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 프랑스 만화가의 좌충우돌 평양 여행기
기 들릴 지음, 이승재 옮김 / 문학세계사 / 2004년 9월
절판


전날 내가 부탁했던 것처럼 가이드는 나를 데리고 북한의 자랑거리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다. 바로 평양의 지하철.

지하 90미터 아래에 자리잡은 평양의 지하철은 유사시 핵무기같은 위협적인 무기로부터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방공호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한다. 지하철 하나조차 언제 어디서 위협이 닥칠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있다니...

바닥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다. 게다가 기둥에는 각종 조각들까지... 한 마디로 영광스러운 대중 교통수단을 자랑하는 지하 왕국 같은 인상이었다. 도처에는 화려한 색으로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여기저기 걸려 마치 살아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겐 우울해 보였다.

신호등 조작하는 것조차 힘들 만큼 전력이 턱없이 부족한 나라에서 마치 라스베이거스를 방불케 하는 조명이 밝혀진 지하철을 운행하고 있다니!

흠... 아무리 봐도 수상했다. 정말 수상할 수밖에 없었다.
열차를 타고 한 정거장을 지나자 모두들 내리라고 했다. 나는 출구에서 운전사를 만나 다시 차를 탔다. 그리고 내 평양 출장이 끝날 때까지 두 정거장 이상 가 본 사람을 한 명도 만날 수 없었다. -31-32쪽

주당 6일 간에 걸친 노동과 자원봉사 하루, 그리고 각종 국가행사를 준비해야 하는 일반 국민들에겐 자신만의 시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몸과 마음은 이미 정부에 바쳐진 지 오래다.

내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여러 명의 '자원봉사자'들은 내가 매일 지나다니는 다리에 매달려 철근 사이에 낀 녹을 닦아내고 페인트를 다시 칠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대략 3/4 정도의 작업이 진행되더니 작업은 어느 날 갑자기 중단되었고(페인트가 부족했을까?) 그 이후 인부들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었다.

2주가 지나자, 다리는 다시 그 전처럼 녹이 슬기 시작했다. 아마 페인트도 불량이었을 것이다. 이런 단적인 예만 보더라도 이 나라와 정부의 운명이 서로 닮은 꼴로 흘러간다는 의심을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었다. -59-60쪽

-오늘 아침에 메론 나온 거 봤어?

-여기 가져왔어요.

-메론이 나오면 최소한 일주일은 먹을 수 있다네.

-어떻게 알아요?

-잘 보면 알지. 자, 조명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걸 봐. 불이 들어온다는 건 외국 사찰단이 왔다는 걸 의미하지. 사찰단이 오면 실내 등이 하루종일 켜져 있고, 매일 아침 과일이 나온다네.-87쪽

평양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 위에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고, 건물 내부의 벽에는 김정일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 초상화 속에는 그의 배지가 달려 있다.
정말 엄청난 일이다. 어느 날은 하루에 과연 몇 번이나 그의 초상화나 배지를 볼 수 있을까 세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보자... 벌써 건물 입구부터 그가 예전에 이래저래 강령을 내리거나 명령을 하는 사진이 수십 장이 걸려 있고(국방위원장의 칭호를 사용한다지만 소문에 의하면 그는 군대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대학시절 1,200여 권이 넘는 책을 썼다는데 그 대부분이 군사문제나 병기에 관한 논문이었다고 한다.(여담이지만 그는 처음으로 골프를 치러 가서 18홀 중 11홀에서 홀인원을 했다고 한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의 '완벽한 뇌'를 형상화한 꽃무늬가 장ㅈ식돼 있거나, 새겨져 있었다. 꽃 이름도 가관이었다. 김정일리아...

어느 식당 벽에는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백두산이 그려져 있었는데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가 태어나던 날 백두산에는 쌍무지개가 떴고 유난히 반짝이는 별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사실 김정일은 시베리아 어디에서 태어났다고 한다.)-130쪽

우리가 몇 주 동안 머물면서 평양의 아주 깨끗한 거리를 산책하다 보니 충격적인 사실이 갑자기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까지 평양 시내에서 장애인을 단 한번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 더 놀라웠던 것은 장애인들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하면서 듣게 된 대답이었다.

"그런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모든 북조선 인민들은 건강하고 똑똑하게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100% 확신에 차 있었다. 도대체 인간의 뇌는 어디까지 세뇌가 가능한 것인가? 그에 대한 해답은 아마 이 나라가 완전히 개방되든지 이대로 무너지든지 양단간에 결판이 나야 알 수 있을 것이다. -135-136쪽

김정일이 컴퓨터는 미래의 도구라고 발표한 이후 북한 사람들은 간첩으로 의심받을 걱정없이 컴퓨터에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더욱 기가 막혔던 것은, 그가 두 발 자전거가 여자아이들에겐 위험한 물건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항상 세발 자전거만 타고 다닌다는 것이다.

"근데 그거 알아요? 북한이란 나라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인터넷 접속이 불가능한 나라라는 것 말이에요?"

"오,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쇼!"-144쪽

건물에 있던 직원들은 북한군에 소속된 영화 제작소에서 최근에 만든 영화를 상영한다고 해서 모두 불려갔다. 내용은 보나마나 뻔한 스토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자네는 왜 안 갔지?"

"전 이 나라 영화 별로 안 좋아해요. 지루하잖아요."

내 출장기간 중 북한 사람의 입에서 이토록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발언은 들어보지 못했다. 게다가 북한이라는 나라의 상황을 감안해 보면 그 젊은 친구의 말은 거의 국가 반역죄에 가까웠다.-153쪽

북한은 세계에서 네번째 군사대국으로 병사의 수가 1백만을 넘고 유사시 동원 가능한 예비병력의 수가 무려 4백만이나 된다. 게다가 군장비 또한 만만치 않다.
전투용 탱크 2,000여 대가 국경지역에 포진되어 있다.
600기가 넘는 스커드형 미사일인 노동과 대포동 미사일이 1998년 미사일시험발사에서 일본 근해에 떨어지는 쾌거를 이뤘다.
적어도 4천 톤이 넘는 생화학 무기가 숨겨져 있다는 보고도 있었다.
핵무기의 경우 있는지 없는지 그 사실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협상테이블에서 가장 주요한 그들의 전략적인 무기임에는 틀림 없다.
매년 실시되는 군사훈련은 1주일 동안 계속되며 사이렌 소리와 함께 모든 국민은 군복과 장비를 챙겨서 각자의 집결장소에 모이게 돼 있다.-159쪽

90년대 최악의 기근 사태로 2백만 명의 북한 인민이 목숨을 잃었을 때도 꼬냑제조사인 헤네시사의 최대 고객 중 하나가 바로 북한이었다고 한다.-17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5 - 단종.세조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5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4월
구판절판


할아버지 세종으로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았던 그다. 단종은 이내 안정되었고 자기 영역을 찾기 시작한다. 즉위한 지 몇 달도 안 돼 대신들의 앵무새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도망치려는 모습이나 치기어린 모습은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다.
배우는 자로서의 겸허함을 잃지 않으면서 소년 임금 단종은 한 걸음씩 성장해 갔다.
그렇게 몇 년만 지나면 성년이 될 것이고 그때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지 않겠는가?
그러나 세상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13-14쪽

<단종실록>은 <조선왕조실록>의 대표적인 옥에 티. 본래는 <노산군 일기>란 이름으로 편찬되었는데 편찬 경위는 물론 편찬 일시나 편찬자의 이름조차 나와 있지 않다.
뒷날 숙종조에 이르러 단종이란 묘호가 추증된 뒤 <노산군 일기>도 <단종실록>으로 개칭된다. 그러나 제목만 바뀌었을 뿐 본문에서는 여전히 단종은 노산군으로, 수양대군은 세조로 기술되어 있다.
내용은 사관이 기록한 사건 기사와 수양대군 측의 일방적 증언, 주장이 섞여 있는데, 그런 까닭에 수양대군이 사저에서 측근들을 만나 나눈 얘기들도 상세히 실려 있다.(사관이 그 자리에 있었을 리는 만무한데...)
<단종실록>의 기본 서술방향 및 강조점은 다음과 같다.
-어리고 불안한 임금
-김종서 등 대신들의 전횡
-안평대군의 왕위 찬탈 음모와 대신들의 결탁
-수양대군의 영웅적인 면모와 우국 충정
마치 80년 5.18 직후의 신문들을 보는 느낌이다.-15-1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로틱 Comic mook 2
나예리 외 지음 / 거북이북스 / 2007년 1월
절판


생물의 기본법칙이란 바로 생명 현상의 유지고, 그 목표를 충족하기 위한 의지가 바로 욕망이다. 그 중 식욕이 양분의 흡수를 통해서 개체의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성욕은 유전자의 혼합과 번식행위를 통해서 종의 생존을 추구하는 것. 그런데 두 본능 모두 인간사회의 발전 과정 속에서 특유의 사회적 체계화 및 그에 대한 반대급부의 쾌락이 더해졌으니, 식욕은 식사를 통한 모임과 미식의 쾌락이 그것이고 성욕은 연애행위와 에로틱한 쾌락이 그것이다. 식욕이 테이블매넌와 요리라는 형식으로 사회적 통제의 대상이 된다면, 성욕은 법적 연령, 결혼관계, '건전한 성관계' 등의 개념으로 통제되곤 한다. 이런 와중에서 통제와 욕구의 괴리를 극복하며 나름의 쾌락을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매체를 통한 대리만족인데, 그렇기에 에로 장르는 사회의 통제가 고도화됨과 동시에 점점 더 발달하곤 한다. -114-115쪽

남자들은 성인에로극화나 모에계열 미소녀 능욕물을 보고, 여자들은 야오이를 보며 쾌락의 죄책감을 열심히 즐긴다. -115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7-03-10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모에계열이란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마노아 2007-03-10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여운 캐릭터'를 의미하는 것 아닐까요? 검색해봤는데, 그래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청소부 밥
토드 홉킨스 외 지음, 신윤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6년 11월
장바구니담기


가족을 짐이 아닌 축복으로 생각하기로 한 거야. 그렇게 생각을 바꾸었더니 식구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졌고, 편안한 마음으로 활기차게 일할 수 있게 됐다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 있었으니까. 일을 하는 진짜 목적도 찾을 수 있었지.

-78쪽

과거로부터 물려받기만 하지 말고, 내가 깨달은 지혜를 후대에 물려주라.-20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녀의 눈동자 1939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1
한 놀란 지음, 하정희 옮김 / 내인생의책 / 2007년 1월
절판


이날은 심판의 날이었다. 심판은 하늘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땅에서 이루어졌다. 선량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으며 악한 사람들은 지옥으로 추방되지 않았다. -128-129쪽

우리는 독일군이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왔지만, 독일군이 전쟁에서 패하는 길만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세계의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러한 역설을 꿰뚫어 볼 수 있을까? 설마 알고도 모르는 척하지 않겠지? 사람의 마음이 어쩌면 이렇게도 모질 수 있을까? 그리고 신도 어찌 이렇게 잔혹할 수 있단 말인가?-130쪽

"야쿠브야, 만약 내가 그들 손에 죽는다면, 절대 그들이 만족감을 느낄 수 없도록 만들고 싶다. 내 얼굴과 내 눈빛이 그들의 기억 속에 살아서 영원히 그들의 영혼을 불태우기를 바란다."

오빠가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잊었나보네요. 그놈들한테는 영혼이 없다고요."
-136쪽

"정말이라니까! 우리 할머니만 유대인이야. 그런데 왜 우리가 죽어야 돼?"

"우리가 유대인이라는 것 때문에 죽어야 하는 까닭은 뭔데요?"-172쪽

앞을 바라보니 사방에 가시철조망이 처져 있었고 그 너머로는 나무도 풀도 덤불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그 광경이 마치 '여기서는 아무 것도 자랄 수 없고 아무 것도 살 수 없다.'라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185쪽

네가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원해야 할 것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야. 이곳에서는 사느냐 죽느냐가 있을 뿐이지.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지.-203쪽

할머니는 입으로는 희망을 얘기했지만 눈빛은 그렇지 못했다.-26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