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키고 싶은 비밀 신나는 책읽기 5
황선미 지음, 김유대 그림 / 창비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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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야단치면서 외할머니한테 야단 맞던 어렸을 때 생각이 났어. 엄마도 너 같은 실수를 한 적이 있거든. 나처럼 너도 엄마의 관심, 사랑을 훔쳐 내고 있었나 봐.-6쪽

은결이는 일주일 용돈으로 천 원을 받는다. 하지만 그걸로는 언제나 부족하다. 형이랑 똑같이 이천 원씩 받으면 좋겠다. 엄마는 은결이가 아직 아홉 살이고 동생이니까 그래도 된다고 했다. 동생이라고 해서 분식집 아줌마가 돈을 덜 받거나 문방구에서 물건 값을 깎아 주는 것도 아닌데.-19쪽

약 먹으니까 많이 아프지 않아. 아빠처럼 되기 전에 이 잘 닦아. 만약 이런 걸 닮으면 아빠가 미안하잖아.-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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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수 광수씨 광수놈 - 광수생각 그 네 번째 이야기
박광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3월
품절


내 냄비의 물이 빨리 끓는다고 좋아할 것 없다.
작은 냄비의 물이 빨리 끓는 법이다.-38쪽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노란색 병아리 한 마리를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이 녀석의 이름은 '꿈'이란다. 처음에는 너무 어려서 니가 열심히 돌보지 않으면 죽을 지도 모른단다. 아들아, 잘 키우렴!"-42쪽

전 당신의 가슴이 원하는 모든 걸 팝니다.

모든 걸...? 그럼 마음의 평화와 사랑, 지혜와 행복을 주겠니?

죄송하지만, 저는 씨앗만 팔고 열매는 팔지 않습니다.-46쪽

그를 용서하면 용서받은 그만이 평안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용서한 내가 더 평안해졌다. 그렇다. 용서란 짓밟힌 꽃에서 여전히 나오는 향기와 같은 것이다.-131쪽

팔 월

태양이 내리쬐는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그늘은 더없는
휴식처지만,

평생을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
그늘은 슬픈 것이다.

팔월,
아버지의
그늘이 너무 짙다.-155쪽

한 남자가, 성형외과 의사인 장호의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와 말했다...
"실례합니다. 저를 좀 도와 주십시오. 전 요즘 제가 자꾸만 나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말을 들은 장호는 난감해하며 대답했다. "당신은 성형외과 의사인 저를 찾을 게 아니라,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자 그 남자가 대답했다. "그건 저도 압니다." 그의 대답에 이어 다시 장호가 물었다. "아니 알면서 여길 왜 찾아온 겁니까?" 잠시 후 사내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불이 켜져 있어서......"-179쪽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착각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사람들이 살면서 하는 그 착각은...
인생 속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의 끄트머리에서
인생을 뒤돌아보면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다.
그 한 길은 다름 아닌 자신이
걸어온 그 길이다.

자신이 가지 않은
길은 길이 아닌 것이다.-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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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 우리 역사 바로잡기 1
이덕일, 김병기, 신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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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사관이 단군조선을 부인하고 고조선의 강역을 평안남도 일대라고 주장했던 것은 한강 이북이 중국사의 영역이었다고 주장하는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와 완전히 일치한다. 이런 점에서 두 사관은 일란성 쌍둥이이다. 일제 식민사관은 한국의 영토를 영구히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고, 동북공정은 현재의 한강 이북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고조선사에서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5쪽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기자가 동쪽으로 가서 조선을 건국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쪽 조선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동쪽에 이미 조선이란 나라가 있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사 교과서는 이런 기술을 외면한 채 단군조선도, 기자조선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국사 교과서는 위만조선이 사실상 고조선의 시작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22쪽

국사 교과서는 위만이 집권한 후 비로소 철기 문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결국 고조선은 기원전 3세기경에야 철기 문화를 받아들였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실증사학을 표방하지만 위만에 대해 전하는 그 어떤 사료에도 그가 철기 문화를 갖고 왔음을 추측하게 해주는 내용은 없다. 마찬가지로 고조선이 위만에 오기 전까지 철기 문화가 아니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고조선의 철기 문화는 당연히 위만이 중국에서 가져왔을 것이다’라는 사대주의적 고정관념 속에서 나온 기술일 뿐이다. 국사 교과서의 논리대로라면 위만은 고조선의 왕위 찬탈자가 아니라 철기 문명의 전달자가 된다. 일제 식민지 치하를 찬양했던 식민사학의 논리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가치전도인 것이다.
-23쪽

진개가 "조선의 서쪽 영토 2천여 리를 빼앗았다"는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고조선이 평안남도 일대에 걸친 작은 소국이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좋은 자료이기 때문이다. 평안남도는 2백여 리에 불과하다. 2천여 리를 빼앗기고도 만번한을 경계로 연과 대치했다면 고조선은 매우 광대한 강역을 지닌 제국일 수밖에 없다. 이때는 부왕과 준왕이 등장하기 이전이다. 그러나 국사 교과서는 이런 내용은 모두 사장시킨 채 위만이 정권을 빼앗은 다음에 고조선이 강성해졌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30쪽

흔히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는 명칭을 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고조선이라는 표현이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처음 나온다는 사실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고려 사람인 일연은 훗날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리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그럼 일연은 무슨 의미로 고조선이란 표현을 썼을까? 일연은 위만조선과 구별하는 의미로 고조선을 썼던 것이다. 일연은 단군조선, 기자조선을 고조선으로 인식하고 위만조선을 따로 인식했다.
-38쪽

서거정은 자신이 본 고기(古紀)에 "무진년(기원전 2333)에 건국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단군조선의 개국년으로 삼은 것이고, 이것이 현재의 단기이다.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일연이 본 고기(古記)가 아니라 서거정이 본 고기(古紀)가 단군조선의 건국년으로 통용된 것이다. 이처럼 조선 초만 해도 단군이 기원전 24세기에 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은 국가의 공식 역사관이었다. 조선 초만 해도 개국 시조였던 단군은 조선 후기 사대주의가 심화되면서 부인되기 시작해 일제가 대한제국을 점령하면서 말살되어갔다. -45쪽

기원전 2000여 년까지로 추정할 수 있는 현재까지의 청동기 발굴 성과만 가지고도 기원전 2300여 년이라는 <삼국유사>의 단군조선 건국 연대와 큰 차이가 없게 된다. 따라서 기원전 2300여 년이라는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삼국지><<위서동이전>> 등의 문헌사료는 물론 고고학적 발굴 성과로도 뒷받침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이는 또한 단군조선의 실재를 부정하고 위만조선을 최초의 국가로 보고 있는 남한 학계의 이른바 ‘통설’에 중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이다. 참고로 북한은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개시에 대해 최초의 국가이자 노예소유주 국가인 고조선을 중심으로 기원전 30세기에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55쪽

조선은 국호 자체가 기자 존숭을 의미했는데,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에서 기자조선의 계승자라는 의미에서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다고 말한 점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정도전은 단군조선의 실재도 부정하지 않았다. 태종 3년(1403) 편찬된 <동국사략>이후 국가에서 편찬한 역사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상고사 체계가 확립되었다. 16세기 이후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기자 존숭은 한층 강화되었다.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면서 조선에서는 소중화 사상이 확산되면서 기자조선은 더욱 존숭되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의 실재를 부정하는 ‘기자부정론’이 통설을 이루고 있다. 이는 기자조선에 대한 엄밀한 학문적 연구 성과의 결과이기보다는 이민족인 중국인이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감정적 차원이기도 했다. 또한 기자조선을 부정하는 것이 식민사학 잔재의 청산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 때문인데, 역사가 실재가 아닌 후대의 감정에 의해 부정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61-62쪽

이병도가 위만을 조선인 계통의 유민으로 보는 근거는, 그가 망명할 때 "북상투(추결)"에 "오랑캐 옷(만이복)"을 입었고, 준왕이 요지인 국경수비대장은 맡길 정도로 신임했다는 점, 그리고 나라를 차지한 후에도 조선이란 국호를 유지했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사기>나 <삼국지>에서 분명히 "연나라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위만이 ‘북상투’와 ‘오랑캐 옷’이라는 것만으로 조선인으로 볼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 <사기><<역생육가열전>>에는 남월왕 위타가 육가를 만날 때 역시 북상투를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한서> <<식화전>> ‘정정조’에도 북상투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최근 진시황릉에서 발굴된 도용은 대부분 상투머리를 하고 있다. 따라서 상투가 그때부터 조선인만의 것이었다고 볼 근거는 없는 것이다. -72쪽

준왕의 도주로가 중요한 것은 고조선 멸망 당시의 도읍지, 곧 최후의 도읍지가 어디인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현재 사학계의 이른바 ‘정설’은 준왕의 도주 당시의 도읍지, 곧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는 오늘의 평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멸망 당시의 도읍지가 평양인지에 대해서는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은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이른바 한사군의 위치와 연계되기 때문이다. 과연 통설대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는지, 아니면 만주 서쪽에 있었는지를 결정짓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후한서>나 <삼국지>의 기록은 모두 준왕이 ‘바다를 경유해’ 도주했음을 전하고 있다.-73쪽

한사군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군현은 낙랑군이다. 바로 한사군의 수도이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 한국인 제자들은 낙랑군이 오늘날 평양 지역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기> <<하본기>>에는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곧 갈석산이 있는 곳이 낙랑군이며, 바로 만리자성의 기점이라는 것이다.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 창려현 북쪽에 있는데, 창려현은 만리장성의 동쪽 끄트머리인 진황도와 난하 사이에 있는 현이다.-105-107쪽

낙랑군이 고구려에게 멸망하는 것은 미천왕 14년(313) 때이다. 대무신왕 15년(서기 32)에 망한 낙랑이 어떻게 미천왕 14년에 다시 멸망할 수 있을까? 이는 한국 고대사에 낙랑이란 이름의 정치세력이 둘이 있었음을 뜻한다. 하나는 최리가 국왕으로 있던 낙랑국이고, 다른 하나는 한사군의 낙랑군이다. 그렇다면 낙랑국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대무신왕조’에서는 고구려를 ‘북국’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낙랑이 고구려의 남쪽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유리이사금 13년의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략"했다는 기록은 낙랑국이 신라의 북쪽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낙랑국은 고구려의 남쪽이자 신라의 북쪽에 있던 나라였다.-114쪽

기나긴 기간 동안 존속했던 고조선이 자국의 화폐를 만들지 않고 연나라의 화폐를 그냥 사용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도 연나라는 존속 기간이 기껏해야 100여 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고조선은 연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망한 이후에도 연나라 화폐인 명도전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명도전을 무작정 연나라 화폐로 보는 현재까지의 시각은 수정되어야 한다.
-165쪽

현재 우리나라의 학교에서 고조선은 청동기 시대 때 개국했다고 가르친다. 이는 신석기 시대에는 국가의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나온 이론이다. 그리고 청동기 시대의 묘제인 고인돌의 등장을 지배계급의 성립과 국가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에도 국가가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현재 세계 학계의 흐름이다. 대표적인 예가 중남미의 잉카, 마야, 아스텍 문명 등인데, 이들 문명은 청동기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고대국가라고 인정하고 있다.
-187쪽

세형 동검은 기원전 300년경부터 주로 등장한다. 세형 동검은 한반도 전역에서 많이 출토되었다는 이유로 한국식 동검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한반도뿐만 아니라 러시아 연해주 지역과 중국 요하 유역의 정가와자에서도 출토되었고, 일본 규슈 지역 야오이 시대의 독무덤에서도 출토되었으므로, 한국식 동검이라기보다는 그 형태를 따서 세형 동검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196쪽

중국의 동북공정은 은나라 출신의 기자가 대동강 유역에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이 사실로 확인되려면 대동강 유역에 기자의 출신 지역인 은나라 유적들이 출토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은나라 유물들이 출토되는 지역은 산동성과 요령성이고 한반도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고 있다.
-198쪽

대동강 유역이 낙랑군 지역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된 것은 이 지역에서 출토된 기와와 벽돌 중에 ‘낙랑(樂浪)’이란 명문이 새겨진 유물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낙랑군이 고구려 미천왕 14년(313)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멸망한 이후에도 낙랑에서 제작된 유물들이 다수 출토된다는 점이다. 특히 서기 407년에 만들어진 벽돌은 낙랑이 멸망한 지 무려 94년 뒤의 것이다. 멸망한 지 1세기 후에도 이 지역에 있던 낙랑군에서 유물을 제작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따라서 ‘낙랑’이란 명문이 있다고 해서 이 지역이 낙랑군 지역이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봉니(封泥)는 고대 중국에서 문서나 귀중한 물품을 봉함할 때 쓴 점토다. 봉니에는 관직 이름이나 지명이 도장으로 눌려 있어 그 당시의 관직 제도와 출토지를 알 수 있다. 봉니는 1918년 대동강 남쪽 대동군 토성리에서 발견된 이래 대략 200여개가 발견되었다. 이중에는 낙랑태수장, 낙랑대윤장, 낙랑장사 등 낙랑군과 여러 관직 이름이 눌려 있는 봉니가 출토되었다. 이를 근거로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대동강 유역을 낙랑군 지역이라고 못 박았지만, 이는 오히려 대동강 유역이 낙랑군 지역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봉니는 발신자가 도장을 눌러서 보내는 것이므로 수신자의 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하는데, 발신자의 지역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지역이 낙랑군이 아니라는 주장에서 더 나아가 누군가 의도적으로 봉니를 위조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까지 낳고 있다. 대동강 일대를 낙랑군 지역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조작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 또한 앞으로의 연구 과제가 아닐 수 없다. -206-209쪽

문헌상 낙랑군의 존속 기간은 기원전 108~서기 313년으로 400년이 넘는다. 식민지 통치기관으로서는 장구한 세월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장구한 존속기간뿐만 아니라 모국인 한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오랫동안 존속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낙랑군이 고구려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던 만주 서쪽 끝에 존재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한반도의 한복판인 평양부근에 있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한나라는 멸망하기 전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식민지는 긴장이 높은 지역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본국에서 즉각적인 정치, 군사적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한나라는 존속했을 때도 국내의 여러 문제 때문에 낙랑군을 제대로 지원하기 어려웠다. 하물며 한나라가 멸망한 다음에는 말할 나위가 없다.
고구려의 미천왕은 재위 12년(311) 8월 요동으로 진격해 서안평을 차지하고, 2년 후(313)에는 낙랑군까지 멸망시킨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 미천왕은 요동을 공격하기 전에 낙랑군을 먼조 공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미천왕이 요동을 공격할 때 남쪽의 낙랑 군에서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동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중국계 유적과 유구 그리고 유물들의 존재는 그 지역에 중국계 세력이 장기간 거주했던 사실만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대동강 유역의 중국계 주민들이 한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고구려와 공존할 수 있으려면 비정치적, 비군사적 성격의 집단이어야 한다. -210-212쪽

치우는 <환단고기>나 <규원사화>가 창작해낸 인물이 아니라 중국 고대의 사서인 <사기>와 <한서>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이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염제 신농씨와 황제 헌원씨는 한족(漢族)의 조상으로 추앙했으나 치우는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치우를 한족에게 도전한 이민족의 조상으로 여겼으나, 최근 치우도 중국인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231쪽

치우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주요한 대응책의 하나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치우천을 찾다가 우연히 만난 중국 치우학회 회원이라는 사람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왔는지 캐묻더니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함나디 덧붙였다. "치우는 한국, 일본, 만주족의 조상이다."
우리는 툭하면 위서(僞書)다 뭐다 해서 부인하려고 애쓰는 동안 중국인들은 치우의 진실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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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체는 너무 오래 울고 있다 - Pamphlet 1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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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강도 9의 지진이 일어났을 때 50명이 죽었다. 그와 비슷한 강도의 지진이 방글라데시를 강타했을 때 50만 명이 죽었다. 한번 지진으로 만 명 이상 죽는 것은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뿐이다. 재앙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불가항력의 자연 재앙이라는 쓰나미, 그 뒤에는 또 다른 사회경제적 진실이 도사리고 있었다.-31-32쪽

살아남은 행운에 감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난민 천막촌 사람들은 오히려 가족과 이웃을 구해내지 못하고 자신만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무 희망 없는 생존의 고통은 몇 배의 무게로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희망이 있다면 더 이상 굴러 떨어질 곳 없는 맨 밑바닥 끝자리에 와 있다는 것. 위안이 있다면 자신과 같은 절망에 처한 사람들이 수십만 명에 달한다는 것. -32쪽

아체 아이들은 아무도 아이답게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 엄청난 비극이 그들을 더 이상 어린 아이로 남아 있을 수 없게 했다.
그렇게 울음을 삼켜버린 아이들은 일하기 시작한다. 그래야 먹고살기 때문이다.-37쪽

까주 마을 사람들은 나에게 아무 말도 없이 깊은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지상에 결코 이겨내지 못할 슬픔과 고통은 없다고. 그 어떤 슬픔도 절망도 그것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면 삶은 다시 피어난다고.-43쪽

교실이 없어도 칠판이 없어도 책상과 의자가 없어도, 아체 아이들은 강인한 풀싹처럼 풀마당에 엎드려 젖은 책장을 넘기며 낡은 공책에 또박또박 자신들의 미래를 새로 써 나가고 있었다. 침수되어 부서진 젖은 교실 바닥에서도 아체 아이들은 낮은 포복으로 어둠을 뚫어가는 전사들처럼 책과 공책 앞에 엎드려 의지의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47쪽

나중에 자카르타로 나와 대통령 수석 등 정부 고위층 인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내가 그런 실정을 아느냐 했더니 그들은 '복구에 50년 걸린다'는 둥의 말만 하고 있었다. 무슨 50년? 한국의 건설회사한테 물어본다면 5년이라고 대답할 것이다.-49쪽

저는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은 '슬픔의 힘'과 '가난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 힘은 우리를 하나로 이어 줍니다. 하느님도 그 속에 계시고, 먼저 가신 부모님도 여러분께 그 힘을 선물로 남겨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많이 울도록 해요. 눈물이 우리를 서로 이어줄 거예요. 그리고 많이 아파해요. 고통이 서로를 어루만져 줄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따뜻히 껴안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하느님도 몰래 우리 곁에 와서 우리를 꼭 안아 주실 거예요.-63쪽

뜨겁다고 다 사랑은 아닐 것이다. 그가 원하는 사랑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사랑만으로 뜨겁다면, 아무리 뜨거워도 그것은 결국 나를 위한 사랑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사랑에는 진정성은 물론 정치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도 함께 요구된다는 생각이 들었다.-69쪽

미래의 아체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여성들이 하늘의 절반이고 아체의 절반입니다. 앞으로 여자들도 회의에 참여하는 새로운 전통을 울렐르 마을에서부터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그들은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77쪽

무슨 말입니까?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면 낯선 환경에서 기가 꺾이고 외로움에 병들어 꿈이 없어집니다. 이 아이들은 우리 마을의 아이들입니다. 우리는 이 아이들을 잘 압니다. 내 자식 남의 자식 구분 없이 잘 키울 수 있습니다. 박 선생님, 한국에서는 이런 경우 고아원으로 보냅니까?-79쪽

무너진 벽돌 틈에서 눈을 끄는 유품 한 점을 집어들었다. 미완성 자수였다. 여성 정치범들이 한땀 한땀 정성들여 수놓아 가다 완성하지 못한 채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가 버렸다.

하롭빌 알라민 알 함두릴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차라리 그 문구가 '자유아체운동 만세!'라든지 '우리는 승리한다!'와 같은 것이었다면 나는 그렇게 통곡하지 않았으리라. 그들은 이미 절망을 보고 있었다. 자유와 독립을 얻으리라는 승리의 전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붙들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뿐이었다.-92쪽

압도적인 무력과 외교력을 가진 인도네시아는 아체를 결코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동티모르처럼 독립을 허락하기에는 아체에 자원이 너무 많다. 이슬람 최대 인구의 나라라는 인도네시아의 위상 때문에 이슬람권은 침묵하고, 기독교권인 미국과 서구는 종교적 분쟁을 피한다는 미명 아래 인도네시아 군부와 결탁하여 자원 수탈과 무기 수출이라는 '국익'을 노리며 또 외면하는 사이, 자유아체운동은 자꾸만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93쪽

젊음은 치욕이고, 사랑도 배신이 되고, 우정마저 밀고로 변하는 폭압의 세상. 감옥에 갇힌 그들이 마지막으로 붙들고 의지할 것은 오직 하느님밖에 없었다. 물방울로 바위를 치는 듯한 자유아체운동. 그들의 절망, 그들의 고독, 그들의 슬픈 의지가 그 미완성 자수 속에 사무쳐 있어 나는 통곡을 참을 수가 없었다.-93쪽

한 달 만에 다시 찾은 아체는 건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외국 구호기관과 언론의 물결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반다아체는 '짧은 열애가 끝난 후' 버림받은 자의 허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달 전만 해도 거리 사람 3분의 1이 외국인이었다. 지금은 외국인이 거의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언론 기자들부터 빠져나갔다. 곧바로 국제 구호단체 직원들이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조명이 꺼진 무대처럼 텅 비어 버렸다. 아체인들은 다시 고립무원의 폐허 더미에 버러졌다. 그 위로 엄습해 온 것은 감시와 위협의 고삐를 단단히 잡은 계엄군의 살벌한 얼굴들이었다. 아체는 다시 홀로 긴 눈물을 흘리고 있다. -110쪽

아체에서 아마 남자와 여자가 함께 회의하는 곳은 우리 마을뿐일 겁니다. 같이 회의를 하니까 여자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여자들이 그렇게 섬세하고 지혜로운지 몰랐습니다. -137쪽

지난번에 전달한 성금이 모자라 옥스팜에서 지원해준 돈을 보태서 우물을 완성했단다. ..... 지하 120m까지 파 들어가서야 물을 만났다. 마침내 물이 쏟아져 나오던 날,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단다. 그리고는 모두 한국 쪽을 향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기로 했다. 그런데 누구도 한국의 정확한 방향을 몰라, 북쪽이다 동쪽이다 논란 끝에 결국 동북쪽을 향해 긴 시간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139쪽

저 사람들도 뜨거운 천막에서 목이 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우리가 압니다. 어려울 때 함께 나눠 마시다가 고갈되는 게 차라리 낫지요. 우리만 마시려고 아낀다면 우리의 영혼이 영원히 목탈 것입니다. -140쪽

다시 지진해일이 덮쳐 와도 방파제가 있어야 재앙을 피할 수 있는데 정부는 해줄 마음도 의지도 없다. 그래서 오래된 지혜를 모아 바닷물 속에자라는 바까오 나무를 심어 기르기로 했단다. ............이것이야말로 콘크리트 방파제보다 더 튼튼하고 생태적인 '대안의 미래'이고 오래된 지혜가 아닌가. -141쪽

아체의 고아는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가난이 만든 고아다. 오랜 식민상태에서 자원을 착취당해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아체 땅이다. 이 가난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고아들을 많이 만들어낸다. 두 번째는 정치적 고아들이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지금까지 자유아체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밤마다 학살해 왔다. ....이 아이들은 고아원에 가면 신분 위장을 하고 절대로 입을 열지 않는다. 서너 살밖에 안 되는 아이들도 본능으로 그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 아빠 어떻게 되었냐고 물으면 대개 병으로 죽었다거나 쓰나미로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마지막으로 이번 쓰나미로 생긴 고아들이다.-152쪽

저 자신도 물론 힘들지만 고아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보다 더 힘들겠어요? 이 아이들은 아체의 불행을 등에 지고 밤길을 걷는 어린 하느님인걸요. ...대학을 나와 혜택받은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늘 고민했어요. 저는 이농발(여성전사)이 된 친구들처럼 그런 용기가 없었어요.-158쪽

지난번에도 큰 후원을 해준 '쌈지'에서 딸기 볼펜을 기증했다. 그 볼펜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더니 아이들이 "이건 몇 페이지 써요?"하고 물었다. 아체 볼펜은 노트 서너 페이지를 쓰면 다 떨어진다고 한다. 이 볼펜으로는 노트 한 권을 쓴다고 하니까 "정말요? 마술 펜이네!" 아이들은 환호를 올렸다.-159쪽

수학은 정직한 것입니다. 아체는 수학이 없는 사회입니다. 왜 저희 부모님처럼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은 굶주려야 하고, 왜 가족이 흩어져 아이들은 고아원에서 자라야 하나요?-160쪽

세계적 다국적 기업인 액슨모빌이 여기 있다. 미국 오일 산업의 맹주이자,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침략전쟁의 숨은 손, 딕 체니와 미국 부시 가문의 돈줄이기도 한 액슨모빌이 바로 이 록스마웨에 빨대를 꽂고 아체인의 골수를 빨고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결탁해 거대한 유전자원을 독식하다시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와 인권을 중시한다는 미국이 아체 문제에 침묵해 온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한국도 아체의 지하자원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쓰는 도시가스와 천연가스 25%가 여기 록스마웨에서 빨아올린 것이다. -180쪽

수하르토를 가리켜 누군가는 '박두환'이라고 표현했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합친 인물이라는 것이다. ............ 1965년 11월부터 1년 동안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200만 명 이상 300만 명에 달하는 시민이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했다.
우리가 잘 아는 '지상낙원의 섬' 발리만 해도 인구의 10%인 20여만 명이 살해당했다. 그것이 우리가 모르는 '발리에서 생긴 일'이다. -181-182쪽

2005년 8월 15일, 마침내 인도네시아 정부와 자유아체운동 지도부는 30년 내전을 마감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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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 아체의 평화를 단언하기엔 이르다. .......2003년에도 휴전협정이 맺어졌지만 6개월 만에 인도네시아 정부는 약속을 깨뜨리고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피의 살육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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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평화를 향한 아체의 걸음을 신뢰하고 싶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미국의 액슨모빌은 아체 유전자원을 2010년 경이면 거의 다 빨아먹게 된다. 아체에 자치권을 넘겨줘도 큰 손해가 되지는 않는다는 현실적 계산이 그들을 평화협정의 길로 가게 했을 것이다.-206-207쪽

아체의 자유와 평화는 인도네시아 자신의 민주주의외 미래의 발전을 위해서도, 나아가 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위해서도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당위의 과제이다.-208쪽

아체인들은 위대했다. 오랜 정치적 억압과 40만 명이 죽어간 쓰나미 참사로 모든 것이 파괴되었지만, 단 한 건의 약탈이나 강도, 폭력, 자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선진문명국' 미국 뉴올리언스에 허리케인이 닥쳤을 때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아체인들은 절망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더없이 선한 인간성과 순수한 분노의 마음으로 다시 삶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폐허의 지평선에서 진정 위대한 인간이란 어떤 것인가를 감동적으로 보여 주었다. -209쪽

한정된 지구자원과 세계화한 경제구조 속에서 누군가의 풍요는 다른 누군가의 궁핍을 전제로 한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삶은 지구마을 가난한 이웃들의 아픔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우리의 삶은 그들의 자원과 노동과 부를 가져 온 바탕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어느 누구도 지구마을 가난한 나라 사람보다 더 가난하지 않다. 시대는 우리에게 자기 존재의 발밑을 돌아보라고 요구하고 있다. 더 많은 물질 소득과 더 많은 소비가 아닌, 적은 소유로 기품 있게 살아가는 나누는 삶의 기쁨을 찾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인간성의 척도는 이제 국경 안에 있지 않다. 지구시대의 성숙한 인간성은 오직 국경 너머에서만 가능하다.-210쪽

나는 슬픔의 힘을 믿는다.
기쁨은 공유하기 어렵지만 슬픔은 함께 나눌 수 있다. 슬픔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공감에 이르고 하나가 된다. 슬픔은 우리를 돌아보게 하며, 우리 자신을 정화하고, 참된 나 자신과 진리에 가닿게 한다. 슬픔을 통해서 우리는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 모든 생명에게로 번져 나가는 크나큰 사랑과 만난다. 나는 인간의 깊은 곳에 흐르는 슬픔의 공유 능력, 저마다의 가슴에 간직한 그 선함을 믿는다.-210-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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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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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사하라 사막 한복판에 내려서 핀셋으로 모래 한 알갱이를 집어 1밀리미터 옆으로 옮겨놓는다면 어떻게 될 것 같니?"

"그건 네가 사하라를 변화시켰다는 뜻이야."

"사하라는 광대무변의 사막이야. 수백만 년 동안 존재해 왔다고. 그런데 네가 그 사막을 바꿨단 말이야!"

"네가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그때까지 흘러왔던 대로 죽 진행되었을 테지......"

"제가 인류 역사의 진행 과정을 바꾼 거예요!"

"바로 그거야."

"제가 우주를 바꿨어요!"

"네가 해냈어."

"전 신이에요!"

"넌 무신론자잖아."

"전 존재하지 않아요!"-122-123쪽

살아남은 수천 명의 사람들은 희망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고문을 당한 거야. 로슈비츠 다리 밑에서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내 머릿 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어. 계속 생각해야 해. 계속 생각하면 살 수 있어. 그러나 살아남은 지금, 이제는 생각이 나를 죽이고 있단다. 나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 그날 밤, 붉은 화염 덩어리 검은 물 같던 하늘, 전부를 잃기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내가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었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단다.-298쪽

너에게 지금까지 전하려 했던 모든 이야기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란다, 오스카.
그 말은 언제나 해야 해.
사랑한다,
할머니가.-4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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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하니 2007-01-19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보다 더 강하게 책 속의 구절들이 가슴을 흔드네요...

마노아 2007-01-19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77년생이에요. 천재 아냐? 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좋았어요. 이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