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과학

제 2660 호/2016-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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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을 지탱한 것은 ‘찹쌀 밥심’

20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담장 수리’라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넓은 들판을 나눠서 쓰고 있는 이웃끼리 어느 정도 높이와 두께의 담을 쌓아야 적절한지 타인의 입을 빌어 이야기했다. “우리는 우리 사이에 담을 유지해요 / 담 양쪽에 떨어진 돌들을 서로가 주워 올려야 하고요 / 뭐 그저 양쪽에 한 사람씩 서서 하는 / 좀 색다른 야외 놀이지요 / 그는 자기 아버지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고 /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되풀이 합니다 / 담을 잘 쌓아야 좋은 이웃이 되지요” 

담장을 너무 낮게 쌓으면 혹시 누군가 넘어오진 않을까 불안해지고, 너무 높게 쌓으면 싸우자는 뜻으로 보인다. 영토를 마주한 국가끼리도 적절한 관계 유지가 필요하다. 국경에 높은 벽을 쌓고 군대를 배치하면 곧 전쟁을 벌이겠다는 뜻이고, 그렇다고 관리를 하지 않고 두면 무슨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고대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8세기에 이민족의 침입을 받은 주나라가 동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세력이 약해지자 인근의 여러 제후들이 나라를 세우고 각축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를 춘추시대라 하는데 그중 제(齊)나라는 높고 기다란 성벽을 쌓아 영토를 지켰다. 세력이 가장 컸던 진(晉)나라가 멸망하자 수많은 소국들이 또 생겨나 혼란이 커졌고 곳곳에서 제나라처럼 성벽을 쌓아 자기 땅을 지키려 했다. 

기원전 3세기에 혼란을 평정하고 중국을 통일한 사람은 진(秦)나라의 첫 황제인 진시황이다. 중국 내 독립국들이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세웠던 성벽은 무너뜨리고 북쪽 기마민족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새로운 성벽을 쌓았다. 덕분에 이후의 한나라는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새로운 성벽을 세웠다. 

사진. 만리장성(출처: Hao Wei/Flickr)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다들 ‘만리장성이구나!’ 하고 생각하겠지만 당시의 성벽은 오늘날의 만리장성과는 완전히 다르다. 지금의 위치는 5세기 남북조시대에 처음 잡혔고 돌을 각 지게 깎아서 올린 현재의 성벽은 천 년 가량이나 더 지난 14세기에 명나라가 다시 쌓은 모습이다. 원나라를 세운 몽골족이 멸망 후에도 지속적으로 침입해오자 아예 허물지 못할 담을 쌓아 소통을 막은 것이다. 

당시의 뜻이 얼마나 확고했으면 50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만리장성이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일까. 만리장성의 실제 길이는 원래 6,352km였지만 중국 정부는 2009년 동쪽 구간을 늘려 8,851km로 발표했고, 2012년에는 한술 더 떠 동쪽과 서쪽을 비약적으로 늘린 2만1,196km라고 선언했다. 1리를 400m로 계산하면 만리장성이 아니라 ‘5만3천리장성’이라 불러야 할 지경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성벽이 튼튼하게 남아 있는 구간은 20%도 채 되지 않는다. 다만 관광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일부 구간은 예전의 모습 그대로 버티고 서 있다. 수백 년을 견뎌온 비결을 알아내기 위해 토목 전문가와 과학자들이 달려든 결과, ‘찹쌀’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고대 문명에서 석조 건축물을 지을 때는 여러 개의 주사위를 쌓듯이 올려놓는 것이 아니라 사이사이에 접착제를 발라서 단단하게 붙인다. 서양에서 주로 사용된 것은 석회석 모르타르다. 모르타르는 시멘트처럼 돌가루를 물에 개서 만드는데 고대 로마제국에서 발견된 석조 건축물 중에서 모르타르를 사용한 건물은 연대가 기원전 245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기술은 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됐지만 화산재를 섞어야 한다는 점에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사용되지는 못했다. 

대신에 고대 중국의 석공들은 특별한 접착제를 사용했다. 돌가루로 만든 기존의 무기물 성분에 유기물까지 섞어 무기-유기 혼합 모르타르를 만든 것이다. 이 기술은 오늘날의 만리장성 위치를 잡은 5세기 남북조시대부터 쓰였으며 중국 중부 허난성 지역에서 발견된 당시의 석굴묘에서도 무기-유기 모르타르가 발견됐다. 송나라 때의 백과사전인 ‘천공개물(天工開物)’에 제조방법이 기록돼 있다. 

기존의 석회석 모르타르에 추가된 유기물 성분은 다름 아닌 ‘찹쌀’이다. 산화칼슘이 들어 있는 석회석 가루에 물을 부어 생기는 흰색의 물질 즉 소석회(消石灰)라 불리는 탄산칼슘인데, 여기에 찹쌀죽을 끓여서 얻어낸 유기물 즉 녹말의 일종인 아밀로펙틴을 섞는다. 그리고 돌가루를 첨가하면 오늘날의 시멘트와 같은 석화-찹쌀풀 반죽이 만들어진다. 돌이나 벽돌 사이에 반죽을 발라서 공사를 하면 웬만한 충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건축물이 완성된다. 

무기-유기 혼합 모르타르는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 때도 지속적으로 사용됐다. 효능이 너무나 강력해서 1604년 명나라 때 강도 7.5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이 공법을 지은 건물이나 성벽, 묘소는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다. 중국 남부 후난성 지역에서는 1978년 공사 중 불도저로 미는데도 꿈쩍하지 않는 구조물이 있어 추가 조사 중에 석회-찹쌀풀 반죽을 사용한 명나라 쉬푸(溆浦) 석굴묘로 밝혀졌다. 

무기물에 유기물을 섞어서 모르타르를 만들면 어떤 원리로 내구력이 높아지는 것일까. 2010년 중국 저쟝대학교, 톈수이대학교, 중국문화유산아카데미 공동연구진은 난징시를 둘러싼 성벽에서 모르타르 샘플을 채취해 분석을 실시했다. 그 결과 소석회에 섞은 찹쌀풀의 성분 중 아밀로펙틴이 억제제로 작용해 탄산칼슘 결정체가 커지는 속도를 적절하게 조절했고 덕분에 수많은 미세구조물을 만드는 것으로 확인됐다. 물리적으로 더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하중을 견디는 힘이 일반 석조물보다 더 크다. 무기물과 유기물을 섞어서 모르타르를 만드는 것이 효능 면에서 훨씬 뛰어난 셈이다. 

고대의 문화재를 복원하는 데 실제 사용해본 결과 뛰어난 효과를 내는 것으로 밝혀졌다. 천 년 전 송나라 때 만들어진 쇼우창 다리(寿昌桥)는 단 하나의 커다란 아치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석조물이다. 국가보호문화재로 지정됐지만 오랜 세월에 지반이 약화되고 교각 하단부에 나무가 자라나면서 석재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해 결국 지난 2006년 수리를 실시했다. 복원 과정에서 석회-찹쌀풀 반죽을 사용해 석재를 접착시켰더니 수리 이후 5년 동안 비바람에 노출됐지만 어떠한 균열과 변형도 나타나지 않았다. 소석회의 강알칼리성 덕분에 석재 사이에서 풀이 자라나던 모습도 사라졌다.

이 비밀을 알아낸 덕분에 오늘날 고대 석조 건축물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거나 다시 짓는 일이 수월해졌다. 만리장성도 찹쌀밥으로 죽을 끓여 접착제로 사용한 덕분에 오늘날까지 멀쩡히 남아 있는 셈이다. 혹시나 균열이 생기거나 귀퉁이가 무너지면 석회-찹쌀풀 반죽으로 복원하면 된다. 우리말에 “밥심으로 산다”는 표현이 있다. 이제는 사람뿐만 아니라 건축물도 밥심 덕분에 살아간다고 해야 할까. 

글 : 임동욱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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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31 0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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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31 10: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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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645 호/201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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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의 기억은 언제부터 사라질까


어릴 적 전북 군산에 잠깐 살았던 적이 있다. 당시 집 근처에는 야구 명문 군산상고가 있었고, 네 살이던 나는 선수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즐겨 봤다. 아니 정확히는 그랬다고 한다. 그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시는 부모님 말씀에 따르면 말이다. 하지만 정작 내게는 당시의 기억이 전혀 없다. 단지 상상하며 마음에 그려볼 뿐이지 사실 그 때의 기억을 상실한 지 오래이다. 

반갑게도(?) 사람들은 어릴 적 일을 대부분 기억하지 못 한다. 이처럼 아동기 초기의 기억이 없는 것을 ‘아동기 기억상실’이라 부른다. 흥미로운 사실은 정작 아이들은 이 시기에 뛰어난 학습 능력을 갖고 있는 점이다. 부모라면 한 번쯤 ‘우리 아이가 혹시 영재 아닐까?’라고 고민해 본 적이 있을 정도로 어린이의 기억력은 탁월하다. 아동기 기억에 관한 역설적 상황을 두고 오래 전부터 활발한 과학적 논쟁이 있어 왔다. 

어린이의 기억은 언제부터 사라지는 것일까? 성인을 대상으로 한 여러 연구에서 사람들은 2-3세에 있었던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3-7세 사이에 있었던 일은 매우 일부만 기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처음 숟가락을 사용했던 일이나 기저귀를 떼던 일은 아예 기억이 안 나지만, 유치원에서 갔던 소풍이나 성탄절에 받은 선물은 드문드문 떠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자신감과 달리 과거는 종종 잘못 기억된다. 과거 연구들의 한계점을 넘어서기 위해 미국 에모리 대학교의 바우어와 라르키나 교수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연구를 시행했다. 먼저 이들은 3살 어린이와 엄마가 가족 캠핑, 사촌의 방문, 생일 파티와 같은 최근 일들에 대해 나눈 대화를 녹음했다. 이후 6년 동안 어린이가 성장하면서 특정 내용을 얼마나 기억하는지를 매년 살펴봤다. 

그 결과 어린이가 7살까지는 3살 때 있었던 일의 60% 이상을 기억하는 반면에 8, 9살 어린이는 기억하는 정도가 40% 이하인 것으로 나타났다.이는 아동기 기억상실이 이 2년 사이게 급속하게 진행됐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이들의 다른 연구에서는 어린이가 11세에 이르면 성인과 비슷하게 과거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종합하면 아동기 기억상실은 시간에 비례해 잊는 형태로 나타나는 성인의 망각과는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왜 아동기 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1세기 전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드가 어릴 적 심리적 외상을 억압하면서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고 주장한 이래 여러 이론들이 제시돼 왔다. 한 때는 어린이에게 기억 생성에 필요한 자아 개념이나 언어 습득과 같은 발달 과정이 채 이뤄지지 않은 것이 원인으로 추정됐었다. 하지만 원숭이나 쥐에게서도 아동기 기억상실이 관찰되기에 좀 더 보편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어릴 때 뇌에서 빠른 속도로 생성되는 신경 세포가 아동기 기억상실의 원인이라는 이론이 최근 주목을 받고 있다. 뇌에 들어온 정보를 종합해 기억을 만드는 곳이 해마인데, 과거에는 더 좋은 기억력을 갖기 위해 신경 세포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의 부부 교수인 조슬린과 프랭크랜드의 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뇌에서는 반대의 현상도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연구진은 실험적 조작을 통해 새끼 쥐와 어른 쥐에서 해마의 신경 세포가 자라는 속도를 조절했다. 그 결과 새끼 쥐에서 신경 세포의 성장을 늦추자 기억이 오랫동안 유지된 반면에 신경 세포 생성이 증가한 어른 쥐는 기억을 상실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를 바탕으로 연구진은 아동기 초기에 기억 회로의 증설을 위해 신경 세포가 빠른 속도로 만들어질 때 오래된 기억을 저장하는 기존 회로가 방해를 받으면서 아동기 기억이 사라지는 것으로 추정했다. 

일부 기억은 아동기를 거치는 중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흔히 감정이 섞여있는 기억이 오래 지속되는데 어릴 적 기억도 그럴까? 미국의 피터슨 교수는 이를 알아보기 위해 뼈가 부러지거나 깊게 베인 상처 등으로 응급실을 방문한 3-5살 어린이를 2, 5, 10년에 걸쳐 추적하면서 이들의 기억을 살펴봤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렸을 때 가장 공포스러운 기억 중 하나가 다쳐서 병원에 갔던 것이지 않은가. 

어린이는 10년이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자신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쳤는지 등의 내용을 70% 정도 기억했고 부상과 관련해 약 45가지의 세부적인 내용들을 떠 올렸다. 그러나 부상당한 기억에 비해 병원에서 치료 받은 기억은 부실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기억이 나빠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두 기억이 다른 방법으로 다뤄지는 것을 원인으로 추측했다. 즉 부상당한 일은 가족과 지인 사이에서 자주 언급되면서 기억의 강화로 이어졌지만, 병원에서 경험한 일은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다뤄지면서 일반적인 기억들처럼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기억 자체의 내용이나 연관된 감정이 아동기 기억을 견고하게 만드는 요소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4-13세의 어린이에게 가장 오래된 기억 세 가지를 묻고 2년 뒤에 확인한 피터슨 교수의 다른 연구에서도 첫 기억들은 의외로 평범(?)한 것들이었다. 프로이드가 언급했던 것처럼 심리적 외상도 아니었고, 강렬한 감정이 실려 있는 기억도 아니었던 것이다. 

혹시 환경적 요소가 아동기 기억상실에 관여하는 것은 아닐까? 성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들에서 남성보다 여성이 어릴 적 기억을 더 많이 갖고 있거나, 국가에 따라 가장 오래된 아동기 기억이 언제부터인지가 다르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어린이 집단에서는 이런 환경적 영향이 관찰되지 않으며 이전의 결과는 연구 방법 상 허점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아동기 기억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에 대해서는 향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일부 사람들은 이미 아동기 때 깡그리 잃어버린 기억을 왜 굳이 궁금해 하고 연구하는지 의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동기 기억상실의 과학적 기전이 밝혀진다면 여러 불안장애에 동반되는 나쁜 기억만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식으로 임상 현장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설령 당장은 그렇지 못 해도 어릴 적 기억을 빛바랜 사진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음미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 행복하지 않겠는가. 연휴가 많은 5월, 어릴 적 기억을 찾아 군산행 기차에 몸을 실어야겠다. 

글 : 최강 의사, 르네스병원 정신과장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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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639 호/2016-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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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 100년 이상 견디는 이유

서울의 서촌과 북촌, 전주의 한옥마을…. 우리나라의 전통 가옥인 한옥을 보존하고 또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한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곳은 주말마다 관광객으로 붐비고, 한옥으로 만든 숙박시설은 미리 예약해야 하루를 묵을 수 있다. 또 한옥을 빌려 실제로 거주하거나 직접 한옥을 짓기도 한다. 
그렇다면 한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한옥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한옥이 어떤 구조로 돼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 처마 끝과 기둥 끝이 만나면 30도가 된다?! 

한옥은 일반적으로 대문, 마당, 부엌, 사랑방, 안방, 마루 등으로 이뤄져 있다. 대문을 열면 넓은 마당으로 들어서고 마당을 둘러싸고 부엌과 사랑방, 안방 등이 ㄷ자 모양이나 ‘ㄱ’자, ‘ㅁ’자 등으로 배치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구조다. 기단이나 주춧돌, 기둥, 공포, 지붕, 대들보 등을 기초로 한옥이 지어진다. 

그렇다면 이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각 요소가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한옥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지붕이다. 지붕은 그 집의 분위기나 인상을 결정하고 매끄러운 곡선으로 이어지는 지붕은 한옥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름다움과 함께 지붕은 눈이나 비를 막고 햇빛을 차단하는 등 한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어떤 기와를 사용하는지도 매우 중요하다. 

그림. 풍속화첩-기와이기(김홍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예로부터 집을 짓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질 좋은 기와를 구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한옥의 기둥은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습기에 무척 약하다. 지붕에서 물이 샌다면 나무가 썩을 수 있기 때문에 한옥을 오래 보존하기가 힘들다. 질 좋은 기와와 함께 집을 지탱할 나무를 잘 구해야 한다. 

또 지붕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나라의 계절적인 특징 때문이다. 사계절의 변화가 있는 우리나라는 한 여름에 태양이 가장 높이 걸리는 남중고도는 77도다. 90도에 가까운 각도로 태양빛이 내리쬐기 때문에 날이 뜨겁고, 낮 길이가 긴 것이 여름 날씨의 특징이다. 하지만 겨울에는 이와 반대로 남중고도가 30도 정도다. 태양빛이 비스듬하게 내리쬐기 때문에 춥고 낮의 길이가 짧다. 

지붕은 이런 계절적 특징을 고려해 만들어졌다. 기둥 중심으로부터 밖으로 돌출된 지붕의 끝 부분을 처마라고 하는데, 처마의 끝 선과 기둥의 끝 부분을 연결하면 기둥과의 각도가 약 30도가 나온다. 이런 형태를 이루고 있어 한 여름 태양빛은 처마 때문에 집 안 깊은 곳까지 들어오지 못한다. 반대로 겨울에는 남중고도가 낮기 때문에 집 안 깊은 곳까지 태양빛을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자연의 특성을 활용해 한옥의 부족한 냉난방을 보충하려는 조상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 한옥의 무게중심은 위에 있다 

전주 한옥마을에는 100년이 넘은 한옥이 있다. 바로 학인당(學忍當)이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으로 민가 중에 문화재로 지정된 유일한 곳이다. 학인당은 처음부터 소리를 위해 설계된 집이라고 한다. 그래서 숙박은 물론이고, ‘학인당 국악제’를 열어 공연도 감상하는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떻게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옥이 건재할 수 있을까. 

사진. 학인당 본채 전경(출처: oldtour.jeonju.go.kr)



그 비밀은 바로 무게중심에 있다. 한옥은 땅을 다진 뒤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수직으로 기둥을 세운다. 뼈대를 놓고 지붕을 올리는 것이다. 아파트나 양옥의 무게중심이 아래에 있는 것과는 다르게 한옥의 무게중심은 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춧돌을 제외하고는 다른 부분이 교체가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습기에 약한 나무 기둥이 썩거나 낡으면 부분적으로 교체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한옥이 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아파트와 같은 건물은 기둥을 교체하기가 쉽지 않다. 섣불리 기둥을 손보다가 큰 사고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한옥에서 기둥을 교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썩은 부분만 잘라내고 새로운 목재로 덧붙인 다음 주춧돌에 맞춰서 그랭이질을 하면 된다. 그랭이질은 그랭이를 사용해 주춧돌의 울퉁불퉁하고 불규칙한 모양을 기둥의 면에 맞게 깍는 작업을 말한다. 기둥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도 이런 식으로 교체하면 오랫동안 한옥을 보존할 수 있다. 

습기에 취약한 한옥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기단(基壇)을 쌓기도 했다. 기단이란 집터를 잡고 터를 반듯하게 다듬은 다음에 터보다 한층 높게 쌓은 단을 말한다. 기단을 만드는 목적은 지하수나 빗물이 집으로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또 기둥을 거쳐 주춧돌을 통해 기단에 전달되는 지붕의 하중을 골고루 분산시키기 위함도 있다. 집이 기울거나 가라앉는 것을 예방할 수 있는 것이다. 기단은 땅에 있는 벌레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쌓기도 했다. 또 햇빛이 집 안까지 충분히 들어가게 하기 위해 기단을 쌓기도 했다. 

한옥은 알면 알수록 참 신비롭다. 그 당시에 어떻게 이런 생각까지 할 수 있었을까 존경스러운 마음도 든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우리나라에 맞게, 또 우리 가족에 맞게 집을 지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조상들의 지혜를 본받아 남아 있는 한옥을 잘 지키고 자손들에게 잘 물러주어야 할 일이다. 

글 : 심우 과학칼럼니스트 
일러스트 : 유진성 작가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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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칫거리 바퀴벌레의 놀라운 능력   FOCUS 과학

제 2620 호/2016-04-04

골칫거리 바퀴벌레의 놀라운 능력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아름다운 그 얼굴 /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희한하다 그 모습 /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달이 떠올라 오면 /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그립다 그 얼굴’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라쿠카라차’라는 노래는 15세기 말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스페인 민요다. 그 후 수 세기를 지나는 동안 여러 버전이 생겨났는데,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노래는 1910년 멕시코 혁명 당시 농민혁명군이 불렀던 곡이다.
그런데 흥겨우면서도 애닮은 이 노래의 제목인 라쿠카라차(La Cuccaracha)는 스페인어로 바퀴벌레라는 뜻이다. 정확히 말해서 ‘라(la)’는 여성 명사 앞에 붙는 정관사로서 영어에서의 ‘the’와 같고, ‘쿠카라차’가 바퀴벌레이다. 영어에서 바퀴벌레를 가리키는 ‘cockroach’도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농민혁명군은 왜 하필 바퀴벌레를 노래했을까. 그 이유는 멕시코 농민들이 스스로를 바퀴벌레처럼 비참한 생활을 하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집단으로 비유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잡아 죽여도 끊임없이 나타나는 바퀴벌레처럼 농민혁명군은 결국 혁명에 성공해 토지 개혁과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 지구상의 가장 오래된 주민, 바퀴벌레

3억5천만 년 전에 나타난 바퀴벌레는 지구상의 가장 오래된 주민 중 하나다. 인간은 물론 공룡보다 먼저 지구에 출현한 것. 이처럼 오랜 세월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생물보다 뛰어난 생존력 덕분이다.
바퀴벌레는 자기 몸의 몇 천 배 높이에서 떨어져도 끄떡없으며 몸을 회전하는 운동능력도 매우 빠르다. 생존능력이 뛰어난 모든 동물이 그렇듯이 번식력도 대단하다. 바퀴벌레 한 마리가 1년 동안 불릴 수 있는 새끼는 수는 약 10만 마리에 달할 정도.

인간보다 125배 발달된 후각에다 절단 부분에 대한 신경차단능력으로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 독극물에 의해 사망할 경우 그 자손들은 해당 독극물에 대한 내성을 획득하며, 스스로 몸의 온도를 조절하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이 같은 능력으로 바퀴벌레는 남극 대륙 이외의 모든 대륙에 서식한다.

바퀴벌레의 번성은 인간에겐 재앙이다. 삼킨 음식을 다시 뱉은 다음 동료와 나눠 먹는 습성으로 인해 사람에게 식중독을 유발하며 40여 가지의 병원균을 전파한다. 또 바퀴벌레의 배설물이나 탈피된 껍질은 천식과 아토피를 유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퀴벌레는 생물학 및 기계공학자들의 실험실에서는 가장 환영받고 있는 동물 중 하나다. 바퀴벌레가 과학자들로부터 찬탄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놀라운 달리기 능력 및 장애물 통과 능력 때문이다.

바퀴벌레는 자신보다 3배 더 높은 장애물을 넘을 때에도 단지 약 20% 느리게 움직일 만큼 달리는 능력이 우수하다. 감각기관으로부터 정보를 인식해 행동으로 옮기는 데 걸리는 시간이 불과 0.001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헤브로대학 연구진이 초당 250장의 장면을 찍는 고속카메라를 이용해 바퀴벌레의 달리기 실력을 측정하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그 결과 바퀴벌레는 초당 25번의 방향 전환을 하면서 초속 1m의 속도로 내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키 1.7m의 사람으로 치면 시속 150㎞의 속도에 해당한다.

■ 바퀴벌레의 놀라운 능력

바퀴벌레가 이처럼 몸의 방향을 민첩하게 바꿀 수 있는 것은 눈이 아니라 더듬이를 사용해 장애물을 발견하는 즉시 몸을 틀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퀴벌레는 하루 24시간 중 18시간을 주로 더듬이 청소에 소비해 더듬이를 항상 깨끗하게 유지하는 습성이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바퀴벌레는 자기 몸보다 더 좁은 틈도 수월하게 빠져나간다. 키가 9㎜인 미국 바퀴벌레는 높이 3㎜정도에 불과한 틈새나 폭 4㎜도 통과할 수 있다. 자신의 몸을 1/4까지 축소시킬 수 있는 놀라운 탄성 능력 덕분이다.
바퀴벌레는 풀과 같은 수직 기둥의 장애물을 통과할 때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횡전(roll) 동작을 사용하기도 한다. 횡전이란 비행기가 곡예비행을 할 때 전후 방향의 세로축에 대해 가로 방향으로 회전시키는 공중 동작을 말한다. 이때 바퀴벌레는 몸통을 틀어 가장 얇은 측면이 수직 기둥 사이로 들어가게 하고 다리는 수직 기둥을 밀어서 장애물을 통과한다.

미국 UC버클리 생물학과 로버트 폴 교수팀은 바퀴벌레의 이 같은 달리기 및 탄성 능력을 모방해 ‘크램(CRAM)’이라는 탐색로봇을 개발 중이다. 지난 2월 국제학술지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시제품이 발표된 이 로봇은 높이 75㎜의 손바닥만 한 크기로서, 좁은 틈을 만나면 바퀴벌레처럼 키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 CRAM(Compressible Robot with Articulated Mechanisms)은 ‘관절 메커니즘을 갖춘 압축 가능한 로봇’이라는 의미다.

이 로봇은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로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나 좁은 공간을 헤집고 다니며 사람을 찾을 수 있다. 압축하면 몸을 동그랗게 마는 아르마딜로처럼 되며, 걸을 때는 다리가 180°로 열려 마치 찰리 채플린의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를 흉내 낸다.
개발 비용 일부를 미 육군에서 지원받은 크램은 구조가 단순해 가격도 100달러 내외로 저렴하다. 대량 생산을 할 경우 개당 10달러 정도면 가능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구진은 크램에 카메라, 마이크, 기타 센서를 부착해 수백 마리를 한꺼번에 운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대부분의 로봇은 장애물을 피하며 다양한 작업을 수행할 목적으로 개발되고 있지만, 크램처럼 장애물을 통과하도록 설계된 로봇은 드물다.

이외에 재난 현장의 생존자 파악에 사용되는 사이보그 동물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개발되고 있는 동물도 바로 바퀴벌레다. 사이보그 동물이란 전자장치를 부착해 살아 있는 동물의 행동을 조종하거나 신체 일부를 기계로 개조한 동물을 의미한다. 로봇처럼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기계장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상태에서 동물을 통제하는 것이 이 기술의 핵심이다.
지난해 3월 미국 텍사스A&M대 연구진은 바퀴벌레의 다리 움직임을 담당하는 뇌신경에 전기자극 장치를 연결해 연구진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사이보그 바퀴벌레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바퀴벌레는 생김새도 움직임도 징그럽다. 그 끈질긴 생명력마저 징그럽다. 하지만 바퀴벌레는 밟혀도 잘 죽지 않는 비결이, 또 자기 몸보다 작은 구멍을 문제없이 드나들 수 있는 비결이 재난 현장의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다.

글 : 이성규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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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SION 과학

제 2614 호/2016-03-23

 

프랑스 와인의 명성, 원산지 표시제도로 만들었다


축하할 일이 생기거나 특별한 손님을 모실 때는 식탁에 와인을 한 병 올려서 분위기를 돋우기도 한다. 그런데 적당한 와인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 미국, 아르헨티나, 호주,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메뉴에 적힌 종류만 수십 가지가 넘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의 와인 중에서 특히 높은 가격에 팔리는 것은 프랑스산이다. 종류가 다양한데다가 품질까지 좋아 격식 있는 자리에서 환영을 받는다.

프랑스 와인을 마시기로 결정했어도 구체적으로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생산지에서부터 품종, 생산년도, 가격까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다. 우선은 붉은색 레드와인과 투명한 화이트와인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고기 요리나 양념이 센 음식은 레드와인, 생선 요리나 간이 세지 않은 음식은 화이트와인이 어울린다.

보르도, 부르고뉴, 론, 루아르, 알자스, 샹파뉴, 랑그독 등 대표 생산지 중에서 선택하되 품종도 함께 살핀다. 보르도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든 레드와인이 많다. 부르고뉴 지역의 레드와인은 ‘피노 누아르’, 화이트와인은 ‘샤르도네’ 품종이 대부분이다. 론 지역은 북쪽의 ‘시라’와 남쪽의 ‘그르나슈’가 레드와인으로 유명하지만 섞어서 만드는 곳이 많다. 품종이 쓰여 있지 않은 와인은 여러 품종을 블렌딩해서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생산년도는 당시의 기후가 어땠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판단의 기준이 되지만 가격과 연관시켜서 생각하면 무리가 없다.

이렇게 하나하나 따져서 마침내 적합한 와인을 주문한다. 종업원이 유리잔에 서빙을 해주면 다들 잔을 들고 쨍 하는 경쾌한 소리로 건배를 한다. 처음에는 색깔을 감상하고 냄새를 살짝 맡은 다음 한 모금 마신다. 새콤하기도 하고 떫거나 달기도 한 와인이 입안에 들어왔다가 목으로 넘어가면 손님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런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든다. 그까짓 와인 한 잔 맛보겠다고 이렇게까지 공부를 해야 하나. 프랑스는 왜 이리도 와인에 신경을 쓰는 것일까. 프랑스 와인은 언제 어떻게 고급 제품으로 자리매김했을까. 비결은 ‘지리적 표시제도’에 따른 까다로운 규제와 관리에 있다.

지리적 표시제도(GIS)는 말 그대로 ‘어느 곳에서 재배되거나 수확되었는지’를 밝히는 제도다. 특히 농산물은 지역에 따라 품질과 특성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생산지를 명시하면 유사 제품과의 차별성이 부각돼 소비자의 선택을 돕는다. 고품질을 유지해온 지역민의 노력을 지적재산으로 인정하고 보호함으로써 명맥 유지를 돕는 효과도 있다.

고대 그리스는 이미 기원전 7세기에 특급 와인에 생산지를 표시했다. 인류가 지리적 표시의 이점을 깨달은 지 2500년도 넘었지만, 법률을 제정해 보호하기 시작한 것은 100년을 조금 넘겼다. 지리적 표시제도를 공식적으로 도입한 첫 국가는 프랑스다. 1905년에 와인을 비롯한 농산물의 생산지를 표기하는 법령을 제안하고 1919년 정식으로 발의했다. 처음에는 농민들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1935년에는 포도주·증류주 국가위원회(CNVE)를 세웠고 1947년에는 국립 원산지표시 품질관리원(INAO)을 출범시켰다. 1955년에는 일반 농산물이 아니라 가공식품인 치즈도 지리적 표시를 의무화했고 1990년에는 농업 전체로 확대 적용했다.

현재 프랑스 내에서 생산된 모든 농산물은 어느 지역에서 생산했는지를 반드시 표기해야만 판매할 수 있다. 덕분에 소비자는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안전한 먹거리를 구매하게 됐고 정부는 지속적인 품질 관리 정책을 펴는 한편, 농민들은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 높은 값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지역색을 중시하는 전통 때문에 법제화 훨씬 이전부터 수백 년 동안 농산물의 원산지 표시를 당연하게 생각해온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 거들었다.

우리나라에는 ‘신토불이’라는 말이 있다. ‘몸과 땅은 서로 다르지 않다.’ 즉 사람은 거주지 인근에서 수확한 식품을 섭취해야 한다는 뜻이다. 프랑스도 이와 비슷한 단어를 사용한다. ‘테루아(terroir)’다. 우리말로는 ‘토양’으로 번역되지만 본래의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의 개입까지 함께 지칭하는 표현이다. 각 농작물이 제대로 자라는 데 필요한 지리, 기후, 지질, 농법 등 환경 전체를 가리킨다.

농산물의 품종이 같아도 어떤 테루아에서 재배됐는지에 따라 맛과 상태에 차이가 난다. 작물의 특성과 지역의 조건을 잘 알고 있는 농부가 재배해서 제품으로 가공할 때 재료는 최상의 맛을 낸다. 오랜 시간 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며 노하우를 쌓아온 지역 농부들의 노력과 자존심을 하나의 지적재산으로 인정해줄 때 국가 전체의 농업도 힘을 유지한다.

그러나 프랑스가 지리적 표시제도를 시작한 이유를 살짝 들춰보면 자존심과 더불어 ‘위기감’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2천 년이 넘는 역사를 통해 세계 최고의 와인을 만들어오던 콧대 높은 나라였지만, 19세기 말 미국으로부터 해충 필록세라(phylloxera)가 전래되면서 와인 생산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다. 필록세라는 흙 속에 사는 진딧물 같은 곤충인데 포도나무의 뿌리를 파고들어 말라죽게 만든다. 수많은 연구에도 퇴치법을 찾아내지 못해 전국의 포도밭이 황폐화됐다.

해결책은 하나뿐이었다. 필록세라에 저항성을 가진 미국산 포도나무 뿌리를 수입해서 프랑스 땅에 심고 그 위에 기존 포도나무 가지를 접붙여서 해충이 땅으로부터 못 올라오게 만드는 방법이다. 당시로서는 최하품 취급을 받던 미국의 포도나무를 이용한다는 말에 프랑스 농민들은 반대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자존심과 위기감의 팽팽한 대결 끝에 기사회생의 쓰디쓴 처방을 받아들였다. 이후 지역과 자국의 농산물 산업을 재건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지리적 표시제도다.

프랑스 와인은 아오쎄(A.O.C.)라는 이름의 지리적 표시제도를 운영 중이다. 우리말로는 ‘원산지 명칭 통제·관리’로 해석된다. 와인 병에 붙은 라벨을 살펴보면 크게 상표, 품종, 연도, 지역의 4가지를 읽어낼 수 있다. 상표, 품종, 연도는 쉽게 읽어낼 수 있지만 지역명은 표시가 복잡하다. ‘오리진(Origine)’ 즉 원산지에 해당하는 단어 앞뒤로 ‘아펠라시옹(Appellation)’과 ‘콩트롤레(Controlée)’라는 글자가 붙는다. 아펠라시옹은 명칭, 콩트롤레는 통제·관리란 뜻이다. 와인 생산지를 표시할 때는 법에 따라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보르도에서 생산된 와인은 ‘아펠라시옹 보르도 콩트롤레’, 부르고뉴에서 만들어졌다면 ‘아펠라시옹 부르고뉴 콩트롤레’라고 쓴다.

프랑스의 와인은 품질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나뉜다. 저품질 일반 와인은 ‘뱅 드 타블(Vin de Table)’이라 하는데 식탁에 두고 부담 없이 마시라는 뜻이다. 품종이나 재배방식에 대한 규제가 별로 없어서 저렴한 가격에 생산이 가능하다. 그 위 등급은 지역(pays)에서 관리한다 해서 ‘뱅 드 페이(Vin de Pays)’라 부른다. 그 위 등급이 ‘아오쎄’에 해당한다. 프랑스 와인을 고를 때 ‘아펠라시옹’과 ‘콩트롤레’라는 표현이 보인다면 믿고 마셔도 좋다. 종업원에게 “아오쎄 등급이냐”고 미리 물어보고 확인하면 된다.

요즘은 미국과 아르헨티나와 같이 신대륙에서 생산된 와인이 환영을 받는다. 기후가 일정하고 병충해가 적어 높은 품질에도 저렴한 가격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프랑스 와인이 주는 고급 이미지를 따라가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프랑스의 명성은 몇몇 회사의 마케팅에 의해 일시적으로 생겨난 거품이 아니라 원산지 표시를 국가 차원에서 엄격하게 관리하며 법적으로 보호해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아오쎄 등급의 와인을 마실 때는 프랑스 사람들처럼 건강을 기원하며 건배를 외쳐보자. “썽떼(Santé)!”

글 : 임동욱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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