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민음사 탐구 시리즈 4
임소연 지음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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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의 이 빨간책 시리즈는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로 처음 접하게 되었지만,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여성과 과학에 대한 이야기들이 낯선 것도 아닌데, 참 더디게 읽혔다. 더디 읽히는만큼 더 많이 생각들로 채울 수 있었다. 


저자는 과학에서 소외되었던 여성을 더 잘 재조명할 수 있도록 함께 탐구하고, 과학과 친해지자고 이야기하고 있다. 

더디게 읽히긴 했지만, 어려운 내용은 아니라서 관심 가는 분야들 재미있게 읽혔다. 


'3장 장은 생각한다'에서 폭식증과 우울증이 뇌만이 아니라 장의 문제임을 이야기한다. 에드워드 불모어의 '염증에 걸린 마음' 에서 염증이 뇌에 영향을 미쳐 우을증에 걸리게 한다는 내용도 떠오르는 부분이었다. 장과 우울증의 문제가 이 책 여성과 과학에 나온 이유는 우울증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세로토닌 때문이다. 장은 세로토닌을 만드는 데 필요한 단백질과 탄수화물을 소화한다. 단백질은 세로토닌의 재료를 제공하고, 탄수화물은 세로토닌 수치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탄수화물을 많이 먹으면 인슐린의 분비량이 늘어나고 이에 따라 세로토닌이 대량 생산된다. 단 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기제이다. 세로토닌의 95퍼센트는 장의 내분비 세포인 장내 크롬친화성 세포에서 만들어진다. 5프로만이 뇌에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우울증은 통상 여성이 남성보다 1.5배에서 2배 가까이 많이 경험하는 질환이다. 섭식 장애를 가장 많이 앓는 집단이기도 하고, 와 단맛과 디저트를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집단인 여성의 장문제와 관련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2018년 발표된 계명대 의과 대학의 이주엽과 박경식의 연구논문에 따르면 여성 과민증 장 증후군 환자에게서 성적, 신체적 정서적 학대 경험이 더 빈번하게 나타났다고 한다. 


20~ 30대 여성의 우울증과 섭식 장애, 식문화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과학은 아직 없다고 한다.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 같다. 


" 젊은 여성들의 문화는 달콤한 디저트를 즐기는 우울한 장과 연결되어 있다. 이미 여성의 장은 더 우울하고 더 예민하며, 이에 대한 처방으로 달콤한 음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제 장이 알고 있는 것을 과학자들도 알아야 할 때가 왔다. 장과 뇌의 연결에 관한 최신 연구는 물질과 감정을 통합해 이해하는 과학이다. 여성의 경험을 과학 속에서 더 많이 공유한다면 우울한 여성, 먹고 토하는 여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60)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머신러닝을 하는 인공지능은 알고리즘에 의해 사회의 차별적 시선마저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차별하지 않는 인공지능은 자연스러운 데이터, 스스로 학습하는 알고리즘이 아니라, 인위적인 노력과 개임으로 다듬어진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의해 만들어진다." (107) 


마지막으로 과학과 좀 더 친해질 것을 과학계 여성들의 머릿수가 더 늘어나야함을 강조하며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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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 2022-07-30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 디저트 먹고 위장이 안좋은데 제 얘기 같네요 ㅎㅎㅎ...(반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됩니다 ^^
 
우리가 잃어버린 것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2
서유미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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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박혜진은 이 책이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어온 여성들의 자발적 고립의 역사 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소설들이 혼자라는 상태, 고립이라는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아내는 데 그쳤다면 서유미의 성취는 각자의 고립을 넘어서는 느슨한 연대를 통해 멈춘 듯한 좌표를 이동시켰다는 데에 있다." 라고 평한다. 


앞문장에는 반 정도 동의하지만, 고립을 넘어선 느슨한 연대라는 것에는 물음표가 뜬다. 


서른 일곱의 경주는 또래의 주원과 아이가 생겨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육아 휴직은 고민 끝에 퇴직으로 이어진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게 되어, 취업을 간절히 바라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동네의 카페 제이니로 출근하며 구직활동을 하게 되지만, 쉽지 않다. 그나마 연락온 곳에서는 야근과 주말출근이 가능하냐고 물어서 안된다고 하고, 집 근처여서 지원했던 회사가 얼마 후 두 시간 거리로 이사간다고 해서 포기한다. 


초반에 육아로 힘들어하는 것들 읽으면서, 내가 왜 이걸 읽고 있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너무 많이 읽고, 봤던 이야기들 아닌가 싶었다. 이 책에는 내가 현실에서는 한 번도 듣고 보지 못했던 남편이 나온다. 아니, 이 책은 남편의 좋은 모습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아이, 남편, 시댁, 가족으로 힘든 일은 편집하고, 경주의 느낌과 깨달음, 힘든 심리에만 집중한다. 


비혼의 친구가 기혼이 되었을 때, 서 있는 자리가 달라졌을 때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남겨준다. 사회에서 우리는 약자의 자리를 지켜줘야 한다는 것을 안다. 육아를 하는 여자는 사회적 약자이다. 하지만, PC도, 배려도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일까. '자발적' 고립이어서인 것 같다. '출산'은 선택이어서. 하지만, 아무리 봐도 출산과 육아는 여자에게 외통수인 것 같다. 일과 육아의 밸런스를 맞추는 것은 곡예와 같고, 대부분의 사람은 곡예사가 아니니, 몸과 마음이 갈릴 뿐이다. 


독립해서 살다가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평소 쓰던 고급 핸드워시를 더 이상 사지 못하고, 취준을 위해 방문한 카페에서 그 핸드워시를 발견하고 좋아한다. 아이가 조금 크니 어른의 것, 어른으로서 어른과 나누던 것들에 목마르게 된다. 임신과 육아로 고립이 되니, 이전에 벽을 유지했던 것과 달리 자꾸 사람들에게 마음을 쉽게 연다. 담당 산부인과 의사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집에 놀러와'주는' J를 절친으로 여기고, J를 기다린다. 그리고, 단골 카페 제이니의 여자 사장에게는.. 더 복잡한 마음. 누가 와줬으면 좋겠다. 나는 밖에서 못 만나니깐. J가 와주니 너무 고맙다. 절친이다. 느끼게 되는 것. 절박해 보인다. 서른 일곱까지 비혼으로 친했던 고등학교 친구들 넷은 청첩장을 보내고, 돌잔치에 초대하면서 절연하게 된다. 고등학교때부터 서른 후반까지 절친으로 만났는데.. 어휴.. 


서른 후반의 직장인들이 비혼이거나 말거나 매 주 만나고, 여행하고, 이런 설정은 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힘들다고. 서른 후반은. 그런 에너지 없다고. 그런 만남에 결혼준비로, 임신으로, 육아로 빠지게 되고, 그렇게 일년 동안 아마도 소원하다가 돌잔치 초대를 하고. '고립', '자발적' 고립. 그 세계에 들어서기 전에는 몰랐던 감정과 상황과 이야기들. 근데, 정말 몰랐을까? 정말 모르나?  


베스트 시나리오는 지우 (경주의 딸)에게 귀여워 죽는 이모 넷이 생기는 것일 수도 있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기도 하고. 친구 관계가 그 정도였나보지 싶기도 하고. 기혼과 비혼 사이에 건너기 힘든 강인가 싶기도 하고.   


책은 비혼과 미혼에서 기혼으로 넘어간 경주가 어떻게 다른 길을 걷게 되는지를 한 눈에 보여준다.


그리고, 아이를 중심으로 같이 웃고 고통을 공유하는 사이라는 점이 남편과 더 큰 결속력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 그런가? 


경주가 SNS에 단골 카페로 태그를 달아 올리자 전직장 동료가 '대낮 카페 부럽다!'고 메시지를 보낸다. 회사 사진과 함께. 경주는 취준으로 괴로워하는 그 시점에. 


"동료는 경주를 부러워하지만 구직자인 경주의 간절함은 헤아릴 수 없을 것이고 경주는 양쪽 입장에 다 처해봤지만 이제 저쪽의 마음에서 멀어졌다. 


오히려 경주는 지원했던 채용 공고가 하나씩 마감될 때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설득해야 했다. 왜 일하고 싶은지, 꼭 일해야 하는지. 경제활동을 해서 빚도 줄이고 생활의 눈금을 여유 쪽으로 옮기고 싶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리를 가지고 싶었다. 주원의 일, 회사에만 기대는 것도 싫고 지우가 크면서 친구들 쪽으로 좌표를 옮겨갈 때 졸졸 따라다니며 뒷모습만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111)


"집에만 있으려니까 답답하지만 그건 답답함이라기보다는 막막함에 가까웠다." (115)


의지하던 집에 와주는 친구 J 와도 마음이 상하게 된다. 

"나는 나를 책임져야 되잖아, 평생. 나를 책임질 사람이 나밖에 없잖아." 


남편이 부인을 책임져주지는 않는데, 누구나 나를 내가 평생 책임져야 하는거 아닌가. 나도 저 말 종종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보니 그렇다. 독립, 의존,연대,파트너, 돌봄과 책임 같은 것들 단순하고, 복잡하다. 나는 최대한 단순하기를 바라고, 그에 맞게 살지만, 그게 언제까지 될지, 그게 되는 지금이 운이 좋은 것일 수도 있다. 


경주는 주원(남편)에게 말한다. "너네는 가족이잖아. 다 자기 자리도 있고, 친구도 있고." 


'자발적 고립'이라는 말은 함정이다. 자발적인 것 같지만, 다른 길은 없는 함정일 수 있다. 그걸 알면서도 걸어들어가서 '자발적'인 것일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느슨한 연대를 통해 멈춘듯한 좌표를 이동시켰다' 고 하는 평. 

마음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저사람도 나처럼, 혹은 나보다 힘들구나 라는 것이 느슨한 연대를 통해 멈춘 좌표를 이동시킨 것일까? 비혼의 친구들과의 사이에 다리가 놓아진 것도 아니고, 좋아보였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는 것이 연대의 마음일까? 


나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 일만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일이 크기야 하겠지만. 책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관계'가 아니라 '타인' 이면 안되고). 봉사나 취미, 공부가 될 수도 있고. 이 책을 읽고 생각하게 된 결론은 다르지만, 생각할 것들은 많이 남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 나도 비혼으로서 이 문장의 우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경주는 다이어리를 펴고 11시 30분 출근이라고 썼다. 출근이라니, 웃긴다고 생각하면서도 경주는 자기가 써놓은 글자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출근의 의미가 돈을 벌러 나감이 아니라 ‘일터로 근무하러 나감‘이라는 걸 알게 된 뒤로 그 단어의 쓰임은 좀 더 각별해졌다. 경주에게는 어딘가로 나아간다는 느낌과 소속감이 필요한 시기였다. 카페 ‘제이니‘에 출근하자마자 하는 일은 그저 커피 주문인데도 시간을 지키려고 애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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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 (Paperback, 미국판, International Edition) - 『아름다운 아이』원서
R. J. Palacio / Random House USA Inc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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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 참 착한 책이고, 두 번째 읽어도 같은 부분에서 눈물 찔끔 난다. 

볼륨 있는 챕터북 중에서는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 싶다. 어려운 책들 중에서는 내용도 영어도 가장 쉽다. 각 등장인물들의 입장에서 같은 이야기가 계속 재구성되며 이야기가 깊어진다. 


친구들간의 갈등, 가족 간의 갈등, 늘 서로에게 좋은 사람일 수 없고, 늘 완벽할 수 없는, 그러나 본심은 선한 사람들간에 쌓인 이야기의 타래가 화자가 바뀌면서 풀려나간다. 


오기, 비아, 미란다, 잭, 저스틴. 저스틴은 음악을 하는 비아의 남자친구인데, 저스틴의 음악같은 말?을 재현하기 위해 모든 문장이 소문자로만 나온다. 이 책은 오디오로도 들었는데, 오기역을 맡은 배우가 나레이션을 정말 잘한다. 영화에서도 배우들이 다 잘하는데, 오기 엄마역이 줄리아 로버츠다. 


얼굴에 큰 장애를 가진 오기와 생활하는 것은 비장애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작게 움찔하고, 눈을 못 마주치는 사소한 바디 랭기지들을 어린 오기는 다 캐치한다. 마지막에 오기의 친구들과 선생님들도, 그리고, 오기 자신도 오기의 얼굴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함께 하고,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사회에 필요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익숙해져야 한다. 책으로 읽어도, 영화로 봐도 오기라는 인물에 빠져들어 오기의 얼굴이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싶고, 오기가 새로 사귄 친구들도 그렇게 된다.

처음으로 학교에 가게 되면서 자신을 학교에 보낸 엄마와 아빠에게 화 내고, 겁나지만, 오기는 세상이 늘 그랬듯이 학교 또한 그에게 잔인한 것을 알게 되고, 때로는 겁나고, 때로는 상처받지만, 학교에 가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좋은 것들을 알게 된다. 오기가 용기를 내고, 용기를 꾸준히 이어나가 1년을 보낸 것에 모두가 기립박수. 


처음에도, 마지막에도 오기는 자신은 평범한 아이라고 말한다. ordinary kid 

모두가 특별하다는 점에서 그것이 노멀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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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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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전문기자가 쓴 과학 에세이라고 알고 있고, 제목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이니, 물고기 관련 과학 에세이인가 싶지만,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모두 반전이 있다고 했다. 소설도 아니고, 왠 반전? 싶었지만,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고, 읽고 나니 당연히 스포일러를 읽지 않고, 책을 읽게 되었다. 왜 스포일러가 없는 것이 당연하냐면, 반전이라기엔.. 끝의 반전이라기보다 책을 읽는 내내 반전이었고, 비판적 독서를 이끌어내는 책이었다. 읽으면서, 아, 그렇지. 하고 밑줄치다보면, 바로 다음 페이지에 근데 그럴까? 아니다. 가 계속 반복됨. 허허- 


우울증과 자살 에피소드, 등등을 가진 저자와 인간은 의미없다. 인간이 개미보다 지구에 더 기여하는게 뭐야. 라는 아버지, 긍정방패를 '휘두르는' 데이빗 스타 조던 중에 나는 기질상 아버지와 데이빗 조던에 가까운 사람이다. 극과 극의 서로는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지. 저자에 공감하기 쉽지 않았다. 


저자는 데이빗 조던을 알게 되고, 그가 겪어왔던 좌절들을 어떻게 헤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는지에 집착한다. 이 책은 그 답을 찾기 위한 저자의 여정이다. 


위인전인가 싶다가, 추리소설이고, 자기계발서이고,심리학책이다가  레즈비언 에세이이고, 미국의 추한 역사 이야기이네? 

위인전이라기에는 데이빗 조던이 중간중간 쎄하다. 감탄과 존경을 할 수가 없음. 데이빗이 열정의 선을 넘기 전에는 그가 어린 시절 구박 받다가 자신의 기질을 인정 받는 청년기의 시작점은 좀 감동적이었다. 그의 후반기 삶을 어떤식으로도 옹호할 수 없더라도, 한 인간의 삶은 복잡하다. 


공감하지 않고, 페이지 넘길 때마다 바로 전 페이지에 배신 당해도,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숨에 읽게 만드는 힘이 있는 글과 이야기였다. 그래서, 결국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뭐라고?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 발밑의 가장 단순한 것들조차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리리라는 것.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로 닦인다는 것."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 


희망과 무지에의 인정, 그리고, 질문하고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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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저자가 꿋꿋이 지치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는지 데이빗 조던을 통해서 알려고 했던건, 곱슬머리 남자가 떠나서였거든. 몇 년이나 지치지 않고, 쫓아다니다가 연인이 되고, 이걸 어떻게 받아 들여야할지 모르겠는데, 소녀와 사랑을 하고 ( 불륜? 소아성애?까지는 아니라도 미성년과 관계? ) 그걸 남자에게 말하자 남자가 떠난다. 그 남자를 되찾기 위해 '어떻게 나아가는지' 에 집착하고, 그 수단이 데이빗 조던의 전기였단 말야. 그러다가 이야기가 막장과 몰랐던 조국의 추함으로 끝맺음되려는데, 여자를 만났고, 사랑에 빠졌고, 희망을 찾는다. 그 여자가 더 이상 옆에 있지 않게 되었을 때, 여전히 희망찬 결말일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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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거 봤어? - TV 속 여자들 다시 보기
이자연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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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전부터 '어제 그거 봤어?' 로 시작하는 전날의 드라마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자연의 <어제 그거 봤어?>를 읽고나니 내가 왜 좋아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 중에서도 아주 가끔 좋아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었는지 떠올려볼 수 있었다. TV 수신료 안 내고 산 지 십 수년이지만, 이슈 되는 것들만 한 번씩 OTT 서비스로 찾아 본다. 이 책은 이런 나도, 재미있는 드라마나 쇼들 찾아 보는 사람도 모두 의미있게, 재미도 있게 읽어볼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미디어가 보여주는대로만 보지 않고, 미디어를 보는 시각을 길러주는 책으로 꼭 필요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주인공이었던, 혹은 스쳐지나갔던 많은 여성캐릭터들에 다시금 포커스를 맞추어 볼 수 있었다. 책도 그렇지만, 영상도 그렇다. 지금까지 남성이 주인공인 이야기들만 잔뜩 봤어서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들을 본다는 것이 정말 짜릿하고 신선하다. 지금까지 봐 온 남성이 메인이었던 그 많은 이야기들과 균형을 맞추려면, 아주 오래, 아주 많이 내가 좋아하고, 아끼고, 응원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읽고 봐야 할 것이다. 


여성서사라는 말이 마케팅으로 쓰이면서 좀 닳긴 했지만, 여기 제대로 된 여성서사 안경을 빌려주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한 번 보이게 된 것을 우리는 계속 보게 되고, 그 외연을 넓혀나갈 수 있다. 


하이킥 시리즈에 나온 여성의 '책상의 부재'는 인터넷에 많이 회자된 이야기라 아는 사람들 많을 것이다. 


"일기 쓰는 서민정, 노트북으로 인터넷 검색을 자주 하는 이현경, 공부하는 황정음과 백진희. 이들은 무언가를 공부하거나 읽고 쓸 때 책상이 없어 화장대에 앉아야 했다. 남성 인물의 생활 환경을 비교해 보면 문제점은 더욱 극명해진다. 공부와 담쌓은 이윤호에게도, 다락방 신세인 이민용에게도, 조연인 강세호에게도 모두 책상이 있다. 공부 안 하는 정준혁과 안종석도, 백수인 이준하도, 똑똑한 이민호와 윤계상도 모두 무언가를 하기 위해 책상 앞으로 향했다. 모든 시즌을 통틀어 공간의 크기와 열악함, 연령대, 주조연, 지적 수준, 성격을 막론하고 남성 인물은 전부 자신의 일에 바로 몰입할 수 있는 책상 하나쯤은 갖고 있었다." 


시즌 2와 3에서도 황정음이 공부에 매진할 때 결연한 다짐이 이뤄진 장소는 화장대, N포세대의 상징인 백진희가 악에 받쳐 공부할 때도 화장대 앞으로 갔고, 국어 선생이고 편지와 일기 쓰기를 퍽 좋아하는 하선마저 책상 하나 없었다고 한다. 


학생 신분인 정해리와 김지원에게는 화장대가 아닌 책상이 주어졌지만, 학생이어도 책상을 가질 수 없는 이들이 있었고, 학생이 아니라고 책상이 필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아파트의 일률적인 모양처럼, 집안의 가구 또한 비슷하기 마련인데, 식탁, 화장대, 책상, 작업대 등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주어지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남자의 공간에는 책상과 서재, 여자의 공간에는 집이 크건 작건, 방이 하나건 두 개건 화장대라는 것을 꾸준히 미디어가 보여주는대로 보고 살았다. 


은근히, 또는 대놓고, 혹은 언젠가 유출되어 많은 이들을 기함하게 했던 '무해한 음모'처럼 대중에게 사랑받는 연예인이 나오는 환상 가득한 클리쉐들에 노출되어 왔다. 여자들은 남자 저자들의 책도 많이 읽는데, 남자들은 여자 저자들의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는 가디언지의 기사를 읽었다. 반대 성에 대한 공감과도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나영석 PD는 방송계 남성중심문화를 선도하기로 유명하다. KBS <1박2일>을 시작으로 tvN <꽃보다 할배>와 <꽃보다 청춘>, <알쓸신잡>에서 대부분 남성 출연자를 기용했고, 화룔정점으로 <신서유기> 시리즈에서는 각종 범죄에 연루된 연예인들을 자체 용서하고 복귀시키는 데 힘썼다. <꽃보다 누나>가 있지 않냐고? 제작 공동인터뷰에서 "여배우가 다른 남성 출연진들보다 5,000배 예민"하다고 유난이었던 게 누구더라. " (148)


예능 보기 힘들어진지 오래지만, 예능붐을 이뤄왔던 스타PD들의 남성중심 예능이 예능을 멀리하게 된 기점이었던 것 같다. 그게 다인줄 알았는데, 요즘은 볼만한 예능, 마음 편한 예능들이 꽤 늘어났다. 이 책에도 나오는 '삼시세끼 산촌편' 도 그 중 하나이다. 여자들끼리 있으니 일이 착착 돌아가고 보기에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라. '노는 여자들'이나 '퀸덤', '골 때리는 여자들'도 민경 장사가 나오는 '운동뚱'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 '신입사관 구해령'을 찾아봐야겠다 싶고, '빈센조'의 최명희 서사만 모아둔 유튜브를 봤다. '스타트업'을 보게 된다면 인재를 더 유심히 보게 될 것 같다. 


" OTT 오리지널과 다양한 TV 프로그램 사이에서 누군가 여성들을 폄훼한다면, 나는 그걸 제지하는 1인으로서 기능하고 싶다. 다음 세대의 여성들을 위해 기꺼이 딴지를 걸며 화면 조정을 이뤄내고자 한다." 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그걸 제지하는 1인을 늘려가는 좋은 시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세대의 여성들을 위해서만 아니라, 지금 나를 위해서도 나는 계속 딴지를 걸 것이다.  

<런 온>의 인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며 괴로워하고 또 성취한다. 일이 반드시 자아실현을 이뤄주는 건 아니지만, 일로써 진짜 나를 감각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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