서 제1부의 제목이 '번역/중역의 모험'이기도 하다). '중역의 인식론'이나 '예상표절', '의사번역' 등과 같은 흥미로운 개념과 문제를 제시하기도 하고, '번역 정글 잔혹사'로서 세계문학전집 번역 문제나 번역의 윤리에 대한 비판과 성찰도 담았다. 조르주 페렉의 <잠자는 남자>(문학동네, 2013) 번역가로서의 소회 등은 책의 보너스이다. 앞으로 번역에 대한 담론은 저자가 펴낸 두 권의 번역론에 덧대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번역하는 문장들'이란 문장의 번역문들로 표지를 구성하는 데 거들었는데, 멋쩍게도 러시아어 문장에서 오타를 냈다. 스마트폰으로 처리하다 빚어진 일인데, '번역'의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가를 보여주는 해프닝이라면 해프닝이겠다(일어 번역에도 탈자가 생겨서 2쇄에는 같이 수정될 예정이다. '희귀본'이 될 가능성이 있는 만큼 빨리 소진되면 좋겠다).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저자인데, 수잔 바스넷은 영어권의 번역학 전문학자다. 국내에 소개된 것만 해도 <번역학>(한신문화사, 2004), <번역학 개론>(인간사랑, 1993) 등을 포함해 여럿 된다. <번역의 성찰>은 최신작. 원저까지 구하려다가 좀 비싸서 그만두었는데, 번역학의 동향과 쟁점을 확인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거라는 생각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김에 <번역하는 문장들>과 짝지어 읽어봐도 좋겠다...

 

15. 0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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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번역학 분야의 의미 있는 책이 출간됐다. 조르주 무냉의 <부정한 미녀들>(아카넷, 2015). 원저는 1955년에 나왔으니까 60년만에 나온 한국어판이기도 하다. 저자는 프랑스의 언어학자로 소쉬르를 재발견한 인물 중의 하나로 기억하고 있는데(롤랑 바르트와 논쟁을 벌인 걸로도 유명하다), 번역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고.

 

언어학자 조르주 무냉은 프랑스 번역학의 토대를 구축한 선구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현대 번역학이 “조르주 무냉에서부터 출발한다.”는 표현이 말해주듯, 그를 폄하하는 측에서건 치켜세우는 측에서건, 무냉이 현대 번역학의 시원(始原)에 서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찾아보니 <번역의 이론적 문제점>(고려대출판부, 2002)도 출간됐었다. 절판된 책으로는 오래 전에 나왔던 <언어학 안내>(신아사, 1984)가 있었다. 제목 그대로 언어학 입문서. <부정한 미녀들>은 학술명저 번역으로 나온 책으로는 발레리 라르보의 <성 히에로니무스의 가호 아래>(아카넷, 2012)와 함께 '번역학 고전'으로 꼽힌다. 라르보의 책은 1946년에 나왔다. 제목의 '부정한 미녀들'은 번역사/번역학 책에 자주 등장하는데, 이런 뜻을 담고 있다.

책의 제목인 “부정한 미녀들(les belles infideles)”이라는 표현은 17세기 타키투스, 루키아노스 등과 같은 고전들을 번역하면서 아주 대담한 태도를 취했던 페로 다블랑쿠르의 번역을, 질 메나주가 다음과 같이 여자에 빗대어 표현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가 한 번역들은 내가 투르에서 애지중지했던 한 여자, 아름답긴 했지만 정조는 없었던 그 여자를 생각나게 한다.” 이때부터 “부정한 미녀들”이라는 표현은 유려하긴 하지만 원작에 충실하지 못한 번역을 단죄하기 위한 낙인으로 사용된다.

 

이 얘기는 쓰지 유미의 <번역사 산책>(궁리, 2001)에서 더 자세히 읽어볼 수 있고(<번역사 오디세이>(끌레마, 2008)가 재간본이다), 요네하라 마리의 <미녀냐 추녀냐>(마음산책, 2008)도 '부정한 미녀냐/ 정숙한 추녀냐'라는 번역학의 쟁점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정숙한 미녀'라면 가장 좋겠지만, 대개 번역 상황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부정한 미녀냐, 정숙한 추녀냐, 라는 선택지다. 무냉이 어떤 입장에 서 있는지 궁금하다...

 

15. 0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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