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4 - 숙종실록 - 공작정치, 궁중 암투, 그리고 환국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4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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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숙종이 왕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 14세였다. 수렴청정도 없이 바로 정치의 무대에 들어선 소년 군주는 어림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의 손에 결국 대로 송시열이 유배를 갔고, 50년간 집권했던 서인이 야당으로 전락했다. 아마도 그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때에 신하들이 군주를 어떻게 대접했는지를 뼈에 새겼을 것이다. 군약신강의 나라에서, 게다가 몸도 약했다던 그로서는 나름의 자구책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왕권을 강화시키는 큰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의 계획은 성공했고, 신하들은 군주를 어렵게 여겼고 자리에서 떨쳐나갈까 두려워했다. 그의 치세 기간 동안에 군강신약의 신화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그는 성공한 군주인가? 

군주도 한 사람의 인간이지만, 한 나라의 임금된 자가 어디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런 자의 꿈과 포부가 그저 한 개인의 것과 다름 없어서야 쓰겠는가. 그토록 원했던 왕권강화를 이루어냈다고는 하지만 숙종을 성공한 군주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의 꿈과 야망은 오로지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 힘들게 일궈낸 강력한 왕권으로 그가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해주었던가. 양반도 세금을 물리자는 호패법을 실시하자는 주장이 무려 집권 서인에게서 나왔음에도, 그는 주저주저하며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백성들이 과중한 군역으로 삶의 터전을 이탈하고 도적이 되어가는 와중에도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살까 용단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잦은 환국으로 정권을 손바닥 뒤집듯 권력을 이리저리 내돌려 왕권을 강화시켰지만, 그 와중에 무수히 죽어간 사람들의 목숨과, 임금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른 간언을 하지 못하는 신하들에게서 빼앗은 언론의 자유와, 정적을 제거할 슈퍼 기회를 줌으로써 붕당정치를 더 극단으로 몰아간 책임들은 어찌 감당할 것인가.  

사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비극적인 대결은 훗날 경종의 설움과 영조의 자기모순, 그리고 사도세자의 참극으로까지 이어지니, 거기에 가장 큰 책임은 역시 숙종에게 있다고 하겠다. 차라리 태종처럼, 피바람을 불러 일으켜 뭇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더라도 후대 임금이 탁월한 군주가 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열어준 것도 아니니, 대체 그의 치세 46년에 진정으로 일궈낸 업적은 무엇일까 허무하다.  

뿐인가. 그가 왕으로 군림하는 동안엔 이빨에 힘 깨나 주는 인물들이 보통 많았던가. 가장 실망스러운 인물은 역시나 송시열이었다. 오로지 명분과 실리만 찾았던 그에게서 진짜 정의와 인정과 백성을 위한 헌신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 인물의 이름에 매달려 죽고 살았던 무수한 정치 찌질이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윤휴 같은 인물을 제 손으로 내쳐버린 숙종은 진정 사람 보는 눈도 없었던 듯하다. 

박시백 작가님도 지적했지만, 당시 조정에서 이름 좀 날렸던 대신들은 장수한 사람이 많았다. (김석주가 일찍 죽은 것은 혹시 고도 비만으로 인한 고혈압 때문???) 송시열의 경우도 83세에 사약을 받고 죽었으니, 아니었다면 더 오래오래 살았을 듯도 하다. (혹시 욕먹어서???) 암튼, 꽤나 긴장감 있는 공방 속에서 살았을 텐데도 하나같이 그렇게 장수했다는 것은 작가님의 궁금함처럼 나 역시도 궁금증이 인다. 이유가 뭘까? 선비의 꼿꼿한 생활 태도와 규칙적인 습관 덕분? 그렇다 해도 과하다 싶기도 하고.... 아마도 당시 노동에 종사하던 일반 백성들은 그렇게까지 장수하며 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제목에서부터 강조하듯이 이 책이 '실록'인 까닭에, 희빈 장씨의 사사 장면 같은 자극적인 씬은 나오지 않는다. 실록에 묘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 입장에서는 탐나는 '씬'일 텐데도 그런 면에서 원칙을 제대로 지키는 게 보기 좋았다.  

눈에 띄었던 것 중 하나는 허적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원인으로 지목된 기름친 장막 사건이 실제로는 없었을 것이라고 본 대목이다. 역시 실록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 허적의 처세를 생각할 때 작가님의 지적이 옳다고 보여진다. 다른 책들에서 만나지 못한 이런 날카로운 부분들이 이 시리즈에 대한 신뢰를 계속 높여주고 있다.  

다만, 현종실록에서는 재기 넘치는 그림과 유머 코드가 뜻밖에 많았는데, 이번 편에서는 '뜻밖에도' 그런 부분에 인색했다. 부러 그런건지 어쩌다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숙종이 유머와는 거리가 먼 인물인 것은 인정한다. (솔직히 불만스러운 게 많아서 찌질해 보인다. 처음의 그 카리스마는 다 어디로 가고, 흥!) 

이 시리즈는 일년에 두 차례 나오는데 다음 책은 평소대로 간다면 내년 1월에 나올 것이다. 아마도 치세 기간이 짧았던 경종을 영종과 묶어서 나오지 않을까. 드디어 사도세자의 비극과 마주칠 차례다. 기대가 되면서 마음이 좀 아리다.  

ps. 윤증 고택에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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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하늘 2009-08-20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많은 마노아님의 글을 보니 행복합니다...ㅎㅎㅎ

마노아 2009-08-20 23:37   좋아요 0 | URL
반가워해 주셔서 감사해요. ^^
 
조선공주실록 - 화려한 이름 아래 가려진 공주들의 역사
신명호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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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조선왕비실록을 무척 재밌게 읽었는데 이번엔 조선공주실록이다.  

조선왕조 500년간 재위한 왕은 27명이며, 추존된 왕은 5명이다. 재위한 27명의 왕에게는 35명의 공주와 77명의 옹주가 있으며, 추존된 5명의 왕에게는 3명의 공주와 1명의 옹주가 있다. 이들을 모두 합하면 공주 38명과 옹주 78명, 총 116명이다.  

역사 속에서 무수하게 등장하고 사극에서 언급되는 그 숱한 남자들 사이사이에 이렇게 많은 공주와 옹주가 있었다. (공주는 왕비 소생의 딸이고, 옹주는 후궁 소생의 딸이다.) 물론 이 책에서 그 많은 사람들을 다 다루는 것은 아니다. 모두 일곱 명의 공주와 옹주를 책에서 언급했는데 책의 표지에 실린 간략한 내용을 옮기면 이렇다.  

정선공주(태종의 딸) : 부왕인 태종의 뜻에 따라 과부의 아들과 혼인했으나 부부관계가 단절돼 갖은 어려움을 겪는다. 

경혜공주(문종의 딸) : 계유정난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남편과 친동생 단종을 잃고 노비로까지 전락한다. 

정명공주(선조의 딸) : 왕실 저주사건에 연루되어 서궁에 유폐되었으나 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서예로 승화시킨다. 

효명옹주(인조의 딸) : 인조의 편애를 받으며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보냈으나 저주혐의로 어머니와 남편을 잃고 귀양에 처해진다. 

의순공주(효종의 딸) :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에게 시집보내기 위해 효종이 자신의 양녀로 삼아 공주에 봉작한다. 

화완옹주(영조의 딸) : 어린 세손(정조)을 편집증적으로 아꼈으나 후일 정조의 최고 라이벌이 되어 사사건건 대립한다. 

덕혜옹주(고종의 딸) : 열네 살 때 일제에 의해 강제로 도쿄로 유학 갔다가 대마도 번주 종무지와 정략적으로 결혼한다. 

 

이 책은 단순히 그동안 조명되지 못했던 조선 왕의 딸들을 소개하는 것에만 의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그런 저작물이 드물었다는 데에서도 의미는 있지만, 그보다 그들이 처한 상황과 닥친 운명들이 모두 조선의 역사와 맞물려 돌아간다는 배경이 더 중요하게 눈에 띈다. 그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삶 또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태종이 굳이 자신의 딸을 과부의 아들과 혼인시킨 데에는 강력한 왕권 확립과 외척의 세력을 누르려는 임금의 평소 각오가 녹아있고, 문종의 딸로서 노비로까지 신분이 전락한 경혜공주의 팔자를 이해하기 위해선 세조의 계유정난도 같이 설명해야 한다.  

정명공주가 유폐된 궁에서 울분을 서예로 승화시킨 배경에는 광해군의 콤플렉스와 위태로운 왕좌를 이해해야 할 것이고, 또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가 그 정명공주를 경계하고 의심했던 것 역시 같은 선상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효명옹주는 인조에게서 과한 애정을 받아 사람을 영 버려버린 케이스인데, 아들 잡아먹은 인조가 역시 딸까지 망쳤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우대하고 추대하던 인목대비(나 그 측근 세력)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는 대목에서는 좀 고소하기도 했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깊이 개입한 귀인 조씨가 바로 그 '저주'로 패가망신하는 대목도 의미심장했다. 이 부분 읽으면서 번뜩 든 생각인데 유교를 강조한 조선 왕실이지만, 샤머니즘적 믿음이 꽤 팽배했으니 여기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다면 왕실의 행보를 읽는 데에도 좀 더 도움이 될 듯 하다. 소현세자가 죽기 전 침을 놓았던 이형익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오는데, 확실히 그는 실력가였으며, 세자의 죽음이 그의 침술 때문이 아님은 더더욱 분명하게 읽혔다. 세자빈 강씨를 향한 인조의 저주는 몹시 일방적이고 황당스럽기 그지 없지만 죄많은 자의 업보로서 '저주'에 대한 발작정 증세는 이해가 갔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효종' 편에서 보면 의순공주의 미모가 형편 없어 퇴짜를 맞았다는 식으로 소개되었다. 저자는 그 부분을 더 파고들어 의순공주의 미모는 자못 고왔고, 도르곤 역시 마음에 들어했으나 조선을 길들이기 위해서 부러 윽박질렀던 청나라의 태도를 같이 소개했다. 하나의 책에서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한, 혹은 알아차리지 못한 정보들이 이렇게 다른 책과 자료를 통해서 보완되고 대체되는 것이 기분 좋았다. 비슷한 시기에 같이 읽어서 더 도움이 된 타이밍도 반갑다.  

화완옹주의 이야기도 몹시 충격적이었다. 정조에게 정적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정조가 어린 시절의 옹주는 그를 아들처럼 소유하고 독점하려고 했던 애정 과잉 상태였다는 것이다. 옹주가 자식을 잃고 남편을 잃었던 당시 상황과 접목시켜 볼 때 설득력이 있었다.

또한 호학군주의 대표명사 정조가 사춘기 시절 방황도 하고 농땡이(..;;;)도 피웠던 시절이 잠시라도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부던히 자신을 채찍질만 하고 살았다고 이해할 때보다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그 화완옹주가 나중엔 양자 정후겸을 이용해서 정조와 무자비하게 대치했던 것을 생각하면 애정이 애증으로 변질되는 격한 순간이 쉽게 그려진다. 사랑과 미움이 꼭 동전의 양면처럼 움직이는 듯하다. 여기에 '정치'가 개입되면 당연히 더 복잡해지기는 하지만. 

이 책을 무척 흥미롭게 즐겁게, 인상깊게 보았는데 마지막에 와서 조금 이해하기 힘든 마무리를 보였다. 최후 주자는 '덕혜옹주'인데 옹주가 태어나기 전의 조선 왕실의 상황, 국권 상실 후 고종의 고독, 그리고 옹주가 태어났을 때 고종의 기쁨 등을 무척 상세히 소개해 놓았는데, 정작 옹주가 일본으로 유학간 뒤의 일은 거의 한 페이지로 일축한 뒤 책을 마무리 지었다.  

옹주가 대마도 번주 종무지와 혼인한 뒤의 이야기, 해방 이후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이야기, 돌아와서 낙선재에서 살다가 죽은 이야기까지 할 얘기가 많을 듯한데 왜 갑작스럽게 멈춰버렸을까? 옹주의 남은 이야기를 못 들은 것도 아쉽지만, 책이 갑자기 뚝 끊기는 느낌을 주어서 책에 대한 여운을 망쳐버렸다.(그래서 별점 하나 감했다.) 

혼사마저도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정권의 변화에 따라 삶 자체가 흔들렸던 조선의 공주와 옹주들. 당시 시대를 움직이던 남자들 역시 그 정치적 입장과 무관할 수 없었지만, 이네들은 자신의 배우자와 관련해서 더 고초를 많이 받은 듯해서 조금은 안쓰럽게도 보인다. 하루 입에 풀칠하고 사는 것이 더 버거웠던 민초들의 가여웠던 삶과는 다른 방향으로 그들의 삶도 고단하고 때로 버거웠던 것이다. 누구나 삶의 크기는 다 크고 생은 무거우니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기록의 방대함을 자랑하는 실록 안에서 여성의 이름이 차지한 비중은 많지 않을 듯하지만 그 사이사이 스며들어 있고 삐져나와 있는 그네들의 이름을 찾아내어 이렇게 연구 성과를 보여주는 책이 참으로 고맙다. 저자의 다음 관심사는 무엇일지 알 수 없지만, 그 관심사에 나의 관심도 꽂혀가고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 

공주든 옹주든, 모두 왕의 딸로서 왕실 식구였던 이들을 몇 명 나열했을 뿐인데 하나같이 인생이 다난하다. 어려서 부왕의 총애를 입고 행복했던 한 때를 보낸 이도 있으나 인생 말년까지 행복했던 이는 드물어 보인다. 공개하지 않은 100여 명 이상의 다른 공주와 옹주들은 혹 다른 삶을 살았을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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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09-07-10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에게 후궁들이 너무 많아서 공주, 옹주 많이 헤갈려요.
이름까지 달라서 조선시대 때를 공부하려고 하면 머리가 지근지근 아파옵니다. ㅎㅎㅎ
이 책을 사 볼까 생각도 했었는데.. 리스트에 담아 둡니다.^^

마노아 2009-07-10 11:31   좋아요 0 | URL
왕비 소생의 아들은 '대군', 후궁 소생의 아들은 '군'
왕이 소생의 딸은 '공주', 후궁 소생의 딸은 '옹주'
세자빈의 딸은 '군주', 세자 후궁의 딸은 '현주'
복잡하지요? ^^;;;
이 책보다 먼저 '조선왕비실록'을 보셔요. 그 전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보시구요~
그럼 아마 헷갈리지 않고 정리가 잘 될 거예요.^^ 추천순이 재미순이기도 합니다.ㅎㅎㅎ

꿈꾸는섬 2009-07-10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겠어요. 저도 조만간 구입할 것 같아요.^^

마노아 2009-07-10 11:31   좋아요 0 | URL
예, 재밌게 읽었어요. 마지막 마무리만 좀 불만이었구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3 - 효종.현종실록 - 군약신강의 나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3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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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제일 처음 내가 선택한 책은 대개 이덕일 씨의 책이었다. 그의 책은 일단 쉬웠고, 문장이 문학적이었으며 설득력이 있었다. 그의 주장들은 다소 감정적인 부분들이 있었지만 나름의 근거를 늘 제시했기 때문에 비판이 많았어도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책들을 보게 되면 그런가? 그래도 아직은 이쪽이 더... 이러면서 추가 기울어지곤 했다. 그랬던 나의 생각들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수정되는 것들이 종종 나왔다. 모두 후세 사람들이라 당대를 살았던 인물이 아니고, 학문에 투자한 시간을 생각한다면 그도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데도, 그만큼 박시백 씨가 설명하는 이 실록의 내용은 타당하고도 설득력이 강했던 것이다.(더 강한 유혹을 느끼면 또 바뀌는 거?) 

암튼, 그렇게 해서 내가 갖고 있던 생각들에 가장 많은 변화를 주게 된 게 바로 효종과 현종의 이미지다. 교과서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효종과 북벌을 함께 외쳤던 인물을 송시열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적어도 효종의 북벌 의지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효종이 실질적으로 추구한 것은 북벌이 아니라, 현실 정치의 개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북벌을 위해 군사력 증강에 힘을 쏟았다지만, 그 대부분은 정벌보다는 방어에 주안점이 두어진 인상을 풍긴다. 송시열과의 10개월도 북벌과는 거리가 멀다. 또 한 가지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청이 조선의 움직임을 손금 보듯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정황 아래서 모두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북벌을 효종 혼자서 가슴에 품고 추진했을까? 혹 효종은 북벌을 도모한 것이 아니라 북벌을 추진한다고 믿게끔 제스처만 취한 건 아닐까? 효종으로서는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자신이 즉위해야 했던 당위성이 필요했다. 소현세자가 줄 수 없는 것. 나아가 소현세자보다 자신이 보위를 이은 게 더 낫다고 여겨질 만한 그 무엇을 보여주어야 했다. 북벌이 바로 그런 무엇이었다. 비록 관념 속의 외침이기는 해도 사대부들은 늘 설치를 꿈꾸었다. 따라서 북벌은 사대부들에 대한 강력한 유인 카드이자 유용한 압박 카드가 될 수 있었다. (96-97쪽)

 
   

 

할 수만 있다면 북벌을 감행해서 치욕을 갚고 싶었겠지만, 당시 조선의 힘이 북벌을 감당할 수준이 아님을 효종도 인정했던 것이다. 독대에서 보여준 효종의 논조가 워낙 강경해서 아직도 좀 흔들리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효종이 그렇게 급서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주장은 어떤 현실로 나왔을 지도 모른다. 열심히 내치에 힘썼던 것처럼, 그 기세로 10년을 더 준비하면 10년 뒤에는 북벌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청나라에 눈치 안 보고 살 정도는 되었을 지 어찌 알겠는가.  

아무튼, 애석하게도 효종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평생에 보여준 인내력은 가히 정조 수준이었다. 세자 시절부터 입에서 떼어버린 술을 죽을 때까지 가까이 하지 않았고, 경연을 마다하지도 않았으며, 늘 비판만 해대는 산당-특히 송시열-의 주장들을 내치지 않고 들어주었다. 가끔 버럭 효종으로 변신하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자신을 모욕주는 말까지도 받아 넘기던 효종이다. 실로 그의 성정은 대인배 수준이었다. 형님 소현세자와 그 삼남인 자신의 조카로 인해 정통성 문제가 늘 불거졌지만, 죽이지 않고 살리기에 힘썼으며, 어린 조카들이 반역 문제에 거론되어도 역시 살리는 일에 힘을 보태었다. 뿐이던가? 흩어져 유배살던 그들을 한 자리에 모아 서로 의지하고 살게 했으며 나중에 그 유배도 풀어주고 관작도 돌려주지 않던가. 형제에게도 우애가 깊었던 효종. 수신제가에 힘쓰고, 군사 문제에 용을 쓰고, 대동법 시행도 제법 적극적이었던 효종. 늘 유약한 이미지의 조선 군왕과 달리 강한 임금 효종은 근사해 보였다. 군약신강의 나라 조선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인물이었지만. 

저자 박시백은 애써 '독살설'이나 군왕 암살에 관한 의혹은 비켜가는 듯하다. 수상쩍은 모습을 잠시 비추긴 하지만 말을 아낀다.(심지어 소현세자 죽음까지도) 이 부분도 이덕일씨와는 차이나는 부분이다.^^ 

이건 마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정치적 타살뿐 아닌 물리적 타살인가에 대한 의혹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그러니까 100% 확실한 물증은 없는데, 쉽게 꺼질 수 없는 심증이 계속 남아있는 그런 의혹 말이다. 게다가 당시 조정을 장악한 지배층의 행태들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예학이란 것이 당시 지배층에게는 피해갈 수 없는 숙명같은 학문이라 할지라도, 다른 분야에서... 그러니까 백성의 삶에 있어서도 그렇게 목숨 걸고 덤비고 수호하고자 한 일이 있다면 그들을 향한 이런 의혹과 불신이 어찌 나왔을까. 나라 밖의 적은 저리도 강한데 제 백성들로부터 진정한 존경조차 받지 못하는 지배층이 다스리는 나라. 당연히 건강할 수가 없다. 그러니 그 왕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의심의 의심의 꼬리를 물 수밖에. 

현종은 재위 기간 15년 동안 신하들과 큰 마찰 없이 지낸. 온순한 성격의 임금이라 생각했다. 평생 후궁도 없이 왕비 하나만 아끼고 산 것도 그런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왕비 사랑은 어떤지 몰라도, 현종이 그렇게 유약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게 이 책을 보면서 얻은 신선한 사실이었다. 현종은 아버지만큼 버럭!하는 다혈질 성격도 있었고, 산당계 인물들을 견제하느라 오랜 시간을 투자하는 모습은 나름 독한 구석도 비쳐졌다. 원래 이렇게 오래 참을 줄 알고 준비할 줄 아는 임금이 무서운 법이 아닌가.  









위 사진에서 '캐실망'이란 단어에서도 그랬지만, '멍 때릴 것 없다!', '헐~'이런 표현들은 이 책이 만화이기에 가질 수 있는 표현의 자유와 열린 공간의 힘이다. 저런 유머가 아니어도 충분히 재밌는 책이지만, 저런 글자 하나만으로도 잠시 웃어갈 짬을 내주는 것이 이 책이 가진 큰 장점 중의 하나다.

현종 말년의 예송에서 현종은 서인 대 남인의 구도로 가기 전에 사태를 수습했다.  

   
 

이때의 예송논쟁은 산당 대 남인의 논쟁이 아니라 산당 중심의 신하들과 임금 사이의 논쟁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왕의 태도가 어딘지 미진하다는 인상을 준다. 왕은 일찌감치 이번 예송의 핵심을 끄집어냈다. 그러나 왕은 핵심 문제가 전면화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듯했다. 만일 적통 문제를 가지고 본격적인 논쟁을 벌였거나 시간을 끌기라도 했다면 남인이 대거 가세했을 것이고, 명분상 취약한 산당은 궁지에 몰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왜일까? 산당과의 전면전이 두려웠던 것일까? 송시열에게 내린 비답을 보면 왕이 자신감은 이미 충만해 보인다. 건강에 자신이 없어서였을까? 불과 한 달 뒤에 죽음을 맞았으니 그랬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보다는 당쟁을 바라보는 왕의 철학이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왕은 한쪽을 도와 세력이 균등해지게 함으로써 서로를 견제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188쪽)

 
   

그는 이제 산당을 어느 정도 누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고, 조정 내에서 남인의 세를 어느 정도 키울 타이밍을 맞고 있었다. 처음에 그랬듯이 이제 붕당도 제 기능을 발휘해서 비판과 견제의 역할을 다 해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는 늘 비정했고, 기회는 쉽게 오지 않으니. 젊은 군주 현종은 3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비록 그가 평소 병치레가 잦은 임금이긴 했지만 극심한 복통과 설사로 급서했다는 것은 그의 죽음에 큰 의혹을 남기게 한다. 게다가 그 시점이 남인 허적에게 영의정을 막 제수한 타이밍이라면.  

게다가 그의 뒤를 이을 아들 숙종은 이제 나이 열 네살에 불과했다. 이런 정황들이 현종의 죽음을 자꾸 타살로 느끼게 만든다. 그가 좀 더 오래 살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한쪽으로 쏠린 조정의 중심축을 제대로 잡아줄 수 있었더라면 숙종 때 상대 당을 원수 당으로 인식해 죽고 죽이는 환국이 아니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고, 몇몇 여인네들이 한을 품고 죽지도 않았을 것도 같건만, 그런 가정들은 모두 무의미하니 여기서 접으련다. 

효종과 현종의 재위 기간을 합해야 25년이다. 책 한 권에 묶어나와도 할 말이 없을 시간이다. 다음 번 숙종실록은 좀 더 두툼해지지 않을까. 재위 기간도 길었지만 그보다 할 얘기가 오죽 많으랴.

백무현 씨가 그린 만화 박정희와 만화 전두환처럼, 박시백 씨도 혹 이 시리즈가 다 끝나면 현대 정치에 대해서도 이렇게 만화로 풀어낼 생각이 있으신지 궁금하다. 자료는 더 많고, 복장은 더 터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와준다면 너무 고마울 듯하다. (뭐 백무현 씨가 해줘도 상관은 없다. 그치만 개인적으로 박시백 표 만화가 더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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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09-06-29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20권으로 나올 예정이라고 하던데 맞나요?
정말 시리즈가 대단하네요. 그래도 소장가치가 있을 것 같아요.^^
제 조카도 그렇고 저도 역사나 역사 만화를 좋아해서 탈이에요.ㅎㅎㅎ

마노아 2009-06-29 18:15   좋아요 0 | URL
네, 20권 예정으로 시작한 시리즈예요. 서가에 꽂아두었을 때 뽀다구가 좀 난답니다.^^
역사 만화 완전 사랑해요. 호호홋^^ㅎㅎㅎ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2 - 인조실록 - 명분에 사로잡혀 병란을 부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2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의 역대 임금 중 그 이름과 가장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임금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코 인조가 으뜸이지 않을까. 그가 스스로 지은 이름이 아니라지만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가당치 않은 이름의 주인공 인조. 

그는 반정으로 왕이 되었다. 그가 스스로 정통성을 주장하려면 광해군을 뜯어내릴 수밖에 없고 그러기 위해선 그가 걸었던 길과 반대의 길로만 가야 했다. 그 결과 두 차례 호란을 겪었고 치욕적인 항복의 순간도 겪어야 했다. 임금 홀로 감내해야 하는 치욕이었다면 다행이겠지만, 전쟁으로 인해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거나, 돌아왔어도 사람 대접 못 받았던 무수한 여인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 없다.  

그 자신도 전쟁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 테니, 여기까지는 백 번 양보해서 운이 지지리도 나빴다고 치자. 그럼 그 다음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게서 대체 그는 어떤 교훈을 얻었던 것일까? 나라의 힘이 약해서 툭하면 국경을 침범당하는데, 그에 대한 대비도 없고, 헐벗은 백성을 먹여 살리기 위한 어떤 개혁도 시도하지 않던 한심한 임금 인조. 뿐이던가. 그 잘난 왕 자리에 집착하여 저 대신 고생하는 아들을 정적으로 겨냥해 죽여버리는 천인공노할 짓까지 서슴지 않았던 이 사람. 그것도 모자라 며느리와 그 가족, 친손주까지 죽게 만든 이 패륜적인 사내. 그러니 그가 패륜아라고 손가락질하던 광해군의 죄질이야 귀엽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조의 행적을 살피다 보면 묵직한 체증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건 단순히 역사 속의 문제 많은 인물을 보아서만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보여지는 비슷한 인간 류를 같이 체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권좌를 위해서 백성(국민)을 나 몰라라 내팽개치는 군주(대통령),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부도덕한 일도 가차 없이 해내며 자기들까리 똘똘 뭉쳐 서로를 보호해 주는 정당. 그 와중에 생계의 위협을 느끼며 목숨까지도 내놓게 되는 가엾은 민중들. 그리고 명분만 좇아 망해가는, 혹은 망해버린 명나라를 숭상하며 현실 정치는 외면해버리는 무모한 외사랑. 그리고 마땅히 손잡아야 할 상대에 대해서는 배척으로 일관하는 뚝심! 아, 말하자면 끝이 없을 듯하다. 저자 역시 이 책을 쓰면서 현실의 모습과 겹쳐지는 역사 속 모습들에 아찔함을 느낀 듯하다. 이 책은 지난 해에 나왔는데, 그 과정에서 '촛불'에 대비되는 모습은 찾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촛불에 비견할 수 있는 사건은 고종실록까지 가야 가능하지 않을까.  

선조 때에는 그래도 이순신 같은 인물이라도 있어서 가슴의 화기를 좀 다스려주었는데, 인조실록에서는 최명길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좀 약하기는 했다. 게다가 권력에 아첨하는 인물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꼭 저같은 사람들만 옆에 끼고 있던 인조. 



항복을 결정했을 때 정온은 할복을 했으나 죽지 않았고, 김상헌은 목을 매었으나 자식들 덕에 살았다. 사실 자식들 보는 앞에서 목을 매었는데 어찌 죽을 수 있을까. 진심이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시류에 영합하기만 했던, 애초에 도망부터 쳤던 자들에 비하면야 그들의 절개가 추켜세울만 하지만, 그 드높은 기개가 향한 '대의'라는 것이 현대를 사는 우리 눈에는 너무도 답답한지라 또 다시 가슴이 묵직해진다. 대체 성리학은 조선에 무엇을 주었을까. 현실론자 최명길이 양명학으로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김상현이 둘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자빈 강씨를 사사할 때 인조가 부렸던 억지를 저자가 따박따박 토를 달아둔 논평이다. 저렇게 논술 쓰면 망한다는 지적에 웃자니 속이 쓰리다. 임금이 죽이려드는데 살려내기가 쉬웠겠냐마는, 폭주하는 임금을 막아내지 못한 신하들도 창피함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강바닥이 다 파헤쳐지기 전에, 우리는 더 거세게 항의를 해야겠지?) 



줄친 부분들을 모두 한글 파일에 담았더니 8장이 나온다. 막판에 꾀가 나서 타자로 치지 않고 사진으로 찍었다. 일종의 자료 보관용이다.  

저자는 이번 편이 편집팀에게서 몇 가지 부족하단 평을 받아서 가슴이 철렁했다고 한다. 지적된 부분들에 대해서는 일견 공감이 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작가님을 지지한다. 이 답답한 내용을 어찌 유머와 재미로 접근하겠는가. 아니어도 작품은 진지함으로 이미 감동을 주었고 그 공에 감사하게 만든다.  

재료비 인상으로 부득불 책값을 올리게 되었다고 양해를 부탁하는 말이 책 마지막에 쓰여 있다. 이 정도면 친절하다 못해 예의바른 출판사가 아니던가. 독자는 이런 책을 꾸준히 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호강하고 있다.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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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9-06-23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재밌어요.^^

마노아 2009-06-23 09:18   좋아요 0 | URL
완소 시르즈예요.^^

후애(厚愛) 2009-06-23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에 나갈 때까지 시리즈가 품절이나 절판이 안 되기만을 빌고 있는 접니다 .^^

마노아 2009-06-23 09:18   좋아요 0 | URL
그때는 아마 재판이 나올 것 같아요. 평판이 좋거든요.^^

비로그인 2009-06-23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역사 만화였군요.
얼마전에 한권으로 된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와 사람들이 광해군나쁘다나쁘다 하는데
폐모살제라는 인조반정의 명분은 사실 광해군이 주변 신료들의 성화때문이기도 하고
나름 인간적 갈등이라도 보여줬는데 인조는 '리얼'-_- 악하다라고 생각했었거든요.
특히 소현세자에 대한 부분에서.
이 책 무척 재밌겠어요. 와, 사고싶어요!!

마노아 2009-06-23 12:04   좋아요 0 | URL
적극 추천하는 책이에요. 유머와 감동이 정보와 함께 잘 버무러져 있어요.
다만 인조실록 같이 복장 터지는 순간이 무수히 나온다는 게 문제랍니다.^^;;;

다락방 2009-06-24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게 이런책 이었군요! 저도 잽싸게 보관함에 넣었습니다. 구입하게 되면 마노아님께 땡스투 하는걸 잊지 않기 위해 메모도 해두었어요! :)

마노아 2009-06-24 21:33   좋아요 0 | URL
아! 보관함에 담아두면 메모도 할 수 있죠. 그건 한 번도 안 해봤네요. 너무 당연한 건데도 말이에요.^^

같은하늘 2009-06-24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쩌란 말인가... 이것 또한 흥미롭네요...
마노아님 때문에 요즘 "식객" 보고있는데...^^

마노아 2009-06-24 23:28   좋아요 0 | URL
저는 식객보다 훨씬 훌륭한 책이라고 강추합니다.ㅎㅎㅎ

BRINY 2009-06-26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행평가 독서퀴즈 대상도서로 선정해봤어요. 반응이 좋긴한데, 학생들이 인물의 이름은 기억못하고 만화에 나오는 그림 캐릭터의 특징으로만 기억한다는 맹점이 있더라구요. 어쨋든 좋은 책이고, 2학기에도 또 이 책으로 독서퀴즈하자고 하네요.

마노아 2009-06-26 14:16   좋아요 0 | URL
이미지가 있을 땐 아무래도 그게 문제가 되더라구요. 마냥 기억하기엔 인물들이 너무 많구요.
그래도 아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으니 고무적이에요.^^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 - 심리학자가 만난 조선의 문제적 인물들
김태형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뿌듯할만큼 재밌고 놀라운 책을 만났다. 심리학자의 눈으로 정조와 율곡 이이, 허균과 연산군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고, 그들의 행보를 설명했으니 접근 방식도 무척 신선했다.  

제목에 박혀 있듯이 정조 편을 가장 기대했는데, 오히려 뒤로 갈수록 더 흥미로워져서 모범생 정조와 율곡 이이보다 풍운아 허균과 불쌍한 악인 연산군 편이 꽤 인상 깊게 읽혔다. 사실 정조 편은 인용한 책들이 읽은 게 많아서 반복되는 느낌을 주어서 기대보다 지루하다고 느낀 것이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심리학에 관련된 책은 거의 보지 못한 듯했다. 예전에 종교개혁가 루터와 히틀러를 비교한 책을 본 일이 있었지만 리포트 때문에 급하게 읽고 깊이 생각지 못했던 기억이 스쳐갈 뿐이다. 이 책을 읽고 보니 심리학이란 분야가 다른 분야의 학문을 깊고 넓게 접근할 수 있는 단서가 되어주는 것 같아 관심이 마구 솟는다.  

알다시피, 정조는 아버지가 죽는 것을 어려서 지켜본 불행했던 과거가 있다. 마찬가지로 연산군은 기억도 못할 만큼 어릴 때 어머니가 죽임을 당했다. 똑같이 불행했던 과거를 안고 있지만 왕이 된 후 그들의 행보는 극과 극으로 달린다. 정조가 성군으로 평가 받으며 그 죽음을 애석해 하는 것에 비해 연산군은 반정으로 쫓겨났고, 역사는 그를 동정할지언정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 그런 차이가 벌어졌을까. 그것을 저자는 심리학적으로 파악, 분석해 놓은 것이다.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줄기는 심리학적으로 '건강한 부모님'을 가졌는가!이다. 그러니까 정조는 아버지를 비참하게 잃었지만, 아버지를 잃기 전의 만 10년 동안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성장했기 때문에 건강한 심리 상태를 가질 수 있었다. 율곡 이이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기만 하는 유약한 아버지 아래서 자라서 거기에 대한 사회적 불안을 갖고 있었지만 모두가 알듯이 훌륭한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성격 이론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전략가'의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이같은 기질은 제왕과 유학자로서 잘 어울리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책 보면서 든 생각은, 율곡 이이도 임금으로 태어났으면 조선의 역사가 기막히게 바뀌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뭐 의미 없는 바람이긴 하다.) 

그러나 또 애석하게도 두 사람은 양 부모님의 혜택을 모두 받지는 못했으니,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크게 일조한 혜경궁을 어머니로 둔 정조, 그리고 무능하고 유약하기만 했던 아버지와 그 아버지와 갈등을 삭이느라 고생했던 어머니를 보고 자란 율곡 이이에게는 모두 상처가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을 바른 방향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거대한 계획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늘 걸림돌이 되었고, 아버지와의 일도 반성하지 않아 끝내 정조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게 되었다. 정조가 순수하게 병으로 죽은 게 맞다면, 거기엔 그 어머니 혜경궁과 외가쪽 일가붙이, 그리고 할아버지 영조의 역할이 크게 자리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 게 바로 홧병이 아니겠는가.  

율곡 이이는 잦은 사직으로 구설수에 오르고 말았는데, 그가 무수하게 선조를 비판하고 또 관직을 마다하고 물러가기를 반복했던 것은 선조에게서 아버지를 읽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정면으로 부딪히지 못하고 도망치기만 했던 그 아버지를 꼭 빼닮은 선조. 그 선조가 습성을 고치고 달라진 모습으로 태어나기를 얼마나 고대했겠는가. 그러나 번번이 그 기대는 무너졌고, 그때마다 율곡은 어머니 사임당이 그랬듯이 한발자국 물러나서 마음을 다스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은 붕당이 형성되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정적들에게 비판의 빌미가 되곤 했고, 안타깝게도 명도 길지 않았던 율곡은 뜻을 다 펼치기도 전에 세상을 등져야 했다.  

건강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한 아버지를 보고 자란 아이들이 막연하게 사회를 향해 갖는 불안함을 설명 들으니 깊이 고개가 끄덕여진다. 스스로에게도, 또는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들여다볼 수 있는 부분들이 아니던가. 

허균은 더 파격적이었다. 천재 시인이었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그 허균이 정말로 역모죄로 죽었는지,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했었다. 저자는 시원하게 설명해준다. 곧았지만 차갑고 엄하기만 했던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던 허균, 그리고 더 모질기만 했던 엄마로부터 결핍만 느꼈던 허균. 그래서 18세나 차이가 나는 둘째 형 허봉을 아버지로 여기고 살았는데 그 형이 죽고, 이어서 누이(허난설헌)도 젊어 죽고 말았으니 그가 가졌던 그 결핍감이 얼마나 컸을까. 성격적으로는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었던 욕구가 너무도 컸던 허균은 그 때문에 관직에 나갈 때도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되기를 원했으니 수령으로 떠받들려지는 그 기분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한테 참 욕 많이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되짚어보니 욕먹을 짓만 골라서 했다. 그리고 그런 행동들의 저변에는 모두 그의 심리학적 질병들, 마음의 병들이 원인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간신 이이첨과의 대립으로 그의 생을 무상하게 끝을 내고 말았던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 안정적이고 건강한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는 설령 천재라 할지라도 그 삶이 불운하고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사례라 하겠다.  

연산군은 기존에 알려져 있던 그의 이야기와 너무도 달라서 충격적이었다. 어머니를 죽게 한 할머니 인수대비를 극도로 증오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할머니에게 엄청 집착했었던 연산군. 때문에 그 모순으로 인해 스스로 더 병들었던 연산군이다. 그가 태어날 무렵엔 그의 어머니가 궁중 세 대비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의 함정에 빠져들 시점이었고, 태어나자마자 이리저리 집을 옮겨다니며 여러 사람 손을 거쳐 자라야 했던 연산군이 정서적으로 안정을 얻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과 마마보이 아빠 성종의 편파적인 모습은 또 그의 어깨에 어떻게 얹히었겠는가. 그런데 기막히게도 연산군은 지금으로 치면 딱 연예인 스타일의 기질을 가진 아이여서 할머니에게 사랑 받으며 자랐다. 그런데 이 사랑은 표면적으로 어리광을 부리고 재롱을 떨어서 얻어낸 사랑으로, 제 손으로 죽인 며느리의 아들을 마음 깊이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니 가짜 사랑에 불과했고, 그러니 연산군의 심리에 그 어떤 보험도 되어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에 기대어 제 생명을 유지한 연산군은 스스로에 대한 경멸을 이기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자아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그를 더욱 벼랑으로 몰았을 것이다. 비극은 그런 그가 왕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 광기를 제어할 사람이 주변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병든 연산군을 부추겨서 제 욕심만 채우던 훈구파들도 연산군의 광기에 철퇴를 맞아 여럿 죽었으니 그 또한 역사의 진리라고 할 수 있겠다.  

태생적으로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성격적으로라도 자신을 변화시켜줄 어떤 계기가 있으면 좋았으련만, 그런 복도 연산군은 없었다. 하긴, 태어나기를 그렇게 박복하게 났는데, 무엇으로 그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책의 맨 뒤에는 저자가 주로 사용한 성격의 유형들에 대한 표가 나오는데, 차라리 그걸 좀 더 쉽게 풀어서 앞에 제시하고 본문을 읽게 했으면 이해도가 더 높아졌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도자', '전략가', '어린아이' 같은 용어들은 미리 이 표를 보지 않고 이해하기엔 너무 전문적인 용어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저자가 그들 조선의 인물들을 분석하면서 현대의 우리가 비교할 수 있는 예들을 들어주는 것은 무척 적절했고, 보여주는 시각도 건강하기 그지 없어서 무척 안심이 되고 위로가 되는 기분이었다.   

   
 

정조는 지금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더라도 저 가난한 무리들은 절대 갚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신하에게  

“구제하여 살리는데 뜻이 있으니 잃어버린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하고 답하는 군주였다. 이는 요즘으로 치면 장관들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고 노동자에게 임금을 올려주면 자본가들이 힘들어져서 경제성장에 방해가 된다’고 말하자, 대통령이 ‘민중이 가난한데 자본가들만 살찌는 경제성장을 하면 무엇 하며, 민중에게 돌아간 돈은 결국 다 국가 안에 있는 것이니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답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조는 극소수 기득권세력의 왕이 아니라 절대 다수인 백성을 위한 왕이 될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보수 세력에게는 ‘먼저 부자들에게 돈을 모아주어야 국가가 성장한다’는 성장제일주의, 친부자 정책을 집행할 대변자가 필요했지 힘없고 가난한 백성을 구제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추진하려는 왕은 불구대천의 원수일 뿐이었다. 기득권세력은 정조의 개혁을 좌절시키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기 위해 발악하기 시작했다. (111쪽)

 
   
   
 

이미 세상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나빠져 있다는 선조의 넋두리에 대해 이이는  

“그 자리에 맞는 임금이 있고 그 자리에 맞는 재상이 있으면, 이는 회복할 수 있는 때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또 말했다. “진실로 그 일을 하면 반드시 그 공이 있으니, 일을 하는 데도 공이 없는 경우는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직 못 보았습니다.”  

두 손 놓고 비관에 빠지기 전에 이이의 간곡한 호소에 귀를 기울여 보자.
 

“하나의 옳지 않은 일을 해서 천하를 얻더라도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서 온 세상을 얻더라도 이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맹자의 가르침을 한 치도 어기지 않으며 살았던 이이가 참으로 그리워진다. (201쪽)

 
   
   
  왕의 여흥을 위해서는 백성들이 고통을 감내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연산군의 태도는 마치 1970~80년대 정통성이 없는 군사독재정권이 청와대 뒷산을 통제하고 도시를 정화한다며 빈곤층의 집을 철거하던 정책을 연상시킨다. 또한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원화성 건설공사에 참여하는 백성들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백성들과 끊임없이 만나 그들의 고충을 들으려 한 정조와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왕의 권위는 스스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신하들과 백성들의 자발적인 존경심을 획득할 때 확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권력을 과시하고 법을 앞세우고 금표를 세우는 식으로는 백성들의 반발심만 키우게 되므로 오히려 권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연산군은 개인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므로 가시적이고 강압적인 권위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고 이는 왕실과 백성들의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 (356쪽)
 
   

이 책이 시리즈로 나와서 좀 더 다양한 인물들을 이렇게 심리학적으로 파헤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저자에게는 무척 수고롭고 고된 작업이 될 테지만, 보람 역시 클 거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다른 심리학 도서도 좀 더 챙겨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잘 만든 책인데 생각보다 입소문을 못 타고 있는 듯해서 살짝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사족이지만, 표지 참 멋지게 잘 나왔다. 제목은 좀 평범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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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하늘 2009-06-20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관심이 가는 책인걸요...
심리학하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것 같이 느껴졌는데...
이 책은 웬지 재밌게 볼 수 있을것 같은데요...

마노아 2009-06-21 01:38   좋아요 0 | URL
심리학 강의를 들으면 무척 재밌을 것 같아요.
책으로 만나는 것보다 더 신날 것 같아요.^^

바람돌이 2009-06-21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밑줄 긋기 해놓은 부분들을 보니 읽어보고 싶네요. 처음에 제목만 들었을때는 요즘 한없이 가볍게 나오는 역사책들의 시류를 따르는 것 같아 별 관심이 없었는데 말이죠.

마노아 2009-06-21 01:49   좋아요 0 | URL
제목이 너무 유행을 탔죠? 저도 그래서 가벼운 책 정도로 생각하고 읽었는데 뜻밖에 제대로 건졌다는 기분이에요.^^

순오기 2009-06-22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모임 토론도서로 정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노아 2009-06-22 12:59   좋아요 0 | URL
회원분들 반응이 좋을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09-06-26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스트 특종 당선 축하 드려요!!
늘 부지런히 읽고 쓰시는 마노아님^^
이 책 재미있겠어요.

마노아 2009-06-27 05:23   좋아요 0 | URL
헤헷,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 책 홍보도 되네요. 참 즐겁게 읽었답니다. 그래서 더 기분 좋아요.^^
프레이야님도 당선 축하해요.^^

마냐 2009-06-28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 덕분에 놓친 리뷰, 즐감했습니다. 전 약간 으스스.....제가 어떤 엄마이냐가 늘 찔려서요..^^;;

마노아 2009-06-28 10:18   좋아요 0 | URL
엄마를 '모신'이라고 하는 이유를 절감했다니까요. 진짜 으스스하긴 해요. 연산군 편에선 더 했답니다.
마냐님의 당선도 축하해요.^^

순오기 2009-07-02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우수리뷰로 뽑아줘야 더 좋았을 특종이란 말예요.^^

마노아 2009-07-02 10:27   좋아요 0 | URL
요새는 다음 블로거 특종을 거의 '리뷰'에 주더라구요. 전 우수 리뷰 뽑혀본 지는 두 해가 되어갑니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