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 출구 1
허새로미 지음 / 봄알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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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에 받아서 일하는 틈틈이 단숨에 읽었다. 몰입도가 강한 이야기. 읽으면서 내 생각을 많이 했고, 심란한 꿈을 꾸고 일어났다. 제목은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둔게 아니라, 죽으려고 살기. 를 그만둔 것으로, 읽기 전에는 기발하다고 생각했지만, 읽고 나서는 안 기발하더라도 평범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희망적인 이야기에 왜 힘이 나지 않는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봄알람에서 '출구 총서'란 이름으로 내는 시리즈의 1번 출구. 가족으로부터 탈출한 딸의 이야기. 2번 출구의 가제는 '결혼 탈출'이다. 어떤 시리즈가 될지 짐작 가고, 응원한다. 


책에 나온 이야기는 많이 듣던 이야기이지만, 많이 듣던 이야기라도 늘 가시에 찔린듯 아픈 이야기이다. 나는 아빠가 소리지르는 것을 경상도 남자가 그렇지로 퉁쳤고, 후에는 분노조절 장애라고 이름 붙였고, 가족들 모두에게, 엄마, 나, 남동생 순서로 그 폭력을 휘둘렀다고 생각한다. 그럴거라고 했지만, 더 이상 돈으로 가족들을 휘두룰 수 없는 지금, 가장 심한 언어 폭력을 당했고, 당하는 엄마만 옆에 남아 있다. 가족을 돌보고, 희생한다는 그 마음을 모르는건 아니라서 연민이 없는건 아니지만, 폭력을 참아 주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가족의 이야기는 그 가족 수만큼이나 있을텐데, 부모가 자식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늘 이해할 수 없는 나쁜 일이었고, 일이고. 그걸 참아주고 희생하는 자식도 늘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삼십대의 어느 추석날 추리닝 바람으로 카드와 전화기만 챙겨 집을 나와 공유 사무실 바닥에서 목도리를 깔고 잠을 잔다. 부모에게서 탈출하는 순간이다. 2부에서는 주어진 가족을 버리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철저히 혼자가 되고, 다른 딸들, 자매들을 찾는. 이들 역시 가족을 버린 딸들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에서 독립하여 자립한 성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으면, 성인이 될 때까지 책임지고, 그 이후로는 성인과 성인이다. 부모의 희생도, 자식의 희생도 바라지 않는다. 현실을 답습한 건지, 견인하는 건지, 둘 다 인지 알 수 없는 K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딸들의 장면들은 이 책에서도 반복되고, 다른 것은, 여기 이 딸은 탈출했다는 것이다. 그 앞의 임팩트가 너무 강해서 심란한건지도 모르겠다. 뒤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깐, 제목도 그렇다니깐. 어쩔 수 없는건지도 모르겠다. 삼십여년간 가족의 사랑과 괴롭힘을 받아왔는데, 이제 3년동안 이렇게 자립하고, 새로운 가족들을 (같이 살아야만 가족인건 아니지) 만들어 나간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아니깐. 집을 나와 문을 닫고, 이제 막 새로운 문들을 열기 시작했으니, 한동안 이전 집의 아우라가 남아 있는건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알 만한 사람의 소개도 아니고 TV에 나오는 명강사도 아닌 내가 한둘씩 고객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만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모든 끈이 떨어져 홀로된 여자에게 고객이자 친구가 되어주는 여자들이 생긴다는 것은 내 개인의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이었다. 세상이 넓다지만 내가 진짜로 넓혀볼 만한 세상에 그때에야 초대된 셈이었다. 


이 이야기가 정말 좋았다. 구렁텅이가 정말 깊어 보였지만, 기어 나와 '개인의 역사를 다시 쓰는' 것. 

그러기 위해 혼자가 되었던 것. 타협한 것도 있었겠지만, 타협하지 않았던 것들이 있었던 것. 순순히 끌려가지 않고, 삶의 고삐를 잡기 위해 애썼던 것. 


정신이 무너지면 가장 먼저 공격당하는 것은 일상이다. 혼자인 여자의 일상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혼자인 여자는 다른 혼자인 여자가 필요하다. 다른 혼자인 여자 아닌 체계는 거의 전부 가부장제의 변형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혼자인 여자가 여럿 모인 조합은 그 존재만으로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힘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좋고, 동시에 별로였다. 


여자가 망하지 않고 그냥 사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해야 한다. 남자와 서사를 섞지 않아도, 그리고 또 눈부시게 성공하지 않더라도 여자가 안 망하고 삼시 세끼 잘 먹고 편안하게 따뜻하게 잘 자고 쫓기지 않고 친구와 잘 지내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여자 안 망하는 이야기를 앞으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해야 한다. 


어제 오전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었고, 저녁에는 허새로미의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 를 읽었다. 

여자들의 이야기가 많아져야 한다고 두 책에서 다 이야기하고 있다. 여자들의 이야기가 많은데, 죄다 남자들이 하는 이야기라고, 여자가 하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많아져야 한다고 하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여자들은 바로 주변의 여자들이다. 미디어에서 보는 여자들은 죽거나, 맞거나, 고통받는 여자들로 점철되어 있다. 픽션도 마찬가지. 여자의 행복은 남자와 가족에 엮여 있다. 평범한 여자들이 잘 사는 이야기들이 많이 필요하다. 주변의 여자로 재미있게 잘 사는 이야기들을 하다보면, 그 주변이 점점 넓어지다보면, 가능하겠지. 


이 책의 마지막이 대단하다. 예상하지 못했던 마지막 챕터였어서 읽으며 닭살이 쫙 돋았다. 


돌이켜보니, 역시, 이 책은 탈출, 새 가족, 희망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어. 그러니, 으쌰으쌰의 기분이 들기보다 심란함이 앞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비관론, 현실론에 낙관론을 담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여서, 지극히 개인적으로 읽을 수 밖에 없는 책이었다. 


괜찮아. 다 괜찮아. 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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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맘에 2021-03-09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가 망하지 않고 그냥 사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해야 한다˝ 에 폭풍 공감합니다!

하이드 2021-03-09 12:03   좋아요 0 | URL
네, 많이 이야기해요! 일단 내 이야기부터요. 망하지 말아야지!

2021-03-09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9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에 갇히다 - 책과 서점에 관한 SF 앤솔러지
김성일 외 지음 / 구픽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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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서점을 주제로 한 SF 단편 모음집. 참여 작가들의 면면이 대단하고, 작품들 또한 아름답다. 읽기와 책, 함께 하고, 전해져 내려와 전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들.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을 가장 앞서나간 방법으로 이야기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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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02-20 1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제목을 ‘책에 깔리다’로 읽는 사람이 많대요. (저도 포함) 서평집이 아니라 소설집이군요 (오해 추가;;;)

하이드 2021-02-20 19:11   좋아요 0 | URL
오, 소설들 대단해요. 책에 진심인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맘에 오랜 여운 남는 좋은 작품들입니다.
 
주머니 전쟁 - 자신을 사랑하는 법 via 여성의 속옷 역사 가치관 컬렉션 1
앰버 J. 카이저 지음, 허소영 옮김 / 상상파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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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탄 디오르의 주장으로 리뷰를 시작해야지. 


" 남성들은 물건을 보관하는 용도로 주머니를 사용하지만, 여성들에게 주머니는 장식용이다." 


중세 시대 속옷의 주요 기능은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속옷은 보온 외에도 거친 소재로 만든 겉옷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기능이 있다. 


속옷이란 뭘까. 지금도 속옷의 기능은 크게 다르지 않다.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겉옷으로부터 몸을 보호한다. 남자만.

 

여자들에게 속옷의 기능은 추가된다. 몸매를 보정하기 위해, 가슴을 처지지 않게 하고, 돋보이게 하고, 골반을 커 보이게 하거나 엉덩이를 작아 보이게 하고, 다리를 날씬하게 보이게 하고, 군살을 감추고, S라인을 만들어줌. 사탕껍질 옷 입을 때 속옷라인 보이면 안되니깐, 엉덩이 사이에 끈만 달아서 끈팬티 만든다. 남자들에게 퍼커블하게 보여야 하니, 섹시한 장식품 역할도 해야 하고, "예쁜 속옷은 여성들의 자존심이니깐" 자존심 살려주는 역할도 한다. 아, 섹시한 속옷 입으면 kibun이 좋아지니, 자기만족 용도이기도 하다. 추가된 기능은 많은데, 위의 기능들을 넣느라 빠진 기능들도 있다. 몸을 보호하지 못하고, 조여서 소화불량을 일으킴. 피 안 통하게 해서 수족냉증이 생김. 겉옷과 몸으로부터 속옷을 보호해야 함. 


의복이 가진 권력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의복이 가진 무언의 권력 때문일까. 의복착용권을 박탈함으로써 피지배층을 통제했던 역사적 흔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 로마, 초기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사람을 사고파는 행위는 노예시장에서 빈번히 일어났다. 그곳 어디에도 제대로 옷을 갖춰 입은 노예는 없었다. 모두 벌거벗겨진 채, 구매자가 살펴보기 좋은 상품의 모습으로 진열되었다. 문화권이 달라지고 시대가 바뀌어도 노예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완전히 또는 거의 벌거벗은 모습으로 강요된 노동을 감당해야 했다. 남들 앞에서 벌겨벗겨진 상태가 노예임을 인증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자신의 신체와 노동력조차 타인에게 통제된 노예들에게 이런 모습까지 강요한 것은 비인격적인 행위의 극단이다." 


완전히 또는 거의 벌거벗은 모습으로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여성 직종들이 떠오른다. 


여자들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던 치마를 덮는 그 새장같은 기구들. 이게 비싸서 돈 있는 사람들이나 귀족의 전유물이었는데, 1856년 기술 발달로 용수철 후프가 등장했다. 수십년동안 착용했던 엄청나게 무거운 크리놀린과 달리 후프는 가볍고 탄력 있고, 대량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에 가격도 저렴했다. 실루엣도 훌륭하게 만들어냈는데, 단 한가지 부족한 점은 안정감. 스커트는 쉽게 뒤집혔고, 치마 속이 시시때때로 드러났다. 


이 당시 속옷은 가랑이 사이가 터져 있었는데, 치마 속이 시시때때로 드러나서 

후프를 포기하거나 속바지를 꿰매야 했는데, 


속옷을 꿰매다니! 상반된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고 한다. 


19세기에 이르러 의복을 통한 성별 구분은 한층 강화되었고, 여성은 긴드레스가 공식이었는데, 1851년 제네바 출신 엘리자베스 스미스 밀러가 터키식 바지 비스무리한 블루머를 만들어냈다. 


1851년 뉴욕타임즈 편집국 

" 이미 미국 여성에게는 헌법이 공정하게 보장한 몫의 권리가 있다.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특권을 장악하려고 고집스럽게 몰입하는 그들의 행동에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 그렇다고 이 행동이 맹렬히 비난받을 만하거나 당장 억압되어야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남성들의 방식을 침해하려는 흐름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남성들의 방식 침해? 뭐라고? 


복장 개혁가와 여성 참정권자를 비웃는 한 남성의 글이 뉴욕타임즈에 실렸다. 


"주머니가 발명된 이후, 주머니를 가지지 못한 자는 결코 위대해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여성이라는 성별은 주머니가 없는 동안 결코 우리(남성)의 경쟁자가 될 수 없다." 


주머니.. 주머니.. 이게 특히 열받는건, 지금도! 2021년에도! 21세기에도! 여성들의 옷에 장식주머니가 달려있거나! 뭐 넣지도 못하게 얕거나! 하는 게 너무 많아서! 전쟁이다! 장식주머니 아웃! 얕은 주머니도 아웃!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여성들의 지위에 변화가 온 건 다 알지. 미국과 유럽의 여성들은 군수품 공장에 취직해서 일을 하고, 버스나 기차에서는 차장으로, 전쟁터에서는 간호사로 일했으며, 경찰관과 소방관의 역할도 여성의 몫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드레스 차림으로 활동하기가 불편해져서. '일을 하기 시작하니' 마침내! 여성들은 난생처음 일상적으로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코르셋에 들어가는 살대가 철로 만들어져서 여성들에게 코르셋 착용을 멈춰달라고 호소함. 

대의를 위해 조였던 끈을 풀어버린 여성들 덕분에 전함 한 척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2만 8천톤의 강철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성들을 남성들처럼 편하게 둘 수는 없지! 이제 거들이 생김. 

1930년대 이상적 여성상의 모습에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추가되었다. 예전에는 예쁘게 보이기만 하면 되어서 고통과 불편함을 감수하고 코르셋으로 몸을 꽁꽁 묶기만 하면 되었지만, 이제 일도 열심히 해야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분노하게 되는건, 여성 속옷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 

아직도 여자 옷은 주머니가 얕거나 장식주머니라는 것이다. 

탈코르셋 물결을 타고, 일부, 한 줌의 한 줌 변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일부의 변화가 아니라 불씨이기를. 

꺼지지 않다가, 언젠가 활활 타오르기를 바란다. 코르셋 아웃! 



란제리를 착용하는 것만으로 여성은 기분이 좋아졌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어지기도 했다. 광고는 이렇게 란제리의 새로운 이중적인 역할을 암시했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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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01-13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생각나요.

하이드 2021-01-13 17:40   좋아요 0 | URL
그죠. 저 표지 사진도 되게 유명한 사진이래요. 모델 뒤에서 찍은 사진.
여튼, 지들 필요할 때만 코르셋 하지 말라고 하고. 진짜 코르셋 모아서 전함 만들었단 얘기 보고 놀랐어요.

2021-01-13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13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포스트잇 2021-01-13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도 있었네요. 전 주머니 없는 바지나 치마는 사지 않습니다. 왜 주머니를 안만드는지.
그래서 여성들 손이나 어깨에 핸드백을 들게 했겠죠.

오라오라 2021-02-01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대로 주머니가 많은 바지는 기능성은 좋지만 심미성이 떨어지지요. 요는 기능이 먼저인가 디자인이 먼저인가 같습니다. 군용 택틱컬 팬츠보면 주머니가 제법 많습니다. 다 제각기 기능이 있지요. 주머니가 있는 옷, 없는 옷 다 제각기 목적이 있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어 마이 네임 - 이름이 지워진 한 성폭력 생존자의 진술서 너머 이야기
샤넬 밀러 지음, 황성원 옮김 / 동녘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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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 사건은 지금 이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뉴스도 아닌 일이 되어버렸지만, 이 사건은 몇 년에 걸쳐 뉴스를 볼 수 있어서 기억한다. 그리고, 스탠포드 수영 선수의 강간 사건에 대한 피해자의 최후 진술서가 세계적으로 바이럴을 탈 때, 나도 읽었고, 책으로 나온 걸 알게 되었다. 이 책하고 김지은입니다.를 같이 묶어서 파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참 독한 책들이 묶여 있었구나 싶다. 

사람이 독하다는게 아니라, 책이 독하다. 


부조리를 뒤집은 글의 힘에 대해 생각한다. 판사는 탄핵되었고, 브록은 책 속의 누구 말마따나 성폭력의 얼굴이 되었다. 

진술서도 대단히 잘 쓴 글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대필 의혹도 있었다고) 책 읽어보니, 글을 굉장히 잘쓰는 사람이었다. 앞으로 작가로 커리어를 가꿔나갈테니, 작가라고 해도 되겠지. 회복하는 중에도 처음 간 코미디클럽에서 코미디 대본으로 대성공을 하는, 글도 잘 쓰고, 열정도 있고, 에너지와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덤프트럭급의 사고에 내팽겨쳐져서 추스리는 몇 년간의 시간을 책으로 써내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끌어냈다.  


글을 너무 잘 써서, 5백페이지 넘는 피해자, 생존자의 이야기를 읽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처음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받은 오렌지색 서류철에는 이후의 반응에 대한 팸플릿이 있었다고 한다. 


" 0~ 24시간 : 무감각, 경미한 어지럼증, 알 수 없는 두려움, 충격. 나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카테고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2주~ 6개월 : 건망증, 탈진, 죄책감, 악몽. 마지막 카테고리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6개월~ 3년 이상: 고립감, 기억이 갑자기 한 번씩 되살아남, 자살 충동, 일을 하지 못함, 약물 남용, 관계의 어려움, 외로움. 이건 누가 쓴거지? 누가 이 쓰레기 같은 종이에다 불길한 미래를 예언한 거야? 내가 이 얼굴도 모르는 우울한 사람의 시간표에 따라 살게 된다는 건가?" 


그리고, 독자는 그 시간표를 살아내는 샤넬을 읽게 된다. 


"나는 돈만 있으면 감방 문이 활짝 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폭력이 발생했을 때 여자가 술에 취한 상태였으면 이 여자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폭력이 일어났을 때 남자가 술에 취한 상태였으면 사람들이 그 남자를 동정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내 끊긴 기억이 그에게 기회가 되리라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피해자가 된다는 건 신뢰받지 못한다는 것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몰랐다." 


이 책을 오래 읽었는데, 사실, 이 책에 대해 덧붙이고 싶은 것은 별로 없다. 강간이 있었고, 목격자도 피해자도 있었는데, 언론은 유망한 수영선수인 가해자의 편을 들고, 피해자의 행실을 비난하고, 유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판사는 가해자를 선해해서 고작 3개월 감방에서 있다 나오는 판결을 내린다. 판사는 나중에 탄핵됨. 판사가 탄핵되는 거 빼고는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 너무 매일 보는 이야기라서.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피해자가 생존자가 되는 과정이다. 진술서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저자의 글쓰기 멘토였던 소설가 앤 라모트와 연결된다. 


" 저는 당신이 걷어붙였던 소매를 다시 풀어 내릴 거라고, 그러면 깊고 깊은 내면에서 무언가가 당신에게로 돌아가서 당신이 무엇을 추구하거나 도전하는 것이 합리적일지 알려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신 위에서 부서져 내리려고 하는 파도 아래로 잠수하는 방법을 알지요? 글쓰기는 그런 면에서 당신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혼란과 임박한 소용돌이에서 물러나고, 그 과정에서 한 조각 안식처를 찾기 위해, 기억을 상상을, 사색을 휘갈겨 적는 행위.."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다시 단단해졌기를 바란다. 

우리는 사람이 서로 잘 맞는다고 할 때 남자가 자신을 여자에게 끼워 넣는다는 생각이나 하지 그 외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간과한다. 귀는 색종이처럼 얇아서 내가 그의 가슴팍에 내 얼굴 옆면을 기댈 수 있게 해준다. 손가락은 엉키지 않고 깍지를 낄 수 있다. 한 손은 하나의 턱ㅇ ㅔ자그만한 의자가 되어줄 수 있다. 우리 몸은 구부러지고 접히도록 되어 있어서 우리 스스로를, 그리고 다른 사람을 편하게 받쳐준다. 우리에겐 아껴주어야 할 작은 부위들이 아주 많다. - P100

루카스가 떠나자마자 나는 나의 하루 안에서 아픈 공허함을 느꼈다. 내가 복숭아씨 주위의 부드러운 곤죽이 되어가는 동안 가장 단단한 부분인 복숭아씨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 P139

사람들은 그의 미래가 마치 그가 그 안으로 들어오기만을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우리 대부분은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그것은 우리가 내리는 선택을 통해 하루하루 만들어진다. 미래는 노력과 행동을 통해 조금씩 획득된다. 거기에 맞게 행동하지 ㅇ낳으면 그 꿈은 흩어지고 만다.

처벌이 잠재력을 근거로 삼을 경우, 특권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을 받게 될 것이다. -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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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21-01-12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now My Name 이 번역되었군요. 글을 잘 쓰더라고요. 그래서 더 읽기 힘들기도 했지만요.
작가가 트레버 노아의 데일리쇼에 나왔었는데 조곤조곤 말도 잘하고 보면서 울컥하기도 하고... 감동적이었어요.

하이드 2021-01-12 16:21   좋아요 0 | URL
네, 글을 엄청 잘 쓰는데, 책은 또 엄청 길고, 내용은 힘들어서, 몇 번에 나누어서 읽어야 했어요. 트레보 노아 데일리쇼 찾아봐야겠습니다.
 
가난의 문법 - 2020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소준철 지음 / 푸른숲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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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에 의미 있는 책을 읽었다. 소준철의 '가난의 문법'은 가상의 45년생 윤영자씨의 일상을 그리며, 

우리나라의 평균 노년 여성 빈곤과 폐지 줍는 노인으로 폄하되는 재활용품 수집인을 보여준다. 


프롤로그부터 인상적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나라가 2위와도 큰 격차로 OECD 국가들 중 노인빈곤 1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노인빈곤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성별임을 알고 있다. 


조금 더 어렸을 때, 비혼을 이야기하기 전에, 혼자 사는 독신녀의 악몽으로 키우던 애완견에게 뜯어 먹혀 죽은지 한참 후에 발견되는 이야기를 하던 때가 있었다. 책이, 방송이, 사회가 그런 이야기들을 했지. 정작 고독사로 죽는건 50대 남자가 1위인데. 그러나, 요즘 이야기하는 혼자 나이들어 폐지 줍는 할머니 된다. 는 것은 사실에 근접해 있다. 


"여성과 남성의 생애 경로의 차이. 조사에서 만난 노인들을 돌아보면, 남성노인은 '출생'에서 '진학'에서 '취업'과 '결혼'과 '육아'를 거쳐 '자녀와의 분리'로 이어지는 개인화되는 경로를 거친다. 여성노인들은 남성인 파트너와 그의 임금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생활이 재편되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제도에서 벗어난 '시장'의 변방에 나가 직접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현재의 여성노인들은 직접 임금노동자가 될 기회가 별로 없었고, 이로 인해 경력과 숙련이 없는 상태였다. 다시 말하자면, 가난한 여성노인은 이전의 한국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여성 생애의 목표를 남편에 대한 내조와 자녀의 양육으로 삼게 하고, 따라서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질 기회를 갖지 못하게 했던 결과인 것이다." 


가상 인물인 윤영자가 1945년생인데, 1945년생은 2020년 기준으로 만 75세이며, 이 나이는 운전면허를 가진 경우, 면허 갱신의 시기가 5년 주기에서 3년 주기로 바뀌는 전환점이라고 한다. 신체적 능력에 대한 사회적 의구심이 가득해지는 시기이고, 인구통계에서 후기고령자로 여겨지기 시작하는 나이이다. 


" 우리는 '늙는다는 것이 역사상 처음으로 정상적인 것이 된' 사회에 살고 있다. " 


노인빈곤과 재활용 산업을 같이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필요한 일인데, 새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 과거 넝마주이의 일이 넝마주이와 고물상과 폐품 매입업자 사이의 단순한 거래 관계였다면, 지금 재활용품 수집노인은 이보다 더 고도화된 '관계'에 갇혀 있다. 이제 노인들이 재활용품을 수집하고 판매하는 행위는 폐기물 처리 과정에서의 자원순환 정책과 재활용 산업에 매개되어 있다. 그렇지만 제도와 산업, 그 어디에서도 인정받지도 보호받지도 못하는 위험한 일에 불과하다." 


재활용 문제는 환경 문제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고, 지금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데, 재활용 산업 끄트머리에 법의 사각지대에 , 필요한 일이라 암묵하는, 다른 일을 찾을 수 없는 노인들이 찾는 재활용품 수거하는 일이 있다. 공동의 쓰레기통이 없는 제도와 산업의 빈틈을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이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노인들의 재활용품 수집은 제도로부터 재활용품을 '낚아채는' 일이다. 도시가 비대해지는 과정에서 생겨난 다세대/다가구주택과 좁은 골목들에 정책과 제도라는 공공영역이 침투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문 앞과 골목에는 쓰레기와 재활용품이 방치될 수밖에 없다." 


저자가 인터뷰들을 통해 보고 들은 장면들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도 있고, 처음 듣는 것도 있고, 알면서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이 있다. 재활용품을 수거하기 위한 눈치 작전, 무거운 걸 많이 들고다닐 수 없고, 재활용품을 두고 화장실이라도 가야 하면 재활용품 모아둔 것을 도둑 맞고나 심한 경우는 카트까지 없어져서 집을 중심으로 재활용 내놓는 시간을 계산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 건물주들이 공짜로 청소 시키고, 건물에서 나오는 재활용 가져가라고 하는 건 흔한 일, 남자 노인들이 리어카나 전동차 등을 이용하여 많이 싫고 다니는데, 여자 노인들은 카트를 끌고 다니는 것. 재활용품 수거차와의 눈치 싸움을 하며 새벽 골목길을 오가는데, 지그재그로 다니면서 폐지등을 줍느라 교통사고를 당할 위험이 크다는 것, 아무 이유 없이 폭행을 당해 죽기까지 한다는 것 등등 


여성노인들은 힘이 부족해서 뿐만 아니라 가사와 돌봄을 이유로 길에서 남성노인들에 밀리게 된다. 

수집하러 다니다가도 식사 시간에 밥해주러! 환자 돌보러 집에 돌아가야 한다. 


앞에 잠깐 얘기했던 '폐지 줍는 노인' 에 대한 이야기를 더하면, 

이들을 돈을 주지 않는 '청소부'나 불쌍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지양해야 한다. 


"노인들은 재활용품을 수집하고 있지만, 이들은 '청소부'가 아니다. 버려진 것들을 주워 돈을 벌지만, 그 돈은 쓰레기를 버린 이들이 주는 게 아니다. 노인들의 행위는 같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청소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게 아니라, 재활용 산업에서 발생하는 돈 일부를 스스로 취하고 있을 뿐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제안하는 것은 지금 당장 생각하고, 고민하고, 결과를 내야 할 것들이다. 

재활용품 수집 노인 중 상당수가 가난으로 고립되어 있는데, 노인들과 지역사회가 상화의존하는 계기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근근이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자립이 아닌 함께 모여 서로에게 의존하는 자립이 필요하다." 


100세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일할 수 있는 나이 동안 일해서 모은 돈으로 그 후로 몇십년을 살아가면서 가난해지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에게 닥칠 문제이다.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어떻게 삶을 이어나갈지에 대한 비전과 액션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한국사회에서 가난의 모습은 늘 변해왔다. 전쟁이 끝난 후 갈 곳 없는 고아의 모습에서,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온 달동네의 모습과 IMF 위기 이후 노숙인의 모습을 거쳐 리어카를 끄는 사람들(특히 노인들)의 모습으로, 가난의 모습은 늘 바뀔 것이다. 다음에 올 ‘가난‘이 어떤 모습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전후 세대 이전의 노인에 대해 우리는 어떤 대처를 해야 할까? 그들은 우리의 ‘불행한 미래‘일까? 가난한 노년을 다가올 불행으로 여기며, 그보다 나아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일은 처참하다. 노인들의 모습은 젊은이들의 ‘불행쿠키‘가 아니며, ‘반면교사‘도 아니다. 지금 닥친 노인들의 생활 속에서 노인들의 어려움을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 P49

종이상자의 생산량, 배출량이 늘어나는 현상은 노인을 착취하는 일을 심화시키고 있다. 배달과 온라인 쇼핑이 활성화되며 종이상자의 사용량이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다. 집과 가게마다 다 쓴 종이박스의 배출량도 늘어났다. 그렇지만 젊고 부유한 소비자들은 폐품의 배출과 처리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종류에 따라 ‘분리수거‘를 하면 자신의 책임을 완수했다고 여긴다. 게다가 종이박스가 늘어나면, 노인들이 수집할 것도 생기니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 종이박스가 골목에 쌓여 있는 데 대한 책임은 대개 정부와 위탁 청소업자에게 있다고 여긴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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