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1권
굽시니스트 지음 / 애니북스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책이 만화의 형식으로 출간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그런 책은 어린이용이라도 가급적 보려고 한다. 물론, 이 책은 어린이용은 아니다. ^^ 

나로서는 상당히 낯선 형태의 책이었다. '본격'이란 단어가 이렇게 웃기게 들릴 줄이야. 디씨 인사이드에서 굽시니스트님이 어떤 분인지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겠다. 이 분, 제대로 오덕후시다! 게다가 패러디의 거장이랄까! 

그러니까 대략 이런 분위기다.  



미술학도가 되고 싶었던 히틀러의 패러디다. 소녀물을 그리는 오덕후 스타일의 히틀러라니, 이건 정말 발상 자체가 차원이 너무 다르지 않은가! 이렇게 심각한 인물도 얼마든지 희화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그와 비슷한 여타 다른 독재자들의 운명(?)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패러디로 점철된 내용들이 쭈우욱 진행되고, 한 챕터가 끝나면 인용한 패러디의 원작이 무엇인지 출처를 밝히고 있다. 내가 아는 작품도 있지만 모르는 작품들도 많다. 대강 알고 있는 나도 이 정도로 웃으면서 봤다면, 인용 작품의 용도(?)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더 쓰디쓴 웃음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웃긴닫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이를 테면 이런 거다. 



프랑스의 '마지노선'을 이야기하면서 등장한 마음의 소리 패러디다. 못 오를 나무를 쳐다볼 게 아니라 돌아서 가면 된다는 이야기.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그 어머어마했던 마지노선에 대한 제대로 된 풍자가 아닐까.  

인터넷 용어를 남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데, 그 문체만 보고 있어도 절로 웃기다. 물론, 그런 점 때문에 이 책을 읽고 즐길 수 있는 독자는 좀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역사적 진실까지 왜곡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뜻밖에도(?) 역사 공부를 쫌! 하신 분이다. 하핫! 



거의 2미터에 육박하는 키를 가진 드골 준장. 그의 큰 키를 우습게 표현한 대목이다. 그 큰 키를 유용하게 써보라고 했더니 등장한 저 풍선 인형. 아하하핫, 울지 못해 웃는다.  

그리고 나를 무한정 웃게 했던 이 씬! 



내가 참 좋아하는 최종병기 그녀의 명 장면 패러디다. 제목도 제대로 비껴갔다. '최종병신 괴링' 

이런 모습이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저 발그레한 표정. 원작의 그 심각한 장면이 이렇게 변신할 수 있다니 놀랍고도 감탄스러울 뿐이다.  



이 장면은 좀 더 유명하니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듯하다. 바로 데스 노트의 L을 패러디한 것이다.  

스탈린이 히틀러의 배신을 미리 짐작하지 않았을까 하는 대목. 원작에서 엘은 라이토가 키라라는 것을 확신한 채로 죽는다. 바로 그 장면의 눈이 흐려지는 모습을 스탈린에게 접목시켰다. 놀라운 조화(?)랄까.  

패러디에 원작 소개만 남기면 진짜 진실이 잘못 해석될 수 있으니, 매 장마다 실제 이야기도 같이 적어준다. 그러니까 패러디로 한 번 웃고, 나를 웃긴 원작이 무엇인지 한 번 확인하고, 그리고 역사 속 실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3단계의 과정을 거치면서 진행된다. 그리고 마지막 씬. 뒷 권을 기대하게 만드는 그 묘미라니! 



극적으로 살아난 볼로쟈와 마리아 부부가 다시 가진 아기 이름은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러시아의 푸틴이다. 우연과 필연이 겹치고 반복되는 역사의 현장을 강조해서 보여준 대목이다.  

그리고 맨 뒷장 역시 우리에게 익숙한 '예고편' 



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이름, 지명, 사건들... 그것들이 단지 검은 바탕 위에 하얀 글씨로 정렬해 있을 뿐인데, 무규칙 속에서 일정한 패턴과 흐름을 보여주는 '디자인'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난 이 장면을 보면서 뒷권 내용에 대한 더 강렬한 갈망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패러디와 코믹으로 포장이 된 2차 세계대전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어찌 짐작했을까. 코드가 안 맞는 사람은 거부감이 들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반가운 시도였다. 작가가 주류의 길을 걸은 역사가가 아닌 덕분에(!) 조금 더 다른 접근, 시도, 해석, 아이디어가 보인다. 작가의 역사 공부가 계속 진행되는 한 이런 시도는 다른 방향으로 더 진전될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한국전쟁, 베트남전, 그리고 무수한.... 꼭 전쟁사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강철의 연금술사가 궁금해져 버렸으니, 다른 장르, 다른 책으로의 전염(?)도 가능한 책 전도사가 되니 그도 바람직한 노릇일 것이다.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은 부분은 또 담아둘 수 있으니 역시나 고마운 책이다.  

애니북스에서 나온 책들이 굉장히 마음에 들곤 하는 요즘이다. 그런데 이 책, 새 책 냄새가 좀 많이 난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석유 냄새 같은 느낌? 이 책의 소재와도 좀 많이 어울리긴 한다. 

하여간 이 책, 오덕후가 만든 2차세계대전 야사 같은 느낌이다. 반갑고 즐거운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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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1-12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서점에서 보고 산다는걸 깜빡했어요. 재밌겠네요. http://homa.egloos.com/ 여기가 굽시니스트 블로그에요.

마노아 2009-01-13 12:30   좋아요 0 | URL
옷,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놀러가볼게요. 재밌을 것 같아요. ^^

아영엄마 2009-01-21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이 리뷰가 이번에 리뷰대회에서 [경영/만화/자기계발/실용/여행]분야에서 일등하셨네요.
그 외에 다른 책 리뷰들도 선정되셨고.. 왕~ 축하해요!!

마노아 2009-01-21 22:24   좋아요 0 | URL
으하하핫, 아영엄마님! 축하 감사해요^^
제가 보기엔 이 책에 다른 리뷰가 없었던 게 아닐까요ㅜㅜ
그래도 기뻐요. 유후~!

순오기 2009-01-22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축하해요~ 리뷰 읽으러 들어왔어요.^^

마노아 2009-01-22 00:49   좋아요 0 | URL
헤헷, 감사해요. ^^
아무래도 저는 부전승(?) 같긴 하지만 그래도 행운이지요. ^^

희망찬샘 2009-01-22 0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었군요. 마노아님은 글도 잘 쓰시고, 또 아주 많이많이 쓰시니 받을 결과를 받으신 거지요. 다시 한 번 더 축하드려요.

마노아 2009-01-22 11:14   좋아요 0 | URL
하핫, 감사합니다~ 리뷰대회 때문에 산 책이 상금을 훨씬~ 넘어요. 전 밑졌어요. ㅋㅋㅋ
 
고우영 십팔사략 세트 - 전10권
고우영 지음 / 애니북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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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고우영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어이쿠... 우리 만화계에 큰 별 하나가 져버렸네...하며 안타까웠드랬다. 그래도 그때는 그냥 고인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보니 우리가 잃은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내가 좋아하는 '역사 만화'의 일인자이신데 말이다.

지난 5월에 막 독립한 지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두꺼운 프레임의 목재 책장에 이 책 십팔사략이 단정하게 꽂혀 있는 모습이 참 부러웠었다. 친구가 빌려달라고 해서 거절했다는 얘기를 들으며, 나도 나중에 빌려달라고 하지 말고 사서 봐야겠다.... 생각했었다.

그리고 8월 초에 보충수업을 하게 되면서 7월에 이 책이 급하게 필요해졌다. 많은 고민을 하다가 인터공원에서 구입을 한 게 못내 아쉬웠지만, 가격 차이가 너무 심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주문 이틀 뒤 알라딘에서 새로 적립금이 5만원 생길 줄 내가 어찌 알았겠냔 말이다.(>_<)

고우영 화백의 '오백년'은 좀 재미 없게 읽은 편이었다. 역사 만화를 좋아하지만, 그랬다카더라~식의 야사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야사에도 민심이 반영되어 있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역사적 진실이 분명히 녹아 있지만, 진실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옛 이야기에서 야사를 먼저 접해버리면 그게 정설처럼 느껴져서 팩트를 읽어내는 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팔사략을 읽을 때 원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불안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기우였지만.

정사도 야사처럼 얘기하고, 야사도 정사처럼 얘기하는 재주. 그게 고우영 작가의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겠다. 해학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이게 작가의 유머인지 정말 그런 이야기가 전해졌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다. 때문에 다른 책을 겸해서 같이 볼 수밖에 없었는데 뜻밖에도 정말 그렇게 전해져왔기 때문인 이유가 많았다.

원전이 있는 책을 만화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작가의 주관적인 판단이나 느낌은 별로 실려 있지 않다. 그러나 워낙 쉽고 재밌게 진행을 시켰기 때문에 '전체관람가'로 아무 문제가 없고 독자라면 저마다의 느낌과 판단이 스스로 세워질 것이다.

교과서적인 진행으로는 통일 왕조에 대한 설명이 집중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이 책은 분열 시기에도 꼼꼼하게 페이지를 할애했다. 한 두 해도 아니고 수백 년에 걸쳐진 분열기를 겪었는데 당연한 얘기다. 텍스트의 정밀함에 있어서는 진나라까지의 이야기가 더 압도적이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사마천의 사기가 워낙 뛰어난 까닭이 아니었을까?

작품은 애석하게도 남송시대까지만을 다루고 있다. 원본 십팔사략의 책이 거기까지였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 후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의 이야기도 이렇게 재밌게, 가깝게 다가가고 싶은데 마땅한 책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앞서 중고샵에서 건진 고우영 삼국지도 조만간 봐야겠고, 일지매도 궁금한데 아까 그 지인이 샀다니 그건 빌려봐야겠다. (난 빌려준다고 했다. 푸핫!)

두꺼운 케이스도 있는데, 책을 펼쳐보다 보면 아무래도 부피가 좀 커지는 경향이 있어서 현재 10권 중 9권만 집어놓고 마지막 1권은 집어넣지도 못했다. 이럴 수가! 좀 더 힘(!)을 쏟아야겠다.

그러고 보니 고우영 화백 전시회도 지금 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자료 좀 찾아봐야겠다.

자료 찾아보고 오는 길!(리뷰 쓰는 데에는 접기 기능이 없구나...;;;;;)

아르코미술관 Arko Art Center

관람시간
화요일 - 일요일 ㅣ 11:00 am - 20:00 pm
월요일 ㅣ 휴관

 



지하철 4호선 혜화역하차 2번출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마로니에공원 쪽)
예술극장 유료주차장
(주차장이 협소하므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주세요)

입장권

2,000원 ㅣ 일반, 19세 - 64세
1,000원 ㅣ 할인, 18세 이하
50% 할인 ㅣ 20인 이상의 단체
무료관람 ㅣ
어린이, 6세 이하
노인, 65세 이상
장애인, 국가유공자

입장권은 전시별로 달라질 수 있으니, 전시별 안내를 참고해 주세요.

도슨트 관람안내

주중 ㅣ 오후 2시, 4시 (2회)
주말 ㅣ 오후 2시, 4시, 6시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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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8-08-14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몇살부터 열독 가능할까요. 어린애들도 되나요? 예컨대 초등 저학년? ^^;;;

마노아 2008-08-14 16:34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아이들 보는 만화와 달리 그림이 작고 글씨도 좀 작은 편이에요. 내용은 이해하기 쉬운데 글이 많다고 싫어하지 않을까 싶네요. 초등 고학년은 무리가 없을 듯하고, 저학년은 책읽기를 좋아하는 아이라면 괜찮을 듯 싶어요.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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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몽골비사'라는 책을 꺼내보았다. 엄청 두꺼웠다. 목차만 대략 살펴보고는 우리나라의 '용비어천가' 비스무리 하지 않을까 지레 짐작했었다. 물론 나는 지금도 몽골비사를 읽어보지 못했고 용비어천가도 1차사료로 접해보진 못했다. 그럼에도, 두 책은 무척 다를거란 짐작을 또 다시 감히 해본다.  이 책,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란 책을 접한 이유로 말이다.

몽골인들에게는 우상과 다름 없는 이름이었다. 지금도 너무 사랑 받고, 존경 받고, 추앙되는 이름. 그러나 역사 속에서는 꽤 오랫동안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이름이기도 했다. 특히 유럽 지역에서. 헌데 이 책의 저자인 인류학자 잭 웨더포드는 그가 잠들었던 유럽을 깨웠다고 말했다.  어떻게?

시대사를 공부하게 되면, 중세까지는 동양의 역사가 압도적으로 서양의 역사를... 아니, 바꿔 말해보자.  동양의 살림살이가 서양의 살림살이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윤택했었다. 여러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땅의 기름짐이 다르고 식생활이 다르고 문화의 차이가 있다.  그러던 것이 근세로 넘어가면서 역전된다.  그 필연적 까닭을 '결핍에의 욕구'라고 생각했다. 부족했기 때문에 갖기를 원했고, 갖기를 원해서 찾아 헤맸고, 갈 수 없기에 돌아서 갔고, 그리고 정복했다.  대항해의 시대는 그렇게 열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윤택했던 땅덩어리는 늘 '중국'이라는 나라로 대표되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중국' 혼자만의 역할이었을까? 다시 생각하게 해 본다. 그 사람, 칭기스 칸과 그 후예가...

지금도 그렇지만 그가 살았던 그 시대에도 몽골인들은 유목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자연환경을 갖고 있었다.  칭기스 칸의 아버지가 그의 어머니를 납치해서 혼인했던 것처럼, 칭기스 칸도 부인을 약탈당했다가 찾아온 이력이 있다. 호전적인 성격 탓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방법 자체가 약탈이었던, 그래서 싸움이 벌어지면 가장 힘센 남자가 가장 튼튼한 말을 타고 제일 먼저 도망을 쳐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던 삶을 살고 있었다.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앞서서 먼저 빼앗고, 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끝없이 싸워야 했던 사내 칭기스 칸. 그가 덜 핍박 받고, 덜 고단하고, 덜 가난한 삶을 살았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많은 부분 달라졌을 것이다.  있을 수 없는 가정 '만약에'를 허락한다면.

전쟁사를 살펴 보면 감탄이 나오는 이야기들이 참으로 많다. 카르타고의 한니발, 로마의 카이사르, 가까이에는 조선의 이순신까지.  그런데 차지한 땅의 단순 면적을 비교한다면 그 누구도 칭기스 칸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가 훌륭한 전략가이기도 했지만 몽골인의 태생이 전사의, 전사를 위한, 전사에 의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다. 비상식량을 상비하고 있으며 날 것으로도 식용이 가능했고, 보급병을 데리고 다니지도 않았다. 그들의 가볍고 날랜 말을 철갑장비를 두른 중세의 무사를 태운 유럽의 살찐 말이 감당해 낼 수 없었고, 그들의 강력한 활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어쩌면, 칭기스 칸 자신도 자신이 구축한 땅이 그토록 넓어질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다만 멈출 길이 없어서, 멈출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그렇게 달렸을 지도 모르겠다. 그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단순히 '욕심' 때문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의 아들, 그리고 손자 대에 이르면 또 달라지지만 적어도 그가 살아있는 동안의 발자취는 그러했을 거라고 느껴진다.

그는 위대한 전략가였고 또 타고난 싸움꾼이었고 보기 드문 경영자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의 마인드를 아들들이 함께 나눠갖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제국은 분열되었고 그들은 칸의 자리를 두고서 서로 싸웠다.  몽골의 흔적을 전 세계 곳곳에 뿌렸지만 각각의 '칸국'으로 갈리어 그들은 따로 또 같이 성장한다.  그들은 가장 앞서가고 있던 무슬림들의 땅을 철저히 밟아버렸고, 오랫동안 공을 들였던 중국 땅을 삼켰다. 그러나 가져갈 게 별로 없었던, 그래서 탐나지 않았던 유럽 땅은 방치했다. 칸의 죽음으로 비어버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둘러 초원으로 돌아가야 했던 기막힌 우연도 물론 한몫을 해냈다.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그들의 존재가 유럽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그들은 두려워했고 동시에 혐오했다. 자신들보다 훨씬 관용을 베풀었고 잔인하지 않았지만 몽골의 존재는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몽골을 이야기한 여러 저작물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공포가 얼마나 극에 달해 있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쿠빌라이 칸은 칭기스 칸의 손자다.  그는 할아버지의 기질을 가장 닮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할아버지의 제국 경영 능력은 가장 빼닮은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그 넓은 제국을 달리지 않았지만 제국과 제국, 문명과 문명 사이의 소통의 장을 열었다.  그의 나라는 배타 대신 국제적인 감각을 갖고 있었고, 법을 집행함에 있어선 관용을 앞세웠고, 경제 관념에 있어선 합리성을 최선으로 여겼다.  그의 제국을 보고 감탄한 흔적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참 독특하긴 하다.  여러 정복왕조가 그 땅을 넘보았고 또 차지했지만 끝내 살아남지는 못했다. 철저히 한화되어서 지배하다가 사라지기도 하였고, 철저히 거리를 두다가 또 금세 밀려나기도 하였다.  몽골의 원 왕조는 두 가지를 다 거친 케이스로 보인다.  그렇게 대단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백년을 지배하고는 다시 초원으로 밀려난 몽골족.  그것이 단순히 한화를 거부한 까닭이라고 알아왔는데 이 책에선 더 흥미롭고 더 설득력 있는 데이타를 제공한다. 바로, '흑사병'의 유행이다.  유럽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어마어마한 사망자를 낸 바로 그 죽음의 전염병이 중국에서부터 시작되어서 몽골이 개척한 그 교역로를 통하여 유럽으로 갔다고 저자는 말한다.  병을 옮기는 것은 쥐였고, 그 쥐에 붙어있던 벼룩이었다.  당연하게도 교역로는 모두 막혀버린다.  물자의 유통으로 유지되고 있던 원 왕조. 거의 자본주의 사회의 그 거대한 흐름을 연상케 하던 제국으로서는 타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실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그 제국을 버텨주던 유통은 막혀버렸다.  고립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악을 쓰다 보니 기존과 달리 배타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인구수에서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중국인들을 박해해 버린다.  당연한 수순으로 반란이 일어나고 저항이 거세어진다. 제국의 몰락이 다가온 것이다.

우리나라를 생각해 보았다. 세계 무역 규모 11위의 경제 대국이란 꼬리표가 늘 따라다닌다. 보잘 것 없는 자원에 좁은 땅덩어리, 면적 대비 인구수만 많아 우글우글 바글바글 아둥바둥 살아가고 있다.  이미 커질대로 커진 경제 규모, 또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는 욕망. 그러니 끝이 아득한 FTA도 우리가 살기 위해서 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그 주장이 먹힌다.  맨발로 살 때는 거친 땅이 그닥 부담스럽지 않았는데, 신발의 편안함과 아늑함을 알아차린 뒤에는 모래밭도 맨발로는 걸어갈 수 없게 되는 게 사람의 생리다.  경제 성장의 순기능을 모르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꼭 거대해진 채 내실이 부실해졌던 몽골 제국과 겹쳐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다 버리고 초원으로 돌아가서는 전통 그대로 다시 살아갈 수 있었지만, 우리는 이미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또 그런 우리나라를 몽골에선 선망해 마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도 아이러니하지만.

몽골은 로마나 알렉산드로스나 그밖의 여러 정복자와 달리 자신들의 문화를, 전통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사라지고 난 뒤 그 자리에 그들의 자취를 남기지 못했다.  다만 뚜렷했던 그 기억을 역사로, 문학으로 남겼을 뿐이다.  가장 잔인했다고 알려졌던 그들이지만 실상 그들이 보여주었던 행적은 지극히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오히려 타국과 타문명의 발전과 소통의 장을 마련했을 뿐.

볼수록 재밌고 또 신기했다. 그래서일까. 유독 몽골의 경영감각, 리더십을 배우자란 책들이 눈에 띈다.  칭기스 칸과 또 몽골 제국이 걸었던 발자취를 살펴 보면 오늘날의 눈으로도 감탄하고 배울 점들이 많이 보인다.  그들은 단순한 땅부자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저자는 칭기스 칸과 몽골의 업적 및 행적에 꽤 경도된 사람이었음에 분명하지만 인류학자로서의 객관적인 눈을 잃지 않으려고 시종일관 노력했다. 여러 문명사를 통사적으로 꿰뚫으며 전개해 가는 연출력이 설득력 있었고, 몽골의 성장과 쇠퇴를 짚어가는 흐름은 꽤나 드라마틱했다.  가벼운 이야기가 아님에도 책은 즐겁게, 동시에 진지하게 읽힌다.  여러 관련 자료들이 사진과 함께 삽입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좀 진하게 남지만.

너무 많은 밑줄을 그어버려, 정리할 때 추리고 추렸는 데도 밑줄 긋기가 세 편이나 나와 버렸다.  길어서 다른 사람들이 읽기엔 힘들겠지만, 내가 찾아보기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인상 깊었던 한 대목을 옮겨본다.

역사상 대부분이 제국은 정복한 땅에 자신의 문명을 강요했다. 로마는 라틴어, 신, 와인, 올리브 기름, 밀농사를 강요했다. 밀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터키의 에페소스에서 독일의 쾰른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모든 도시는 도시 설계와 건축양식이 똑같았다. 시장과 목욕탕으로부터 기둥이나 문간의 아주 미세한 곳까지 마찬가지였다. 다른 시대로 가면 영국은 봄베이에 튜더 왕조식 건물을 지었고, 네덜란드는 카리브 해에 풍차를 세웠고, 스페인은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자신의 양식을 적용한 성당과 광장을 만들었고, 미국은 파나마에서 사우디아바리아에 이르기까지 그들만의 독특한 주거단지를 건설했다. 따라서 고고학자들은 어떤 장소에 남아 있는 물리적 흔적을 연구하기만 하면 힌두, 아스텍, 말리, 잉카, 아랍 제국의 성정을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몽골은 자신이 정복한 땅에 가벼운 몸으로 왔다. 그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정복당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언어나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외래 작물의 경작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주민의 집단적인 생활방식을 갑자기 바꾸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몽골은 대규모의 사람들을 움직이고 전쟁을 목적으로 새로운 과학 기술을 활용하는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몽골 평화 기간에도 똑같은 관행을 유지하여 유목민 사회의 이동 원칙을 생활과 문화가 매우 보수적인 지역에 적용했다. – 325쪽

 

일종의 의무감을 갖고 몽골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알면 알수록 신비롭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새로이 몽골 관련 책이 또 나왔던데 출판기념 행사에 참가해 볼까 한다. 전통 악기 마두금 연주도 들을 수 있다고 하는데 제법 기대가 된다.  이러다가 언젠가 몽골로 훌쩍 떠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득해 보이지만 그런 날을 꿈꾸어 보며 괜히 두근거려 본다. 상상만으로도 벌써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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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지다 - 강요배가 그린 제주 4.3
강요배 지음, 김종민 증언 정리 / 보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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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의 역사 수업은 근현대사라는 이름으로 배우지만 현대사까지 가게 된 적은 드물었다. 일제시대 수탈의 역사는 자세히 배우지만, 해방의 기쁨과 그 뒤 찾아온 좌절과 극복의 역사는 제대로 들어본 기억이 없다.  있어봤자 다 건너 뛰고 88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쳤노라... 정도의 이야기?

대학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사 전공자인 내게도 낯선 현대사. 4학년 1학기 때 겨우 현대사를 접할 기회가 있었지만 교생 실습과 맞물려 역시나 한국 전쟁 정도에서 그치고 만 이야기.  제주 4.3 사건을 언제 처음 들어보았는지 기억이 아득하다. 교과서를 통해서 본 기억은 없다. 설령 적혀 있었다 할지라도 진도가 거기에 이르러 본 적이 없다.  누구를 통해서 들어본 기억도 없다. 내가 책을 찾아서 만나게 된 충격적인 사건. 한국전쟁을 공부할 때 보도연맹 사건에 경악한 것과 마찬가지의 집단 학살의 흔적.

그렇게 제주4.3 항쟁은, 부러 찾아 공부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전체 도민 열명 중 한 명 꼴로 죽어 나간 사건인데, 그토록 많은 피흘림을 남겼는데도 불구하고, 그 억울함을 토로할 수 없었던 서럽고 아픈 이야기. 그래서 더 쉬쉬하고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  그 제주의 이야기가 책으로 출간되었다. 98년도에 학고재에서 출간되었던 동명 책이 보리에서 재출간되면서 강요배 화백의 그림에 생존자들의 육성이 덧입혀졌다.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있지만 한반도와 가장 이국적인 풍경을 갖고 있는 제주도. 고려 시대 몽골의 침략기 때부터 수탈의 역사는 시작되었지만, 그때마다 항쟁의 역사도 함께 간직하고 있는 제주도.  밭이 99%를 차지하여 땅이 척박하고 소출이 적은 까닭인지, 육지에 비해서 계급 갈등의 소지가 적은 곳이 이곳 제주도라고 한다. 때문에 혈연 공동체적 성격도 유난히 강하다 한다.  이런 사회 경제적 요인은 도민들이 쉽게 단결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1948년 4.3 사건의 발달은 한 해 전 1947년 3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 삼일절 기념 행사에서 경찰이 시민을 향해 발포했던 것.  이 사건으로 주민 6명이 죽었다.  이에 대한 항의로 3월 10일에 관민 총파업이 벌어졌는데 미 군정의 대응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쪽으로 몰고 갔다. 당시 경찰청장 조병옥은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이 불온하기 때문에 싹 쓸어버릴 수 있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육지에서 응원 경찰이 속속 도착했고 서북청년회(서청) 단원들도 대거 투입되었다.  검거 열풍이 불어 닥쳤고, 유치장은 차고 넘쳐 더 이상 수용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사태는 점점 악화되고 경찰과 주민의 충돌이 일어났으며 고문, 테러, 강간, 금품 갈취가 빈번히 일어났고 그 중심에는 서청 단원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단순히 정치 깡패로 동원된 서청의 테러 탓이었을까? 그들이 제주도에서 저지른 만행은 물론 용서받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지만, 그들의 뒤에 또 누가 있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1948년 5월 10일로 내정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 그 선거를 꼭 장악하겠노라 결심한 이승만. 함께 손 잡은 미 군정. 모두 다 진정한 배후이자 공범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한 서청 단원 출신은 "이 대통령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라고 증언한 바가 있다.

일년에 걸친 탄압은 1948년 제주도민의 4.3 항쟁으로 맞불이 붙었지만 애초에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가족이 입산했다는 것이 들키는 순간 부녀자건 노인이건 상관 없이 처형이 이루어졌고 이들에게 붙여진 연좌제는 그 후 수십 년간 이들의 발목을 붙잡으며 족쇄가 되어버렸다. 물론, 무장대가 토벌대에게 살의를 보인 예도 쉽게 눈에 띈다. 비율로 따진다면 상대가 되지 않을 테지만, 피가 피를 부르는 증오와 분노의 살풀이가 거듭 이루어졌다.


일년 여를 버티다가 무장대의 총대장 이덕구는 해산을 명령한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고, 그 이상의 죽음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산하였지만 또 많은 사람들이 절벽에서 뛰어내리거나 목을 매어 자살을 하기도 했다. 마치 꽃이 시들지 않고 한꺼번에 저버리는 동백꽃처럼.


해방이 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친일파를 처단하고 새로운 조국에서의 새 삶이 열릴 거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새롭게 들어설 정부의 주인이 되고자 제 나라 국민들을 먼저 핍박하고, 좌익과는 손을 잡을 수 없다고 등을 돌리면서 친일파를 껴안는 그런 몰상식을 넘어선 만행이 자행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전두환도 박정희도 너무 미운 상대이지만, 첫 단추를 제대로 잘못 채운 점에 있어서 이승만이 가장 밉다. (모 대안 교과서에서는 건국의 아버지라고......;;;;)

그 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진상 규명 특별법이 통과하고 대통령의 직접 사과를 듣기까지 6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든 세상은 변했고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도착했다.  (18대 국회에서 제주 4.3 특별법을 폐기할 것이란 흉흉한 소문이 들려오던데 제발 그냥 소문이길...;;;;;)  찢기고 패어진 상처는 치유가 되어야 한다.  새살이 돋을 수 있게 약도 발라주고 새 붕대로 동여매 주어야 한다. 그리고, 아팠다는 것을... 지금도 많이 아프다는 것을 함께 알아주어야 한다.  때로, '무지' 자체만으로도 죄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 책이, 그때 희생된 사람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역할만 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 피흘림을 넘어서 화합과 상생의 길을 가기 위한 노력을 촉구하는 진한 울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가 함께 작업해 가야 할 공동의 목표이기도 하다.  더 이상 '몰랐었다'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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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4-14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주4.3항쟁,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로 사실에 접근할 수 있었어요.
18대 국회는 저희들 입맛에 맞도록 다 고칠 생각인가보죠?ㄴ ㅃ ㄴ ㄷ

마노아 2008-04-14 10:11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현기영 작가가 그 작품으로 고초를 겪은 이야기도 나오더라구요.
지난 주 기사에 간디 학교 선생님은 사상불량으로 잡혀가기까지 했답니다.
21세기에도 이런 일이 가능한 대한민국이 경이로울 지경이에요..;;;;
 
동백꽃 지다 - 강요배가 그린 제주 4.3
강요배 지음, 김종민 증언 정리 / 보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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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대시위

1947년 3월 1일, 제주 읍내에 탐라 개벽 이래 최대로 운집한 3만 군중은 진정한 민족 해방을 갈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1947년 3월 1일 제주 지역 곳곳에서 열린 3.1 시위 투쟁에 역사상 최대 인파가 참가했다.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열린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에만 2만 5천 명에서 3만 명 정도가 참가했다. '4.3'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시위 군중이 관덕정 앞을 지나간 뒤 발생했다. 관덕정 앞에서 우연한 일로 소란이 일어나자 겁을 집어먹은 경찰이 총을 쏴 주민 6명이 죽은 것이다.

경찰 발포로 주민 6명이 죽자, 이에 대한 항의로 3월 10일에는 역사상 희귀한 '관민 총파업'이 벌어졌다. 제주 도총을 비롯한 관공서와 학교, 은행, 통신 기관과 일반 사업체까지 참여해 관과 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일어났는데, 해방 후 제주도 상황을 모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총파업이었다.

서청 입도

"우리는 어떤 지방에서 좌익이 날뛰니 와 달라고 하면 서북 청년단(서청)을 파견했어요. 그 과정에서 지방의 정치적 라이벌끼리 저 사람이 공산당원이라 하면 우리는 전혀 모르니까 그 사람을 처단케 되었지요. 우린들 어떤 객관적인 근거가 있었겠어요? 그 한 예가 제주도인데, 조병옥 박사가 경무부장으로 있으면서 4.3 사건이 나자마자 저를 불러 제주도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는데 반공정신이 투철한 사람들로 경찰 전투대를 편성한다고 5백 명을 보내 달라기에 보낸 적이 있습니다."

문봉제. 당시 서북 청년회 단장. 북한 연구소 발행 <北韓> 1989년 4월호 127쪽

넘치는 유치장

제주 유치장은 한국의 어떠한 형사 시설보다도 넘쳐 나는 죄수를 수용하는 것으로는 최악의 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 10*12피트(약3.3평)의 한 감방에 35명이 수감되어 있다.

-미 군정청 특별 감찰관 넬슨 중령, <특별 감찰 보고서>(1947년 11월12일~1948년 2월 28일)

고문

"둘째 오빠가 행방불명되어 버리자 우리는 졸지에 '폭도 집안'으로 몰렸어요.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당시 열세 살이던 나까지도 서북 청년회에 끌려가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옷을 모두 벗긴 채 고문을 했는데, 거꾸로 매달아 몽둥이로 때리거나 고춧가루 탄 물을 코와 입에 부어 댔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입을 다무니까 쇠붙이를 사용해 이빨 사이를 억지로 벌리는 바람에 이가 다 부러졌어요. 전기 고문을 받은 곳은 살이 썩어 갔어요. 토벌대는 우리가 오빠를 숨긴 채 밥을 날라 주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며 윽박질렀습니다. 기절하면 물 뿌려 깨운 뒤에 또 고문했어요. 결국 서청은 도피자 가족이라며 어머니를 총살했습니다. 그때 언니랑 나도 함께 끌려갔는데 서청은 우리한테 '어머니가 죽는 것을 잘 구경하라'고 하면서 총을 쏘았어요. 난 그때의 충격으로 성장이 멈춰, 다 자란 후에도 몸무게가 30kg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쳐집니다."

-정순희. 2007년 72세, 서귀포시 강정동.

입산

"우리 학교 김용철 학생이 조천 지서로 끌려가 고문치사를 당한 후, 서북청년회와 경찰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졌습니다. 그래서 '악질 경관 처단하자!'라고 쓴 삐라를 뿌리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막상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가 벌어져 소위 반동이라고 지목받은 사람이 살해당한 것을 보고는 어린 마음에 '아, 어떻게 이럴 수 있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무튼 서청과 경찰로 인해 도무지 마을에서 살 수가 없어 1948년 8월경 산에 올랐습니다. 조천 중학교 2학년 때지요. 그땐 사태가 그렇게 오래갈 줄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달랑 여름옷 하나 입고 올랐겠습니까?"

김민주. 1994년 63세. 일본 동경도, 천엽현. 당시 조천 중학교 학생.

공격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쯤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붉게 봉홧불이 타올랐다. 남조선 노동당(남로당) 제주 도당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약 350명으로 추산되는 무장대는 제주도 내 경찰지서의 꼭 절반인 12개 지서를 일제히 습격하고, 경찰과 서북 청년회(서청)같은 우익 청년단 간부들의 집도 습격했다. 평화의 섬은 피의 섬이 되었다.

부모들

인간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일도 버젓이 저질러졌다. 토벌 작전을 펴면서 13명의 목을 잘라서 시내를 두루 다니며 구경시키기도 하고, 서북 청년회에서 주민들을 모아 놓고 서로 뺨을 때리게 했는데,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도 이런 짓을 하게 했다. 토벌대가 주민들을 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놓고 발가벗긴 채 매질을 하고, 남녀를 지목하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짓'을 하게 했다. 또 자식을 맨 앞줄에 세워 놓고 부모가 총살당할 때 손벽을 치고 만세를 부르게 했다. 잔혹 행위는 끝이 없었다. 과거 나치나 일본군이 저질렀던 대살도 빈번히 발생했다. 남편이 산에 올라갔다고 아내를 죽이고 자식이 입산자라고 부모를 죽였다. 도피자 가족으로 여자나 노인, 어린아이 같은 주로 노약자들이 끌려가 살해되었다.

天鳴
"그날 새벽 총소리가 요란하자 젊은이들은 황급히 피신했어. 그러나 난 어린 아들과 딸 때문에 그냥 집에 남아 있었지.'설마 아녀자와 어린아이까지 죽이겠느냐.'는 생각을 했어. 그런데 집집마다 불을 붙이는 군인들 태도가 심상치 않았어. 무조건 살려 달라고 빌었지. 그 순간 총알이 내 옆구리를 뚫었어. 세 살 난 딸을 업은 채로 픽 쓰러지니까 아홉 살 난 아들이 '어머니!'하며 내게 달려들었어. 그러자 군인들은 아들을 향해 총을 쏘았어. '이 새끼는 아직 안 죽었네!'하며 아들을 쏘던 군인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해. 아들은 가슴을 정통으로 맞아 심장이 다 나왔어.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어. 그들이 나가 버리자 우선 아들이 불에 딸까 봐 마당으로 끌어낸 후 담요를 풀어 업었던 딸을 살폈지. 그때까지만 해도 울지 않았기 때문에 딸까지 총에 맞았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어. 그런데 등에서 아기를 내려 보니 담요가 너덜너덜하고 딸의 왼쪽 무릎이 뻥 뚫려 있었어. 내 옆구리를 관통한 총알이 담요를 뚫고 딸의 왼쪽 다리까지 부숴 놓은 거야. 그날은 마침 딸의 두 번째 생일날이었는데, 그 일로 딸은 장애인이 되었어."
양복천. 1915년생 조천면

붉은 바다

"1948년 12월 14일 오후 5시쯤 갑자기 군인과 경찰이 마을에 들이닥쳐 한 사람도 빠짐 없이 향사로 집결시켰습니디ㅏ. 그들은 열여덟 살에서 마흔 살 사이의 남자들과 얼굴이 고운 처녀만을 골라 밧줄로 묶어 표선리로 끌고 갔습니다. 그 후 남자는 12월 18일과 19일 양일에 걸쳐 표선 백사장에서 학살당했고, 여자는 군인들의 노리갯감이 되다가 군대가 이동하게 되자 최종적으로 12월 27일에 표선 백사장에서 총에 맞은 후에 또 칼로 찔려 죽었습니다.

김양학, 1998년 58세. 표선면 토산1리

젖먹이

"우리 마을 북촌리에 대학살이 벌어지던 그날, 아침부터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군인들이 마을 동쪽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연설이 있으니 학교 운동장으로 집합하라 했습니다. 군인들은 우선 경찰 가족, 군인 가족을 따로 분리시키더군요. 낌새가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은 사돈의 팔촌이라도 경찰이 있으면 경찰 가족 쪽으로 줄을 섰습니다. 군인은 우선 민보단 간부를 불러내 바로 총살했습니다.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 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댓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업혀 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김석보, 1998년 63세, 조천읍 북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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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4-14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주의 5.18과 더불어 가슴 아픈 현대사~~~ ㅠㅠ

마노아 2008-04-14 22:51   좋아요 0 | URL
가슴 아픈 이야기가 너무 많지요. 오늘 식코 보고 왔더니 마음이 더 무거워졌어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