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8 프리모 레비.
막연하게 난 이 작가 작품을 좋아할 것이다, 하고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프리모 레비의 책 다섯 권을 모아뒀다. 제일 관심이 갔던 ‘주기율표’는 작년 봄에 읽었는데, 역시, 나는 그 책이 좋았다. 직장에서 책을 사 준다길래 나는 ‘부모와 다른 아이들 1’이 뭔가 두껍고 비싸니까 이거 사달래야지, 하다가 맞은 편 동료가 책 살 궁리를 하는데 대고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를 권했다. 동료는 일이 바빠 전에 내가 알려준 ’밀레니엄-여자를 증오한 남자들‘도 다 못 읽은 참인데…
책 추천은 삼가는 편인데 또 그러고 나니 정말 좋았던가, 이 작가 맞던가, 확인이 필요했나 보다(이렇게나 자기 확신 없는 책쟁이놈). ’이것이 인간인가‘를 펼쳤다. 담담하게 그가 만났던 사람들, 겪었던 일들을 적어낸 걸 읽다 보니 책을 못 덮고 하루가 한 권이 되었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는 참혹한 경험을, 만화 ’쥐‘나 필립로스의 ‘포트노이의 불평’같은 데서는 수용소 생존 유대인과 그 자녀들로 이어지는 지옥도를 통해 보여줬던 것 같다. 그런데 앞서 말한 작품들이 생존자 자녀들의 시각에서 수용소 세대 이후의 삶의 고통을 주로 그린 데 비해, 소수만 살아 돌아온 생존 당사자 레비의 글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하고 담담하면서도 또 세세해서 읽는 사람이 더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았다.
소설 후기 격인 독자의 질문에 대해 레비가 답한 내용에서는, 이제 평범한 삶으로 돌아와 짧은 수용소 생활을 돌아보면 격렬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이후 십 년 뒤쯤 그가 자살로 생을 끝낸 것을 보면 그렇게 괜찮아, 앞으로가 중요하지, 또 이런 일이 없어야 해, 하면서 자신의 고통을 강조하기 보다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려고 부단히 애쓴 작가의 저작들이 그저 묵직하다. 무겁게 가까이 꽂혀서 멍청한 소리만 자꾸 하지 말고 좀 읽어보라고, 내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하는 것 같다.
+밑줄 긋기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그 암묵적인 도그마가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되면, 그 논리적 결말로 수용소가 도출된다. 수용소는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이 인식이 존재하는 한 그 결과들은 우리를 위협한다. (작가의 말 중)
-이제, 사랑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집, 자신의 습관, 옷, 다시 말해 말 그대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빼앗겨버린 사람을 상상해보라. 그는 고통과 욕구만 남은, 존엄성이나 판단력을 잃어버린 텅 빈 인간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잃는 건 쉬운 일이니까. 그리하여 그의 삶과 죽음은 인간적인 친밀감 따위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아주 가볍게 결정될 것이다. 운이 아주 좋을 경우 그게 더 낫다는 순수한 유용성 판단 정도를 따를 수는 있으리라.
이제 ‘절멸의 수용소’라는 용어의 이중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지다‘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분명해질 것이다. (35)
-낯선 외국어가 모든 사람들의 정신의 밑바닥으로 돌덩이처럼 떨어진다. ‘기상’. 따뜻한 담요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경계, 잠이라는 튼튼하지 못한 갑옷, 고통스럽기도 한 밤으로의 탈출, 이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다. 우리는 다시 무자비하게 잠에서 깨어나 벌거벗고 연약한 상태에서 잔인하게 모욕에 노출된다. 이성적으로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긴, 다른 날과 똑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너무나 춥고 너무나 배고프고 너무나 힘이 들어 그 끝은 우리와 더 멀어진다. 그러므로 회색빛 빵 한 덩이에 우리의 관심과 욕망을 집중시키는 것이 더 낫다. 빵은 작지만 한 시간 후면 틀림없이 우리 것이 된다. 그것을 집어삼키기 전까지 5분 동안 그것은 이곳에서 우리가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변할 수 있다. (94, 지금껏 들어 본 중에 가장 슬픈 “일어나기 싫어.”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수용소는 벌을 받는 곳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 수용소는 게르만식 사회구조 한가운데에서 시간 제한 없이 우리에게 부과된 존재방식일 뿐이다. (125)
-나이, 사회적 지위, 출신, 언어, 문화와 습관이 전혀 다른 수천 명의 개인이 철조망 안에 갇힌다. 그곳에서 그들은 규칙적으로 되풀이되고 통제당하는, 만인에게 동등한 삶, 그 어떤 욕구도 충족되지 않는 삶에 종속된다. 이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인 인간이라는 동물의 행동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실험장이다. (132)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인간성은 땅에 묻혔다. 혹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그것을 땅에 묻어버렸다. 사악하고 어리석은 SS대원들, 카포들, 정치범들, 범죄자들, 크고 작은 일을 맡은 트구건층들,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노예와도 같은 해프틀링까지, 독일인들이 만든 광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단계들은 역설적이게도 균등한 내적 황폐감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그는 이 무화의 세상 밖에 있었다.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187,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자연스럽고 평범한 호의란 겪어보기 어려운 일이지만 또 불가능한 건 아닌 듯싶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야 할 사람의 고함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무기력과 복종의 두텁고 낡은 장막을 뚫고 들어와 우리들 내부에 살아남은 인간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Kamaraden, ich bin der Letzte!˝(동지들, 내가 마지막이오) (227)
-(…)내가 보기에 증오는 개인적인 것이고 한 사람에게, 어떤 이름에게, 어떤 얼굴에게 향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당시 우리를 박해했던 사람들은 이름도 얼굴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책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멀리 있었고, 눈으로 볼 수 없었으며, 접근할 수도 없었다. 나치스 체제는 용의주도하게도 노예와 주인이 최소한의 접촉만 하도록 마련되어 있었다. (…) 또 이 책이 쓰인 그 몇 달 동안, 즉 1946년에 나치스와 파시즘은 정말 얼굴이 없는 듯했다. 그것들은 무시무시한 악몽처럼, 정확하게 그리고 당연하게 다시 허공 속으로 흩어져버린 듯했다. 새벽닭이 울면 유령들이 사라져버리듯이 말이다. 그런 유령 집단을 향해 내가 어떻게 분노를 키우고 복수를 바랄 수 있겠는가? (269)
-책의 경우 (독재)국가의 마음에 드는 내용이어야만 출판과 번역이 될 수 있다. 다른 책을 보려면 외국에 나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자기 나라로 책을 가지고 들어와야 한다. 그런 책은 마약이나 폭발물보다 더 위험하다. 국경에서 책을 소지하고 있다가 들키면 책을 압수당하고 당신의 처벌을 받는다. 국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책, 마음에 들지 않게 된 책, 이전 시대의 책들은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워진다. 1924년과 1945년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일이다. 국가 사회주의가 지배한 독일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런 일은 지금도 수많은 나라에서 자행되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파시즘에 맞서 영웅적으로 싸웠던 소련도 이런 국가에 포함된다. 독재국가에서는 진실을 마음대로 바꾸고, 과거를 되돌려 역사를 다시 쓰고, 사실을 왜곡하고 삭제하고 거짓을 첨가하는 게 합법적이다. 프로파간다가 정보를 대체한다. 그런 국가에서 당신은 권리를 지닌 시민이라기보다는 신민이다. 또한 당신은 광적인 충성과 맹종을 강요하는 국가(그리고 국가를 대표하는 독재자)에 복종해야 한다. (272)
-고통을 덜 받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건 처음에는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다. 수용소 밖에서도 룸펜프롤레타리아가 투쟁을 선도하는 일은 드물다. ‘거지들’은 저항하지 않는다. (279)
-당시에는 굴뚝 위로 불꽃이 보였다고 했다. 그녀는 나이 많은 여자들에게 물었다. “저 불길은 뭐지요?” 그러자 여자들이 대답해주었다. “저기서 타고 있는 건 바로 우리야.”(284)
-역사적 현상의 책임을 한 개인에게 돌려(끔찍한 명령을 실행에 옮긴 자들도 결코 무죄일 수 없다!) 설명한다는 건 옳지 않은 듯하다. 게다가 한 개인의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행동의 동기들을 해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까지 제기된 가정들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을 변명하며 죄의 양이 아니라 질을 설명한다. 나는 솔직히 히틀러와 그의 뒤에 있던 독일의 광적인 반유대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한 몇몇 진지한 역사학자들(블록, 슈람, 브라허)의 겸손함을 좋아한다.
이와 같은 일은 어쩌면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해되어서도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정당화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내 말은 이런 뜻이다. 인간의 의도나 행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원학적으로도)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 그 행동의 주체를 수용하고, 그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01-302)
-그러므로 이성과 다른 도구로, 혹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을 앞세워 우리를 설득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진짜 선각자와 가짜 선각자를 구별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모든 선각자를 의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들의 주장을 일단 거부하는 것이 좋다. 그것의 단순성과 눈부심이 우리를 들뜨게 한다 해도, 무상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편리하다고 생각되더라도, 훨씬 더 소박하고 덜 흥분되는 진실, 차근차근, 직름길로 가지 않고 공부와 토론과 추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진실, 확인되고 입증될 수 있는 진실에 만족하는 게 훨씬 더 좋다. (304, 그리고 난 이렇게 실험 연구 해 본 사람의 신중함을 삶과 정치에까지 적용하는 레비의 말이 좋다.)
-사실 우리의 미래는 외적 요인들, 우리들의 자유로운 선택과는 전혀 무관한 요인들과 우리가 의식하고 있지 못하는 내적 요인들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다. 잘 알려진 이런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본인의 미래도 이웃의 미래도 알 수가 없다. 또 같은 이유로 과거의 일에 대해 “만약에”라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내가 아우슈비츠의 시간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글을 쓰는 일을 없었을 것이다. (305, 겨우 두 권 읽었지만, 프리모 레비가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돌아 온 건 자신이 겪은 일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이 정말 강했던 덕도 있지 않을까 짐작했다. 나도 내 속엔 이야기가 너무 많아...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다 어딘가 잠들어 있나 보다. 라고 쓴 뒤 한 장만 넘기니까 작가 스스로 비슷한 말을 한다.)
-아마도 그보다는 지칠 줄 몰랐던 인간에 대한 관심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뿐만 아니라 꼭 살아남아 우리가 목격하고 참아낸 일들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지가 생존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암흑과 같은 시간에도 내 동료들과 나 자신에게서 사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보겠다는 의지, 그럼으로써 수용소에 널리 퍼져 많은 수인들을 정신적 조난자로 만들었던 굴욕과 부도덕에서 나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고집스럽게 지켜낸 것이 도움이 되었다. (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