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잡담을 적는다. 다른 게 아니라 알라딘의 북캘린더에 대한 유감이다. 오늘 날짜로는 '1770년 8월 27일: 헤겔 출생'이라고 해놓고 링크는 뜬금없이 '미야기타니 마사미쓰'(발음도 어렵다)의 <자산의 꿈1>을 걸어놓았다. 일본의 역사소설가로 유명한 모양인데, 헤겔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어떻게 이런 링크가 가능한지도). 그저 어이없는 경우이다. 하지만 유감스럽다고 굳이 적은 건, 작년과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곧 작년에도 어이없어 했는데, 일년 동안 아무런 수정 없이 방치돼 있다는 것. 알라딘 서재 메인에 계속 뜨는데, 담당 직원은 한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는지, 아니면 이 또한 나름 (깨알같은) 유머인지 나로선 알 길이 없다. 하지만 10주년이나 된 인터넷서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이해하기 어려울 뿐더러 불쾌하다. 이런 걸 정보라고 버젓이 제공한다고 생각하면 말이다.

 

말이 나온 김에 또 적자면 엊그제 캘린더에는 '1976년 8월 25일: <광장> 초판 출간'도 포함돼 있었다. 어지간한 한국문학 독자라면 말도 안된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으리라. 1960년에 나온 작품의 초판 출간연도가 어떻게 1976년이 될 수 있나? '문학지성사판 초판'이라고 해야 맞다. 그런데, 그 날짜가 문학사적 의의를 갖는, 과연 달력에 적어놓을 만큼 중요한 날짜인가?(출판사에서만 그럴 수 있다.) 어이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판단도 못하는 캘린더라면 떼는 게 낫다.

 

알라딘에 이런 일까지 전담하는 직원이 따로 있을 리 만무하다고 보지만, 그래도 어차피 서비스라고 제공하는 정보라면 오며가며 확인은 좀 해주면 좋겠다. 아침부터 이런 페이퍼를 쓰는 기분이 별로 유쾌하진 않을 거라는 점도 헤아려주면 더 좋겠고...

 

13. 0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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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무거울 때는 가벼운 책을 읽으라는 수칙(?)에 따라 집어든 책이 로제 폴 드르와의 <위대한 생각과의 만남>(시공사, 2013)이다. 저자는 프랑스의 여러 잡지에 칼럼과 철학평론을 기고하는 저널리스트 겸 철학자. 그런 역할에 걸맞게 철학의 문턱을 낮추는 책들을 써왔고, 국내에도 여러 권 소개돼 있다.

 

 

'이주의 책'을 꼽는 자리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위대한 생각과의 만남>은 원제가 <사유의 스승들>이며, <처음 시작하는 철학>(시공사, 2013)의 속편이다. <처음 시작하는 철학>은 원제가 <간략하게 보는 철학사>인데, 서양철학사를 대표하는 스무 명의 철학자를 간추려 소개한 책이다. <위대한 생각과의 만남>은 그 뒤를 이어어서 스무 명의 20세기 철학자를 소개한다.

 

책은 평이하기 때문에, 20세기 철학의 전체적인 그림을 아는 독자라면 잘 정리된 요약본을 읽는 기분으로 읽어내려갈 수 있다(몇가지 새로운 정보는 팁이다). 그런데 약간 아쉬운 대목이 있다. 각장 말미에 '(누구누구의) 책 중에서 가장 먼저 읽어야 할 것은?'란 물음에 답을 주는 것까진 좋은데(이건 원저의 형식인 모양이다) 거기에 덧붙여서 역자가 '(누구누구에 대해서) 좀더 깊이 알고 싶다면?'이란 코너를 덧붙이면서 국내 참고문헌을 몇권씩 소개했다. 친절한 배려이긴 하지만, 설득력 있는 리스트라기보다는 구색 맞추기 리스트에 가깝다는 게 문제다. 그건 역자가 이 분야의 서지에 별로 정통해보이지 않는다는 데서 생기는 문제다.

 

 

 

가령 하이데거에 관한 장에서 '하이데거의 책 중에서 가장 먼저 읽어야 할 것은?'이라는 물음에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살림출판사, 2008'이란 서지를 적어놓았다. 같은 제목을 달고 있지만 살림출판사에 나온 건 이기상 교수가 역자가 아닌 저자로 쓴 <존재와 시간> 해설서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번역서는 까치(1998)에서 나왔다. 그냥 검색결과만 보고 옮겨적은 게 아닌가란 의심을 갖게 된다.

 

그러다 보니 '하이데거에 대해서 좀더 깊이 알고 싶다면?'이란 코너에서 세 권의 참고문헌을 소개하며 '하이데거와 나치'란 주제와 관련해서는 제프 콜린스의 <하이데거와 나치>(이제이북스, 2004)를 넣은 것도 불만스럽다. 관련서이긴 하지만 문고본의 아주 얇은 책이다. 이 주제에 대해선 박찬국 교수의 <하이데거와 나치즘>(문예출판사, 2001)이 규모나 깊이 면에서 더 나아간 책이다(이 책은 <하이데거는 나치였는가?>(철학과현실사, 2007)란 제목으로 다시 나왔다).

 

사실 철학자들의 서지 정도는 검색만 해보면 다 알 수 있기 때문에, 몇 줄이라도 소개를 덧붙이는 게 아니라면 딱히 필요하지 않다. 과도한 친절이 도리어 부실함만을 드러내준다면 굳이 애써서 핀잔을 감수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막간에 하이데거 장에 이어서 읽은 건 데리다 장인데, 소득이 없진 않다. 데리다가 재수 끝에 1952년에야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재수한 건 알았지만 입학연도는 모르고 있었다. 데리다는 대학입학자격시험에서도 물먹은 전력이 있다. 이후에 철학자로서 얻은 명성에 견주면 아주 놀라운 낙차다).  

하지만 1952년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면서 데리다는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루뱅의 후설 기록보관서에서 일한 후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했고, 하버드대학의 장학생이 되어 미국으로 건너간 후, 1957년에는 보스턴에서 마르그리트 오쿠튀리에와 결혼하고(이후 1963년과 1967년에 두 딸을 낳았다), 알제리의 알제 인근 코레아에서 군인 자녀들을 위한 공립학교 교사로 군복무를 마쳤다.(315쪽)     

참고로 루뱅의 후설 아카이브에서 데리다는 후설 현상학을 공부하며 하버드 유학시절에는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탐독한다. 데리다를 성장시킨 두 경험이다. 그건 그렇고, 인용문에서 '두 딸'을 굵은 글씨로 표기한 건, 오역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마르그리트(정신분석가이다)와의 사이에 두 딸이 아니라, 피에르와 장, 두 아들을 두었다. 아래가 장남 피에르.

 

 

두 아들이 모두 성정환 수술이라도 한 게 아니라면 '두 딸을 낳았다'는 건 낭설이다. 역자가 아들과 딸도 구별하지 못한 것일까. 사소한 대목이긴 하지만, 번역의 신뢰성을 잠식한다는 점에서 좀더 주의했더라면 좋았겠다...

 

13. 0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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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와 소크라테스에 관한 책들을 뒤적이다가 저녁을 먹은 후에 잠시 손에 든 책은 오늘 마이리스트로 올려놓은 피터 노왁의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문학동네, 2012)다. 주로 어제와 그제 주문한 책들이 저녁녘에 한꺼번에 배송됐는데(오늘도 열 권이 넘는다), 그중 한 권이다. 찾아보니 그제 이정전 교수의 <시장은 정의로운가>(김영사, 2012)와 새로 나온 <햄릿>(열린책들, 2012)과 같이 묶어서 주문했었다.

 

 

 

'전쟁과 포르노, 패스트푸드가 빚어낸 현대 과학기술의 역사'라는 부제가 사실 책의 핵심을 알려주기에 일독은 옵션인 책이다. 조금 부연해서 "음탕하고, 사람을 살상하고, 건강을 해치는 '나쁜 것들'이 현대문명을 발전시켜 왔다!"고 주장하는 책 정도로 정리해두면 된다. 그래도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조금 읽어보다가 번역상의 '미스'가 눈에 띄기에 적어둔다. 그전에 책에 대한 설명이 조금은 필요하겠다.

 

일단 CBS의 과학기술 전문기자인 저자가 이런 책을 쓰게 된 배경이다. "사실 나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에게서 이 책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바로 패리스 힐튼이다." 알다시피 한때 섹스 비디오 파문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힐튼호텔 상속녀다. "순순히 인정하긴 부끄럽지만, 어쨌거나 나의 뮤즈는 재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호텔 상속녀였다"고 저자는 순순히 고백한다. 이젠 기억에도 가물가물하지만, 때는 2004년이었다고 한다. 문제의 스캔들이 터진 해가.

 

 

물론 저자인 노왁도 문제의 비디오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유는 좀 남달랐다. 비디오 화면이 초록색이라는 점이었으니까. 그건 "조명 없이 어둠 속에서 야간 투시 기법으로 촬영했기 때문"이고, 그는 섹스 기술이 아니라 비디오 촬영 기술에 호기심이 생겼다. 이 야간 투시기법은 어떤 기시감을 안겨주었는데, 며칠 뒤에야 어디서 본 것인지 떠올리게 된다. 바로 CNN으로 생중계됐던 걸프전이다. "공중에서는 대공포화가 빗발치고 땅에서는 무시무시한 폭발이 잇따르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이라크가 몰락하는 걸 지켜보는 내 뇌리에 박힌 영상은 힐튼의 섹스 비디오와 마찬가지로 온통 에메랄드빛이었다."(16쪽)

 

 

이 발견이 말하자면 저자에겐 '유레카!'였다. 그는 "걸프전쟁과 섹스 비디오의 관계를 생각하다 문득 군에서 개발한 기술을 가져와 소비재에 접목시킨 다른 예는 뭐가 있을가 궁금해졌"고, 더 많은 사실을 캐냈다. 전쟁과 포르노그래피 기술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내가 읽은 대목. 

 

두 산업 간에 이런 유대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적에 맞서 싸우고 전쟁에서 이기려는 욕망은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강한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본능 인간의 기본욕구인 동시에 중요한 행동을 이끌어내는 동기이기도 하다.(17쪽)

 

두 산업은 물론 '전쟁산업'과 '포르노산업'이다. 이 두 산업에 관련된 '두 가지 본능'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강한 본능"이기에 서로 유대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놀랄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한데 인용문에서 '두 가지 본능'을 굵은 글씨로 강조한 건 바로 앞 문장에서는 "적에 맞서 싸우고 전쟁에서 이기려는 욕망" 하나만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를 빼먹은 듯해서 원문을 구글에서 찾아봤다.

 

The technological savvy of these two indurstries should come as no suprise. Lust and the need to fight or compete are two of the most primitive and powerful human instincts. They are our basest needs, a duo of forces that drive many of our key actions."

"두 산업 간에 이런 유대 관계"는 "The technological savvy of these two indurstries"를 옮긴 것인데, 'technological'도 옮겨주는 게 좋았겠다. 'technological savvy'는 느낌엔 '기술적 짝짝꿍' 정도가 어울릴 듯싶다. 원문에서 두 가지 본능으로 지시된 건 "Lust and the need to fight or compete"다. 거기서 'Lust(성욕)'는 누락하고 'the need to fight or compete'만 "적에 맞서 싸우고 전쟁에서 이기려는 욕망"이라고 옮기는 바람에 앞뒤 호응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옮기면, "성욕과 전쟁욕구, 혹은 경쟁욕구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면서 강력한 두 가지 본능이다."

 

 

이 두 가지 욕구에 물론 하나가 더 추가돼야 한다. 바로 식욕이다. 그렇게 해서 '와꾸'가 맞춰졌다. 전쟁, 섹스, 그리고 음식. 이게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란 제목이 뜻하는 바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여전히 식량을 얻고 섹스를 하기 위해 싸우고, 섹스를 하려고 음식과 선물을 이용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어느새 서로 교차하는 이 세 가지 고유 본능에 집착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것을 '부끄러운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저자가 의도한 '현대 과학기술의 역사'는 어느새 '인간의 역사'를 넘보고 있는 형국이다...

 

12. 03.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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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외출하기 전 자투리 시간에 무얼 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로쟈의 한줄'을 적기로 한다. <모비딕>의 한줄이다. 지난주 구입도서 가운데 가장 반가운 책의 하나는 멜빌의 <모비딕>(작가정신, 2011) 보급판이었는데, 아셰트클래식판으로 나온 <모비딕>(작가정신, 2010)은 일단 너무 두껍고, 너무 무거워서 휴대가 불편했다. 게다가 참고로 들어가 있는 삽화들이 본문과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참고용'이었기에 빠져도 독서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이번 보급판에선 삽화를 빼고 페이지당 행수를 두 줄 늘렸다(25행에서 27행으로). 그렇게 해서 전체 페이지수는 817쪽에서 718쪽으로 100쪽이 줄었다. 기분상 무게는 절반으로 줄어든 느낌이다. 같은 번역본을 보급판으로 다시 구한 이유인데, 책에 대한 집중도는 더 좋아질 듯해서 마음에 든다. <모비딕>의 세계문학전집판들이 경쟁 번역본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정본' 역할을 해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 가지 '옥에 티'가 교정돼 있지 않기에 지적해놓는다. <모비딕>의 핵심장 중의 하나인 36장 '뒷갑판' 말미에서 에이해브 선장이 이번 항해의 목적이 흰고래 모비딕을 잡는 데 있다고 말하고 유일한 반대자인 일등항해사 스타벅까지 설득하는 장면으로 부하 선원을 압도하는 그의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에이해브의 완력 앞에 일, 이, 삼등 항해사가 모두 움츠러드는 장면은 이렇게 기술된다.  

그 강력하고 긴박하고 신비스러운 선장의 태도 앞에서 세 항해사는 기가 꺾여 움츠러들었다. 스터브 플래스크는 눈길을 돌렸고, 정직한 스터브는 눈을 내리깔았다.(아셰트판, 249쪽; 보급판, 219쪽) 

이 대목의 오류는 누구라도 지적할 수 있다. 기가 꺾인 '세 항해사'에 대한 묘사인데, '스터브-플래스크-스터브'라고 해서 '스터브'만 두 번 호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정직한 스터브'는 '정직한 스타벅'으로 고쳐져야 한다. 참고로, 원문은 이렇다(내가 참고한 건 펭귄판이다).   

The three mates quailed before his strong, sustained, and mystic aspect. Stubb and Flask looked sideways from him; the honest eye of Starbuck fell downright.

완성도 높은 번역이기에, 이 정도 흠도 교정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바로 이어지는 37장 '해질녘'의 첫 문단에도 한 줄이 첨가되면 좋겠다.  

나는 하얗고 탁한 자국을 남긴다. 내가 항해하는 곳이며 어디에든 창백한 물, 그보다 더 창백한 얼굴, 질투심 많은 파도는 내가 남긴 자국을 삼키려고 옆으로 비스듬히 부풀어 오른다.(아셰트판, 251쪽, 보급판 221족) 

이 대목의 원문은 이렇다.  

I leave a white and turbid wake; pale waters, paler cheeks, where'er I sail. The envious billows sidelong swell to whelm my track; let them; but fisrt I pass

차이는 원문의 마지막 문장 'let them; but fisrt I pass'(뒤따라오라지, 하지만 내가 먼저다)가 번역문에는 누락됐다는 점. 몇 단어 안 되지만, 에이해브의 성격을 말해주는 부분이어서 나름대로 중요한 대목이라는 생각이다. 방대한 분량에 견주면 사소한 오류에 지나지 않지만, 더 정밀한, 더 좋은 번역본으로 나오는 게 모두에게 더 좋은 일이지 않겠는가... 

11. 0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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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19 13:55   좋아요 0 | URL
"뒤따라오라지, 하지만 내가 먼저다."
짧지만 아주 멋진 번역인데요. 나중에 다른 번역자들은 이 문장을 어떻게 옮겼는지 각 번역본들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겠는데요 ㅎㅎ^^

로쟈 2011-05-19 20:49   좋아요 0 | URL
다른 번역본은 확인해보지 못했고, 그냥 제 식으로의 번역입니다.^^;

비로그인 2011-05-19 18:08   좋아요 0 | URL
흑흑 저는 양장본을 싫어해서 못마땅해하며 샀는데 이런 식으로 보급판이 나와 뒤통수를 치다뇨ㅜㅜ

로쟈 2011-05-19 20:50   좋아요 0 | URL
알면서 얻어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일즈 2011-05-19 21:29   좋아요 0 | URL
백경을 원서로 보려고 이해가 잘 안되면서 여러번 읽다 보니까 이 생각 저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시점이 이스마엘에서 인디언 피쿽으로 바뀌면 어떨까하는 겁니다. 포경선 선원과 선장에 대한 묘사도 많이 달라지겠지만 백경을 바라보는 관점도 매우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로빈슨 크루소를 다소 관점을 바꿔 프라이데이 입장을 넣은 방드르디라는 소설을 즐겁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혹시 그런 소설이 이미 나왔다면 알고 싶고요^^

로쟈 2011-05-19 22:44   좋아요 0 | URL
'되받아쓰기'를 말씀하시는군요. <모비딕>은 아직 못 들어봤습니다. 하지만 <모비딕> 자체가 상당히 도전적이긴 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경향도 있구요...

pyenjea 2011-06-13 09:4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작가정신 편집부입니다. 정성을 기울였는데도, 저희가 미흡한 부분이 있었네요. 말씀해주신 부분 역자와 상의해서 다음 쇄에서 수정하기로 했습니다. ^^ 로쟈 님께서 찾아주신 덕분에 책의 오점을 수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지금보다 더 잘 다듬어진 모비딕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에드워드 윌슨의 <바이오필리아>(사이언스북스, 2010)에 실린 최재천 교수의 추천사('생명도 알아야 사랑한다')를 읽다가 멸종된 '황금두꺼비'가 궁금해 찾아봤다. 최교수가 코스타리카 고산지대에서 아스텍개미의 행동과 생태를 연구하던 시절 보았다는 두꺼비다.  

어느 날 밤 숲속에서 나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오렌지색의 황금두꺼비를 보았다. 어른 한 사람이 제대로 들어앉기도 비좁을 정도의 물웅덩이에 언뜻 세어 봐도 족히 스무 마리는 넘을 듯한 수컷 두꺼비들이 마치 우리 옛이야기 '선녀와 나무꾼'에 나오는 선녀들처럼 멱을 감고 있었다. 그들에게 방해가 될까 두려워 숨소리마저 죽인 채 나무 뒤에 숨어 그들을 관찰하는 내 모습은 영락없는 나무꾼이었다. 다만 그들이 수컷 선녀들이란 게 아쉬울 뿐이었다. 그들은 고혹적인 몸매를 뽐내려는 듯 다리를 길게 뻗기도 하고 물웅덩이에 첨벙 뛰어들어 헤엄을 치기도 했다. 그 해 1986년 나는 그들을 딱 두 번 보았고 그게 내가 그들을 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이렇게 생긴 두꺼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60년내 중반에 처음 이들을 발견한 미국의 양서파충류학자는 "온몸이 거의 형광에 가까운 오렌지색으로 뒤덮인 작고 섬세한 두꺼비를 보고 누군가가 그 두꺼비를 통째로 오렌지색 에나멜 페인트 통에 담갔다 꺼낸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을 과학자들이 마지막으로 본 게 1989년 5월 15일이고, 국제자연보호연맹은 2004년 그들이 완전히 절멸한 것으로 보고했다고 한다.  

이 황금두꺼비 이야기는 최 교수의 에세이집 <열대예찬>에도 나온다고 하므로("이럴 줄 알았으면 그들이 벗어놓은 옷가지라도 한두 개 숨겨 둘 걸"이란 한탄을 적어놓았다) 나도 한번 읽었을 텐데, 잊고 있었다. 생명사랑을 주제로 한 책의 서두에서 다시 읽게 되니까 느낌이 또 다르다. 지구상에서 이젠 다시 볼 수 없는 두꺼비라니! 

과학자들은 지금과 같은 수준의 환경 파괴가 지속된다면 2030년경에는 현존 동식물의 2퍼센트가 절멸하거나 조기 절멸할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금 세기말에는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들의 빈 자리를 아마도 늘어만 가는 '인구'가 채울 것이다. 쓰레기들과 함께. 생명사랑에는 동의하지만, 인간사랑에는 조금 머뭇거리게 되는 일요일 밤이다... 

10. 1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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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7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9 0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