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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귀한 왕의 이름은 칭기스 칸이었으니

그는 당대에 큰 명성을 떨쳐

어느 지역 어느 곳에도 만사에 그렇게 뛰어난 군주는 없었다.

-제프리 초서, <캔터베리 이야기>(1395년 경)

 

민족! 민족이 무엇인가?

타타르족! 훈족! 중국인! 그들은 벌레처럼 몰려다닌다.

역사가는 그들을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려 애쓰지만 헛수고일 뿐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니면 한 사람 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개인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일기>(1851년 5월1일)

 

칭기스 칸과 그의 후손들이 지구를 흔들자

술탄들이 쓰러졌다.

칼리파들이 넘어졌고, 카이사르들은 왕좌에서 떨었다.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

 

아시아가 우리를 삼키고 있다. 어디를 보든 타타르와 마주친다.

-토마스 만, <마의 산>

 

1930년대에 스탈린의 심복들은 여러 차례 몽골의 문화와 종교를 공격하여 파괴했고 그 과정에서 약 3만 명의 몽골인을 처형했다.

 

칭기스 칸의 혁신적인 전투 기술로 인해 중세 유럽의 중무장한 기사는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나고, 전체에 통합된 단위를 이루어 움직이는 규율 잡힌 기병이 전면에 나섰다. 칭기스 칸이 방어용 요새에 의존하는 대신 기습을 기발하게 활용하고 공성전을 완벽하게 다듬어 운용하자, 성벽을 두른 도시의 시대도 끝이 났다.

 

몽골군은 2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로마군이 40년 동안 정복한 것보다 많은 땅과 사람을 정복했다. 칭기스 칸은 아들, 손자 들과 함께 13세기에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문명들을 정복했다.

 

오늘날 세계 인구의 다수가 한때 몽골이 점령했던 나라에 살고 있다. 현대 지도에서 칭기스 칸이 정복한 땅은 30개국이며 인구로는 30억이 훨씬 넘는다. 이런 성취에서 가장 놀라운 측면은 그의 휘하에 있던 몽골 부족 전체가 약 100만 명으로, 현대 일부 기업의 직원들보다 적은 수였다는 점이다. 칭기스 칸은 이 100만 명에서 군대를 징집했는데, 그 수는 10만 명에 불과했다. 현대의 대형 경기장도 꽉 채우지 못할 숫자였던 것이다.

 

칭기스 칸은 돌이 아니라 나라로 건축을 했다. 몽골군은 동유럽에서 슬라브족의 공국과 도시 여남은 개를 묶어 하나의 커다란 러시아 국가를 만들었다. 동아시아에서는 3대에 걸쳐 남쪽의 송나라에 만주의 주르첸(여진), 서쪽의 티베트, 고비 사막 옆의 탕구트, 투르키스탄 동부의 위구르의 땅을 결합하여 커다란 중국을 만들었다. 몽골은 통치 영역을 확대하면서 인도도 통치했다. 인도는 대체로 몽골 정복자들이 세운 경계 안에서 현대까지 생존해왔다.

칭기스 칸의 제국은 주위의 많은 문명을 연결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냈다. 그가 태어난 1162년, 구세계는 여러 지역문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각각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이웃 외에는 다른 문명을 거의 알지 못했다. 중국은 유럽을 몰랐고, 유럽은 중국을 알지 못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중국과 유럽 사이를 여행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칭기스 칸이 사망한 1227년에 중국와 유럽은 외교나 상업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연결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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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은 부와 보물을 축적하는 제국이 아니었다. 대신 칭기스 칸은 전투에서 얻은 물자를 널리 분배하여 다시 상업적 유통망으로 들어가게 했다. 대부분의 통치자가 스스로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 칭기스 칸은 통치자도 미천한 목자와 똑같이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복당한 모든 신민에게 종교와 관계없이 완전한 충성을 요구했지만, 영토 내에서 종교적 자유를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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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대부분의 정복자들에게 비참하고 때 이른 죽음을 선고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33세의 나이에 바빌론에서 의문을 남기고 죽었다. 부하들은 그의 가족을 죽이고 땅을 나누어 가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동료 귀족과 이전 동맹자들에게 로마 원로원에서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모든 정복지가 파괴되거나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과정을 지켜본 뒤 지구에서 가장 접근하기 힘든 외딴 섬에서 외로운 수인으로 고독하고도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그러나 거의 70세에 이른 칭기스 칸은 자신의 야영지 침대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의리 있는 친구, 명령만 내리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충성스러운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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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묻은 자리에는 능도 없고 사원이나 피라미드는커녕 그가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작은 묘비조차 세우지 않았다. 몽골인의 믿음에 따르면 죽은 자의 몸은 평화롭게 놓아두면 그만이었으며 굳이 기념비를 세울 필요가 없었다. 영혼이 이미 몸을 떠났기 때문이다. 영혼은 영기에 머물며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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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인은 과학 기술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열지도 않았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지도 않았고, 책이나 연극도 거의 쓰지 않았으며, 세상에 새로운 작물이나 영농기술을 내놓지도 않았다. 몽골의 장인은 직물을 짜지도 못하고, 금속을 주조하지도 못하고, 도기를 만들지도 못하고, 심지어 빵을 굽지도 못했다. 그들은 자기나 도기를 제작하지도 않았고,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고, 건물을 짓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군대는 여러 문화를 차례차례 정복하면서 이 모든 기술을 모아 이 문명에서 저 문명으로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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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영향을 받은 결과인 르네상스 기간에 유럽 생활의 모든 측면-과학기술, 전쟁, 의복, 상업, 음식, 예술, 문화, 음악-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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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다른 정복자와는 달리 칭기스 칸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거나, 자신의 상을 조각하거나, 동전에 자신의 이름이나 얼굴을 새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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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과학자들은 아시아 사람들과 아메리카 인디언이 열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을 때 그들을 몽골 인종으로 분류했다. 의사들은 우월한 백인종 어머니가 지진아를 낳는 이유를 설명하고 싶을 때, 지진아의 얼굴 특징을 보면 아이의 조상 가운데 누군가가 몽골 전사에게 강간을 당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불행한 아이는 백인이 아니라 몽골 인종이었다. 매우 부유한 자본가들이 부를 과시하면서 민주주의나 평등이라는 가치에 반대되는 태도를 보일 때 이들은 무굴 사람이라고 조롱을 당했다. 무굴은 몽골을 가리키는 페르시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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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베이징에서 한자로 적힌 문서 사본이 한 부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한자 자체는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한자들은 13세기의 몽골어 발음을 옮겨놓은 일종의 암호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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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칸이 입성했던 1220년 그날부터 1920년에 소비에트 군대가 진입할 때까지 꼭 700년 동안 칭기스 칸의 후손들은 칸과 아미르로서 부하라를 통치했는데, 이 통치자 가문은 역사상 가장 긴 가족 왕조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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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문화에서는 냄새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다른 문화에서는 만나거나 헤어질 때 끌어안거나 입을 맞추지만 초원의 유목민은 뺨에 입을 맞추는 것과 흡사한 동작으로 서로 냄새를 맡는다. 냄새 맡기에는 매우 깊은 감정적 의미가 담기는데, 여기에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이루어지는 가족간의 냄새 맡기에서부터 연인 사이의 성적인 냄새 맡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이 있다. 각 사람의 숨결과 독특한 체취는 그 사람의 영혼의 일부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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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지대의 모든 부족 가운데 몽골족과 가장 가까운 친족은 동쪽의 타타르족과 거란족, 그리고 더 동쪽으로 만주족, 서쪽으로 중앙아시아의 여러 투르크족이었다. 이 세인종 집단은 시베리아의 일부 부족들과 문화, 언어 유산을 공유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들 모두가 시베리아 출신일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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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든 여자와 아기는 보통 피해를 입지 않았다. 싸울 수 있는 나이의 남자는 보통 가장 빠르고 튼튼한 말을 타고 가장 먼저 달아났다. 그들이 죽을 확률이 가장 높았고, 전체 집단의 미래의 생계가 그들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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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족에게 싸움이란 진짜 전쟁이나 지속적인 분쟁이라기보다도 생계를 위한 일상적인 약탈에 가까웠다. 복수도 약탈의 구실이 되곤 했지만, 진짜 동기가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중요한 것은 살인이 아니라 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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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군대와는 달리 몽골군은 얼어붙은 강이나 호수에서도 쉽게 움직이고 심지어 싸움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인은 얼어붙은 볼가 강이나 도나우 강이 외침의 방어선 노릇을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몽골족에게는 오히려 상대의 방비가 가장 허술한 철에 말을 타고 성벽까지 다가갈 수 있는 간선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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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칸 칼둔의 숲에 숨은 테무진은 그의 평생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내의 납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부르테를 다시 빼앗아올 희망을 접을 수도 있었다. 사실 이것이 예상되는 선택이다. 그의 작은 집단으로는 강력한 메르키트에게 도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른 부인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의 어머니를 납치했듯이 테무진도 여자를 납치해야 했다. 더 힘센 남자들에게 부인을 빼앗긴 사람한테 자발적으로 딸을 내줄 가족은 없었기 때문이다.

91

7은 몽골족에게 불운한 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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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칸은 주권자를 포함한 모든 개인보다 법이 우위에 선다는 사실을 선포했다. 통치자를 법에 복속시킨 것은 그때까지 어떤 문명도 이루지 못했던 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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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에 현재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몽골 남부 지역에는 수많은 독립 국가와 왕국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세계 인구의 1/3이 살고 있었다. 주르첸 왕국은 인구가 약 5,000만으로, 현재 중국에 포함된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수많은 왕국들 가운데 두 번째로 큰 나라였다.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영토는 수백 년 중국 문명의 상속자인 송 왕조의 행정부(정확하게 말하자면 남송!) 관할하에 있었으며, 그들은 항저우(당시에는 임안이라고 불렀다.)를 수도로 삼아 중국 남부에서 약 6,000만 명의 인구를 다스리고 있었다. 몽골 고원과 송나라 사이에는 유목민의 국가들이 한줄로 늘어서서 완충 역할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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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인은 장거리 여행에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반드시 필요한 것만 지니고 다녔다. 이들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전통적인 양털 겉옷 밑에 바지를 입고, 귀덮개가 달린 모피 모자를 쓰고, 밑창이 두꺼운 승마용 장화를 신었다. 이렇게 각 전사는 악천후에도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옷을 입었을 뿐 아니라, 불을 피울 수 있는 부싯돌, 물과 젖을 담을 수 있는 가죽 그릇, 화살촉을 날카롭게 갈 수 있는 줄, 짐승이나 포로를 묶을 수 있는 밧줄, 옷을 수선할 수 있는 바늘, 뭔가를 자르는 데 사용하는 칼과 자귀,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는 가죽 부대 등을 지니고 다녔다. 그리고 십호마다 작은 천막을 하나씩 가지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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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의 이동과 대형은 두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이 점에서 이들은 다른 모든 전통적인 문명의 군대와 분명하게 달랐다. 첫째, 몽골군은 모두 기병으로만 이루어졌다. 행군하는 보병 없이 무장한 기병만 있다는 뜻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나라의 군대는 대개 다수의 전사가 보병이었다.

몽골군의 두 번째 독특한 특징은 병사들과 함께 다니는 예비의 많은 말들 외에는 따로 병참부나 거추장스러운 보급 대열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동하면서 가축의 젖을 짜고, 가축을 도살하여 식량을 만들고, 사냥과 약탈을 통해 배를 채웠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 전사들이 불을 피우거나 음식을 조리하느라 멈추는 일이 없이 열흘 동안 여행을 할 수 있으며, 말의 피를 마시고, 각 사람이 5kg의 마른 젖 덩어리를 가지고 다니다가 매일 그 가운데 500g 정도를 물이 담긴 가죽 용기에 풀어 식사를 해결한다고 전했다. 전사는 가늘게 자른 육포와 마른 응유를 가지고 다니다 말을 탄 채로 먹었다. 새로 고기가 생겼는데 조리할 시간이 없으면 날고기를 안장 밑에 넣었다. 그러면 곧 씹을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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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르첸 병사들과 비교할 때 몽골군은 훨씬 더 건강하고 튼튼했다. 몽골족은 고기며 우유며 요구르트 같은 유제품으로 이루어진 식사를 꾸준히 했으며, 적들은 여러 가지 곡물로 이루어진 죽을 먹었다. 농민 전사들은 곡물 식사를 하기 때문에 뼈의 발육이 좋지 않았고, 이도 썩었고, 몸에 힘이 없었고, 병에 잘 걸렸다. 반대로 몽골 병사는 아무리 가난해도 주로 단백질을 먹었으며, 따라서 이와 뼈가 튼튼했다. 탄수화물이 많은 식사를 하는 주르첸 병사들과는 달리 몽골 병사들은 식사를 하지 않아도 하루 이틀은 너끈히 버텼다.

전통적인 군대는 긴 열을 이루어 똑같은 길을 가고, 식량을 잔뜩 운반하는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몽골군은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서 이동했다. 그래야 가축이 풀을 충분히 뜯을 수 있고, 병사들이 사냥을 할 기회도 최대한 늘어났기 때문이다.

153

몽골족은 우월한 무기 때문에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었다. 무기를 만드는 기술은 오랫동안 비밀이 유지될 수 없다. 한쪽 편에서 유용하게 써먹은 무기는 전투를 몇 번만 하고 나면 상대편도 사용하게 된다. 몽골의 승리는 작은 무리를 지어 다니던 유목민이 수천 년 동안 다져온 단결과 규율에서 나온 것이며, 지도자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디서나 전사들은 지도자를 위해 죽어야 한다고 배운다. 그러나 칭기스 칸은 부하들에게 자신을 위해 죽을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을 할 때 무엇보다도 몽골군의 생명을 보전하는 것을 중요한 전략적 목적으로 삼았다. 수십만 명의 병사들에게 쉽게 죽으라는 명령을 내렸던 역사 속의 다른 장군이나 황제들과는 달리 단 한 명의 목숨이라도 함부로 희생하려 하지 않았다. 칭기스 칸이 군대를 위해 만든 가장 중요한 규칙들은 인명 손실과 관련된 것이었다. 몽골 전사는 전장의 안팎에서 죽음, 부상, 패배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생각만 해도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61

중국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전쟁의 승리는 하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얻는 것이었다. 칭기스 칸이 계속 승리를 거두어나가자 중국의 농민이나 주르첸 전사들은 그가 하늘의 명령에 따라 싸우는 것이며, 그에게 대항하는 것은 곧 하늘에 대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174

13세기 무슬림의 땅에는 아랍, 투르크, 페르시아 문명이 결합되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들이 모여 살고 있었으며, 이 나라들은 천문학이나 수학에서부터 농학이나 언어학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또 일반 주민의 문맹률도 세계에서 가장 낮았다. 사제만 글을 읽을 수 있는 유럽이나 인도, 정부 관료만 글을 읽을 수 있는 중국과 비교할 때 무슬림 세계에는 어느 마을을 가나 쿠란을 읽고 무슬림 법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은 있었다. 유럽, 중국, 인도가 지역 문명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면, 무슬림은 상업, 기술, 일반 학문의 높은 수준으로 볼 때 세계 수준의 문명에 가장 근접해 잇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머지 세계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추락할 거리도 그만큼 길었다. 몽골 침략군의 말발굽은 다른 어느 곳보다 이곳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184

이 시대의 문명화된 군대가 공포를 자아내는 행동을 하는 것과 비교할 때 몽골군의 행동은 잔인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이 공포를 자아낸 것은 특별히 잔혹해서가 아니라, 정복이 매우 빠르고 능률적이었으며 부자나 권력자의 목숨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원정은 그들이 피에 굶주린 행동을 했거나 사람들 앞에서 잔혹성을 과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막강한 군대와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도시들과 싸워 전례 없는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눈길을 끌었다.

186

몽골군이 정복한 도시의 유적을 조사해보면 실제 주민의 수가 희생자로 계산된 주민 수의 1/10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건조한 사막 토양이기 때문에 뼈가 수백 년, 때로는 수천 년씩 보존된다. 그러나 어디를 보아도 몽골군이 살육했다고 하는 수백만 명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칭기스 칸은 주민 살육자라기보다는 도시 파괴자라고 묘사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복수를 하거나 공포심을 자아내는 목적 외에 전략적인 목적에서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206

도시 주민에게는 일 년 내내 항상 먹을 것을 공급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식량을 생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고비 사막 남쪽에서 큰 대가를 치르고 들여오는 물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카라코룸은 넓은 초원지대에 있었으므로 매서운 겨울바람을 피할 수가 없었다. 가축은 산이 있는 곳으로 피할 수 있었지만, 도시는 철마다 자리를 옮길 수가 없었다.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은 이런 문제들에 시달리다 결국 사라지고 만다.

 

208

몽골인이 기독교에 끌린 데는 예수라는 이름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던 것 같다. 예수라는 말은 몽골의 신성한 숫자인 9를 가리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리며, 왕조의 창건자라고 할 수 있는 칭기스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의 이름과 비슷하게 들리기도 한다. 기독교인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카라코룸이라는 작은 도시는 아마 당시 세계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개방되고 관용적인 곳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종교인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자기 신앙을 지키는 곳은 달리 찾아볼 수 없었다.

 

216

말을 탄 러시아의 공후들은 반짝거리는 창과 검, 화려한 기를 들고 문장이 박힌 옷을 자랑하며 육중한 군마 위에 앉아 있었다. 이 유럽의 군마들은 힘의 과시를 위해 키웠기 때문에 연병장에서 고귀한 승마자의 갑옷 무게는 어렵지 않게 감당했지만 전장에서 속력이나 민첩성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러시아 귀족은 육중한 금속 갑옷을 입어도 전장에서 다른 유럽 귀족을 만났을 때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상대방 역시 비슷한 과시용 말을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방에서 보병이 패주하는 상황이라 그들 역시 달아나야 했다. 그들의 말은 아름답기는 했지만 무거운 짐을 싣고 오래 달릴 수는 없었다. 몽골군은 철갑을 두른 전사들을 따라잡았고 러시아의 도시국가를 다스리는 공후들은 하나씩 죽음을 당했다. 몽골군은 전투가 시작되었던 흑해로 돌아가는 길 내내 러시아군을 추적하여 도륙했다. 1224년의 노브고로드 연대기에 따르면 몽골군과 싸우러 나간 대군 가운데 오직 “1/10만 고향에 돌아왔다.” 거의 1000년 전 훈족이 유럽을 공격한 이래 처음으로 아시아 군대가 유럽을 침공하여 대군을 완파한 것이다.

221

몽골은 늘 똑같은 방식을 따랐다. 어떤 영토를 원정할 때면 먼저 공식 사절을 보내, 항복하여 몽골 가족에 합류하고 대칸의 봉신이 될 것을 요구한다. 상대가 동의를 하면 사절은 새로운 봉신을 적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할 뿐 아니라, 권력과 신앙을 유지하는 것도 허용했다. 다만 속국은 이런 보호의 대가로 모든 재산과 물자의 10%를 몽골에 조공으로 바쳐야 했다. 그러나 항복 제안을 받아들이는 도시는 거의 없었다.

236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의 극도의 사악함” 때문에 죄 없는 자신들이 몽골인의 진노의 피해를 입고 있다고 비난했다.

237

유럽인은 자신들의 문명의 경계를 위협하는 몽골군을 물리칠 수는 없었지만, 국내의 적이라고 상상하는 유대인은 제압할 수 있었다. 요크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도시마다 성난 기독교인 군중이 유대인 거주 구역을 공격했다. 기독교인은 몽골인이 원정에서 사용했다고 하는 방법으로 유대인을 벌주려 했다. 그들은 유대인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학살했다. 간신히 도시를 빠져나온 유대인은 피난처를 찾아 떠돌았지만, 어디를 가나 더 심한 박해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피난민 가운데 유대인이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교회는 유대인에게 누구나 금방 알아볼 수 있도록 남들과 구별되는 옷을 입고 상징물을 달라고 명령했다.

238

몽골군은 도나우 강 너머를 정찰하기는 했지만 서유럽 전면 침공은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1241년 12월 11일, 우구데이는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은 카라코룸으로부터 6,500km 떨어진 유럽의 몽골군에게 4주에서 6주 내에 전해졌다. 차가타이도 비슷한 시기에 죽었다. 칭기스 칸이 죽고 나서 불과 14년이 지난 시점에 아들 넷이 모두 죽은 것이다. 그러자 칭기스 칸의 손자들은 다음 대칸이 되기 위한 경쟁을 계속하기 위해 고향으로 달려갔다. 가문들 간의 투쟁은 이후 10년간 계속된다. 적어도 이 10년 동안은 세계가 몽골의 침략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240-241

몽골의 남자들이 전장에 머물며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느라 바쁠 때 여자들은 제국을 운영했다.

우구데이는 대칸으로 재위하는 동안 술에 취하는 일이 너무 잦아 제국을 제대로 이끌 수 없었다. 그는 제1부인은 아니었지만 가장 유능했던 투레게네에게 행정권을 점차 넘겨주었다. 1241년에 우구데이가 죽자 투레게네는 공식 섭정이 되었다. 1251년까지 이후 10년간 그녀는 다른 여자들 몇 명과 더불어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관리했다. 이 여자들 가운데 몽골족 출신은 없었다. 모두 정복당한 초원지대 부족 출신으로 칭기스 칸 집안에 시집을 왔다. 또 이 여자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성도 종교도 권력투쟁의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이들은 자신의 아들의 손에 제국 전체를 넘겨주려고 싸웠다.

249

칭기스 칸 자신은 비교적 약하고, 술을 좋아하고, 자기중심적인 아들들만 낳았지만, 소르칵타니가 낳아서 훈련시킨 네 아들은 모두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게 된다. 그녀의 아들들은 모두 칸이었다. 또 뭉케에 이어 아릭 부케, 쿠릴라이가 대칸 자리에 오르며, 나머지 아들 훌레구는 페르시아의 일칸이 되어 그곳에서 독자적인 왕조를 창건한다. 그녀의 아들들은 페르시아, 바그다드, 시리아, 터키를 모두 정복하여 제국의 규모를 최대로 키운다. 그들은 남쪽으로는 송나라를 정복하고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까지 밀고 들어간다. 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던 아사신(Assassins-이들의 명성 때문에 훗날 유럽으로 건너와 암살자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일파를 없애고 무슬림의 칼리파를 처형한다.

264

아마 이스마일파가 대마초를 중시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그들을 핫샤신, 즉 “하시시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이름은 아사신이라는 말로 바뀌었다. 살인자들이 실제로 하시시에 취해서 행동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 이름은 고관을 암살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여러 언어에 스며들었다.

271

몽골군은 불과 2년 만에 서쪽의 유럽 십자군과 동쪽의 셀주크 투르크가 200년 동안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어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그들은 아랍 세계의 심장부를 정복했다. 그 이후 2003년 미군과 영국군이 들어올 때까지 무슬림이 아닌 부대가 바그다드나 이라크를 정복한 일은 없었다.

276

몽골 제국은 뭉케 칸 치세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뭉케는 칭기스 칸의 후손 가운데 몽골 제국 전체로부터 대칸으로 인정받은 마지막 칸이었다.

277

쿠빌라이는 교육을 잘 받았고 중국 문화가 지배하는 농경지역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황금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전적인 신임이나 인정을 받은 적이 없었다. 쿠빌라이는 건물이나 도시를 더 좋아했다. 심지어 중국어도 조금 할 줄 알았다. 이렇게 몽골의 전통적 생활로부터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늘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281

카라코룸은 불과 30년 동안 몽골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한 뒤, 몽골인 자신의 손에 의해 약탈을 당하고 파괴되어버렸다. 쿠빌라이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짧은 기간이기는 했지만 카라코룸은 세계의 중심이고 축이었다.

 

285

쿠빌라이 칸의 천재성은 그의 군대가 아무리 크고 그의 무기가 아무리 세련되었다 해도 단지 힘만으로는 중국 전체를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서 엿볼 수 있다. 그는 할아버지와 같은 수준의 군사적 기술을 갖추지 못했지만, 그의 집안 누구보다도 머리가 좋았던 것은 분명하다.

결국 쿠빌라이는 할아버지가 야만적인 힘으로 이루지 못했던 과업, 즉 지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 전체를 정복하고 통일하는 과업을 대중정치를 통해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중국식 수도를 건설하고, 중국식 이름을 채택하고, 중국식 왕조를 창건하고, 중국식 행정부를 수립했다. 그는 중국인보다, 적어도 송나라 사람보다는 더 중국인처럼 보임으로써 중국을 통제할 수 있었다.

288

뭉케가 아버지 톨루이에게 대칸의 자리를 추서했듯이 쿠빌라이는 그에게 중국 황제 자리를 추서했다.(툴루이는 예종이 되었다. 참고로 칭기스 칸은 태조, 우구데이는 태종, 구육은 정종, 뭉케는 헌종이며, 쿠빌라이는 세조가 되었다.) 쿠빌라이는 또 그들의 중국식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령했는데, 그 결과 그들의 모습은 몽골의 전사라기보다는 중국의 현자를 닮게 되었다.

292

쿠빌라이 칸의 행정부는 지주에게 소유권을 보장하고, 세금을 낮추고, 도로와 통신을 개선했다. 몽골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송나라의 가혹한 형법을 완화했다. 전체적으로 쿠빌라이의 치세 30여 년 동안 처형된 범죄자는 2500명 이하였다. 평균 사형 건수로 보자면 현대의 중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의 사형건수보다 훨씬 적다.

293

몽골 법은 자백을 얻어낼 목적으로 고문을 하려면 그 전에 용의자가 특정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단순한 의심 이상의 실체적 증거를 쥐고 있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몽골이 고문의 사용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던 시기에 유럽의 교회와 국가는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범죄에 증거를 불문하고 고문을 시행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296-297

과거의 행정제도는 보수를 받지 않는 학자 겸 관리들에 의존했다. 이들은 일을 해주거나 승인 도장을 찍어주는 대신 사람들한테서 돈을 강탈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몽골인은 일상적인 행정을 담당하는 하급직에는 보수를 주는 직원을 고용했다. 이들의 보수는 몽골 영토 전역에서 표준화되었으며, 다만 생활비 차이를 고려하여 지역마다 약간 다르게 지급했다.

합의를 전제로 한 회의체와 보수를 지급하는 공무원 제도를 만들려는 노력은 중국에서는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몽골 시대와 함께 막을 내렸다. 명나라는 위에서 아래로 다스리는 방식을 선호하여 권력을 잡자마자 회의제를 버리고 전통적인 관료제로 돌아갔다. 그 이후 중국 역사에서는 이러한 참여 행정 실험의 길이 막혀 있다가, 20세기에 이르러 공화국 창건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지방 회의체, 토론, 보수를 받는 행정가, 시민 참여 정부 등의 제도를 다시 도입하려고 노력했다.

297

쿠빌라이는 제국 전역의 교역 속도를 높이고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지폐의 사용을 급격하게 확대했다. 마르코 폴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지폐가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마르코 폴로는 뽕나무 껍질로 지폐를 만든다고 묘사하는데,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종이임을 알 수 있지만 당시 유럽에서는 몰랐다. 지폐는 다양한 크기의 사각형으로 잘라 그 가치를 기록하고 주홍색 도장을 찍었다. 지폐의 첫 번째 장점은 당시 사용되던 주화에 비해 다루거나 운반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이었다.

298

몽골인은 유교나 전족 같은 일부 중국 문화는 일관되게 거부했다. 쿠빌라이는 실용적 가치가 있는 사상이나 제도를 찾아 오래 전 중국 역사까지 뒤지는 사람이었다. 쿠빌라이는 전통적인 중국의 학문과 문화 가운데 몇 가지 유형을 장려하기 위해 학교를 세우고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들로 이루어진 한림원을 재건했다. 그는 1269년에 몽골 언어 학교를 세웠으며, 1271년에는 칸발릭에 몽골 국립대학을 건립했다.

몽골 조정은 몽골어만이 아니라, 아랍어, 페르시아어, 위구르어, 탕구트어, 주르첸어, 티베트어, 중국어를 비롯하여 덜 알려진 언어들을 위한 서기도 두었다.

299

몽골은 모든 사람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한 방법으로 문맹 퇴치를 장려했다. 쿠빌라이 칸은 농민의 자식을 포함한 모든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공립학교를 만들었다. 몽골은 겨울에는 농민의 자식들도 배울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교사들은 그들에게 고전 중국어 교육을 시키지 않고 구어를 사용하여 실용적인 교육을 했다. 몽골 왕조 기록에 따르면 쿠빌라이 칸의 치세에 공립학교가 2만 166개 세워졌다. 서구에서는 100년이 더 지난 뒤에야 작가들이 구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정부가 보통사람들의 자녀에 대한 공교육 책임을 떠맡은 것은 거의 500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다.

301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배우와 가수 같은 공연 예술가들이 매춘부나 첩처럼 존경도 받지 못하고 지위도 낮았다. 그러나 몽골 통치자들은 그들의 지위를 전문 직업인으로 격상하고 공연장이 장터, 매음굴, 선술집에 한정되지 않도록 극장 지구를 조성했다. 중국의 연극과 몽골의 음악 후원이 결합되면서 훗날 경극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307

쿠빌라이의 일본 침공은 실패했다. 그러나 일본의 사회적, 정치적 삶에는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몽골군의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화적 통일을 이루고 군국주의적 정부를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 몽골은 언제 그런 실패가 있었냐는 듯이 고개를 돌려 더 손쉬워 보이는 목표물을 찾았다.

몽골의 지상 정복은 계속되었다. 몽골군은 열대의 더위와 낯선 지형 때문에 큰 고초를 겪으면서도 미얀마, 베트남 북부의 안남, 라오스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베트남 남부의 참파나 인도 해안의 말라바르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몇 개 왕국은 스스로 몽골 지배에 복종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이런 복종은 현실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몽골에는 그들을 다스릴 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317

몽골인의 상업적 영향은 그들의 군대보다 훨씬 멀리까지 퍼져갔으며, 쿠빌라이 칸 치세에는 몽골 제국이 ‘몽골 회사’로 바뀌었다. 13세기 내내, 그리고 14세기 초에 몽골인은 제국 전체의 교역로를 유지했고 30 내지 50km마다 자리잡고 있는 대피소에 물자를 쟁여두었다. 역참은 운송용 동물만이 아니라 상인이 험한 지형을 헤쳐나가도록 도와주는 안내인까지 제공했다.

323

몽골 엘리트가 교역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전통과 뚜렷한 단절이 이루어졌다. 중국에서 유럽에 이르기까지 전통 귀족은 일반적으로 상업 활동을 불명예스럽고, 더럽고, 종종 부도덕하다고 멸시했다. 권력이나 신앙을 독점한 자들이 낮추어보는 육체노동 작업과 같은 급이었다. 나아가서 이 시대 봉건 유럽의 경제적 이상은 모든 나라가 자족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각 장원이 최대한 자급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봉건체제에서 수입된 물자에 의존하는 것은 곧 국내 경제의 실패를 뜻했다.

그러나 몽골은 상인을 강도보다 겨우 한 단계 높은 지위에 놓는 중국의 문화적 편견을 정면으로 공격하여 상인의 지위를 모든 종교와 직업보다 높은 자리로 격상했다. 상인보다 높은 지위는 이제 정부 관리밖에 없었다. 대신 중국 전통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던 유교 학자들을 아홉 번째 지위로 낮추었다. 거지보다는 높지만 매춘부보다는 하나 낮은 등급이었다.

 

325

역사상 대부분이 제국은 정복한 땅에 자신의 문명을 강요했다. 로마는 라틴어, 신, 와인, 올리브 기름, 밀농사를 강요했다. 밀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터키의 에페소스에서 독일의 쾰른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모든 도시는 도시 설계와 건축양식이 똑같았다. 시장과 목욕탕으로부터 기둥이나 문간의 아주 미세한 곳까지 마찬가지였다. 다른 시대로 가면 영국은 봄베이에 튜더 왕조식 건물을 지었고, 네덜란드는 카리브 해에 풍차를 세웠고, 스페인은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자신의 양식을 적용한 성당과 광장을 만들었고, 미국은 파나마에서 사우디아바리아에 이르기까지 그들만의 독특한 주거단지를 건설했다. 따라서 고고학자들은 어떤 장소에 남아 있는 물리적 흔적을 연구하기만 하면 힌두, 아스텍, 말리, 잉카, 아랍 제국의 성정을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몽골은 자신이 정복한 땅에 가벼운 몸으로 왔다. 그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정복당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언어나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외래 작물의 경작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주민의 집단적인 생활방식을 갑자기 바꾸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몽골은 대규모의 사람들을 움직이고 전쟁을 목적으로 새로운 과학 기술을 활용하는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몽골 평화 기간에도 똑같은 관행을 유지하여 유목민 사회의 이동 원칙을 생활과 문화가 매우 보수적인 지역에 적용했다.

326

전통적인 제국은 한 도시에 부를 축적했다. 모든 길은 수도로 통했고, 늘 가장 좋은 것은 수도에 이르렀다. 한 도시가 제국 전체를 지배하다 보니 로마나 바빌론 같은 이름은 제국 자체의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몽골 제국에서는 주요한 도시 하나가 전체를 지배한 적이 없었다. 제국 내에서 물자와 사람은 늘 이곳저곳으로 이동했다.

328

몽골은 문화를 휴대 가능한 형태로 바꾸었다. 단순히 물자를 교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모든 형태의 지식은 상품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333

유럽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은 적은 없지만 여러 면에서 몽골의 세계체제로부터 가장 많은 이득을 얻었다. 유럽인은 몽골 정복이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교역, 기술 이전, ‘세계 인식의 대전환’에 따른 모든 혜택을 입었다. 몽골은 헝가리와 독일에서 기사를 죽였지만 도시를 파괴하거나 점령하지는 않았다. 로마 멸망 이후 문명이 주류와 차단되었던 유럽인은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새 옷을 입고, 새 음악을 듣고, 새 음식을 먹었다. 그들의 생활수준은 거의 모든 면에서 급속하게 높아졌다.

340

몽골이 위대하다는 이미지는 1390년 경 제프리 초서가 가장 분명하게 표현했다. 초서는 외교적인 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광범위하게 여행했으며 자신의 독자들 다수보다 훨씬 더 국제적인 안목을 갖추고 있었다. 영어로 쓰인 첫 책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가장 긴 이야기는 칭기스 칸의 생애와 모험을 로맨틱하고 환상적으로 묘사한다.

 

이 고귀한 왕의 이름은 칭기스 칸이었으니

그는 당대에 큰 명성을 떨쳐

어느 지역 어느 곳에도

만사에 그렇게 뛰어난 군주는 없었다.

그는 왕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태어난 신앙에 따라

스스로 맹세한 법을 지켰다.

게다가 강인하고, 지혜롭고, 부유했으며,

누가 보아도 정이 많고 의로웠다.

그는 약속을 지켰고, 자비롭고, 명예로웠으며,

그의 감정은 중심이 잡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집의 어떤 젊은 남자 못지 않게

젊고, 생기있고, 강하며, 전투에서 앞서고자 했다.

그는 잘생긴 사람이고 운도 좋았으며,

늘 왕의 지위를 잘 유지하여,

그런 사람은 달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고귀한 왕, 이 타타르의 칭기스 칸.

 

343

몸 안에 산소가 부족하고 살갗 밑에 피가 말라붙기 때문에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시커멓게 변해갔다. 이 극적인 변화 때문에 이 병은 ‘흑사병’이라고 알려졌다. 환자는 보통 며칠 동안 몹시 괴로워하다가 죽었다.

상당히 그럴듯한, 그러나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병은 중국 남부에서 발생했고 몽골 병사들이 북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병의 세균은 벼룩 속에 살며, 벼룩은 쥐의 몸을 타고 남쪽에서 오는 식량이나 다른 공물과 함께 옮겨다녔다.

344

중국의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지역, 그리고 훗날 다른 도시의 수많은 쥐는 이 세균에게 완벽한 거주환경을 제공했다. 사람들은 쥐가 오랫동안 인간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아온 동물이라 이 병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1331년 연대기 기록자는 허베이성(하북성) 주민의 90%가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중국은 이 병 때문에 인구가 1/2 내지 1/3로 줄어든 것으로 전해진다. 13세기 초에 이 나라에는 1억 2300만 명 정도가 살았는데, 14세기 말에는 인구가 6,500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중국은 몽골 세계체제에서 제조업의 중심 역할을 했다. 따라서 중국에서 물자가 쏟아져 나가면서 병도 따라갔다. 이런 식으로 페스트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진 것으로 보인다.

페스트는 교역으로 옮겨지는 전염병이었다. 몽골이 상인을 위해 건설한 도로와 역참 또한 의도와 관계 없이 벼룩, 따라서 병 자체가 이동하다 머무는 지점으로 이용되었다.

346

1348년 페스트는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파괴했으며, 그해 6월이 되자 잉글랜드에 진입했다. 1350년 겨울에는 페로 제도에서 북대서양을 건너 아이슬란드를 통과하더니 그린란드에까지 이르렀다. 페스트는 아이슬란 정착민의 60%를 죽인 것으로 보이며, 그린란드에서도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바이킹 거주지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347

페스트는 로마의 몰락 이후 유럽을 지배했던 사회질서를 거의 파괴해 버려, 대륙에는 위험한 무질서만 남았다. 이 병은 도시 거주자를 더 쉽게 공략했기 때문에 교육 받은 계급과 숙련된 장인들이 많이 죽었다. 도시 안이든 밖이든 수도원이나 수녀원 같은 폐쇄된 공간은 병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몰살할 수 있는 이상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유럽의 수도원 제도, 나아가서 로마 가톨릭 교회 전체는 이 비극의 충격으로부터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348

사람들은 이 병의 진짜 원인이나 전염 경로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곧 도시 안팎의 교역이나 사람의 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인식하게 되었다.

즉시 교역, 통신, 운송이 중단되었다. 유럽 전역의 지방당국은 페스트의 전파를 막고 대중의 반응을 통제하기 위해 페스트 법을 만들었다.

 

외교사절단과 편지도 오가지 않았다. 몽골 운송체계의 가동이 중단되자 가톨릭 교회와 중국 선교단의 연락이 끊겼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외국인이 병을 가져온다고 비난했고, 이로써 국제교역은 더 위축되었다. 유럽에서 기독교도는 다시 유대인을 공격했다. 유대인은 교역이나 동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이 두가지는 또 페스트하고도 관계가 깊었기 때문이다. 유럽 사람들은 유대인을 집에 가두고 불을 지르기도 했다. 끌어내어 죄를 자백할 때까지 형틀에 묶고 고문하기도 했다. 1348년 7월 교황 클레멘스 6세가 유대인을 보호하고 유대인 박해를 중단하라는 교서를 내렸음에도 유대인 탄압은 오히려 증가했다.

349

페스트는 유럽을 고립시켰을 뿐 아니라 페르시아와 러시아에 사는 몽골인을 중국이나 몽골과 차단했다. 중국의 황금 가족은 러시아와 페르시아로부터 물자를 얻을 수 없었다. 각 지파 사이에 연결이 끊어지자 서로 맞물리는 소유제도도 붕괴했다. 페스트는 국토를 유린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타락시켰고, 교역과 공물을 차단하여 몽골의 황금 가족으로부터 일차적인 소득원을 빼앗았다. 몽골인은 거의 100년 동안 서로간의 물질적 이해관계 덕분에 그들을 가르는 정치적 단층선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 통일ㅇ성이 흔들릴 때에도 문화적, 상업적으로는 통일된 제국을 유지했다. 그러나 페스트의 살육이 시작되면서 중심이 버틸 수가 없었고, 그 결과 복잡한 체제는 붕괴했다. 몽골 제국은 사람, 물자, 정보가 제국 전체를 끊임 없이 빠르게 돌아다녀야 생존할 수 있었다. 이런 연결이 없으면 제국도 없었다.

몽골인이 외국인 정복자이면서도 때로는 자기들보다 열 배나 더 많은 신민을 큰 탈 없이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이 약해진 뒤에도 교역물자가 계속 대규모로 흘러다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스트의 여파로 교역도 이루어지지 않고 다른 지파에서 지원병을 보내줄 가능성도 사라지자 칭기스칸의 황금 가족 각 지파는 신민이 언제라도 적대적으로 변할 수 있는 매우 가변적인 상황에서 스스로 꾸려나가야 했다. 군사적 힘과 상업적 이득이라는 두 가지 이점이 사라지자, 러시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중동의 몽골인은 자신의 신민과 결혼을 하고 의식적으로 그들의 언어, 종교, 문화를 따름으로써 권력과 정통성의 새로운 양식을 찾아나갔다.

351

조정의 관리들은 중국인에게 자유를 너무 많이 주었고, 몽골인이 지나칙 중국 생활에 동화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중국 문화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대신 자신들의 이질적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중국의 언어, 종교, 문화, 중국인과의 혼인 관계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극단적인 탄압을 하자 중국 신민은 불만이 늘었으며, 몽골 통치자들을 더 불신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몽골인은 가능한 한 중국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노력의 일환으로 다양한 종교를 공정하게 대접한다는 전통적 정책을 버리고 불교, 특히 티베트 불교를 우대하여 특혜를 주었다. 티베트 불교는 중국의 유교적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

352

중국의 몽골 칸들은 페스트의 확산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고 신민들로부터도 점차 고립되자 티베트 불교의 영적 세계에서 피난처를 구했다.

 

중국의 몽골 통치자들이 자신의 영성과 성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동안 수도의 ‘금단의 도시’의 담 너머 바깥 사회는 붕괴하고 있었다. 가장 뚜렷한 증상은 몽골 당국이 그렇게 힘겹게 또 꼼꼼하게 만들어낸 화폐제도를 통제할 힘을 잃었다는 점이었다. 몽골 행정부가 약해진다는 조짐만 보여도 지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져 가치가 폭락하는 대신 구리와 은의 가치는 상승했다. 인플레이션도 매우 심해져 1356년에 이르자 지폐는 가치를 거의 잃고 말았다.

353

페르시아와 중국에서 몽골 사회는 빠르게 붕괴했다. 각각 1335년과 1368년에 몽골인의 지배가 무너졌다. 페르시아 일 칸국의 몽골인들은 사라졌다. 죽음을 당하거나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신민에게 흡수된 것이다. 중국에서 대칸 토곤 테무르(순제)와 약 6만 명의 몽골인은 명의 반군을 피해 가까스로 달아났다. 그러나 뒤에 남은 약 40만 명은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중국인에게 흡수되었다. 간신히 몽골로 돌아온 사람들은 전과 다름없이 목가적인 유목민 생활을 계속했다. 1211년부터 1368년까지 중국을 다스렸음에도, 그저 남쪽 여름 숙영지에서 조금 오래 머물다 온 듯이 다시 옛날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러시아의 킵착칸국은 작은 무리로 나뉘어 이후 400년이라는 긴 기간에 걸쳐 서서히 쇠퇴해갔다.

354

명의 통치자들은 몽골이 중국에 정착하도록 권유했던 무슬림, 기독교도, 유대인 상인들을 쫓아냈다. 또 그렇지 않아도 힘을 잃어가던 지폐를 완전히 없애고 금속화폐로 돌아감으로써 몽골이 세워놓았던 상업체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들은 몽골이 후원했던 티베트의 라마교 계열의 불교도 배격하여 그 자리에 전통적인 도교와 유교의 사상과 전통을 집어넣었다. 새로운 통치자들은 몽골의 교역체계를 소생시켜다 실패하자 대양을 다니던 배들을 태우고, 외국인의 중국 여행을 금지하고, 외국인은 못 들어오고 중국인은 못 나가게 할 목적으로 국민 총생산의 큰 부분을 투여하여 육중한 새 성벽을 쌓았다. 이 과정에서 동남아시아 여러 항구에 살던 수천 명의 중국인이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명은 새로운 몽골 침략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중국식 도시라 할 수 있는 남쪽의 난징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이미 통일중국의 통치는 북부의 수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고, 주민 다수의 태도와 행동방식도 하루아침에 바꿀 수가 없었다. 명은 결국 옛 몽골의 수도 칸발릭으로 돌아갔다. 대신 명은 몽골의 외양을 제거하여 도시를 다시 만들기로 했다.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운 ‘금단의 도시’(자금성)를 세우려 한 것이다.

356

티무르의 후손은 역사에서 인도 무굴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519년 무굴 왕조를 창건한 바부르는 칭기스 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의 13대손이다. 무굴 제국은 바부르의 손자 악바르 치세(1556-1608)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는 칭기스 칸과 마찬가지로 행정의 천재였을 뿐 아니라 무역도 중시했다. 악바르는 원성의 대상이던 지즈야 세금, 즉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에게 물리는 인두세를 철폐했다. 그는 기병대를 전통적인 몽골의 십진법에 따라 편성했으며(5000명까지), 공무원 체계를 확립하여 공과를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했다. 몽골이 중국을 당대에 가장 생산적인 제조와 교역의 중심으로 만들었듯이, 무굴은 인도를 세계 최대의 제조와 교역 국가로 만들었으며, 무슬림과 힌두 전통과는 반대로 여성의 지위를 높였다. 악바르는 종교에 대한 보편주의적 태도를 유지했으며, 모든 종교를 하늘에는 하나의 신이 있고 땅에는 하나의 황제가 있다는 내용의 하나의 ‘거룩한 신앙’, 즉 디니 일라로 융합하려 했다.

357

아주 많은 제국들이 정치에서부터 예술에 이르기까지 몽골 제국의 환상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여론 역시 몽골 제국이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완강하게 믿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몽골 제국에 대한 믿음이 그 어느 곳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또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던 곳은 유럽이다. 마지막 칸이 중국을 통치하고 나서도 100년 이상이 지난 뒤인 1492년 유럽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자신이 바다를 통해 대칸의 몽골 조정과 다시 접촉하여 허물어진 교역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이사벨과 페르난도를 설득했다. 몽골의 교통체계가 무너지면서 유럽인은 제국의 몰락과 대칸의 패배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유럽에서 몽골 조정으로 가는 육로는 무슬림이 막고 있지만 유럽에서 서쪽으로 항해를 하여 ‘세계의 바다’를 건너 마르코 폴로가 묘사한 땅으로 가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콜럼버스에게 마르코 폴로는 영감이었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안내자였다. 그는 몇 개의 작은 섬을 찾은 뒤에 쿠바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대칸의 영토 가장자리에 이르렀고 곧 몽골의 카타이 왕국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몽골인의 대칸의 땅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만난 사람들이 몽골인의 나라 남쪽에 자리잡은 인도 주민이라고 판단했으며, 그래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인도인)이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364

황화의 공포는 필리핀인이나 한국인 등 어떤 집단에도 적용될 수 있었지만, 그 가운데도 중국과 일본이 가장 위험해 보였다. 일본은 산업화를 이루고 대군을 육성했다. 중국은 식민지화를 계속 거부하고 기독교로 개종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아시아인은 서구 대중의 눈에 적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19세기 내내 유럽에는 아시아인에 대한 공포가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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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와 몽골 제국의 시대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칭기스 칸은 인간 역사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까지 격하되었다. 근대 유럽은 새로 발견한 식민지 정복의 힘과 스스로 내세운 세계 지배의 임무 때문에 아시아의 정복자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칭기스 칸과 몽골의 잔혹성은 문명화된 잉글랜드, 러시아, 프랑스의 식민주의자들이 아시아를 통치할 수밖에 없는 구실이 되었다.

 

유럽 과학자나 정치가들과는 정반대로 이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인 아시아의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칭기스 칸에게서 새로운 영웅을 발견했다. 이것은 유럽의 우월성이라는 교조를 반박하는 생생한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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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반에 점차 아시아의 지도자로 자처하던 일본은 유럽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면서 범몽골주의에 강하게 끌리기 시작했다. 일부 일본 학자들은 칭기스 칸이 사무라이 출신으로 권력투쟁에서 실패한 뒤 고향을 떠나 초원지대 유목민 사이에 살면서 힘을 길러 세계 정복에 나섰다는 이야기를 퍼뜨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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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 있는 곳은 범상한 장소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몽골 민족의 어머니가 공격을 당하고, 납치를 당하고, 폭행을 당했다. 그녀를 빼앗기자 어린 테무진은 자신의 젊은 목숨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걸고 그녀를 되찾으려 했다. 테무진은 결국 그녀를 구했으며, 이후 평생 동안 자신의 민족을 외침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싸웠다. 이를 위해 쉬지 않고 외부인들을 공격하며 돌아다니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테무진은 세계를 바꾸었고 민족을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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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란바타르 : 붉은 영웅 이란 뜻

몽골 : 면적은 한반도의 7배에 해당하는 1,566,500km2. 세계에서 17번째로 큰 국가. 인구 250만 명. 북쪽으로는 러시아의 토바 공화국, 부리야트 공화국, 치타주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신강위구르 자치구, 감숙성, 내몽골 자치구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몽골은 동서의 길이가 2,392km, 남북의 길이가 1,259km이다. 서쪽에는 길이 1,500km에 달하는 장업한 알타이 산맥이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에는 울창한 삼림지대가 많다. 남쪽에는 광활한 황막초원(고비)과 사막이 전개되고 있으며 중부와 동부에는 평원 지대가 펼쳐져 있다.

몽골의 평균 해발고도는 1,580m이며 수도인 올란바타르 시의 해발은 1,350m이다.

국토의 40%가 산악 지대이며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지형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몽골의 주요한 강들은 주로 북부 지방에 위치하고 있으며 분지와 호수 지구의 면적은 몽골의 2/3를 차지하고 있다. 몽골에는 약 3,000개의 호수가 있고 그 가운데 성분이 바닷물과 같은 호수도 있다. 몽골은 면적의 80%가 유목이 가능한 지역이며 1%는 농업지구, 10%는 삼림 지역이다. 몽골에는 가끔 지진도 발생한다.

몽골의 연간 강수량은 200-220mm

5~9월 사이에 내리는 비는 전체 강우량의 80~90%에 해당한다.

기온의 일교차와 연교차가 아주 크다. 대기가 아주 건조하며 강우량이 적고 겨울이 길다.

봄바람의 위력이 대단하다. 바람이 가장 심한 시간은 오후 1시 전후이다. 몽골의 겨울은 아주 춥고 매우 건조하지만 바람은 그다지 불지 않는다.

몽골의 평균 기온은 영하 6.6도~영상 3.9도 사이이다. 1월은 1년 중 가장 추운 달로 평균기온은 영하 15도~영상 35도이다. 7월은 1년 중 가장 무더운 달로 평균 기온은 영상 10~25도 사이이다. 일교차가 가장 심한 계절은 봄이다.

봄은 3월부터 시작되어 5월에 끝난다. 일년 중 제일 건조한 계절이며 강한 바람이 특징이다. 봄은 가축이 가장 많이 아사하는 계절이다.

 

이동식 천막 게르

초원에서는 자동차가 말보다 더 불편한 때도 많다고 한다.

돌로 쌓아 놓은 한국의 성황당 같은 곳. 돌무더기의 꼭대기에는 나무가 꽂혀 있었고 나무에는 푸른색 천들이 무수히 감겨 있었다. 이것을 몽골어로 ‘오보’라고 부른다. 몽골인들은 오보가 나오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해가 이동하는 방향으로 3번을 돌며 소원을 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여행의 안전이나 소망을 빌면서 휴식을 취한다.

 

몽골의 오보는 주로 산 위나 고개 위에 위치한다. 그리고 그 고장의 수호신이 이곳에 거주한다고 믿는다. 오보의 중심부에 있는 나무는 버드나무. 버드나무는 고주몽의 어머니인 유화와 관계가 있는 신목의 일종으로 유목민들이 몹시 신성시하는 나무다. 특히 붉은색의 버드나무가 가장 신성시된다. 버드나무에 걸려 있는 푸른색 천들은 하늘을 상징하는 색깔.

 

몽골의 말은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지만 힘이 무척 셌다.

몽골 말들은 모두 머리가 우뚝 속지 않고 거의 등과 평행을 이루고 있었다. “아! 그래서 몽골 기병들은 말 위에서 화살도 자유자재로 쏘고 칼도 휘두를 수 있었구나!”

 

몽골의 여름 낮은 몹시 길다. 해가 10시 반에 진다.

 

게르 안에는 침대가 3개 있었는데 북쪽에 하나, 동서로 하나씩 3개가 있었다. 전형적인 유목민 게르의 침대 배치 형태. 주인은 남쪽의 문이 바라다 보이는 북쪽에 위치하고 손님들은 좌우에 앉게 돼 있는데 남자들은 주인의 오른쪽, 여자들은 주인의 왼쪽에 앉는다. 게르는 한국의 움집과 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몽골의 산들은 멀리서 보면, 멀고 가까움을 구분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공기가 깨끗해 산이 모두 가까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낙타들의 영양 상태는 혹만 보면 알 수 있다.

낙타는 매우 재미나게 걷는다. 겁에 질린 큰 눈망울에 앞뒤 다리가 같이 움직인다. 몽골의 말들도 이런 주법을 배운다. 그러면 진동이 없어 말 위에서 화살을 쏠 수 있다. 유목 제국 탄생의 비밀은 말이 낙타와 같은 주법을 구사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한다. 이러한 주법을 구사하는 말들을 조로모리라고 부르는데 제주도의 조랑말도 이러한 주법을 구사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했을 때 한국의 독립 무장 세력들이 올란바타르를 제2의 독립군 기지로 활용했다. 똣 옛날 몽골의 국가를 지은 사람이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음악 작곡가인 김순남 선생님이라는 풍문도 있다.

어거데이는 칭기스칸의 셋째 아들로 몽골 제국 2대 황제이다. 카라코룸은 그게 세운 도시다.

터키의 조상들이 바로 이곳에 터를 잡고 수백 년을 살았다고 한다.

 

몽골은 땅이 넓어 구름의 방향을 보고서도 일기예보가 가능하다.

 

말젖술을 몽골어로 아이락이라고 부른다. 육식 생활을 하는 유목민들의 경우 여름에 말젖술을 마셔야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말젖술과 함께 타락(몽골 요구르트)과 몇 가지 유제품도 나왔다. 정말 몽골인들은 손님을 잘 접대하는 민족이 틀림없다.

 

올란바타르 나담은 1921년 인민 혁명군이 7월 11일 올란바타르를 해방시킨 날을 기념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나담에는 씨름, 활쏘기, 말 경주의 3가지 종목이 행해지는데 하르호린에서는 말 경주만이 열린다.

 

‘검은 성’이라는 뜻을 지닌 하르발가스는 위구르 제국의 대칸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 성은 840년 서북방에서 침공해 온 10만 명의 키르키즈 군대에게 점령되어 대칸의 목이 잘리는 것과 동시에 제국이 멸망하는 것을 지켜 본 비운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몽골의 개는 한국의 진돗개처럼 2개의 짙은 눈썹과 2개의 눈을 합쳐 눈이 4개라 불려진다.

 

중세 몽골인들에게 물고기는 잠을 자지 않는 동물 즉 경계가 철저한 동물로 인식되어 왔다.

 

라마교를 받아들인 이후 몽골 남자의 30% 정도는 결혼을 금하는 라마승이 되었는데 어떤 지역의 경우에는 50%에 이르는 곳도 있었다. 혁명 이전 몽골(외몽골)에는 약 12만 명의 라마가 있었다.

1921년 사회주의 혁명 후 몽골인민공화국은 라마교를 배격하면서 거의 필사적이라 할 만큼 인구 증가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몽골은 1980년대 후반에 인구 200만을 돌파하게 되었다. 2003년 현재 몽골국의 인구는 25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약 80만의 인구가 올란바타르에 거주하고 있다. 내몽골이나 러시아 등 전 세계에 분포된 몽골족을 모두 합산할 경우 그 수는 700만~800만 명으로 잠정 집계되고 있다.

인구 밀도는 1m2당 1.5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낮다.

몽골 인구의 특징은 젊은 층이 많다는 것이다. 현재도 출산을 장려하는 추세이지만 도시에서는 아이들을 적게 낳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몽골에 거주하는 민족은 크게 몽골족, 카자흐족, 기타 민족으로 나누어진다. 몽골족은 몽골의 총 인구 중 80%를 차지하고 있다.

몽골족은 역사적으로 칭기스칸의 보르지긴 씨족을 핵으로 확대 발전 되었다.

몽골에 거주하고 있는 카자흐족은 1920~1930년대에 신강에서 이주해 온 돌궐족계 민족으로 오늘날 몽골 인구의 6%를 차지한다.

기타 민족은 러시아와 중국인들로 이들은 주로 청말민국 초에 농업이나 상업 이민으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몽골은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로는 이례적으로 부족과 민족 간의 구별이나 갈등이 없는 편에 속한다. 이는 몽골 영토가 넓고 각 부족들의 인구수가 적어 유목을 하는 데 큰 갈등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적이나 정치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몽골어는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알타이어계(핀란드, 터키, 카자흐, 우즈베크, 한국)에 속하며 모음조화의 원칙을 비롯한 여러 공통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몽골어는 존칭어가 많으며 시적 표현들을 많이 사용한다.

소련의 압력을 받은 몽골인민공화국 정부는 1941년 8월 21일 러시아 문자인 키릴 문자로 새 글을 만들어 이전의 위구르 문자를 대체한다는 결의를 하였다.

 

붉은 영웅이란 뜻을 지닌 올란바타르는 1921년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 후 1924년에 붙여진 이름이다.

 

칭기스칸에 대한 몽골인들의 사랑은 거의 종교적인 신앙과 같다.

금나라 세종은 여진족에게는 현군이라 일컬어지는 위대한 군주였지만 몽골 고원의 부족들에게는 백정과 같은 존재였다. 세종의 학살 프로그램은 3년마다 어김 없이 실행되었다. 몽골 고원에 불어 닥친 3년 주기의 학살 프로그램의 한파는 그야말로 몽골인들에게 골수에 스며드는 원한을 심어 주었다. (칭기스칸 탄생 전후의 몽골 고원)

칭기스칸을 비롯한 몽골군은 거짓말처럼 오늘날까지 무덤 하나 발견되지 않는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져간 신의 군대처럼 기념이 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이는 그 후계자들인 원 제국의 칸들이나 장군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왜 이들은 동서양의 역대 제국의 황제나 장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들을 위한 거대한 지하 세계를 만들지 않은 것일까?

칭기스칸은 개인적으로 물질보다는 정신을 사랑한 인물이었다.

 

고대의 몽골은 남녀가 거의 대등한 지위를 누리는 양성문화의 사회였다고 한다.

 

‘만두하이’는 여성으로 몽골의 ‘잔 다르크’와 같은 인물이다.

 

1990년까지 몽골인들이 칭기스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못했고 그와 관련된 역사까지도 배울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몽골은 민주화와 함께 칭기스칸에 대한 족쇄가 풀렸다.

 

우리나라 TV에서‘새 천년을 꿈꾸는 땅’이라는 제목으로 몽골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와 몽골은 역사 문화적으로 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특히 몽골 민족의 고향인 동몽골에는 우리나라의 선조들이 남긴 유적이 많다.

칭기스칸은 “한 사람의 꿈은 꿈일 뿐이지만 만인의 꿈은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몽골의 초원 지대는 동부 유럽인 헝가리에서 시작해서 만주의 초원 지대에 이르는 광대한 초원 띠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동몽골 초원은 야생동물의 낙원이다.

 

알타이 산맥의 남부 및 북부 지방은 유목 민족들의 이동로이자 동서 문화 교류의 십자로이다. 칭기스칸도 이 지방을 중심으로 중앙 아시아를 정복했으며 13세기 로마 교황청의 사신인 커르피니와 루브루크도 모두 이 지방을 통해 몽골로 들어갔다. 알타이 산맥 주변은 역사상 매우 유명한 돌궐 유목 제국의 고향이다. 이들은 고구려의 장수왕과도 싸웠다고 한다.

 

흔히 고비하면 사막을 연상하지만 고비란 사막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건조하고 황막한 초원’이라는 뜻이다. 고비 지역에서 사막이 차지하는 비율은 3%에 불과하다. 고비는 매우 험준한 산으로부터 극도로 건조한 사막, 나무가 우거진 오아시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매우 건조하고 물이 부족한 고비는 극단적인 대륙성 기후를 가지고 있다. 한여름의 온도는 최고 40도까지 올라가고 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다. 봄에는 시속 140k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모래 폭풍이 불어온다.

고비에 있는 작은 호수들은 수심이 얕은 관계로 일년의 대부분을 진흙 상태로 보낸다. 이러한 호수를 토이롬이라 부른다.

 

오늘날 고비의 사막 지대는 세계적인 공룡 화석 사냥터라 불려진다. 고비에서 발견된 공룡 알 덕분에 사람들은 공룡이 파충류나 새처럼 알을 낳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몽골에서는 5대 가축이 사람을 먹여 살린다. 5대 가축이란 말, 소, 낙타, 양, 염소이다. 이 가축들은 유목민들의 귀중한 재산이자 정신적 반려자이기도 하다.

 

몽골의 음식은 크게 고기와 젖, 곡물류로 나누어진다. 곡물의 주종은 밀, 기장, 메밀이다.

몽골인들은 추운 계절에는 육식을 주로 한다. 몽골인들이 가장 맛있게 여기는 고기는 양고기이며 다음으로는 소고기, 염소고기이다. 이로 인해 양은 사육가축의 58%를 차지하고 있다.

고비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지역의 특성상 낙타고기를 식용으로 삼는다. 또한 일부 지역에서는 때에 따라 말고기도 식용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말이나 낙타와 같은 가축들이 식용의 목적을 위해 도살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거의 대부분의 몽골인들은 고기를 구워 먹는 것보다 삶아 먹는 것을 좋아한다.

 

고대 몽골군들은 주변 제국의 원정 때 가축의 몸통에 달군 돌멩이를 집어넣어 요리하는 조마라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 조리법은 오늘날에도 특별한 손님이 왔을 때 혹은 여름철의 별미로 이 조리법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조마라는 말 대신 보도크나 호르혹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몽골인들은 추운 겨울에 고기를 말린 뒤 이듬해의 양식으로 삼거나, 혹은 먼 길을 떠날 때 가지고 가기도 하는데 이를 보르츠라 한다. 보르츠는 건조한 지방일 경우 1~2년간 보존할 수 있다. 고대 몽골인들은 원정을 떠날 때 원정의 규모에 따라 보르츠를 준비했는데 보르츠의 수가 많을수록 대규모의 장기 원정이다. 보르츠는 주로 소의 방광에 준비했는데 그 속에는 잘 건조된 소 한 마리 분의 건육이 들어간다. 보르츠는 몽골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게 만들었던 군수품 중 하나였던 것이다.

 

몽골인들이 좋아하는 아침 식사는 양 고기를 넣고 끓인 칼국수이다.

고대 몽골인들의 아침 식사는 오늘날 한국의 설렁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서하에서 나오는 소금은 푸르고 백색이 감도는 소금 즉 청백염이라 하여 매우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몽골인들은 귀한 손님이 오면 보즈라 불리는 고기만두를 대접한다. 그 양이 아주 많아 손님들에게는 고역이지만 다 먹는 것이 주인에 대한 예의이다.

 

역사적으로 몽골과 한국은 음식을 만들 때 탕 위주의 조리법을 쓰고 있다. 이는 기름에 튀기는 것을 위주로 한 중국이나 바비큐를 위주로 한 돌궐이나 유럽과는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음식 문화의 유사성으로 인해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음식인 생선국, 송편, 인삼주가 일시 유행하기도 하였다.

 

고대 몽골인들은 물고기를 즐겼지만 라마불교의 전파 이후 습속이 바뀌어 물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에도 물고기를 먹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의 몽골 사람들은 겨울과 여름을 막론하고 시원한 샘물 대신 뜨거운 차를 선호한다. 몽골인들이 애용하는 차는 티베트인들처럼 우유를 섞은 수태차이다. 어느 면에서 수태차는 음료라기보다는 식품에 속한다. 몽골인들이 우유에 차를 타서 마시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라마불교의 보급 이후이다.

 

몽골인들은 말, 소, 낙타, 양, 염소, 순록, 사를락 등 다양한 가축의 젖으로 수태차 뿐만 아니라 갖가지 유제품을 만들어 먹는다. 젖이나 젖으로 가공된 식품은 백색의 깨끗한 식품이라는 뜻에서 ‘차강이데’라고 불린다.

젖으로 만든 유제품은 영양식품일 뿐만이 아니라 질병을 치료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몽골인은 3세부터 말 타는 것을 배운다. 몽골의 준마는 하루에 250km를 달리며 평범한 말도 30km를 쉬지 않고 질주한다. 지구력이 좋고 추위를 견디는 능력이 아주 강한 몽골 말은 몽골인의 소중한 친구이자 충실한 조수이다. 몽골인들은 종종 게르의 입구에 천마를 그린 깃발을 내걸고 있는데 이는 말이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믿음 때문이다.

 

몽골의 말을 떠올릴 때 가장 유명한 것이 아이락이라 불리는 말젖술이다.

 

말젖술은 아주 효능이 뛰어난 건강 음료이다. 육식을 주로 하는 유목 민족들은 한 여름철 동안 고기를 먹지 않고 이것만 마시는데 이는 말젖술이 육식으로 인한 몸의 노폐물을 정화해 주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말젖술은 성인병의 치료제로 세계적으로 각광 받고 있다.

 

몽골에서는 양과 염소를 함께 방목하는 방법을 쓰고 있는데 양은 무리의 형성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염소가 한곳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하는 양을 이리저리 이끌고 다님으로써 초지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은 여름에는 모여 있고 겨울에는 서로 떨어져 있다고 한다. 한여름에 서로 떨어져 있으면 상대방이 시원할까 시기하기 때문이며 겨울에 한곳에 모여 있으면 상대방이 추위를 면할까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양은 자기 새끼 이외의 다른 새끼들에게 절대로 젖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이 때문에 몽골인들은 속 좁은 사람을 빗대어 ‘양 같은 놈’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몽골의 낙타는 쌍봉낙타로서 체구가 크고 강인하며 추위에 견디는 능력이 강하지만 혹서에는 약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낙타는 주인에게는 매우 유순하지만 외부인에게는 경계심이 강하다.

낙타는 새끼를 끔찍이 사랑하는 동물이다.

몽골에서 낙타의 젖은 약으로 간주된다. 특히 결핵의 특효약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 낙타 젖은 모유와 가장 근사한 젖으로 지금까지 몽골인들은 산모의 젖이 부족할 경우 낙타 젖을 모유의 대체용으로 사용해 왔다고 한다.

 

게르의 문은 모두 남쪽으로 향해 있다.

게르의 중심에는 철제 난로가 놓여 있고 문의 정면인 북쪽이 주인의 자리이다. 주인의 자리에서 오른쪽이 남자와 손님의 자리로 마구 등이 놓여 있으며 왼쪽이 여자와 어린이의 자리로 조리 기구 등이 높여 있다. 주인 자리의 오른쪽에는 불단이, 왼쪽에는 가족의 액자 사진이 있다.

게르에 들어가 손님 자리에 앉게 되면 먼저 주인과 코담배 인사를 나눈 뒤 수태차나 말젖술로 접대를 받는다. 몽골인들은 바닥에 앉을 때 우리나라 여성처럼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는다. 보통 오른쪽 무릎을 세우지만 윗사람 앞에서는 왼쪽 무릎을 세운다. 그것은 자기를 낮춘다는 뜻이다. 무릎을 세워서 앉는 것은 말을 타기 위해 가죽장화를 신고 있으므로 이렇게밖에 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구려 사람들도 이런 방식으로 앉았다고 한다.

 

양은 게르의 주원료인 펠트를 제공한다. 양의 털을 모아 물을 뿌려 가며 누르면 두꺼운 직물이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펠트인 것이다.

게르의 조립과 분해는 무척 쉬운 편에 속한다. 어른 3~4명이 게르를 분해하는 데에는 30분 안팎의 시간이 걸리며 세우는 것도 1시간이면 족하다.

 

몽골의 거칠고 위험한 자연환경이 몽골인에게 환영과 친절이라는 오랜 전통을 갖도록 만든 것 같다.

 

새해 인사가 끝나면 성찬이 벌어진다. 또 이웃집을 방문하여 서로 감사와 찬미의 말을 주고받는다.주인이 손님들에게 마실 것을 대접하면 잔을 받은 사람이 일어나서 설날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른다. 이때 그 자리에 있는 손님들도 노래에 호응해야 한다. 노래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몽골의 설날은 시골의 경우 15일간 이어지는데 남녀노소 모두 델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몽골 전통 의상을 입는다.

다양한 부족으로 구성된 몽골인들은 제각기 고유한 전통의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차림새를 통해 서로를 구분할 수 있다.

 

나담이란 초원 민족의 전통을 계승한 축제로 말 경기, 씨름, 활 쏘기로 이루어져 있다. 나담은 놀이보다는 전투적 성향이 매우 강한 스포츠 제전에 가깝다. 1921년 인민 혁명군이 7월 11일 올란바타르를 해방시킨 ksf과 합쳐져 몽골의 국가 나담이 되었다. 올란바타르에서 매년 7월 11부터 13일까지 열리는 이 나담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한 축제가 되었다. 몽골의 나담은 초원 민족의 놀이문화가 남긴 최후의 흔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도의 조랑말이 바로 조로모리의 제주방언이라고 한다. 제주도는 몽골 제국에서도 이름 높은 군마 훈련장이었던 것이다.

 

북방 민족의 씨름이 역사상 처음 출현한 것은 흉노 때이다.

몽골 씨름은 몸무게와 상관이 없으며 씨름판의 범위나 경기 시간의 제한도 없다.

가장 위대한 칭호를 가진 선수는 동쪽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데 이는 몽골인들이 태양이 뜨는 동쪽을 존귀한 방향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실제 고대 몽골에서는 여자들도 씨름을 즐겼다.

 

고대 몽골인들의 최대 명중 살상 사거리는 대략 450~525m 전후이다.

 

몽골인들은 전통적으로 위를 향해 화살을 쏘기 때문에 시위를 떠난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면서 표적을 맞추게 된다.

 

모린호르(마두금)는 말이 뛰는 소리를 절묘하게 연주하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 정말 몽골은 말의 나라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몽골의 민속 음악 중에서 이상한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허미‘가 있다. 허미는 맑은 피리 소리가 나면서 동시에 굵고 낮은 노랫소리가 동행하는 목의 노래라 할 수 있다. 원래 허미는 샤먼이 신을 부르는 노래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오늘날 라마승들이 몸을 흔들며 웅웅거리듯 굵은 목소리로 불경을 읽는 방식은 허미에서 배운 건ㅅ이라고 한다. 샤먼들은 허미를 하늘과 땅의 소리라고 했다고 한다. 허미는 강한 체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남자만 부른다고 한다.

 

몽골에서 종교의 믿음은 자유이다. 오늘날 몽골은 전체 인구의 90% 정도가 라마교를 믿고 있으며 4%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몽골인들이 접한 최초의 외래 종교는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였다. 이 때문에 몽골 제국 때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원나라의 창시자인 쿠빌라이칸의 어머니도 기독교도로서 항상 자기 주변에 십자가를 세우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대몽골의 시대가 끝나고 몽골 고원에 남은 그 후예들은 16세기 중반에 라마교의 시대라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몽골의 라마교는 사회주의 기간을 거치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특히 1937년은 몽골 역사상 최악의 한 해로 기록된다. 수백 개의 사원이 파괴되고 수많은 불교서적이 불에 태워졌으며 10만 명 이상의 라마승들이 핍박을 당하거나 살해되었다. 이후 40년 이상 라마교는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1990년 이후 라마교는 화려하게 부활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몽골의 이슬람교 종파는 수니파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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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은 '세상의 중심'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 4쪽

 

몽골인은 광활한 대지를 발판으로 굳세게 살아간다. 몽골은 유라시아 대륙 중앙에 위치한 육지 속에 고립된 국가이다. 156만 제곱 킬로미터의 면적으로 한반도보다 7배 이상 넓은 국토를 자랑하지만, 인구는 270만 명(2005년 유엔 통계)으로 고작 대한민국의 20분의 1정도이다. 수도 울란바토르의 역사는 2005년 현재 366주년을 넘었으나 아직도 반 이상의 사람들이 13세기 생활양식을 고집하며 천막집인 게르에서 살고 있다. – 12쪽

 

희귀한 식물이 많아 고비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해발 2000미터에 가까운 이곳은 국제기관들이 보호하는 야생동물의 보고이기도 하다.

고비는 중국과의 자연적인 국경선이다. 중국 한무제는 후손들에게 몽골을 침략하려면 군량조달이 어려우니 득이 없는 전쟁보다는 화해를 택하라고 지시했다. 고비를 지나 몽골까지 군량을 운반하려면 1석의 운반비가 18석이나 되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점을 지적했던 것이다. – 16쪽

 

연교차가 70도가 넘는 몽골 전역은 그만큼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지역이다. 그나마 연교차가 적은 지역이 울란바토르였다. – 18쪽

 

우리에게 생각하기도 싫은 1960년대의 보릿고개가 있었던 것처럼 몽골의 시골에는 지금도 넘기 힘든 젖고개가 남아있다. 젖고개는 짐승들이 풀을 뜯어먹고 젖을 내는 5월말부터 6월초까지 계속된다. 양을 잡아봐야 겨울을 넘기느라 뼈만 앙상하게 남아 고기를 얻기도 어렵다. 더구나 갈무리 해둔 감자, 양배추 등의 야채는 벌써 바닥이 났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절박한 상황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이때가 되면 징기스칸 군대가 세계를 제패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는 전통 비상식량 보르츠(고깃가루) 주머니가 열린다. 보르츠가 구황을 한다고는 하지만 많은 가정에서는 굶기를 밥먹듯 한다. – 22쪽

 

몽골의 여름은 노루꼬리처럼 짧지만 알찬 수확의 계절이다. 우리나라는 가을에 수확하는 전형적인 농업경제이지만 몽골은 여름 한철 가축을 이용해 수확하는 유목경제다.

농업이 태양의 에너지를 식물의 형태로 저장한다면, 유목은 동물의 형태로 저장하는 셈이다. – 23쪽

 

겨울대비용 연료로 소나 말 등 가축의 똥을 가능한 한 많이 모아 놓는다. 여름내 주워 말린 똥을 높은 둑처럼 쌓아 바람막이 벽으로도 사용한다. 우리가 가을철 나뭇짐으로 겨울 땔감을 비축했다면, 몽골에서는 가축 똥이 이를 대신하는 셈이다. 마른 똥을 주워오는 것은 여성들이 할 일이다. – 29쪽

 

양이 잠자는 바닥이 어는 추위(12월 31일부터 시작되어 다음해 1월 8일까지 계속된다.) 몽골인은 양을 우리에 넣어 재우지 않는다. 그만큼 양은 추위를 타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의 체온으로도 녹이지 못할 추위라 양이 잠자는 바닥이 얼 정도라는 것이다. – 32쪽

 

유럽에서는 지금도 아이들이 울면 호랑이가 아니라 '훈이 온다'고 겁을 주어 울음을 그치게 한다.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훈이라는데 도대체 훈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훈족이라는 말을 쓰지만, 나는 몽골에 가서야 그 말이 '사람'이라는 뜻의 몽골어임을 알았다. 또한 영어의 인간(human)이란 단어의 어원이기도 하다. 즉 이 세상의 인간은 몽골에서 시작된 셈이다.

사람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고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정말 몽골인보다 무서운 사람들은 없었다. 한때는 유럽에 코란이냐 칼이냐를 선택하게 했던 페르시아인이 가장 두려운 존재였지만, 그를 뛰어 넘는 것이 몽골인이라는 것이다. 몽골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아시아인의 긍지를 세계에 떨쳤다. – 35쪽

 

몽골 국민 270만, 내몽고의 300만, 브리야트의 300만, 중국 신장 지방의 24만 등 전 세계 약 1000만 명 이상의 몽골족들은 칭기즈칸의 묘가 발굴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위대한 신 이상으로 추앙받는 칭기즈칸의 실체가 외국인들 손으로 까발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 37쪽

 

몽골인은 1990년 자유화 당시 울란바토르 시에 있던 스탈린, 흐루시초프 등 옛 소련 지도자의 모든 동상을 파괴했다. 몽골의 것이 아닌 치욕의 러시아 역사라고 분노하면서 때려 부순 것이다. 그 와중에서도 레닌동상만은 울란바토르 중심 정부 청사 앞 광장 오른쪽에 그대로 남아 있다. 레닌의 피 속에 몽골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몽골인의 동정을 받았던 것이다. – 37쪽

 

몽골인은 최고라는 의미가 없는 곳에는 칭기즈칸의 이름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칭기즈칸 보드카, 칭기즈칸 호텔 등이 좋은 예다. 이처럼 몽골인 마음 속에는 칭기즈칸이 살아 있는 영웅처럼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돈을 벌거나 여업을 번창시키기 위한 허튼 수작으로 칭기즈칸이란 명칭을 사용하면 손가락질을 당하기 십상이며, 심할 경우 테러도 감수해야 한다. – 39쪽

 

칭기즈칸이 몽골을 통일했을 당시 몽골에는 약 9만 5000가구가 살고 있었다. 대가족 제도임을 감안하더라도 몽골인구는 100만 명 정도였으며 병사는 10만 명을 넘지 않았다. 칭기즈칸의 전략은 현대전에도 적용될 만큼 기발했다. 그는 우선 한 집에서 병사 한 명씩만을 차출해 군대를 구성했다. 그래서 군대 조직 이름도 십호, 백호, 등의 집 개념을 사용해 전 국민이 병사라는 의식을 갖도록 유도했다. 병역의 의무보다 한발 앞선 국방의 의무를 전 국민에게 인식시키는 선진 방위 개념을 도입했던 것이었다.

칭기즈칸은 이 병사들에게 세계 최초로 근대적인 군 제도를 적용했다. 그는 군대를 10진법에 의한 단위로 조직하고 명령체계를 일원화했다. 10명을 1개 단위로 설정해 지휘자를 임명했던 것이다. 이 제도의 영향을 받은 청나라는 8기병 제도를 통해 원나라에 이어 또 다른 유목 국가를 세웠다. – 39쪽

 

칭기즈칸은 진격하면서 300~400킬로미터 후방으로 가족들을 불러들였다. 정착 민족에게서 가족을 이동시키는 것은 삶의 터전 즉 병참기지를 포기하는 것이었지만, 유목민들에게는 평상시의 생활과 다름 없었다. 몽골군의 군량은 가족들이 후방에서 가축의 젖을 짜고 고기를 말려 보내는 것으로 완벽하게 해결됐다.

장기전에 대비한 비축식량도 양을 잡아 말린 고기가루 보르츠로 간단하게 해결했다. 보르츠는 가볍고 부피가 작아 군용식량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양 한 마리로 만든 보르츠는 3~4킬로그램에 불과했으며, 두 스푼 가량을 더운 물에 불려 마시면 요기하는 데 충분했다.

 

몽골 병사들은 1인당 8~9마리의 말을 몰고 진격했다. 병사가 100여 명이면 말이 800~900마리가 되어 적들은 몽골병사들에게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1시간쯤 달리다 말이 지치면 다른 말로 바꿔 탔다. 이렇게 해 진격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했던 것이다. – 40쪽

 

일반 병사들이 칭기즈칸에게도 '너'라고 부를 만큼 형제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상하관계는 엄격하되 친숙함을 유지했던 것이다. 또 병사들이 죽더라도 가족들의 생활은 걱정 없도록 준비해 주었다.

현대에도 이런 전통은 그대로 전해져 몽골에는 상류층이라는 개념이 전무하다. 다른 공산국가들에는 지배계층을 위한 비밀 오락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몽골에는 전혀 없었다. 1980년대부터 옛 소련과 루마니아 등 40여 개국이 자유화 과정에서 엄청난 피를 흘렸으나 몽골에서는 이처럼 전통적인 민족의 결집력 덕분에 유혈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

또한 칭기즈칸은 항복한 군사들과 정복지의 국민을 자국민과 동일하게 대우했다. 적군도 항복하면 몽골군에 편입시켜 응분의 직책과 계급을 부여하는 동화정책을 사용했다. 그러나 지휘자로는 기용하지 않았다. – 42쪽

 

역사상 이라크를 침공한 외세는 몽골군와 미국뿐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몽골군은 단숨에 이라크 병사를 무력화시키고 점령에 성공했지만, 미국은 장기간에 걸쳐 전쟁을 해야만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는 점이다. – 42쪽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도 이국적인 문화를 잘못 받아들여 쇠퇴하고 말았다. 대표적인 것으로 라마불교의 도입을 들 수 있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전성기에 몽골인은 한 집에서 한 명의 병사를 배출하는 대신 한 명 이상씩 라마승으로 출가시켰다. 몽골인이 라마승을 많이 배출했던 것은 지식인을 숭상하는 당대의 풍토와 그 당시 지식인이 모두 승려였던 점에 기인한다. 그 결과 병사가 모자라 몽골의 군대제도는 와해됐다. 이후 국방을 외국인 병사에게 맡겼으며, 이 때문에 대제국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한족에게 국가를 고스란히 바치고 만 것이다.

제국이 쇠퇴하기 전 몽골은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의 세력을 밖으로 펼쳐나가려고 몸부림쳤다. 그 결과 몽골의 흔적은 세계 곳곳에 남아 있다. 현재 중국 수도인 북경은 몽골인이 처음 수도로 정했던 곳이다. 덕택에 중국영토가 북쪽으로 확장되는 부수효과를 얻기도 했다. 모스크바도 몽골인이 건설한 뒤 러시아인에게 물려준 것이다. 이란 북부의 이즈파한은 몽골족이 세운 일칸국의 수도였다. 당시 이주한 몽골인 후손들이 현재까지도 남아 몽골어를 사용하고 몽골 문자로 된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 44쪽

 

1921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혁명에 성공한 몽골은 70년 동안 옛 소련의 지배를 받아왔다.

국내 총생산의 30% 이상을 러시아가 무상으로 지원했던 덕분에 몽골인은 자국 경제 상황보다 높은 수준의 경제생활을 해왔었다.

모든 학교는 거의 무상에 가까운 교육을 실시했고, 당에 대한 충성심과 어느 정도의 학습 능력만 있으면 대학 진학 자격이 주어졌다. 최우수 학생으로 선발되면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식 교육을 받을 수도 있었다. 곡물 생산량이 전 국민을 먹여 살리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음에도 배급표만 있으면 언제나 배고프지 않을 만큼의 음식을 확보할 수 있었다. – 45쪽

 

몽골은 1990년 자유화 과정에서 한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아 동구 국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몽골은 민주화와 자본주의를 선택한 뒤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회보장제도의 몰락을 동시에 경험하게 되었다. – 48쪽

 

정확한 수는 매번 바뀌지만, 대체로 몽골인구의 1%가 한국에 불법체류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 49쪽

 

몽골인의 1인당 국민소득은 480달러(세계은행 2005년 통계 기준)에 불과하지만 심리적인 만족감은 여전히 상위국가군에 속한다. 몽골인에게서는 저개발국가에서 흔히 드러나는 지도자의 신격화나 그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식의 극단적인 사고방식은 찾아볼 수 없다.

몽골의 정치체제는 이원집정제로, 대통령은 국방에 관한 결정권과 법률안 거부권만을 지닌다. 실질적인 경제나 치안 등 국내 통치권은 의회에서 선출되는 총리가 가지고 있다. – 51쪽

 

몽골은 21개 종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다. – 61쪽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력이 1.0~1.5 정도인데 반해 이들의 시력은 때에 따라 5.0까지도 측정된다고 한다. 푸른 초원에서 적을 발견하기에 적합한 눈이다. 늑대나 여우가 아무리 빨리 달려와도 양떼를 몰고 도망가기에 충분할 정도로 훌륭한 눈이기도 하다. – 63쪽

 

몽골인은 자기 신분증에 종족과 집안을 밝힌다. 인구 대다수가 할흐족인 몽골에서 소수민족임을 밝힌다면 불리하지 않겠느냐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소수민족이라 정부의 보호가 필요하므로 종족을 밝힌다는 것이다.

카자흐족은 중국 신장성에 살다가 1870년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알타이 산맥을 넘어 몽골로 이주했다. 몽골 정부는 1917년 공산혁명 당시 노동력을 확보한다는 명분 아래 카자흐 사람들에게 국적을 주고 몽골국민으로 편입시켰다. 카자흐족은 이주 후에도 자신들의 종교인 이슬람교는 물론 방언 및 관습, 의복, 주거문화 등을 유지해왔다. – 64쪽

 

오이라트는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 흡스골 호수의 타이가지대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알타이산맥 부근에 자리잡았다. 17세기 초에는 그 일부가 러시아의 볼가 강변에 새로이 정착했다. 이들이 세운 나라가 오늘날 러시아 연방 내의 칼무크자치공화국이다.

청나라는 1757년부터 1758년 사이 준가르제국을 정복하여 오이라트족 대부분을 중국 신장성으로 이주시켰으며, 이들이 지금까지도 신장성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다. – 65쪽

몽골리안이라 불리는 몽골 북부지역의 브리야트 몽골인과 중국 내몽고의 몽골인들은 본국의 몽골인보다 훨씬 숫자가 많다. 내몽고에 300만, 브리야트에 300만이 포진해 몽골을 감싸 보호하고 있는 형상이다. – 66쪽

 

몽골반점을 지닌 종족을 언급한다면 에스키모와 아메리카 인디안까지도 몽골인의 범주에 포함된다. 반면 이들은 생활방식이 워낙 달라 모든 동질성을 상실한 상태다. – 68쪽

 

초원의 작은 부족이었던 몽골인들은 종족의 번영과 지속을 위한 방어과정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넓은 국가를 성립할 수 있었다.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종족이 멸망한다는 강박감에서 공격을 최고의 방어책으로 삼아온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제국 건설 과정에서 점령지의 문화나 종교를 인정하는 유화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몽골족이 피해를 당하면 반드시 보복을 하는 강력한 자민족보호주의를 내세웠다.

인구가 많은 주변 국가들로부터 늘 위협을 받아온 몽골인은 아이를 많이 낳아 인구를 증가시켜야 한다고 배워왔다. 지금도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살지 않으면 언제 나라가 송두리째 없어질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 68쪽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지라 몽골에는 태아숭배사상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아이를 위한다. 덩달아 임산부도 그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는다.

태어난 아이들의 엉덩이에는 푸른 반점이 있다. 이것이 '흐흐 민지' 즉 몽골반점이다. 이 점은 3~4살이 되면 자연스레 없어진다. 몽골족만이 갖는 특징이므로 몽골인은 이 점을 가진 민족을 동계혈족으로 여긴다. 그런 연유로 몽골인은 우리나라 사람에게 형제 같은 느낌을 갖는다고 말한다. 한국인에게는 특히 우호적이며 모든 면에서 편의를 베풀려고 노력한다. – 69쪽

 

1921년 당시 40만이 채 되지 않았던 몽골 인구는 곧 300만 명에 다다를 전망이다.

현재 몽골인구의 65%가 30세 미만이며, 45.2%가 16세 이하의 어린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 70쪽

 

몽골인은 개를 지저분한 가축으로 여겨 개고기는 먹지도 않는다. – 70쪽

 

몽골인에게는 가문을 나타내는 성씨가 없고 이름만 있다. 물론 몽골인에게도 성이 있었으나 옛 소련의 배후 조종을 받던 당시의 몽골 정부가 공산혁명 이후 성 제도를 폐지했다. 성을 없앤 것은 소련이 몽골족의 기상을 꺾어 놓기 위해 취한 여러 수단 중 하나였다. 소련은 몽골영토의 일부인 브리야트 지방을 자국령에 귀속시키고, 중국이 몽골 남족지방(현재 내몽고)을 접수하는 것을 방치해 몽골인의 근거지를 가급적 척박한 지역으로 한정시켰다. 또한 몽골 가족의 단합을 분열시키기 위해 성 대신 아버지의 이름을 쓰도록 하는 편법을 가르쳤다. – 71쪽

 

몽골에서 매장이 일반화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푸장 또는 조장이라고 불리는 장례법이 전승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후가 건조하여 부패가 되지 않으므로 시체를 들판에 벌려 새와 들짐승이 뜯어먹게 하는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흔히 말안장에 시체를 앉혀 놓고 말을 마을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게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시체가 말에서 덜어지면 그곳에서 짐승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잔인한 것 같지만 자연 조건에 실질적으로 순응하는 장례문화였다. – 74쪽

 

몽골인의 가장 특징적인 성격으로는 독립심을 들 수 있다. 그들은 활과 칼, 말 한 마리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다. 자신의 힘과 지혜만으로 세상을 살아왔기에, 그들에게 협동이나 단결이란 말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 75쪽

 

개개인의 독립심이 투철했기 때문에, 몽골인은 지도자가 백성들을 책임지지 못하면 지도자를 심판해 목을 쳤다. 그러므로 몽골의 지도자는 늘 국민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백성에게 보여주려 했다. 반면, 우리 지도자들은 언제나 말만 앞섰지 진정으로 국민과 함께 한 경우는 드물었던 것 같다. 국민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던 몽골 지도자 같은 사람을 고르는 혜안이 우리 국민들에게도 필요한 때이다. – 76쪽

 

몽골인들은 그들만의 풍부한 감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웬만한 사물을 詩로 묘사할 수 있으며, 그들 사이에서는 시를 아는 사람이 가장 환영받는다. 우리나라 사람이 모이면 노랫가락이 퍼지지만 몽골인이 모이면 시가 흘러나온다. – 77쪽

 

모린호르는 말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 마두금으로도 불린다. 모습이나 소리가 우리나라의 해금과 매우 유사하다.

야타크라는 악기는 우리나라의 가야금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음색도 비슷한 편이다. 현을 튕겨서 소리를 내는데, 경쾌한 음률이 실내악으로서 손색없다. – 79쪽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몽골인의 손님 대접은 극진하다. – 81쪽

 

손님과의 안면 유무에 관계 없이 장황한 인사말을 주고 받는데, 인사는 적어도 5분 이상 걸린다.

코담배를 상대방에게 줄 때는 반드시 오른손을 사용해야 한다. 왼손은 불결하다고 생각해 타인과의 접촉을 꺼리기 때문이다. – 84쪽

 

몽골에서는 어른들이 물건을 주면 아랫사람들은 황급하게 소매를 풀어 내리고 두 손을 내밀어 받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맨살을 보이거나 팔뚝을 드러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몽골인이 겉으로는 험악해 보일지 몰라도 예의 면에서는 어느 민족에게도 빠지지 않는다.

 

몽골인은 또한 외국인들에게 호의적이다. 자연환경이 척박해 외부인을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몽골인은 외국인을 외부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이자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는 선구자로 여겨 반긴다. 그러나 몽골인의 호의적인 태도는 사실 도시지역에 한정된 말이다. 지방을 여행할 때 전통과 예절을 잘 알지 못하면 봉변을 당하기 일쑤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배타적이며 관습을 중시한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잘 몰라서 그렇다는 것을 모든 몽골인은 잘 알고 있기에 크게 걱정할 것은 아니다. – 85쪽

 

손님은 음식을 먹고 포식했다는 표시로 트림을 한다. 그리고는 감사하다는 말을 한다. 10분은 족히 넘을 시간을 할애하여 주인에게 감사와 고마움을 나타낸다.

예부터 잔칫날에 귀한 손님이 오면 몽골인은 말고기를 대접한다는 중국 사신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몽골 학자들은 이 말이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손님에게 새로 잡은 고기를 대접하는 관습에 따라야 했지만, 당시 사신이 방문한 전쟁터에서는 가축을 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가장 구하기 쉬운 말을 잡아 잔칫상을 차렸던 것이었다. 이런 모습을 두고 몽골의 풍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중국 사신은 몽골인이 미개하고 무식해 말고기도 먹는다는 투의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말고기는 그저 운송수단으로 사용하다 수명ㄷ이 다하면 잡아 먹을 뿐이다. – 86쪽

 

난로에 물을 붓거나 쓰레기를 넣어서는 안 되며, 불을 쑤시는 것과 난롯불에 발을 쪼이는 것은 금기시 된다. 난로를 타 넘는 것도 삼가야 한다. 난로를 모독하는 모든 행동은 죄악이며 주인을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우유를 땅바닥에 쏟아도 곤란하다. 게르 기둥에 몸을 기대면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인다. 게르 안에서 휘파람을 불면 게르 외부에 있던 불순 세력들이 침입해 온다는 옛말 때문에 몽골인은 이를 몹시 꺼린다. – 86쪽

 

몽골인에게 풀은 생명과 직결된다. 초원의 풀을 이용하기에 따라 젖의 생산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조상대대로 비법이 전수되므로, 그들은 가축에게 포원의 풀을 효과적으로 뜯게 한다. 가능하면 풀을 짧게 듣어먹을 수 있게 가축을 순서대로 몰고 다니는 것이 그 방법이다. 소와 양을 같이 모는 목동은 소 다음 양이 풀을 뜯도록 하기 위해 소가 앞서 가게 몬다. 소는 풀뿌리 근처까지 뜯어먹지 못하므로, 어느 정도 남은 풀을 양은 샅샅이 헤쳐 먹는다. 마찬가지로 낙타와 양을 동시에 유목하는 고비 지방에서는 양을 먼저 뜯긴다. 양은 가시가 있는 거친 풀을 먹지 않기 때문에 거친 풀을 잘 먹는 낙타를 양 뒤에 세우는 것이다. – 92쪽

 

몽골여성들은 빨래에서 해방된다. 칭기즈칸은 그의 법전으로 불리는 <대야사>에서 천이 완전히 해어지기 전까지는 의복을 세탁하는 것을 금하였다. 날씨가 추워 빨래를 하다보면 사람이 다치는 것은 물론 의복이 상하기 쉬워 백성들의 노고를 덜기 위해서였다. 역으로 생각하면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땀의 분비가 적고 건조하여 생활에 별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발상이 가능했던 것이다. – 93쪽

 

몽골인은 물 대신 눈으로 빨래한다. 눈이 날리기 시작하면 털옷과 양탄자 등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온다. 빨랫감을 눈밭에 던져두고 그 위에 눈이 2~3센티미터가량 쌓이기를 기다린다. 눈이 쌓이면 빨랫감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눈이 골고루 묻게 한 뒤 바위나 나무 등걸에 대고 패기 시작한다. 이렇게 2~3번하고 훌훌 털어 버리면 끝이다. 털옷을 세탁하는 모습은 한 마리 늑대가 눈밭에 굴렀다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 94

 

몽골에서는 기후가 민족의 생활환경이나 성격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인류학자들의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몽골인은 혹독한 추위를 이겨 생존하기 위해서 게르를 지었고, 가축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일 년이면 네다섯 차례 이사한다. 이사라는 것이 지어진 집 사이를 옮겨다니는 것이 아니라 살고 있는 집 자체를 뜯어 세간과 함께 옮기는 것이므로 우리의 이사 개념과는 판이하다. 이사는 일 년에 4~5번씩 하며 봄 이사가 그 시작이다. 겨우내 매서운 바람을 피했던 좁은 지역에서 벗어나 햇빛이 비치는 평지로 집을 옮긴다. 시골에서는 훈훈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4월말부터 봄맞이 이사를 서두른다. 겨우내 굶주렸던 가축에게 한시라도 빨리 새 풀을 뜯기려는 안타까운 심정에서다. – 96쪽

 

우리가 농사를 지을 때 같은 땅에 연작을 하지 않듯 몽골인도 같은 장소에 터를 잡지 않는다. 같은 장소로 오는 데는 적어도 4~5년이 지나야 한다. 그 이전에 가면 지난해 뜯어 먹은 풀뿌리가 제대로 자라지 않아 그 해 가축 농사는 실패한다고 한다. – 97쪽

 

한여름에도 낮에는 27~29도의 뜨거운 햇볕이 대지를 달구지만 그늘에서는 서늘함을 느껴 별로 땀이 나지 않는다. 밤에는 기온이 4~5도까지 급격하게 내려가 곧바로 두꺼운 옷이 필요해진다. 그러니 유목민들은 두꺼운 옷 한벌이면 대충 사철을 견딜 수 있는 셈이다.

개방의 바람을 탄 집안에서는 최근 텔레비전과 냉장고 등의 가전제품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을 갖춘 집들은 유목에서 벗어나 반정착상태의 생활을 영위하는 경우에 국한된다. – 98쪽

 

영하 40도 이하인 외부와 단절된 게르 내부에서 열기를 더하는 것은 오직 난로뿐이다. 아낙네들이 여름내 모아 말린 소똥을 연료로 사용하는데, 이는 나무가 희귀한 초원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연료이기 때문이다. 소는 사료 대신 풀만 먹어 똥에는 섬유소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냄새나 분진이 거의 없는 편이라 생각보다는 위생적이다.

모든 것을 신에게 의존하는 몽골인은 난로 연통을 게르 안의 자신들과 신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로 여긴다. – 99쪽

 

난로는 가문의 유일한 상속물로 여겨질 만큼 재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이 별로 없는 몽골인이지만, 전통적으로 난로에는 큰 의미를 두고 막내에게 상속해 왔다. 몽골인은 가장 최후까지 남아 가문을 지킬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장남이 아닌 막내아들을 상속자로 택한다. 칭기즈칸은 전쟁에 나설 때마다 막내 아들에게 집안의 모든 관할권을 위임하고 출정했다. 가족보호는 물론 城의 관할조차도 나이 어린 막내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리고는 "만약 이 애비와 너의 형들이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하면 가문과 나라를 일으켜 원수를 갚아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와 더불어 하는 말이 바로 "난로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몽골인이 난로를 특별히 여기는 것은 불을 곧 조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 101쪽

 

몽골에서 노란색은 신성한 색이므로 여성들은 허리띠를 제외하고는 함부로 노란색 옷을 입지 못했다.

델은 남녀구별이 없다. 단지 단추의 숫자가 많고 화려한 것이 여성용이고, 단추가 적으며 장식 없이 폭이 넓은 것이 남성용이다. 델 한 벌을 만드는 데는 손으로 꼬박 3일쯤 소요된다. 손바느질로 한 땀씩 떠서 만들기 때문에 기계로 한 것보다 훨씬 촘촘하고 여물다. – 103쪽

 

가죽 장화는 오른쪽과 왼쪽 신발 모습이 같은 점이 특이하다. 전쟁 중 신발을 갖춰 신고 나가는 시간이라도 벌기 위해서 구별 없이 만들었다고 한다. – 110쪽

 

몽골인 대부분은 지금까지도 천막집 게르에서 살고 있다. 우리에게는 영어의 유르트(yurt)로 소개된 집이다. 몽골인은 기후 여건에 따라 자주 이사하므로 이동이 간편하고 보온이 잘 되는 게르를 주거로 이용해왔다. 게르는 새로 짓거나 다시 조립하는 데 길어야 3시간을 넘지 않는다. 이처럼 게르는 영구성이나 외적으로부터의 보호기능보다 일시적인 추위와 햇빛 그리고 비바람을 차단하는 차양 목적이 주였다. – 111쪽

 

게르를 새로 짓는 것은 새 며느리가 들어와 식구가 늘어난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아들이 장성한 집에서는 적당한 신부를 찾기 전에 게르 지을 준비를 서두른다. 신부가 나타나면 곧바로 예식을 올리고 살림을 내줘야 하기 때문이다. – 113쪽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집의 크기를 말할 때 몇 칸짜리인가로 계산했지만 몽골에서는 벽이 몇 개인지에 따라 크기를 따진다. 일반인들은 보통 벽 5개로 게르를 짓는다. – 114쪽

 

게르 안은 난로를 기준으로 남성구역, 여성구역, 신성구역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남성은 게르에 들어가면 곧바로 왼쪽으로 가고 여성들은 오른쪽으로 간다. 남성구역은 하늘이 보호하고 여성구역은 태양이 보살피기 때문이다.

남성구역은 게르의 서쪽으로, 정문에서 보면 왼쪽이다. 이곳 벽에는 주인의 말안장과 고삐, 아이락 주머니 등이 걸려 있다. 주인의 방어용 무기는 이보다 안쪽의 손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둔다. 손님을 우대하는 의미에서 주인의 오른쪽에 앉힌다지만, 여기에는 손님을 가장한 적이 들어왔을 때 오른손잡이인 가장이 방어를 하기 위한 모겆ㄱ도 내포되어 있다. 이 구역에서 접대하는 손님은 남자만을 의미하며, 여자 손님은 여성 구역으로 모신다. 여성구역은 게르의 동쪽 입구에서 볼 때 오른쪽이다. 안주인은 이곳에 주방용구와 생활도구를 비치하며, 아이들도 여기에 기거한다.

주인 내외의 침대는 여성구역의 벽에 붙어 있고 손님용 침대는 반대편 남성구역의 벽 쪽이다. – 116쪽

 

게르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안팎 어디를 둘러 봐도 화장실이 없다는 점이다.

화장실에 간다는 표현도 재미있는데 "말(馬)을 본다"고 한다. 예전부터 말은 대부분 게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 그곳에서 볼일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여럿이 말떼 속으로 들어가 볼일을 볼 때 주위 사람에게 건넬 말이 없어 "말이나 보자"고 했는데, 여기서 유래된 말이라는 것이다. – 119쪽

 

철저히 개방된 공간에서의 성생활은 어린아이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심한 경우 3대가 6~7평의 한 공간에서 살다보면 성에 대한 개념도 무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성 풍습이 몽솔 사회의 개방과 발전에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는 견해도 있다. 몽골이 여타 공산국가보다 쉽게 개방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개방된 성 문화를 비롯한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큰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121

 

몽골인의 성 풍속만큼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것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개방적이라는 말을 아무하고나 의미 없는 사랑도 가능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몽골인은 알려진 것보다 더 완고하고 합리적이다. 그들은 사랑도 가문의 유지와 종족의 번영을 위한 생활의 일부분이라고 말한다. – 121쪽

 

학자들에 따르면 에스키모와 몽골인은 근친혼의 폐해를 경험으로 배워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근친혼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장애아로 태어나거나 열성유전인자가 쉽게 발현된다. 그래서 이들은 늘 혈통이 근접한 사람과의 혼인을 피하는 방법을 찾고자 한 것이다. 결혼 상대자로는 가능하면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다른 부족을 선택하려 했다.

아내를 외간 남자와 동침케 하는 데도 법도가 있었다. 손님을 맞은 씨족장은 회의를 개최하여 전체 구성원의 의사를 물었다. 남자의 지적 수준 및 외모와 됨됨이를 보고 동침 여부를 결정했다. 지적 수준이 우선적인 선택 요건이 되자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났다. 공산혁명 이전 몽골에서는 승려들이 새 신부들의 초야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즉, 신부가 첫날밤을 승려와 보내는 것이다. 당시 지식인 계층은 승려뿐이라 그들이 정치, 사회, 문화 등 사회전반에서 지도자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우수한 혈통을 이어받기 위해 이런 풍습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아이는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묻지 않고 자식으로 키웠다. – 123쪽

 

일부 지방에서는 남편이 집을 떠나면서 아내에게 출타한다는 것을 알리지 않고 떠난다. 아내에게 자유 시간을 허락하는 묵시적인 방법이다. 남편은 가문에 좋은 씨가 들어온다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느긋한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고 아내가 쾌락을 목적으로 다른 남자와 간통을 해도 용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출산 이외의 목적으로 간음한 자는 예부터 법으로 엄히 다스려 왔다. 칭기즈칸 시대 이후 시행된 법에 따르면 평민이 왕공의 부인과 간음하면 전 재산을 몰수하고 두 사람 모두 노예로 만들었다. 평민끼리 간통하면 가축 300마리와 귀중품 30개의 재산형에 처했다.

공식적으로 몽골인의 이러한 성 문화는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고비 지방 혹은 북서부 산악지대 등 일부에서는 여전히 행해질 수도 있을 것이라 한다. – 125쪽

 

몽골인은 친족에 의한 혈족은 인정하면서도 인척관계로 생긴 혈족은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동시에 두 명의 자매와도 혼인이 가능했다. 유목민의 이러한 풍습은 우리 역사에도 있다. 고려 초기 임금이 자매와 결혼한 경우가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자는 자기가 현세에서 섬긴 자를 사후에도 섬긴다고 믿었다. 그래서 생모가 아닌 과부는 재혼하지 않고 막내아들의 아내가 되었다. 몽골인은 막내상속을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후처 중에는 나이가 아주 어린 경우도 있어 막내에게 가는 것이 오랫동안 보살핌을 받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랑받을 시간이 적었던 막내에게 아버지의 사랑 대신 그의 사랑하는 여인과 물질로 대신한다는 뜻도 있다. – 127쪽

 

신부들이 하던 화장술의 하나인 연지곤지는 우리에게도 전해져 전통혼례에서는 자주 쓰인다. 부녀자들이 가슴에 차던 은장도와 족두리, 원삼도 몽골에서 유래된 것이다.

몽골족의 결혼은 우리 상식에 견주어보면 대체로 조혼이다. 과거에는 10살 이전에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칭기즈칸도 아홉살 때 한살 연상의 여인이었던 웅기라드족 데이 세첸의 딸 부르테와 결혼했다.

우리 여성의 평균 결혼 연령이 26.8세(2001년말 기준 남 29.6세)인데 반해 몽골은 15~16세에도 결혼한다. 물론 법적으로는 18세로 제한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더 어린 경우가 많다. 여자 나이 스무 살이면 벌써 아이를 두세 명씩 낳는다. 이런 실정이고 보니 생활에 대한 감각은 우리 나라 여성들보다 더 현실적이다.

유의할 것은 몽골인과 중국인의 결혼은 누구도 반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법으로 아예 금지시킨 적도 있었다. – 130쪽

 

몽골 국민의 90% 이상이 라마불교를 믿는다. 불교는 몽골인에게 종교라기보다 생활의 일부로, 이들은 집안에 불상을 모셔놓고 지낼 정도로 적극적인 신도들이다. 한때는 국교로서 강요되었지만 최근에는 다양한 종교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는 여전히 불교만을 믿는다.

몽골인은 모든 것은 부처를 통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일은 부처의 대리인으로 여겨지는 승려가 관장했다. 왕에서부터 말단까지 지배계층은 모두 승려였다. – 138쪽

 

몽골인이 최초로 라마교를 받아들인 것은 원나라 태종 오고타이 때다. 세조 쿠빌라이가 중국 전역을 점령하고 티베트를 손에 넣었을 당시 라마교의 최고 지도자였던 파스파를 초청하였다. 그는 몽골불교의 수장으로 추대되었고 티베트어를 차용해 최초의 몽골 문자인 파스파 문자를 제정하였다. 이후 청나라는 몽골족의 사나운 기질을 완화하기 위해 라마교를 정책적으로 권장했고, 맏이를 제외한 나머지 아들은 라마승을 만들도록 법으로 정했다. 이로 인해 인구가 격감하자 몽골 공산당은 1921년 혁명 후 라마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당과 정부가 종교를 장악했지만 일반인의 신앙 생활만은 허용했다.

 

개방 이후에는 세계 각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몽골로 몰려들었다. – 139쪽

 

몽골인은 경제적으로는 우리나라의 발전을 인정하지만 민족적 자부심에서는 늘 자신들이 앞선다고 말한다. 특히 몽골인은 21세기 초 우리나라 종교인들조차 해내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는 자부심이 강하다. 중국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제14대 달라이 라마인 텐진 갸초의 방문을 허용했던 것이다. 2002년 11월 몽골 정부는 달라이 마라의 방문과 설교를 허용해 중국정부와의 외교적 마찰을 일으켰다. 중국은 티베트 독립을 꾀하는 정치지도자로서의 달라이 라마를 경계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몽골 정부는 종교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입국을 허용한 것이지 정치 지도자나 군사지도자로서의 입국을 허용한 것이 아니라며 중국에 당당히 맞섰다. 달라이 라마가 몽골에 입국했던 것은 4대 달라이 라마가 몽골인이었고 몽골에 머물렀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중국도 이 사실을 모른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나라들도 덩달아 그의 입국을 허용할까 두려워 선수를 쳤던 것이다. – 141쪽

 

한편 우리나라는 여전히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달라이 라마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이미 미국, 독일, 대만, 몽골 등지를 다니면서 깊은 정신세계의 진수를 가르치는데도 우리나라는 그의 입국을 허용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의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국민의 사랑을 받는데 그를 한국 땅에서 보기가 이리 어려운가. 미국에는 할말을 한다면서도, 한때 한국을 침공해 '중공 오랑캐'라 불렸던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정부의 태도가 다소 모순적이다.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에서 '달라이'는 몽골어로 '바다'라는 뜻이다. 이 명칭은 3대 쇠남 갸초가 몽골 지도자였던 칸을 방문했을 때 받은 칭호가 굳어진 것이다. 몽골 종교 지도자들은 이 이름이 '바다가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처럼 종교지도자도 그와 같이 넓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 141쪽

 

몽골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무당이다. 공산시절에는 국가가 무당을 모두 없앴으나 자유화 이후 다시 생겨나는 무당은 어쩔 수 없이 묵인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다른 지역의 무당들이 외부에서 신을 불러들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몽골 무당은 자신의 영혼을 몸 밖으로 내보낸다. – 142쪽

몽골 초원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것은 '어버', 즉 성황당이다. 성황당은 미신을 억압했던 공산주의 시절에도 폐기되지 않고 전해질 만큼 몽골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 몽골인은 학식, 사회적 지위,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수시로 성황당을 찾아가고, 어디에서나 성황당을 만나면 예의를 갖춘다. 성황당은 마을의 수호신이요, 초원의 이정표이자 재앙을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 – 143쪽

 

몽골인은 전통적으로 하루에 한 번만 요리한다. 전쟁에 대비한 조상들의 습관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몽골 요리사들은 음식을 풍성하게 만들려면 많은 재료가 필요하므로 현지에서 약탈을 일삼게 되는 상황을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아침과 점심에는 차와 밀가루 튀김과자로 요기만 한다. 저녁에는 고기와 국수를 비롯해 쌀, 귀리 등 곡물이 든 묽은 죽을 곁들여 제대로 챙겨 먹는다. – 152쪽

 

'순한 양'이라는 말을 몽골인이 양을 잡는걸 보고서야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이미 살 의지를 잃은 양은 죽어가면서도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고 사지만 잠깐 버둥거리다 만다. 시간은 고작 5~6분이 걸릴 뿐이다.

양이 죽으면 가죽을 가슴팍에서 사타구니까지 갈라 땅 위에 쫙 펼쳐 놓고 깔개로 사용한다. 우선 내장을 꺼내 큰 그릇에 담고 흘러나온 피는 다른 그릇에 옮겨 담는다. 그리고는 머리, 갈비, 다리, 엉덩이, 가슴팍, 어깨 부분을 따로 갈라내면 작업은 끝난다. 이 모든 과정은 길어야 30분을 넘지 않는다. 또한 피는 한 방울도 땅에 흘리지 않는다. 식량으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짐승으로부터의 습격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배고픈 맹수와 맹금류가 피 냄새를 맡으면 사난ㅇ눠져 사람들을 해친다는 것이다. 또 피 냄새는 다른 냄새보다 멀리 퍼져 나가므로, 전장에서는 적에게 쉽게 노출되어 목숨을 잃기 때문이기도 하다. – 153쪽

 

몽골인의 주식은 고기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들은 서구인처럼 고기를 많이 먹지는 않는다. 몽골인은 주로 젖을 섭취하며 고기는 부족한 젖을 보완하는 수준이다. 유목을 하는 몽골의 고기 생산량이나 육질이 목축을 하는 서구 국가보다 떨어지기 때문이다.

닭고기 값은 쇠고기의 5배, 돼지고기는 3배정도로 비싸다. 고기값이 비싼 것은 이들 가축이 사료를 먹기 때문이다.

몽골인은 죽은 가축의 고기는 절대 먹지 않는다. – 155쪽

 

개고기와 새는 먹지 않는다. 옛날에는 죽은 사람을 산야에 내다 버리는 풍장이 있었으므로, 이때 조상의 시신을 들개가 뜯고 새들이 쪼아 먹었기 때문이라 한다. 국가 문양에 물고기를 그려 놓을 만큼 신성시하기 때문에 생선도 먹지 않는다.

기온이 낮은 겨울을 이겨내려면 고칼로리 음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몽골인은 우리는 먹을 수 없을 정도의 비계 덩어리를 가장 좋은 고기로 친다. – 156쪽

 

몽골에서 가장 보편적인 유제품은 아이락이다. 말젖을 가죽부대에 넣고 나무 막대기로 밤새 휘저으면 아이락이 된다.

몽골인은 여름밤 내내 아이락을 젖는다. 게르 문 옆에다 가죽부대나 젖통을 놓아두고 오가면서 습관 삼아 나무 막대기로 휘휘 저어준다. – 157쪽

 

아이락은 마유주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인들이 알코올 성분이 들어있다는 것만을 강조하여 번역한 것이며, 실제로 몽골인은 아이락을 전혀 술의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아이락에는 우리나라 막걸리와 비슷한 6~7도의 알코올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하지만 두세 잔 마시면 취기가 오르기 보다는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솟는 정도다. 그래서 아이락은 식사대용이자 최고의 영양식으로서 몽골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여름에는 한 사람당 매일 3~5리터의 아이락을 마신다. 허약한 아이에게는 아이락을 끊임없이 마시게 한다. 또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중증 환자에게도 아이락을 먹인다. 아이락은 비타민 A.C.B 등을 포함하고 있고 병원체미생물의 성장과 증식을 억제한다. 아이락은 특히 폐나 위 질환에 효험이 있고 신경작용을 활성화 한다. 더불어 식욕과 소화력을 증진시킨다. – 159쪽

 

소나 양, 염소 젖으로 만든 '타라크(요구르트)'는 발효식품이다. 필요한 비타민은 유제품과 날고기를 섭취해 보충하므로 몽골 요리에서 야채는 비교적 적게 사용된다. 야채는 동물들이나 뜯는 목초와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몽골인은 양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몽골인 요리에는 간장보다는 소금을 많이 사용해 별다른 맛을 느끼기 어렵다. 하지만 기후가 건조한 탓에 음식을 매우 짜게 먹는다. 몽골 정부는 수돗물에도 의무적ㅇ로 요오드를 포함시켜 국민 건강을 보살피고 있다. – 161쪽

 

건조기법으로 만든 음식으로 봄여름에 먹는 보르츠라는 고기가루가 있다. 보르츠는 가축들이 살찌는 가을에 잡은 고기로 만든다. 주로 쇠고기로 만들며, 살코기의 결을 따라 찢은 뒤 그늘에서 말린다.

보르츠는 소의 위나 오줌보를 깨끗이 씻어 그 안에다 보관한다. 이것들은 기후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을 갖춘 최상의 자연 저장고이므로, 해가 바뀌어도 고기가루가 상하지 않는다.

보르츠를 뜨거운 물에 서너 숟가락 퍼 넣고 2~3분 기다리면 훌륭한 영양식이 된다. 외국에 가는 몽골인은 반드시 보르츠를 한 봉지씩 가지고 가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때 이것으로 식사를 대신한다. – 170쪽

 

수테 차를 만들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가 소금을 넣는 일이다. 찝찔한 맛이 나지만 몽골고원에서는 염분 보충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기후가 건조해 몸에서 수분이 자주 발산되므로 몸속의 염분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 175쪽

 

손님이 오면 주인은 술이기 보다 음료에 가까운 아이락을 먼저 내놓는다. 아이락으로 기분이 조금 얼큰해진 주인과 손님의 마음이 상통하면 아르히를 마시기 시작한다.

몽골에서 술을 마실 때는 만취하는 것이 에의다. 그래서인지 만취해서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하다. – 176쪽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처럼 몽골인은 늘 차강사르(설날)처럼 풍요롭기를 기원한다. – 181쪽

 

몽골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음양오행과 십간십이지를 사용한다. 양의 해에는 좋은 일이 생기며 가정이 화목해진다. 닭의 해에는 살림이 풍요로워지고 출산율이 크게 늘어난다. 돼지해에는 음식 저장량이 크게 늘고 모든 것이 풍요로워진다고 한다. – 183쪽

 

소련은 1921년 공산혁명 이후 몽골의 많은 전통 세시풍속을 없애면서 서구식 신년을 강요했다.

젊은이들은 소련의 본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세시풍습에는 민족의 전통의식이 반영되어 있으므로, 풍습을 바꾸면 민중의 의식과 사고에도 변화가 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소련은 몽골인의 민족혼을 말살하거나 국민 단결을 약화시키기 위해 몽골 전래 풍습을 없애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몽골에서 신년은 서양풍속의 하나일 뿐이다. 이 날 모든 관공서는 휴무이다. – 185쪽

 

몽골인이 '차강사르'라고 부르는 매년 음력 1월 1일은 거창하다. 3일간 모든 고나공서와 직장이 문을 닫고 집 안에서 식구끼리 지낸다. 한달 전부터 이날을 준비하느라 온 국민들이 분주하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날에는 전 갖고이 모여 세배하고 성황당에 참배하는 등 새해맞이를 한다. 덕담도 어느 때보다 많이 주고 받으며 음식도 풍성한 명실공히 몽골 최대의 명절이다.

몽골 음력설의 역사는 쿠빌라이 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중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며 한족으로부터 음력설을 도입해 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연히 어른들로부터 세뱃돈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몽골에서는 아래사람이 웃어른에게 세뱃돈을 드린다. 그러면 어른들은 아랫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관례다. 어른들이 준비하는 선물로는 초콜릿, 사탕, 학용품, 장갑부터 때로는 새로 나온 빳빳한 지폐 몇 장까지 다양하다. 또한 세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문간에서 하나씩 선물을 나눠준다. 통상 유제품을 싸주는데, 이는 세배를 갈 때 싸갔던 것 중 먹고 남은 것이다. – 187쪽

 

6월 1일은 어린이날이다. 몽골에서는 이때가 되어야 겨우 나뭇잎도 제대로 피고, 어린이들이 밖에서 놀기 좋은 계절이 시작된다. 몽골 정부는 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해 모든 관공서와 기업이 휴무한다. – 193쪽

 

몽골 세시풍속 중에서 가장 이색적인 것이 가축의 거세다. 이 일은 유목민들이 가축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봄마다 하는 연례행사다. 지난해 태어난 수놈 중 좋은 종자를 제외하고 모두 거세하여 무차별적인 생식을 막는다. 또한 거세를 하면 발리 자라고 먹이를 적게 먹으며 온순해진다고 한다. – 194쪽

 

몽골에서는 나담이 치러지는 매년 7월 11,12,13일에 국갖거인 축제를 벌인다. 나담은 '에른 고른 나담 (남성 3종 경기, 즉 씨름, 활쏘기, 말달리기')의 준말로 '남성축제'라는 뜻이다. 나담은 원래 '놀다'라는 뜻의 몽골어 '나다흐'에서 유래되었다. 이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몽골인은 경기의 의미보다는 놀이의 의미로 나담을 즐겼다. 이날은 또한 몽골 인민혁명 기념일이기도 하다. – 195쪽

 

나담의 하이라이트인 씨름은 최고의 인기종목이다. 몽골에서 씨름의 인기는 캐나다의 아이스하키, 미국의 야구, 독일의 축구, 스페인의 투우 인기를 능가한다. 씨름 경기는 나담 축제의 첫째, 둘째 날에 벌어진다. 울란바토르 스타디움에는 전국에서 예선을 거친 512명의 선수가 참가해 토너먼트 방식으로 경기가 치러진다. 참가자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예선을 치른다. 이들 중 9회 동안 연승한 선수가 우승자가 된다. 재미있는 것은 최고 타이틀 보유자나 최다승으로 지목받은 선수는 3회전부터 매회마다 경기 상대를 고를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은 비교적 쉽게 경기를 치를 수 있다. – 196쪽

 

몽골 씨름에는 체급 구분과 경기시간 제한이 없다. 선수들은 최선의 방법으로 상대선수를 물리치면 그만이다. 우리나라 씨름처럼 샅바를 잡지 않고 서서 경기를 시작한다. 경기가 시작 후 상대방의 무릎이나 팔꿈치 등을 땅에 먼저 닿게 하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 198쪽

 

활쏘기는 나담에서 두 번째로 인기를 얻고 있는 종목이다.

몽골인은 활을 쏠 때 과녁에 미치지 못하는 것보다 멀리 날아간 쪽을 선호한다. 물론 명중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과녁에 못 미치는 화살은 궁수의 약한 힘을 드러내므로 수치스럽다는 것이다.

궁술시합에는 남녀노소 모두 참가할 수 있다. 사수들은 꼭 몽골 전통복인 델을 입고 수술이 달린 모자를 써야만 한다. – 199쪽

 

나담 마지막 날에는 시상식이 거행되며 이날의 주요 경기는 말달리기 시합이다. 4~7세의 어린 기수들이 가문의 명예를 걸고 최장 약 30킬로미터를 달린다.

이밖에도 매년 3월 8일은 몽골의 여성축제일이다. 몽골에서는 세계 여성의 날인 이날을 국경일로 지정해 기념행사를 펼친다. – 202쪽

 

몽골 여행의 진수는 철도편을 이용해 느낄 수 있다. 젊은이들에게는 인천에서 천진행 여객선을 타고 각서 북경-유라시아 간 철도를 이용하는 방법을 권하고 싶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만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기차 속에서 만리장성 너머의 중국을 보는 맛도 추천할 만하다. 몽골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승마와 승마여행이다. – 212쪽

 

몽골을 여행하면서 주의할 것은 공룡알 들의 자연유물을 절대 가지고 나올 수 없다는 점이다. 몽골 정부는 몽골의 자연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유물은 물론이고 가공되지 않은 동물 뼈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녹용 등의 반출을 금지하고 있다. 고비에서 주운 돌멩이 하나, 작은 나무 가지 등도 같은 취급을 받는다. 단, 공항이나 백화점 선물가게 등에서 구입한 선물은 인정된다. – 216쪽

 

자본주의 사회와 70년이나 격리되었던 몽골에서는 영어보다는 러시아어가 더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1920년대에는 라마승과 극히 일부의 지식인만이 몽골 문자를 읽고 쓸 수 있었다. 당시 각 종족별로 언어가 달라 몽골은 하나의 국가이면서도 여러 개의 나라나 다름없었다. 몽골 정부는 1921년 공산혁명 이후 국가 통합을 위한 각종 정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정책적으로는 통합이 이루어졌지만 국민들의 의사와 사고를 통합하는 데는 늘 언어장애가 뒤따랐다. 1940년 몽골 총인구 74만 3800명 중 문자를 깨우친 사람은 5% 미만이었다. 1946년 몽골이 러시아 문자르 ㄹ빌려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 상황은 변했다. 러시아의 지원으로 의무교육을 강화해 문맹률을 급격히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1990년 민주화의 상징으로 러시아 문자를 폐지하고 옛 몽골 문자를 부활시켜 공식문자로 사용키로 결정했다. 이를 두고 많은 지식인들은 옛 몽골 문자를 다시 사용하는 것은 전 국민의 80% 이상을 문맹으로 만들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들의 주장이 민주화 세력을 눌러 현재 몽골에서는 러시아 문자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 217쪽

 

고비 지역은 우리에게 사막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사실 '고비'는 '황무지'라는 뜻의 몽골어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래지형의 사막은 3%에 불과하다. 연중 6개월 이상 눈이 쌓여 있어 무성하지는 않지만 풀과 나무가 자라며 야생동물도 뛰어다닌다. – 223쪽

 

아라비아의 낙타는 혹이 하나인데 반해 고비낙타는 둘이라서 혹 속의 지방질로 열악한 환경에서 잘 견딜 수 있다고 한다.

낙타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살아서는 젖을 짜기도 하고 운송수단으로도 유용하게 쓰인다. 낙타젖은 진하고 끈기가 있으며 영양분이 풍부해 최고 품질로 선호된다. 낙타털로 만든 캐시미어 실은 양모와 염소털실보다 4~5배나 비싸다. 값도 비싸지만 털 자체를 구하기가 어렵다. 낙타 고기도 고비에서만 맛볼 수 있다. – 226쪽

 

극북 히스테리아-극지방과 그 주변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정신분열증. 옷을 찢는 등 과격한 반응을 보이며, 급격히 우울해지거나 정신을 잃기도 한다. 단조로운 기후와 고립된 환경에서 비롯된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 234쪽

 

옛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하라호름(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카라코름으로 소개됨)은 울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 약 400킬로미터 떨어진 으브르항가이 아이막에 속해 있다. – 238쪽

 

성곽 안에는 황제들의 집무실이었던 게르 터가 남아 있다. 황제들은 요란하게 치장된 건물이 아닌 일반 국민들과 같은 게르에서 살았다. 다만 왕의 게르는 일반 백성들이 구하기 어려운 호랑이나 사자 등의 가죽으로 실내를 장식했을 뿐이다. 이처럼 전통적으로 몽골 국민들은 가족 같은 유대와 계급차별 없는 공정한 통치 아래서 살았다.

이곳은 북경으로 옮겨 갈 때까지 148년간 수도로 사용됐다. 그 후 200년간 퇴락을 거듭해 이제는 주민이 한 사람도 살지 않는다. 몽골의 성은 방어용이 아니라 공격을 준비하는 장소였다. 특이하게도 성이 평지에 자리 잡고 있어 처음 접하는 관광객들은 의아하게 생각한다. 우리나라 성들은 산이나 언덕 등을 끼고 방어에 유리하게 지어졌다. – 239쪽

 

바로 여기서 몽골인의 전술을 알 수 있다. 적들과 지구전이나 방어전을 치르다보면 숫자가 적은 몽골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몽골인은 공격 전술을 채택한 것이다. 적이 침공해 오면 좁은 성벽에서 맞붙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넓은 곳으로 유도해 전열을 정비한 뒤, 전격전으로 맞섰다. 몽골인들은 당시로선 가장 강한 무기와 기동력을 가졌다. 말은 지금의 탱크처럼 위력적이어서 보병 위주의 군대는 대적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현대에도 적용되는 말이지만, 화력이 우세한 군은 언제나 노출된 싸움을 원한다. 그래서 적을 먼저 발견하는 것이 유리하고 기마전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넓은 초원 한가운데 하라호름 성을 구축했던 것이다. – 241쪽

 

하라호름에 도착한 유럽인들은 두 번 놀란다. 첫째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 제국의 첫 수도였던 하라호름 성이 너무 작고 보잘 것 없다는 것이다. 영국의 윈저,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오스트리아의 쇤부른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의 노이슈반슈타인과 비교해도 형편없다. 유럽의 성은 외국에서 잡아온 포로를 이용해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대규모로 지어졌으며 투입한 비용도 어마어마했다. 하짐나 몽골인은 으리으리한 성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유목민의 기질 때문에 한 곳에 머물러 사는 데 집착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둘째는 전리품이 전무한 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유라시아 지역을 점령하여 많은 것을 약탈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상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하라호름 성에는 만주족이 보낸 궁궐을 방비하기 위한 나무장애물이 있을 뿐이다. 몽골 군인들은 점령지에서 약탈하는 병사들을 즉석에서 참수했다. 엄정한 군기확립과 싸움에만 관심이 있었지 다른 것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예상 밖의 전리품이 생기면 부하들과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몽골인의 전통이었다. – 247쪽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실자 발음은 울란바아타르)는 몽골어로 '붉은 영웅'이라는 뜻이다. – 249쪽

 

몽골의 사회학자들은 사회가 국민의 생활을 보장하고 노후까지 책임지는 칭기즈칸의 정신에서 사회주의의 기본 이념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증거로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을 든다. 레닌은 몽골족의 핏줄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몽골족의 생활방식을 잘 터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몽골족인 외할머니로부터 받은 가정교육에서 공동생산, 소유 및 분배의 정의와 인간다운 삶에 대해 감화를 받고 이를 실천했다고 한다. 더불어 1921년의 몽골 공산혁명이 거부감 없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사회적인 분위기가 이미 조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 259쪽

 

몽골처럼 교육열이 높은 국가도 찾기 힘들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몽골인의 문맹률은 비교적 낮다. – 264쪽

 

전통적으로 몽골인의 가장 큰 소망은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돈과 명예는 순간적이지만 인간적인 덕망과 지혜는 영원하다는 것을 믿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골이 가장 강성해 중국을 지배하던 때부터 몽골인은 학문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한 집안에서 한 명 이상의 학자를 배출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시대의 학자는 승려였으므로, 당연히 출가하는 사람이 늘어만 갔다. 승려들이 정치, 학문, 의술은 물론 예술분야까지도 이끌어 갔으며 이들은 전쟁보다 평화를 주장했고, 약탈보다는 자급자족을 강조했다. 그 결과 몽골군의 군사력은 추풍낙엽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265쪽

 

서구의 많은 사람들은 물론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조차도 몽골을 망한 나라라고 여긴다. 원나라의 강성했던 힘은 사라지고 이제는 가난하고 볼품없는 나라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몽골은 약해진 것이 아니라 강점했던 중국을 한족에게 돌려주고, 약탈했던 러시아 땅을 러시아인들에게 반환했을 뿐이다. 옛날 강성했던 터키, 로마,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도 몽골처럼 본래의 위치로 돌아와 오늘과 같은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나라들을 대상으로 망했다는 표현을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몽골에 대해서만은 유독 망했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까? 아마도 현재 경제적으로 빈곤해서, 즉 일반적인 부의 개념에 비추어 볼 때 보유하고 있는 달러가 적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몽골이 가난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원나라가 무너지고 공산혁명이 일어났어도 행복한 삶을 누려왔다. 몽골인은 어느 나라의 어느 민족보다도 더 예절을 찾고, 남을 위하며, 관용을 베풀 줄 안다. 몽골인은 지식인들의 덕목으로 꼽히는 관용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어느 민족보다도 충실히 실천해 나가고 있다. – 268쪽

 

영주권은 아직 쉽게 얻기 힘들다. 몽골인구가 너무 적어 영주권을 쉽게 주면 중국인이 몰려와 내몽고처럼 중국에 예속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 281쪽

 

과거 소련은 몽골에 산업시설을 배치하지 않았고, 그 결과 몽골에는 공업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기반시설이 취약했다. – 281쪽

 

술을 마실 때는 지대가 높다는 점을 감안해 적당히 마시는 것이 좋다. 고지대에서는 쉽게 취하기 때문이다. – 288쪽

 

많은 몽골인은 중국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중국과 가깝다는 것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신상에 유리하다. 몽골인과 중국인의 어색한 관계는 역사적인 경쟁의식과 내몽고를 강탈해간 것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인해전술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중국과의 거래는 지형적인 요인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13억이 넘는 인구에 대한 이들의 두려움은 대단하다. 내몽고의 몽골인은 300만 명이지만 중국의 최대 민족인 한족은 2000만 명에 가깝다. 이제는 힘으로나 국민투표로나 어느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내몽고를 되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해져 몽골인들은 이에 분해하고 있다. – 291쪽

 

해도 되는 것!

-모자를 쓰고 있으면 게르에 들어갈 때 그대로 쓰고 있어도 무방하다. 인사를 할 때는 모자를 약간 들어올리면 된다.

-음식 선물 등 물건을 주고 받을 때는 양손이나 부득이할 경우 오른손을 사용하며, 걷어 올린 소매는 내린다.

-악수할 때는 아무리 추워도 장갑을 벗는다.

-게르 안에서 움직일 때는 시계 방향으로 이동한다.

-차나 음식은 조금씩 마시거나 뜯어 먹는다.

-물건을 받을 때는 두 손을 모아 바닥을 위로 향하게 한다.

-몽골인의 발을 밟았을 때는 상대방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사과한다.

-바닥에 앉을 때 무릎을 꿇어도 된다.

-초대받았을 때 작은 선물이나 적은 현금을 놓고 오는 것이 좋다. – 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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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012-02-09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해요--;;. 제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제 아들놈이 이런 짓을....
정말 죄송합니다. 삭제했어요^^

마노아 2012-02-09 19:32   좋아요 0 | URL
어이쿠, 아무래도 그랬을 거라 생각했지요. 과연 언제 알아차리실까 궁금했어요.
어휴, 삭제 안 하셔도 되었는데... 무척 재밌었어요.^^ㅎㅎㅎ
 


몽골 사람들은 주로 가축의 젖을 가공해 만든 음식과 고기를 먹어. 하지만 야채를 심고 가꾸지는 않아. 가축과 함께 이동하면서 살기 때문에 한곳에서 야채가 자라는 걸 기다릴 수가 없지. 야채를 심는다고 해도, 동물들이 망쳐 놓기 일쑤래. 그래서 몽골 사람들은 야채를 동물들이 듣는 풀 정도로만 생각하고 오래전부터 고기와 유제품을 주식으로 삼았어.몽골 정부는 유목민들을 단계적으로 나라에서 운영하는 농장에 정착시키고 있어.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 시가지에 들어서면 새로 지은 고층 건물과 화려한 광고판이 들어선 현대적인 도시 모습을 볼 수 있단다.

예로부터 몽골 사람들은 개개인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보다는 서로 돕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단다. 넓디넓은 초원에서 적은 수가 유목민으로 살아가려면 혼자서 뛰어난 재주를 자랑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몽골 사람들은 가축의 수가 너무 많아지면 관리하기가 힘드니까 자식들에게 가축을 나누어 주어서 분가시키지.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은 막내아들에게 집과 가축을 물려주고 노후를 함께 보내는 거야. 딸의 몫도 시집갈 때 공평하게 나누어 준단다. 몽골에서 막내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에는 가문에서 가장 늦게 태어난 막내가 이 세상에 맨 나중까지 살아남아 가문을 계속 이어 가라는 뜻이 담겨 있어. 젊은이에게 가문의 희망을 걸고 있다는 상징이기도 하지.막내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난로도 물려받는다. 먼 옛날부터 몽골 사람들은 난로를 신성하게 여기고 숭배했지. 난롯불이 꺼지면 가문이 기울고 가족에게 재앙이 다가온다고 해서 몽골 사람들은 난로의 불씨가 꺼질세라 불씨를 지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단다. 불은 위쪽으로 활활 타오르니까 사람이 하는 일이 불처럼 타올라 다 잘되길 바란다는 뜻이 있어. 또 꺼지지 않고 계속 생명을 유지하니까 자식을 낳아서 가문의 대를 이어 간다는 의미도 있지. 이렇게 귀한 불씨가 담긴 난로이다 보니 막내에게 물려주는 거야.몽골에서는 일부러 불씨를 꺼뜨리면 결투 신청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때의 결투는 개인의 싸움이 아니라 가문의 싸움. 그  

러다 보니 난롯불에 가문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사할 때 난로를 지키는 것은 가장의 주요 임무 중 하나.

몽골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과 달리l 조상의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지 않아. 늘 떠돌아다니면서 살기 때문에 사람이 죽어도 무덤을 만드는 일이 드물지. 그 대신 살아 있는 동안 함께 지내는 가족이나 이웃과의 믿음과 사랑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단다.
사냥과 목축으로 살아가던, 미개하고 가난하며 수도 얼마 되지 않던 민족이 어떻게 해서 강력한 문명 국가들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바로 ‘말’에 있어. 화약과 총포가 나오기 전까지 기마 군단은 가장 강력한 전쟁 수단이었단다. 전쟁터의 말은 기동력을 갖춘 훌륭한 군사나 마찬가지. 중앙의 명령을 멀리 떨어진 지역에 빨리 전하고, 전쟁터의 상황을 중앙에 연락하는 등 요즘과 비교하자면 초고속 인터넷이나 휴대 전화의 역할까지 말이 다 맡아서 했던 셈이지. 이러한 말을 탄 군대를 이끌고 칭기즈 칸은 가는 곳마다 정복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단다.

우리 민족은 한곳에 정착해서 농사를 지어 왔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말보다 소가 더 흔하고 친숙한 동물. 몽골 사람들이 말을 이용해서 마두금 같은 악기를 만들었다면 우리는 소가죽을 이용해서 북을 만들었지. 한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민족과 계속 이동하며 사는 유목민은 의, 식, 주 등 기본적인 문화가 많이 다르단다.

몽골 말은 유럽 말보다 몸집이 작고 다리가 짧아서 겉모습은 그다지 멋지지 않아.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몽골의 기후와 환경에 적응한 덕분에 추위에도 잘 견디고, 오래 달려도 쉽게 지치지 않는다. 말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몽골 사람들은 굶어 죽어도 말안장만은 남에게 팔지 않는다고 한다.

전통적인 유목 생활에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은 어느 정도 구분되어 있어. 보통 일을 반반씩 부담하지. 남자들은 가축 기르기, 말안장이나 발걸이 만들기, 무기 만들기, 펠트 만들기, 가축 도살 같은 일을 도맡아 하지. 여성들은 주로 식사 준비를 하고, 가축의 젖을 짜거나 유제품을 만들고, 물을 긷고, 연료로 쓰이는 가축의 똥을 주우러 다니는 일을 한단다. 또 아침에 일어나 게르 꼭대기의 덮개를 벗기고 자기 전에 다시 덮는 것도 여성의 몫이야.

몽골에서는 옛날부터 가축의 똥을 땔감으로 썼단다. 땔감으로도 쓰고 잠자리가 습하거나 춥지 않도록 침대 밑에 깔기도 했지. 주로 8월과 9월에 커다란 바구니를 메고 들판에 나가서 가축의 똥을 모아 오지. 더럽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가축들은 풀만 먹기 때문에 똥에 섬유질이 풍부해. 게다가 날씨가 건조해서 바싹 마르니까 냄새도 나지 않고 매우 가볍단다. 유목 생활을 하는 몽골의 여성들은 집 안에서뿐만 아니라 바깥에서도 할 일이 많아. 그래서 동양의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비교적 남녀의 지위가 평등한 편이야.

씨름, 활쏘기, 말달리기 경기를 벌이는 나담. 세 가지 경기를 기본으로 하면서 음악회, 연극 공연, 시 낭송 같은 문화 행사도 열고 육상 같은 현대 운동 경기도 하지. 나담 기간 중에 몽골 사람들은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지내고, 나담에 관련된 이야기로 인사를 나눈단다.

활쏘기는 남녀가 따로 시합을 하는데 남자는 75m, 여자는 60m, 떨어진 과녁을 쏘아 쓰러뜨리기로 승부를 겨룬다.

나담 경기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거리는 보통 30km가 넘는다. 수백 마리 말이 한꺼번에 출발해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 저쪽까지 달려갔다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말달리기는 말의 나이에 따라 두 살, 세 살, 네 살, 다섯 살, 그 이상의 큰 말로 나누어 시합을 한다. 기수는 대개 여섯 살에서 열세 살 사이의 남녀 어린이들이다.

몽골비사는 몽골 제국의 3대 역사책 중 하나로 꼽히는데 칭기즈 칸이 몽골 제국을 세우기까지의 과정이 실려 있어.

흰색은 몽골 사람들이 가장 신선하다고 생각하는 색깔이야. 말 중에서도 흰말은 칭기즈 칸을 상징하고 무리의 우두머리를 나타낸단다.

몽골이 청나라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도 청나라 황제에게 복종의 표시로 매년 흰 낙타 한 마리와 흰말 여덟 필을 바쳤단다. 몽골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도 쉽게 흰색을 찾아볼 수 있어. 게르에 두르는 펠트도 흰색이고 가축의 젖으로 만든 음식도 모두 흰색이지.

몽골의 가장 큰 명절을 ‘차강사르’라고 하는데, 음력 1월1일, 즉 새해의 첫날을 기념하는 명절이란다. 차강사르의 ‘차강’은 몽골어로 ‘흰색’을 뜻하고, ‘사르’는 ‘달’을 뜻해. 다시 말해서 차강사르는 ‘하얀 달’이지.

흰색은 ‘처음, 풍부, 순결, 평안’을 상징하는 신성한 색깔.

고대의 몽골 사람들은 제사를 지낼 때 하늘에 말젖술을 뿌리는 의식을 행했어. 이런 의식을 ‘사촐리’라고 부르지. 가축을 키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축은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재산이거든. 그래서 가축이 병들거나 굶어 죽지 않고 무사히 자랄 수 있게 도와달라는 뜻으로 말젖술을 뿌렸단다. 말젖술은 몽골 사람들이 가장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거니까 최고로 좋은 것을 신에게 바친다는 의미도 담고 있지. 그때부터 몽골에서는 가축의 젖으로 만든 흰색의 유제품을 복의 상징으로 여겼고, 흰색은 ‘처음, 풍부, 순결, 평안’을 상징하는 신성한 색깔이 되었단다.

 

게르 안에 들어가 보면 문 반대편의 좌우 양옆에 반닫이가 두 개 놓여 있지. 그 집안의 중요한 물건은 모두 이 반닫이 안에 들어 있어. 반닫이는 광이나 창고처럼 한곳에 붙박여 있는 게 아니라 뭐든지 넣어서 들고 다닐 수 있는 도구란다. 유목민의 생활과 정말 잘 어울리는 가구.

 

‘몽골’은 ‘용감하다’라는 뜻. 원래 칭기즈 칸이 속해 있던 부족의 이름이었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대제국이 세워지자 그대로 나라 이름이 된 거란다. 중국 사람들은 몽골을 ‘몽고’라고 불렀단다. 한자를 풀이하면 어리석고 케케묵었다는 뜻. 중국은 자기네 나라를 최고라고 생각하고 주변에 사는 민족들을 얕잡아 보고 낮추어서 불렀거든.

 

몽골 사람들은 대부분 불교를 믿는단다. 불교 중에서도 특히 티베트에서 발달한 불교인 라마교를 믿지. ‘라마’란 ‘정신적 스승’을 가리키는 말이야. 티베트 불교에서는 스승의 가르침, 즉 라마를 존중하기 때문에 라마교라는 이름이 붙었어. 몽골 사람들은 모든 일이 부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정도로 불교에 대한 믿음이 깊단다.

 

흔히 가을을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하지. 천고마비는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이야. 그런데 옛날 중국 사람들은 이 말을 너무도 싫어했단다. 왜냐하면 가을만 되면 몽골 사람들이 중국에 쳐들어왔거든. 몽골 사람들은 여름 내내 풀을 잘 뜯어 먹어서 살찌고 튼튼해진 말을 타고 중국에 쳐들어와서 애써 가꾼 열매며 곡식을 빼앗아 갔어. 그러니까 중국 사람들이 얼마나 화가 났겠니. 원래 천고마비는 ‘가을 하늘이 높아지고 말이 살찌면, 또 몽골에서 쳐들어오겠구나.’하고 걱정하는 말이었어. 그러다가 칭기즈 칸이 죽자 몽골의 힘이 점차 약해져서 마침내 청나라 때 이르러서는 중국이 몽골을 지배하게 되었지. 그 뒤에는 가을이 와도 몽골 사람들이 쳐들어올 걱정을 안 하게 되어, 천고마비가 단순히 가을을 상징하는 말로 바뀌었단다.

 

공식 이름 : 몽골인민공화국

수도 : 울란바토르

공식 언어 : 몽골어

주요 도시 : 울란바토르, 호브드, 초이발산

기후 : 국토 대부분이 고원과 높은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황량한 고비 사막이 남동부 대부분을 차지한다. 기온차가 아주 심하고 강우량이 매우 적은 편인데, 비는 대개 여름철 태풍 때 집중해서 내린다.

국가 원수 : 대통령

행정 수반 : 총리

통화 : 투그릭

주요 생산물 : 낙타, 말, 소, 양, 염소, 우유, 육류, 감자, 곡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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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몽골 인민혁명은 청나라와 러시아의 웅겔룬 장군이 이끄는 백위군에 대항해서 싸운 민족 운동. 몽골 인민 혁명군은 1921년 5월 웅겔룬 군을 격파하고 7월에는 고륜(현재의 울란바토르)으로 쳐들어가서 인민정부를 세움. 1924년 11월 몽골인민공화국 선포. 1946년 중국으로부터 정식 독립

 

낙타의 몸은 귀에는 털이 나 있고, 코는 자유로이 열고 닫을 수 있어 모래가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으며, 코에서 나오는 수분은 다시 코밑 홈을 통하여 입 속으로 들어가고, 긴 속눈썹이 눈에 모래가 들어오지 않게 합니다.

낙타는 후각이 예민하여 땅 속의 물줄기를 찾는 데 전문가.

낙타의 등에는 육봉이라는 혹에 지방이 저장되어 있어 며칠 동안 굶어도 괜찮습니다.

낙타는 180kg 이나 되는 짐을 싣고 시속 4.8km의 속도로 하루에 20km나 걸을 수 있어 ‘사막의 짐꾼’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지금은 자동차로 이동하는 유목민들도 있는데 그 자동차가 한국산. 우리나라 중고차를 수입

 

몽골 고원에서 가장 낮은 지대를 고비 사막이라고 합니다. 대륙성 기후이고 기온은 7월에는 45도, 1월에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갈 정도로 일교차와 연교차가 심합니다. 연 강수량은 200~250mm 이하인데, 100mm 이하인 지역은 대부분이 사막. 몽골에서 고비 사막이 차지하는 비율은 41.6%

 

몽골은 축산업이 기간 산업. 취업 인구의 43%가 농 목축업에 종사.

 

몽골 인은 편평한 얼굴과 눈에 두꺼운 몽골 주름이 있는 것이 특징. 팔다리는 짧으나 체격은 우람하고 튼튼.

 

현대 몽골은 아시아에서는 교육이 진보된 나라의 하나로, 1941년 문자 개혁으로 옛날 위구르 문자가 폐지되고 러시아의 키릴 문자가 채용되어 문맹은 완전히 사라졌으나, 개혁 이후 서서히 몽골 문자가 다시 부활하고 있다.

 

몽골인은 좁은 의미로는 몽골(외몽골)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할하족을 가리키나, 넓은 의미로는 러시아 연방령 바이칼 호수 주변의 부랴트족, 볼가 강 하류 유역의 칼미크족, 몽골 내에 거주하는 소수 부족과 중국의 다촨얼족, 투족, 바오안족 등도 포함

 

몽골인의 삶은 자연과의 싸움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연에 순응하며 산다고 해야 할 듯

 

 

언젠가는 우리나라에서 이 열차를 타고 몽골 평원을 달리게 될 거야. 철의 실크로드. 서울과 평양을 잇는 경의선이 완공됐고 중국 단둥과 베이징을 거쳐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를 거쳐 시베리아나 유럽으로 가는 날이 멀지 않을 거야.

 

울란바토르. 원나라가 망한 이후 17세기부터 청나라의 지배를 받아왔고 1911년 구소련의 도움으로 독립을 했기 때문에 시내는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몽골 어가 있지만 러시아 어도 통한다.

 

몽골과 한국은 본격적으로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받아 그 지배를 받으면서부터였지요.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몽골 황실의 혈통이 고려 황실에 직접 이어지면서 친족 관계로 변하게 되었으며, 오랜 기간에 걸쳐 수많은 혈연 교류가 여러 형태로 이루어졌지요. 또한 각종 제도와 문물의 교류도 이루어져 주자학이 몽골이 지배한 원나라로부터 고려에 도입되었고, 고려의 금속활자가 몽골 제국권에 전파되어 서아시아를 거쳐 서유럽까지 전해졌습니다.

 

1993년 최초의 직선 대통령 선거에서 오치르바트가 당선. 1996년 총선에서는 야당인 민주연합이 압승하여 비사회주의 정권이 탄생. 그러나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인민혁명당의 바가반디가 당선되었고, 2001년에 재선.

 

‘스롱고스바라고이벤!’ ‘한국물건 최고!’라는 뜻.

중국, 베트남, 대만 등이 대중문화를 통해 한류 열풍이 불었다면 이곳 울란바토르는 실생활 속에서 한류가 시작. 한국의 상품이 한류의 밑바탕이 된 것.

울란바토르에서 가장 맛있는 집은 한국 식당. 순두부, 꼬리곰탕, 육개장 등이 유명하지만 최고 인기는 불고기와 김치.

몽골의 음식은 거의 소금 간만 하는데 비해 한국음식은 매운맛, 단맛, 신맛 등 다양해서 인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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