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을 강의에서 읽으며 그의 신작들도 언급했는데 <더 리얼 씽>(2024)과 <모더니즘>(2025)이 그에 해당한다. 모두 80대의 비평가가 펴낸 책(이글턴은 1943년생이다). 더불어 <더 리얼 씽>은 번역이 안 좋아서 강의에서 교재로 쓰려다 포기한 기억이 떠올랐다. 단순하게 아래 인용문에서 원문에도 없는 ˝19세기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운운은 뭔가 어이없다는 인상을 준다. ‘19세기‘가 번역에만 들어간 말이다.
생년이 비록 19세기(1871년생)라 하더라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7)의 작가를 발자크(1799-1850)나 에밀 졸라(1840-1902)와 같은 19세기 작가로 분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앞 페이지에 ˝18세기 영국 작가 클라라 리브˝(이건 원문 대로다)란 말이 나와서 짝을 맞추려 ˝19세기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로 옮긴 듯싶지만, 그렇더라면 그런 친절은 ˝20세기 프랑스 작가˝로 표현됐어야 했겠다. 같은 단락을 AI에게 번역하도록 해봤다.
˝그러나 예술은 어떻게 삶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예술일 수 있는가? 예술이란 형성하고 선택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예술을 “삶을 충실하게 재구성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렇다면 사물들이 겉으로 나타나는 방식에 충실한 채 어떻게 그것들을 다시 구성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들을 재배치함으로써 오히려 그 진실을 더 온전히 불러낼 수 있는 것일까? 어떤 경우이든, 모든 것이 재현될 수는 없다. 양성자는 실재하지만, 그것의 스케치를 휘갈겨 그릴 수는 없다. 척추를 따라 전해지는 찌릿한 감각은 회화보다 인쇄물에서 더 쉽게 재현된다. 기독교인에게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어떤 존경받는 신학자도 당신이 휴대전화를 준비한 채 예수의 무덤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면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실제로 벌어졌지만, 모든 칼부림과 고통의 비명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것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모든 리얼리즘은 자신이 묘사하는 것의 편집된 버전이다.˝
개인적인 판단으론 별차이 없거나 더 이해하기 쉽다(AI의 번역은 1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뜻하는 바는 우리가 철학이나 이론서 번역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 거의 모든 언어의 어지간한 난이도의 책들을 이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번역에 대한 시비나 비평도 이제는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긴 한데 아직 비용 고지서가 날아오지 않은 편익 같은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나 형태와 선택성의 문제인 예술이 어떻게 삶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예술이 될 수 있는가? 19세기 프랑스 작가인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예술을 ‘삶의 충실한 재구성‘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어떻게 보이는 대로 충실하면서 한편으로 사물을 재구성할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그것들을 재구성함으로써 진실을 더 완전하게 환기할 수 있을까? 어찌 되었거나 모든 것을 표현할 수는 없다. 양성자는 실제 존재하지만, 그 개요를 단숨에 휘갈겨 쓸 수는 없다. 척추의따끔거림은 그림보다 글에서 더 쉽게 표현된다. 기독교인에게 부활은 실제 사건이었지만,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라 해도 휴대폰을 들고 예수의 무덤 주변에 숨어 있었다면 부활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아우스터리츠전투(1805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동맹군과 치른 전투)는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지만, 이 전투에서 격돌하는 검들과 고통스러운 비명까지 표현할 방법은 없다. 그러한 모든 사실주의는 사실주의가 묘사하는 것을 편집한 버전이다.- P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