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주말 바깥양반 성화로 신촌에 벚꽃 보러 갔다가 알라딘에 들러 허탕만 치고 (예전에는 책장 맨 꼭대기까지 물건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장식품만 놓여 있고, 1층 가운데 매대도 절반은 팬시용품뿐이다) 혹시나 싶어서 단골 헌책방에 들러 보았더니 지학사 오늘의 세계문학 가운데 하나인 <광야의 집>(호세 도노소 지음, 김창환 옮김, 1988)이 눈에 띄어 구입했다.
이 시리즈를 모으기 시작한 것이 1990년대 초였으니까, 대략 30년째 찾아다닌 셈인데 아직 완질을 갖지는 못했다. 전34권으로 알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두 권이 비었으니까, 어쩌면 평생 다 사지는 못할 수도 있겠다. 물론 지금이라도 중고로 구하려면 구할 수 있지만, 절판본을 만나는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 언젠가 때가 되면 만나겠지 여유를 부린 까닭이다.
아주 흔치는 않은 시리즈인데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까닭은 그 대부분을 단 한 번에 구매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서울역에서 남영동 쪽으로 큰길에 헌책방이 대여섯 군데 있었는데, 하루는 그중 맨 끝에 있는 별빛서점에 들렀더니 이 시리즈 가운데 스물대여섯 권이 꽂혀 있었다. 생소한 작품이며 작가가 대부분이었지만, 무슨 내용인가 궁금해서 모조리 샀다.
지학사라면 대부분 교과서와 참고서 출판사로 기억하겠지만, 한때는 단행본을 간행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벽호'로 브랜드명이 바뀌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성과물이 '오늘의 세계문학'이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와 작품을 해당 언어 전공 교수가 번역했다는 점인데, 그래서인지 아직도 유일한 번역서로 남은 것들이 많다.
세계문학전집이라면 지금도 영미유럽 작가에 편중된 것이 문제로 지적되는데, 이 시리즈는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중남미 등 이른바 제3세계 작가를 많이 소개했다. 당시 노벨문학상을 이미 받은 작가로는 클로드 시몽, 월레 소잉카, 나집 마흐푸즈, 나딘 고디머를 넣었고, 유력 후보로 거론된 작가로는 치누아 아체베, 응구기 와 시옹오, 막스 프리쉬를 넣었다.
훗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페터 한트케의 작품도 하나씩 넣었으니, 이 시리즈의 선구안도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영미유럽 작가 중에서 앤서니 버제스, 토머스 핀천, 마가렛 앳우드, 조이스 캐롤 오츠 등을 넣었던 것도 당시로서는 꽤나 특이했고, 중국 작가 중에서 장애령을 넣었던 것 역시 특이했다.
나귀님 입장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작품은 역시나 버제스의 대표작 <시계태엽 오렌지>의 번역본인 <조직과 인간>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영국판이 아니라 미국판을 번역 대본으로 삼았다는 점이 특이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미국판은 영국판의 맨 마지막 장을 삭제함으로써 더 암울하고 충격적인 결말을 제시했지만, 저자의 허락을 받지 않아서 논란이 되었다.
반면 나중에 번역된 민음사의 <시계태엽 오렌지>는 영국판을 대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미국판의 결말에서 수년 뒤의 상황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도 고스란히 실려 있다. 물론 편집자나 출판사가 감히 저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멋대로 내용을 가감한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작품의 내용을 감안해 보면 영국판보다 미국판의 결말이 더 그럴싸하게 여겨진 것도 사실이다.
생각해 보니 미국판의 결말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결말과도 똑같은 셈이니, 어떤 면에서는 저자의 의견보다 편집자/출판사의 의견이 더 정확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여하간 나귀님은 <조직과 인간>을 통해 미국판의 결말이 유일무이한 결말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영화에도 그렇게 나왔으니까!) 나중에야 또 다른 결말이 있다고 하기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 다음으로 흥미로웠던 작품이 바로 그제 타계한 페루의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녹색의 집>이다. 중앙일보사 세계문학전집에 들어 있던 <빤딸레온과 위안부들>을 먼저 읽었는지, 아니면 이 작품을 먼저 읽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여하간 수많은 '목소리'가 정신없이 교차되면서 사건의 윤곽이 점차 뚜렷해지는 서술 기법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후 <미라플로레스에서 생긴 일>과 <궁둥이>를 읽고 나서부터는 이 작가의 책이라면 일단 사고 보는 버릇이 생겨 버렸는데, 막상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에 한동안 절판되었던 책들도 재간행되고, 새로운 작품이 대거 번역되는 것을 보니 어쩐지 관심마저도 시들해져서, 지금은 읽은 것보다 읽지 않은 것이 더 많은 채, 마루 책장 한구석에서 먼지만 쌓여 가고 있다.
그런데 이 작가의 책 중에서도 막상 읽고 나니 살짝 어리둥절했던 경우가 있었으니, 사실 원저자가 문제라기보다는 번역자가 문제였던 경우다. <픽션에 숨겨진 이야기>라는 책인데, 원래는 1968년에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했던 강연 내용을 수정해서 내놓은 것이다. 판형도 작고, 분량도 적어서 150쪽에 불과하지만, 원문도 수록되다 보니 번역문은 그 절반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번역자의 무지와 편집자의 부재다. '알렉상드르 뒤마'를 '알레한드로 듀마스'로, '플로베르'를 '플라우베어'로 오기한 것은 물론이고 수많은 오타도 들어 있다. 아마존 토착민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벨기에 탐험가를 가리켜 "그 역시 마르께스이다"(60쪽)라고 첨언한 것이 있어서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만, 무려 '후작'(marques)의 오역이다!
그런데 제아무리 오역과 오타가 그득한 몰골이라도 이 책을 감히 내버릴 수 없는 까닭은, 그 내용이 바로 <녹색의 집>의 창작 과정에 대한 회고이기 때문이다. 즉 어린 시절 잠깐 살았던 동네의 유곽인 "녹색의 집"을 멀찍이 지켜보며 느낀 호기심부터, 청년 시절 아마존에서 목격한 원주민과 선교 단체와 범죄 조직에 대한 기억이 뒤섞여 저 소설이 나왔다는 거다.
즉 "소설을 쓴다는 것은 스트립쇼와 비슷한 의식이다"(11쪽)라는 상당히 당혹스럽기까지 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강연록은 바르가스 요사 나름의 창작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스트립걸이 음탕한 조명 밑에서 옷을 벗어 던지며 자신의 감추어진 매력들을 하나하나 보여주는 것처럼, 소설가도 역시 작품들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자신의 은밀한 부분들을 발가벗는다."
하지만 소설은 단순한 노출로 그치지 않는다. "물론 둘 사이의 차이점은 있다. 소설가가 자기 스스로 내보이는 것은 스트립걸이 전개하는 것처럼 자신의 감추어진 매력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장 추한 부분, 즉 그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향수, 실수, 원한 등과 같은 악마이다." 아울러 "소설가는 옷을 반쯤 벗고 시작해서,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옷을 입는다."
이후의 강연 내용에서 드러나듯이, <녹색의 집>은 그의 수많은 기억들이 뒤섞이고 변형되어 현실에서 재창조된 허구이다. 소설의 내용이 현실의 사례와 정확히 대응하지는 않더라도 근거가 없지는 않으니, 저자의 다음과 같은 정의에 딱 들어맞는 셈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전위된 스트립쇼이고, 모든 소설가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노출광들이다."(11-12쪽)
강연 말미에서 바르가스 요사는 저 소설을 발표한 이후, 그 소재가 된 유곽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 번 날을 잡아 방문하려 했지만 번번이 이런저런 이유로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고 언급한다. 때로는 불가피한 사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충분히 기회가 있었는데도 저자 스스로가 막판에 결정을 번복해서 방문을 취소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어쩌면 노출 후 이미 옷을 도로 입은 까닭일까. "이야기를 쓰는 데 필요한 첫 번째 자극물이었던 개인적인 경험(일상생활, 꿈, 듣기, 독서)들은 창작 과정 동안 아주 심술궂게 감추어져서, 소설이 끝났을 때에는 어느 누구도, 때때로 소설가 자신조차도, 모든 허구의 이야기 안에 길게 늘여져 있는 자서전적인 그 마음을 용이하게 귀담아 들을 수가 없다."(11쪽)
하지만 저자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고, 오랫동안 찾아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녹색의 집>의 소재를 제공한 "그 도시, 그곳의 사람들, 그곳의 모래밭조차도 나를 자유롭게 풀어 주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그러면서 덧붙인 강연문의 마지막 몇 마디는 마치 지금까지 모든 작품 창작의 토대였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보내는 마지막 인사처럼 들리기도 한다.
"여러분들 중에 누구라도 우연히 삐우라에 가서 만가체리아를 둘러보고 '녹색의 집'을 방문한다면, 만가체리아 사람들과 아비딴따들에게 내가 계속해서 그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말을 제발 전해 주십시오. 각고의 노력으로 그들에 대한 글을 쓰는 데 지루한 3년을 보냈고 (...) 아직도 나의 마음속에는 계속해서 그들이 남아 있다고 전해 주십시오."(72쪽)
[*] 그나저나 <픽션에 숨겨진 이야기> 번역자의 약력을 살펴보니, 다른 번역서 중에는 마르케스의 단편집 <이방의 순례자들>도 있었다! 교통사고가 나서 전화를 쓰려고 우연히 정신병원에 들어갔다가 정신병자로 오해받아 영영 나오지 못하게 된 여자의 이야기라든지, 딸의 썩지 않는 시체를 트렁크에 넣어 다니며 바티칸에서 성녀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처럼 기괴하면서도 인상적인 단편이 많았는데, 지금 와서 다시 읽어 보면 바르가스 요사의 번역서처럼 잘못된 문장이 줄줄이 나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이미 오래 전에 사다 놓은 (아마 한 번 읽기도 했던 것 같은)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중남미 소설 개론도 이 양반 번역이라니, 그건 또 어떨지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