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황옥 루트, 인도에서 가야까지 - 고고학자 김병모의 역사 추적 시리즈
김병모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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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전에도 김수로 왕비 허황옥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책에서도 가끔 보곤 했지만 그녀의 출신에 대해서 딱부러지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인도의 유사한 지명과 중국 지명을 같이 얘기했지만 그 시절 그녀의 이동 수단에 대해서 자신있게 말하지 못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거의 신화 시절의 이야기이기에 어느 정도 가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진실'성에 큰 점수를 부여하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역사적 진실과 사실성에 이만큼이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 크게 놀랐다.

저자는 자신의 검은 얼굴에 대한 의문점에서 이 길고 긴 여정의 시작을 울렸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시조 김수로왕과 허황옥 왕비.  허왕비는 아유타국에서 왔으며 보주태후라고 불렸다. 배를 타고 온 그녀가 왔다는 아유타국은 인도의 아요디아를 뜻하는 것이었다.  허면 2천년 전에 배를 타고 인도에서 우리나라 가야까지 갔다는 말인가.  저자는 그 이동 경로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지만 인도까지 찾아가서 아요디아를 직접 밟아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두 마리의 물고기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상징 표시를 곳곳에서 발견한다.  이 쌍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왜 동시에 발견되는 지를 추적하는 것이 이때부터 저자의 평생 숙제가 되고 만다.

인도에서 이렇다 할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 못한 저자는 허왕비가 '보주'태후라고 불렸다는 것에 집중한다.  보주라는 중국 지명을 찾아내고, 동시대에 있었던 반란 사건과 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개입됐다는 점을 알아냈을 때 저자는 만세를 외친다.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저자의 퍼즐들은 하나씩 하나씩 그 정체를 드러내며 그림을 완성시켜 나간다.  쌍어 상징은 아시리아에서 스키타이에게로, 다시 인도 간다라 지방에서 아요디아로, 그리고 중국 운남성에서 보주, 무창을 거쳐 한국의 가야로, 그리고 일본의 구마모토까지 전해지며 그 흔적을 남겼다.  곳에 따라서는 현재까지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남아있는 쌍어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는 그들의 신앙이었고 신념이었다. 신어로 추앙된 물고기 그림은 자신들을 보호해 주는 절대적 존재였으며 인류평화의 상징이었다.

또 왜국의 히미코 여왕이 어쩌면 가야의 허왕비의 딸이 아닐까 하는 가정도 매우 설득력 있게 들렸는데, 가야와 일본에서 전해지는 역사적 정황들이 기막히게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진심으로 갈망하면 온 우주가 자신을 도와준다고 했던가.  저자의 열망과 노력, 숙원 등은 세계 곳곳에서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또 운명처럼 도움의 손길이 되어 저자의 연구를 돕게 된다.  캐나다의 타밀학회의 회원이 보내준 이메일은 경이로운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스리랑카의 타밀 명칭이 한일 명칭과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를 저자는 가야인들이 한반도를 인도로, 일본 섬을 스리랑카 섬으로 감정이입시키는 대위법을 적용한 까닭이라고 보았다.  역시 설득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는 북방 기마 민족과의 연계성은 반가워하지만 남아시아 쪽에서 전파된 문화라는 말을 쓰면 어쩐지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다.  이는 왜곡된 순혈주의 신봉 현상으로서 우리 모두가 지양해야 할 부분이다.  이는 우리의 객관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실험과 탐구에 대한 도전을 방해하는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 사고로부터 자유로웠고, 또 호기심에서 시작했지만 그 호기심을 무시하지 않고 끊임없이 탐구하여 이토록 큰 결과물을 내놓은 저자에게 박수의 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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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8-03-16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6년인가 이분꼐 실제 저 체험담을 강의를 들으며 대단하다 했지요. 아주 재미났어요.

마노아 2008-03-16 22:10   좋아요 0 | URL
우와! 엄청 재미난 시간이었겠어요! 직접 들었다면 더 흥분되었을 테지요. 부러워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 - 광해군일기 - 경험의 함정에 빠진 군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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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광해군을 떠올리면 정조와 마찬가지로 늘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앞장 선다.  그들의 치세가 좀 더 오래 갈 수 있었더라면, 혹은 그들이 다른 신하들과 일을 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역사에 있어서 늘 의미 없어지는 IF가 따라오곤 한다.  그들의 다음 대에 왕이 된 사람들의 면면을 떠올리면 그 안타까움은 더 짙어진다. 그러나 어쩌랴.  그게 그들의 운명이었고 조선의 숙명이었으니...

광해군은 16년 동안 울분의 세자 시절을 보낸 만큼 '준비된' 임금이었다.  온 나라 곳곳을 그의 두 발로 안 다녀본 곳이 없고, 전쟁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백성의 삶을 알았으며, 쓸모 없는 명분보다 현실적인 실리를 더 추구했었던 인물이다.  실제로 대동법을 실시하고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짓게 하고, 무엇보다도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 해서 조선의 안녕을 지킨 것은 그가 아니면 해내기 힘든 과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따라오는 법.  그는 출발부터가 불안한 왕이었고, 그 불안정은 아버지 선조카 한껏 키워놓은 참이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누가 번다고... 아비 선조는 임금 체면도 지키지 못한 채 백성과 나라를 버리고 제 한 몸 살리기 바빴으나 광해군은 목숨을 걸고 분조를 이끌며 전쟁의 위기 속에서 조정의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비교체험 극과 극!) 자신과는 너무도 반대되었던 아들의 업적.  권력은 부자 사이에도 나누지 못한다고 했던가.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선조는 아들을 자신의 정적처럼 여기게 된다.  숱한 양위 소동으로 진을 다 빼놓고, 명나라가 조선을 향해 점점 더 강한 입김을 내뿜는 것을 막지는 못할 망정 그것을 이용하여 아들 가슴에 못 박기를 서슴지 않는다.



영창대군이 태어나고 광해군의 입지가 얼마나 난처해졌을 지는 상상이 간다.  하다 못해 선조가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죽으면서 only 영창대군을 부탁한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인네는 죽으면서까지 화근을 남겨두었다!  미련하기로는 인목대비도 마찬가지였다.  임금보다 9살이나 어린 새 엄마.  재산을 부정축재하는 데에 올인할 것이 아니라 영창대군이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도록 몸을 낮췄어야 했다. 광해군이 어린 이복 동생을 죽인 것을 잘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역사 속에서 왕권을 구축해 가는 가운데 그같은 일은 비일비재했다.  특별히 광해군만 욕먹을 사건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컴플렉스를 안고 있었던 광해군은, 왕권에 위협이 될만한 요소는 철저히 쓸어버리기를 원했다.  그리고 간교한 신하들은 왕의 그 심리를 제대로 이용해 먹었다.  광해군의 치세 동안 있었던 숱한 옥사들.  '역모'의 '역'자만 들려도, '모반'의 모자만 들려도 광해군은 바로 추국에 들어갔다.  왕은 의심이 많았고 소심했으며 사특한 이이첨을 너무 신뢰했다. 

저자의 허균에 대한 표현도 인상적이었다.  허균이 역모죄로 능지처참 된 것은 사실이지만, 흔히 허균을 이상론자로 묘사하면서 그의 역모는 남다르다고 평가해 왔다.  전부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역모 사건은 기존의 사건들과는 확실히 달랐으며, 마지막 진술도 받지 않고 서둘러 형을 집행하게 한 것은 그에게도 어떤 억울함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지만 소설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이이첨과 손잡고서 갖은 추태를 부린 것까지 미화시키지는 않는다.  기존의 사서와 구분되는 점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있는 그대로 표현해 주되 의문부호는 남겨두기.  이를테면 허준의 시침 거부 사건이 그랬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명의 허준은 선조가 죽을 당시 시침을 놓지 못한다고 해서 다른 이가 대신 침을 놓는 장면이 나온다.  세상에 그 허준이?  허준의 말년을 보여준 것도 미화된 드라마와는 비교된다.  그의 업적을 폄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과장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광해군에 대해서 가장 아쉬움으로 남는 장면은 무리한 궁궐 공사이다.  설령 그가 '재조지은'을 배신했다는 명분으로, 또 '폐모살제'의 명분으로 쫓겨났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에게 진정 훌륭한 군주였다고 한다면 역사는 그를 좀 더 후하게 평가했을 것인데, 임진왜란과 후금과의 전쟁 등으로 백성의 편에서 생각했던 광해군은 미신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켰고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말았다.  혹은 궁궐을 짓더라도 초기에 지었던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까지만 손을 댔더라면 나라의 위상을 세웠다.... 정도로 이해했을 터인데, 역시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했던 것이다.

이이첨을 위시한 대북파를 너무 일으켜 세운 나머지 왕권마저도 위협된다고 여긴 광해군.  그리하여 그 동안 외면했던 서인과 남인을 등용하기 시작하지만, 이미 그들은 그의 신하들이 아니었음을, 불행하게도 임금은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역모 고변이 들려왔을 때에도 한 귀로 흘려버리고, 결국 그 대가로 폐위되어 쫓겨나는 불운을 겪고 만다.  초기에 '역'자만 들려도 마구 오버하던 그때와 어쩌면 이다지도 다를까. 

오이디푸스 왕을 떠올리면, 항상 신탁에 대한 반감이 생긴다.  그때 그 아버지가 신탁을 믿지 않았더라면, 혹은 신탁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들 모두의 운명은 달라졌을 터인데... 하는 마음.

광해군이 미신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소신을 지켰더라면 하는 아쉬움.  아버지 선조가 물려준 악업의 힘이 크긴 하지만, 그것을 극복해내지 못한 광해군에게도 슬픈 실망이 깃든다.  그를 그토록 몰아친 시대의 힘도 야속하고......

연산과 마찬가지로 폐주로 몰려 슬프게 생을 마감한 광해군.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인조가 감히 '仁'자를 붙일 수 없는 진짜 패륜 임금이었다는 것이 죽은 그에게 혹여나 위안이 될 것인가.  그러나 어쩌랴.  그 모두는 조선의 손해고 불행인 것을.

다음 편 인조실록은 꽤나 속이 거북해져서 보게 될 듯하다.  조선의 여러 임금 중 내가 가장 싫어하는 임금이기 때문.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그 이야기는 기다리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처럼 승정원 일기도 이렇게 쉽고 재미나고 유익한 책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보다 훨씬 광대한 작업이 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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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Journey 2008-02-07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더 간절해지네요~
저희 아이에게는 좀 이른 것 같아 천천히 구입하려고 했는데, 제 욕심에 조만간 질러버릴 것 같은 예감이 ... ^^;

마노아 2008-02-07 19:00   좋아요 0 | URL
제 기억에 어린이용 조선왕조실록이 따로 나와 있을 거예요. 박시백씨 작품으로요~
찾아보니 만화 조선왕조실록이 있는데 알라딘은 품절이네요. 다른 곳은 있을 지 모르겠어요^^;;;

순오기 2008-02-08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권 구입했는데, 아직 민경이도 안 봤어요. 나는 님의 리뷰로 귀동냥이나 하고 있고요! ^^
곧 날 잡아서 봐야 할 일인데~~ 2월에도 힘들 듯해요!

마노아 2008-02-08 11:45   좋아요 0 | URL
인명사전 받으려고 가격 맞춰 주문했는데 인명사전은 심심해서 패스했어요. 나중에 심심할 때 보려구요.
뭐 봐야 할 책은 아직도 구만리지만 그냥 천천히 보려고 해요^^

스카이 2009-05-07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기억 나시려나 몰라요? 진짜 오랜만입니다..우연히 지난해 한권 구입했어요.. 아이가 역사 만화는 도통 읽으려 하지 않아서요..초등 5학년 말에 의하면 도통 재미가 없다나요..1년을 책꽂이에 꽂아 뒀더니 약 열흘전 쭉 읽더라구요..너무 잼있다고 시리즈로 사달라는데 생각 하고 있습니다 구매를요..휴 휴 한숨 나오네요..이번에 학교 도서 바자회때 강추 하렵니다..님의리뷰 도움 많았습니다.. 하지만 시리즈 다살려면 님의 책임 있어요 ..아참 이번 역시 4급봅니다.23일날요..

마노아 2013-07-27 16:04   좋아요 0 | URL
세상에, 몇 년이나 지나서 댓글을 보았네요. 죄송합니다. 그때 우리를 열광시켰던 조조록이 드디어 완성되었네요. 더 가열한 추천을 해보자구요.^^
 
조선 블로그 - 역사와의 새로운 접속 21세기에 조선을 블로깅하다
문명식 외 지음, 노대환 감수 / 생각과느낌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제목을 본 순간, 너무 참신해서 오히려 '상업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상업적이라는 게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내 선입견으로는 이 책의 '깊이'에 큰 신뢰를 담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이건 정말 생각도 못한 별천지가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서문에서 '불로구', '갑회'라는 단어를 보면서도 이 시대에 오늘날의 블로그와 카페와 비슷한 단어들이 있었네...라며 순진하게 넘어갔던 나는, 이게 모두 '픽션'이라는 것을 안 순간, 오히려 제대로 속았다는 생각에 뜻모를 희열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 거창한 서두는 웬 말인가?  다 이유가 있다.  이 책, 너무 즐겁다!

'편집'과 '기획'의 힘이 이렇게 셀 줄 몰랐다. 태조, 정도전, 태종, 세종, 조광조, 이순신, 광해군, 김육의 블로그가 조선사의 큰 축을 이루었고, 그 사이사이 양념처럼 양반 블로그, 농민 블로그, 상인 블로그가 끼어들어가 조선의 신분제도를 비롯, 그들의 생활상을 조명해 주었고, 또 그 사이사이 의병 카페, 실학 카페, 풍속화 카페가 들어가 있으면서 주제사와 미시사를 넘나들며 문화사도 같이 정리를 해주었다.

'블로그'와 '카페'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니, 우리가 날마다 접하는 바로 그 '소통'의 형식을 그대로 빌려온 것인데, 평소 무심코 보게 되는 그 프레임이 조선사를 뒤집어 쓰고 있으니 너무 재미난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블로거 중에서 가장 이웃 블로거가 많은 사람은 이순신도 아니고 세종도 아니고 바로 태조 이성계다. 무려 이웃 블로거가 583명이나 된다.  당시 '영웅'으로 급부상했던 그의 인기도 실감이 날 뿐아니라 한 나라를 세운 개국의 인물이라는 각성이 팍 드는 순간이다.  블로거의 주인장들은 자신의 카테고리에 맞게 글을 쓰는데 태조 이성계의 카테고리는 이렇다.

-우국충정
-개국 통신
-국가와 가족
-선조들 이야기
-최신 명 풍속

이들 카테고리 중에는 공지사항도 있고 이웃 공개 글도 있고, 자물쇠 채워진 비밀 글도 있다. 그리고 당연히 '댓글'도 등장한다.  댓글을 쓰는 사람들의 닉네임도 역사적 인물들의 성격을 반영하는 이름들인데, 이방원의 필명은 '하여가'이다. 이들은 댓글로 정책을 가지고 논쟁을 펼치다가 악플러가 등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저주' 댓글도 등장한다. '이 글을 본 사람은 모두 저주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대신 '목자위왕' 네 글자를 다른 곳에 두 번 올려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행운의 편지가 등장하는 것!  이런 형식들이 너무 파격적이어서 역사서로서의 순기능을 방해하지 않을까 고민이 될 것 같은데, 그 수위를 묘하게 잘 조절한다.  한마디로 기본 역사서에 충실하지만 표현은 '쉽게', '재밌게' 가자가 이 책의 주장이다. 실록의 내용이라고 해서 모두 믿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새겨진 '정치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 그럴 때면 어김 없이 댓글이 등장하면서 '속내'는 그게 아니지 않냐며 공방이 벌어진다.



또 [펌글]이 등장하면서 신문의 사설 형식을 빌린 논조가 등장하고, 한참 유행했던 패러디 그림이 기막힌 타이밍에 등장하기도 한다.  '조삼모사'가 대표적이다.

대쪽의 길을 걸은 김육 대감의 블로그에서는 그가 왜 대동법에 목숨을 걸었는지 역사적 상황과 현실적 이유가 설득력 있게 제공된다.  실학 카페에서는 중농학파와 중상학파의 주장이 어떻게 다른 지가 역시 댓글 공방을 통해서 쉽게 설명되어져 있고, 이 댓글이라는 것은 백년 뒤의 댓글도 같이 실리면서 정책이 어떻게 변화되어 있는 지도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풍속화 카페에서도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 윤두서, 조영석, 신사임당 등을 두리 비교해서 볼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빠'와 '까'가 등장하면서 이들 빠의 성향까지 분석하는 재미를 보여준다.  한참 유행했던 '~~~하는 법!'이런 타이틀의 신간 소개하는 패러디도 압권이었으며 표지는 신윤복 그림의 주인공이 노트북을 보면서 컴퓨터 쓰는 장면이 나오니 그야말로 재치와 유머 감각이 하늘을 찌른다.



책을 보면서 청소년들이 보면 즐겁고 재밌는 교육이 될 것 같아서 막 중학생이 되는 친구에게 선물을 주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보니 소장욕심이 생기는 거다.  그래서 보던 책은 내가 계속 갖고, 친구에게는 주문을 넣어버렸다.  좋은 책은 두루두루 함께 읽으면 이 아니 기쁜 일이겠는가!

그러나 옥의 티가 있으니, 연도 틀린 것이 두건 정도 있었고 오타도 두건 정도 있었다. 처음에 선물 줄 생각에 책에 표시를 안 해 둔 게 살짝 후회가 된다. 다시 보긴 좀 엄두가 안 나고...;;;;; 2쇄에서는 꼼꼼히 살펴서 오타가 수정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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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2-01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너무 가벼울 것 같아 손이 안가던데 내용이 괜찮다구요. 아이들 보기에도 괜찮다면 한번 봐야겟네요. ^^ 자료로는 쓸만할까요?

마노아 2008-02-01 02:00   좋아요 0 | URL
가벼운데 재밌어요. 전공자가 보기엔 솔직히 너무 쉽구요. 그래도 애들 보기에는 좋을 것 같아요. 전 무척 즐거웠어요^^ 도서관에 신청해 두면 좋을 것 같아요~

turnleft 2008-02-01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좋아요 좋아. 머리 식히면서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이 책 찜!!

마노아 2008-02-01 02:59   좋아요 0 | URL
가볍고, 즐겁게, 유익하게! 박자가 잘 맞는 책이었어요^^

하늘바람 2008-02-01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기획이 재미나네요

마노아 2008-02-01 10:40   좋아요 0 | URL
아이디어가 반짝였어요^^

라주미힌 2008-02-01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보고 이 책인줄 알았습니다 ㅋ ㅋ

마노아 2008-02-01 11:43   좋아요 0 | URL
저도 라주미힌님 이 책 리뷰 썼을 때 제목 보고 바로 알아봤어요^^ㅎㅎㅎ

순오기 2008-02-02 0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주, 민경이는 재미있다고 바로 읽었어요. 성주는 한강 7권째 읽느라 아직... 엄마도.^^
민경이가 컴에 독후감을 남겼는데, 날이 밝으면 올려야겠어요. ^^

마노아 2008-02-02 10:22   좋아요 0 | URL
어휴, 빠르기도 하여라. 역시 독서 매니아들이에요^^
 
소신에 목숨을 건 조선의 아웃사이더
노대환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주제사로의 접근은 흥미롭다.  통사에서 볼 수 있는 일관된 흐름은 부족할 수 있지만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묶어놓은 이야기 갈래들이 새롭거나 뜻밖일 경우가 많아서 신선함을 주기 때문이다.

'소신에 목숨을 건 조선의 아웃사이더'
-열 두 꼭지로 이루어진 이 책은 조선 시대에 비주류에 속했지만 자신만의 길을 가고자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열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 각자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일생을 바쳐 움직였지만, 그들의 행보 모두를 옳다 혹은 바람직하다고 몰아 말하기는 어려웠다.  호불호, 혹은 과오에 상관 없이 그들은 '소신'을 지킨 사람일 뿐이다.  저자의 시각은 그들이 신념을 바친 소명에 집중할 뿐 객관적인 판단을 요구하지 않는다.

조선은 성리학 사회였고 양반 사대부가 주체가 된 지극히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그 안에서 성리학 사회의 주류에 서지 않고, 임금이나 명망 있는 사대부의 판단에 반기를 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500년을 넘게 유지해 온 그 사회가 아무리 닫힌 사회였다고는 하나 체제에 반항하고 다른 길을 가고자 한 이가 없을 리가 없었다.  정조의 문체반정에 반기를 들었던 '이옥' 역시 그런 인물이었다.  학자 군주였던 정조가 과연 사상을 탄압하고자 한 의도로만 '문체반정'을 일으켰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 됐든 그는 패관소품을 인정하지 않았고 문장 또한 바꿀 것을 명했다.  그러한 때에 자신의 문장을 고수한 이옥은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운아이기도 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의 인물이었다면 그의 자유로운 형식의 문장은 오히려 독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이언진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제 문장에 큰 자부심을 가졌던 그가 박지원의 성의 없는 반응에 울화가 치민 것은 당연한 일.  더군다나 중인 출신이었던 그가 양반 사대부들에게서도 인정 받았다고 자부했는데 그것이 틀어졌다고 생각하니 제 성미를 이기지 못한 것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본시 유학의 큰 덕목은 수신인데 그는 자부심이 지나쳐 마음 수양은 덜 채운 듯하다.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명을 당길 만큼 분을 품을 일은 아니었다고 본다.(고생을 덜한 게다!)  아무튼, 죽어서 오히려 그 문장력에 칭송을 받았으니 억울함이 조금은 가셨을 지도 모를 일이다.

죽은 아내에게 수십 편의 글을 남긴 심노숭과 손자의 육아일기를 남긴 이문건은 이 책의 구성원 중 가장 독특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글을 썼던 시대 배경이 바로 그 '조선'이기 때문이다.  연애편지가 미덕인 시절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아내'에게 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남사스러웠던 때가 아닌가.  부인과의 이별을 친구와의 이별만도 못하다고 여기던 그때에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하나 둘도 아니고 수십 편의 글을 남긴 심노숭의 마음이 애잔하고, 그 마음을 숨기지 않고 표현한 그 솔직함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슬픔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이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며 우울증을 감소시킨다는 학계 보고가 있는데, 심노숭같은 자세로 살았다면 조선 선비들이 좀 더 오래 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문건은 가족 복이 없는 사람이었다.  낳아놓은 자식들이 요절하기 일쑤였고, 병에 걸려 장애가 있는 경우도 수차례였으니까. 그러니 그가 손자에게 쏟은 정성이 어느 정도였을 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비록 손자가 그의 뜻에 맞게 자라주지 않았고, 기대에도 전혀 부응하지 못했지만.  이문건은 아들도, 손자도 모두 매를 들어 키웠지만 아들 때만큼 독하게는 못한 것이 역시 손주 사랑이란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엄마에게 자식 키울 때랑 손주 볼 때랑 언제가 더 사랑스럽냐고 질문한 적이 있는데 손주 이쁜 것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하셨다.  이문건도 분명 그랬으리라.

친구의 죽음에 과거를 포기한 박지원, 스승의 죽음에 평생을 은둔한 양산보.  이들은 사람에 대한 의리를 자신의 출세와 맞바꾼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들 모두가 생계위험형 가문은 아니었다라는 전제가 있긴 했지만, 과거를 통한 출사, 그리고 출세를 일생의 목표로 삼던 그 시절에 이런 각오는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소쇄원에 가게 되면 아무래도 감회가 남다를 듯 싶다.

행동파 유학자 정인홍, 북벌에 일생을 바쳤던 윤휴, 경세에 목숨을 걸었던 김병욱, 천주교에 맞서 싸운 김치진 등은 모두 제 소신을 발로 뛰면서 설파했던 인물들이다.  그들의 일생이 결코 편치 않았고, 영예를 보았던 적은 있어도 황혼이 불운하기도 했지만 결코 제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소신파들이다.  다른 인물들은 그래도 이름 석자 역사책에 종종 등장하는 인물들이었지만 김치진은 꽤 낯설었는데, 잠상으로 몰려 처형까지 당한 인물이어서 더 애처롭기까지 했다.

'대장부의 삶'을 읽었을 때에도 느꼈지만, 소품을 이용한 책 디자인이 책의 맛깔스러움과 고급스러움에 꽤 일조를 한다.  사진 자료는 꼭 본문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도 한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는데 흔치 않은 것들도 있어서 눈이 호강을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본문의 내용은 평이하게 읽었는데, 소재로 잡은 주인공의 약력 소개와 '더 읽어보기'에 소개되는 뒷이야기 혹은 배경 이야기가 훨씬 더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아내에게 지극했던 추사 김정희, 중인 출신 문인들, 커닝도 불사한 조선 후기 과거 시험장 풍경, <구운몽>은 정말 한글로 지어졌을까? 등등.

다소 아쉬운 점은, 책의 내용을 잘 배치하면 조선사 전체를 아우르는 통사의 진행도 가능했을 터인데, 시간 순서대로 기술하지 않은 점이다.  그랬더라면 책을 읽으면서 조선의 시작과 끝이 같이 진행되었을 텐데 말이다. 

주제사로 접근했지만 통사의 장점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책이다.  분절된 내용들이기 때문에 꼭 이어서 한꺼번에 읽을 필요없이 쉬엄쉬엄 읽으면 더 좋을 듯하다.  실제로 나 역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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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1-20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참 끌리네요. 요즘도 역시 소신있는 사람들이 비주류로 살고 있으니...
여름방학에 광주오세요. 제가 소쇄원 제대로 안내할게요. 소쇄원은 4계절 모두 가 봤지만, 역시 정원은 푸르름이 한창일때가 제맛일 듯해요. 담양 메타세쿼이아길도 같이 걸어보고요~~~ 좋은 사람과 함께 오면 더 좋아요! ^^

마노아 2008-01-19 21:39   좋아요 0 | URL
대대로 소신 있는 사람들은 비주류로 살아왔던 것 같아요. 역사가 그렇게 증명하네요.
와, 광주 놀러가면 함께 가볼 곳이 많군요. 벌써 콩닥콩닥 가슴이 뛰어요.
여름방학의 멋진 여행을 기다릴게요. 좋은 사람을 빨리 만들어야 하는데 것참..;;;;;;

순오기 2008-01-20 12:27   좋아요 0 | URL
어제 한국사 전(내가 유일하게 챙겨보는 TV프로)에 송강 정철 나오더군요. 송강정과 식영정, 가사문학관등 소쇄원과 같이 둘러볼 수 있어요. 답사전문가 모시고 제대로 안내할게요. 한여름은 너무 더울려나? 그래도 방학이라야 맘 놓고 움직일 수 있겠죠~~~~ '광주이벤트'추진해 볼까~~ 내가 자칭 이벤트 아지매인데.... ^^

마노아 2008-01-20 12:47   좋아요 0 | URL
광주 이벤트, 근사해요^^ 광주에서 엠티를 계획하는 겁니다. 여름맞이 알라딘 배 답사 모임^^
한국사전도 챙겨봐야겠어요. 유익하단 소리 많이 들었는데... ^^
 
삼한지 - 전10권 세트 김정산 삼한지
김정산 지음 / 예담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뿌듯한 독서활동이었다.  10권이나 되는 긴 분량 속에서 한 시대와 다음 시대의 세대교체를 보았고, 역사 속에서 한 획을 그었던 수많은 인물들의 삶을 엿보았으며,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들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자웅을 겨루며 다투었던 시기는 우리가 고대사로 분류하는 까마득한 옛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먼 과거가 아닌 바로 우리 옆에서 숨을 쉬는 현실의 이야기처럼 책을 통해 다가왔다.  책을 읽느라 긴 시간을 투자했지만 전혀 아깝지 않은, 멋진 만남의 순간순간들이었다.


  삼한지에서는 대략적으로 3세대로 내용을 구분 지을 수 있겠는데, 1세대에서는 각 나라의 현재 상황과 주요 등장인물들의 아버지 세대 이야기가 나오고, 2세대에서는 이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기르며 힘겨루기 하는 내용이 진행된다.  3세대에서는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가 삼한을 통일하는 내용이 전개되며 주요 인물들의 아들들까지 대를 이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보면 되겠다.  또한 여기에 평행적으로 중국의 역사도 함께 보여주는데, 대륙이 통일되어서 수나라가 등장했고, 그 수나라가 단명왕조로 끝나고 당나라가 들어서면서 삼한에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끼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세대에서는 신라 진평왕과 용춘․서현이, 백제 무왕, 그리고 고구려 영양왕과 을지문덕 등이 주요인물이다.  이 시절에는 백제가 신라를 압도하는 힘으로 신라는 그저 힘없이 내내 당하고만 있었고, 고구려는 수나라의 수백만 대군과 맞닥뜨려서 무찌르는 놀라운 방패 역할을 해낸다.  특히 3권은 ‘살수대첩’으로 익히 알려진 여수대전으로 전체 내용을 할애하고 있는데, 명장 을지문덕의 지혜와 전술에 감탄을 넘어 찬탄에 이르게 된다. 

 

  2세대에서는 신라에 여제가 등장하여 국내외로 벅찬 시대를 살아냈고, 용춘의 아들 김춘추와 서현의 아들 김유신이 장성하여 나라의 큰 재목으로 활동하였다.  백제에서는 여전히 무왕이 신라의 국경을 넘나들며 큰 위협이 되었고, 고구려에서는 영양왕이 죽고 영류왕이 즉위하면서 대당정책의 변화를 맞이하였으나,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다시금 당나라와 대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부분에서는 김춘추의 외교술이 빛을 발했고, 김유신이 명장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십분 이해했으며, 비록 독재자였지만 당나라 앞에서 시종 당당했던 연개소문과 당태종의 한판승부가 큰 줄거리를 차지했다.  얽히고설킨 삼한의 외교관계는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로 탈바꿈하기도 하며, 국가 간의 약속이란 것이 때로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기도 하였다. 


  3세대에서는 신라의 김춘추가 백제 멸망 직후 사망하여 아들 법민(문무왕)이 뒤를 이었고, 백제 의자왕은 충신의 고언을 알아듣지 못하는 큰 실책과 함께 700년 사직을 무너뜨리는 고역을 맡게 되었다.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죽고 그 아들들의 분열과 함께 역시 700년 사직이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백제, 고구려 부흥군의 힘겨운 싸움과 신라의 분투가 이어졌고, 신라와 당나라의 오랜 전란 끝에 삼한 통일의 위업이 달성되는 장면들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대략 백여 년의 시간 동안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과 그 사건들의 중심인물들의 치열했던 삶이 묘사된 것인데, 그 속에서 독자들은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흠뻑 빠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 속에는 각 개인의 희로애락이 묻어 있으며, 국가와 임금을 향한 충성이, 사내로서의 기개와 우정 등등이 잘 묘사되어 있다.  세 나라가 각축을 벌이며 강역 싸움을 하는 장면들에서는 오늘날에도 무수히 볼 수 있는 외교 전쟁이 재현되는 듯했고, 이해관계에 따라서 국가 간의 의리와 신의가 지고 뜨는 것 역시 오늘날의 우리 사회와 다를 바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대가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을지문덕, 연개소문, 김유신, 흑치상지, 계백 등등 시대를 아울렀던 수많은 명장들이 동시대에 공존했으며 귀유, 강수, 성충 등의 책사들의 두뇌싸움도 가히 볼만하였다.  뿐이던가.  역사의 획을 그었던 여걸들의 출연도 무시할 수 없었다.  신라의 선덕․진덕 여왕, 백제로 시집간 선화공주, 당의 측천무후가 차지한 역사적 비중도 결코 가볍지 않다.


  역사 책 속에서 삼한의 통일은 지극히 짧은 서술로 끝나버리지만, 책을 통해 만나본 역사적 과업의 완수는 무수히 많은 피를 흘린 희생 위에 치러진 값진 전쟁이었다.  당시 당나라의 존재는 오늘날 지구촌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위상만큼이나 크고도 두려운 존재였을 터인데, 자국 내 친당파마저도 자발적인 전투 참여로 이끌어낼 만큼 신라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백제 무왕 시절 때까지만 하더라도 내내 강토를 빼앗기고 그때마다 당나라에 원군을 요청할 만큼 비실댔던 신라가, 수양제의 수백만 대군도 물리치고 당태종마저도 망신살을 주어 쫓아낸 고구려마저도 젖히고 삼한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역사로 하여금 신라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을까.  그 까닭은 책을 통해서 만나본 신라인들을 보며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신라의 화랑도에서는 지배층의 앞선 헌신을 너무도 쉽게, 자주 만나볼 수가 있었다.  김춘추는 외교사절로서 목숨을 걸고 당나라를 오갔으며, 반굴과 관창은 아버지의 권고로 어린 목숨들을 초개처럼 던져 백제 결사대를 무너뜨렸다.  왕족들이 앞장서서 성곽 보수 공사장에서 땀을 흘렸고, 당나라에 반인질로 보내졌을 때에는 자국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제 몸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 결정적인 기억 한 가지 더!  바로 가야의 존재다.  이미 백 년 전에 가야를 병합한 신라는, 가야 유민과의 융합을 위해 몸살을 앓았었다.  망국의 유민으로서 가야인들이 겪었을 서러움은 말로 다 표현 못할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이다.  그러나 그들은 힘들었던 시간을 이겨낸 뒤 신라의 공신이 되었고, 마침내 역사의 주역이 되었다.  가야와의 힘겨웠던 융합의 시간을 거친 뒤, 신라는 백제 유민과 고구려 유민을 두 팔에 아우를 수 있는 내공을 지니게 된다.  한마디로 삼한의 통일은 ‘준비된’ 신라의 몫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백제와 고구려를 비교해 보면 어떨까?  스스로 무너지는 나라를 누구라도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백제 의자왕은 한때 ‘해동증자’라 불리던 총기를 잃어버렸고 충신의 간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위에서부터 무너진 백제의 적나라한 모습은, 나라가 망하게 생긴 결정적인 순간의 결사대가 불과 5천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한숨을 쉬게 만든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그 한 사람의 존재로 요동을 지켜낼 만큼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었지만, 그가 죽자마자 요동의 방어가 무너졌다는 것은 그가 자식농사만 실패했던 것이 아니라 후계자를 성실히 키워내지 못했음도 함께 증명해내는 것이었다. 

  흔히들 고구려가 통일을 이루었더라면, 만주의 드넓은 영토가 지금도 우리 것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보이곤 한다.  나 역시 그런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바람에 신라의 삼한 통일의 성공이 평가절하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당나라라는 외세를 끌어들이긴 했지만,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신라의 국세를 고려한다면, 그것은 ‘타협’이기 전에 ‘생존본능’이었다고 보아야 맞을 것이다.  그리고 당이라는 커다란 호랑이를 몰아내기 위해서 안으로 협동하고 단결했던 신라인들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로서도 크게 본받아야 할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가로서,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을 바라는 우리의 열정이 삼한을 통일하고자 했던 신라의 그 열망과 노력에 결코 부족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통일을 위해서 신라가 보여주었던 단결과 화합, 용서와 포용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누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스스로 이뤄내야 할 과업이라는 것, 남이 먼저가 아닌 내가 먼저 자발적인 사회 헌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것이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행복을 필연적으로 가져온다는 것을 이 책 ‘삼한지’는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아름답게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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