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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지 - 전10권 세트 ㅣ 김정산 삼한지
김정산 지음 / 예담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뿌듯한 독서활동이었다. 10권이나 되는 긴 분량 속에서 한 시대와 다음 시대의 세대교체를 보았고, 역사 속에서 한 획을 그었던 수많은 인물들의 삶을 엿보았으며,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들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자웅을 겨루며 다투었던 시기는 우리가 고대사로 분류하는 까마득한 옛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먼 과거가 아닌 바로 우리 옆에서 숨을 쉬는 현실의 이야기처럼 책을 통해 다가왔다. 책을 읽느라 긴 시간을 투자했지만 전혀 아깝지 않은, 멋진 만남의 순간순간들이었다.
삼한지에서는 대략적으로 3세대로 내용을 구분 지을 수 있겠는데, 1세대에서는 각 나라의 현재 상황과 주요 등장인물들의 아버지 세대 이야기가 나오고, 2세대에서는 이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기르며 힘겨루기 하는 내용이 진행된다. 3세대에서는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가 삼한을 통일하는 내용이 전개되며 주요 인물들의 아들들까지 대를 이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보면 되겠다. 또한 여기에 평행적으로 중국의 역사도 함께 보여주는데, 대륙이 통일되어서 수나라가 등장했고, 그 수나라가 단명왕조로 끝나고 당나라가 들어서면서 삼한에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끼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세대에서는 신라 진평왕과 용춘․서현이, 백제 무왕, 그리고 고구려 영양왕과 을지문덕 등이 주요인물이다. 이 시절에는 백제가 신라를 압도하는 힘으로 신라는 그저 힘없이 내내 당하고만 있었고, 고구려는 수나라의 수백만 대군과 맞닥뜨려서 무찌르는 놀라운 방패 역할을 해낸다. 특히 3권은 ‘살수대첩’으로 익히 알려진 여수대전으로 전체 내용을 할애하고 있는데, 명장 을지문덕의 지혜와 전술에 감탄을 넘어 찬탄에 이르게 된다.
2세대에서는 신라에 여제가 등장하여 국내외로 벅찬 시대를 살아냈고, 용춘의 아들 김춘추와 서현의 아들 김유신이 장성하여 나라의 큰 재목으로 활동하였다. 백제에서는 여전히 무왕이 신라의 국경을 넘나들며 큰 위협이 되었고, 고구려에서는 영양왕이 죽고 영류왕이 즉위하면서 대당정책의 변화를 맞이하였으나,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다시금 당나라와 대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부분에서는 김춘추의 외교술이 빛을 발했고, 김유신이 명장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십분 이해했으며, 비록 독재자였지만 당나라 앞에서 시종 당당했던 연개소문과 당태종의 한판승부가 큰 줄거리를 차지했다. 얽히고설킨 삼한의 외교관계는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로 탈바꿈하기도 하며, 국가 간의 약속이란 것이 때로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기도 하였다.
3세대에서는 신라의 김춘추가 백제 멸망 직후 사망하여 아들 법민(문무왕)이 뒤를 이었고, 백제 의자왕은 충신의 고언을 알아듣지 못하는 큰 실책과 함께 700년 사직을 무너뜨리는 고역을 맡게 되었다.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죽고 그 아들들의 분열과 함께 역시 700년 사직이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백제, 고구려 부흥군의 힘겨운 싸움과 신라의 분투가 이어졌고, 신라와 당나라의 오랜 전란 끝에 삼한 통일의 위업이 달성되는 장면들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대략 백여 년의 시간 동안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과 그 사건들의 중심인물들의 치열했던 삶이 묘사된 것인데, 그 속에서 독자들은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흠뻑 빠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 속에는 각 개인의 희로애락이 묻어 있으며, 국가와 임금을 향한 충성이, 사내로서의 기개와 우정 등등이 잘 묘사되어 있다. 세 나라가 각축을 벌이며 강역 싸움을 하는 장면들에서는 오늘날에도 무수히 볼 수 있는 외교 전쟁이 재현되는 듯했고, 이해관계에 따라서 국가 간의 의리와 신의가 지고 뜨는 것 역시 오늘날의 우리 사회와 다를 바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대가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을지문덕, 연개소문, 김유신, 흑치상지, 계백 등등 시대를 아울렀던 수많은 명장들이 동시대에 공존했으며 귀유, 강수, 성충 등의 책사들의 두뇌싸움도 가히 볼만하였다. 뿐이던가. 역사의 획을 그었던 여걸들의 출연도 무시할 수 없었다. 신라의 선덕․진덕 여왕, 백제로 시집간 선화공주, 당의 측천무후가 차지한 역사적 비중도 결코 가볍지 않다.
역사 책 속에서 삼한의 통일은 지극히 짧은 서술로 끝나버리지만, 책을 통해 만나본 역사적 과업의 완수는 무수히 많은 피를 흘린 희생 위에 치러진 값진 전쟁이었다. 당시 당나라의 존재는 오늘날 지구촌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위상만큼이나 크고도 두려운 존재였을 터인데, 자국 내 친당파마저도 자발적인 전투 참여로 이끌어낼 만큼 신라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백제 무왕 시절 때까지만 하더라도 내내 강토를 빼앗기고 그때마다 당나라에 원군을 요청할 만큼 비실댔던 신라가, 수양제의 수백만 대군도 물리치고 당태종마저도 망신살을 주어 쫓아낸 고구려마저도 젖히고 삼한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역사로 하여금 신라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을까. 그 까닭은 책을 통해서 만나본 신라인들을 보며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신라의 화랑도에서는 지배층의 앞선 헌신을 너무도 쉽게, 자주 만나볼 수가 있었다. 김춘추는 외교사절로서 목숨을 걸고 당나라를 오갔으며, 반굴과 관창은 아버지의 권고로 어린 목숨들을 초개처럼 던져 백제 결사대를 무너뜨렸다. 왕족들이 앞장서서 성곽 보수 공사장에서 땀을 흘렸고, 당나라에 반인질로 보내졌을 때에는 자국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제 몸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 결정적인 기억 한 가지 더! 바로 가야의 존재다. 이미 백 년 전에 가야를 병합한 신라는, 가야 유민과의 융합을 위해 몸살을 앓았었다. 망국의 유민으로서 가야인들이 겪었을 서러움은 말로 다 표현 못할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이다. 그러나 그들은 힘들었던 시간을 이겨낸 뒤 신라의 공신이 되었고, 마침내 역사의 주역이 되었다. 가야와의 힘겨웠던 융합의 시간을 거친 뒤, 신라는 백제 유민과 고구려 유민을 두 팔에 아우를 수 있는 내공을 지니게 된다. 한마디로 삼한의 통일은 ‘준비된’ 신라의 몫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백제와 고구려를 비교해 보면 어떨까? 스스로 무너지는 나라를 누구라도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백제 의자왕은 한때 ‘해동증자’라 불리던 총기를 잃어버렸고 충신의 간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위에서부터 무너진 백제의 적나라한 모습은, 나라가 망하게 생긴 결정적인 순간의 결사대가 불과 5천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한숨을 쉬게 만든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그 한 사람의 존재로 요동을 지켜낼 만큼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었지만, 그가 죽자마자 요동의 방어가 무너졌다는 것은 그가 자식농사만 실패했던 것이 아니라 후계자를 성실히 키워내지 못했음도 함께 증명해내는 것이었다.
흔히들 고구려가 통일을 이루었더라면, 만주의 드넓은 영토가 지금도 우리 것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보이곤 한다. 나 역시 그런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바람에 신라의 삼한 통일의 성공이 평가절하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당나라라는 외세를 끌어들이긴 했지만,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신라의 국세를 고려한다면, 그것은 ‘타협’이기 전에 ‘생존본능’이었다고 보아야 맞을 것이다. 그리고 당이라는 커다란 호랑이를 몰아내기 위해서 안으로 협동하고 단결했던 신라인들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로서도 크게 본받아야 할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가로서,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을 바라는 우리의 열정이 삼한을 통일하고자 했던 신라의 그 열망과 노력에 결코 부족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통일을 위해서 신라가 보여주었던 단결과 화합, 용서와 포용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누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스스로 이뤄내야 할 과업이라는 것, 남이 먼저가 아닌 내가 먼저 자발적인 사회 헌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것이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행복을 필연적으로 가져온다는 것을 이 책 ‘삼한지’는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아름답게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