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은 아니고 자주 확인하는 북플 앱의 ‘지난 오늘‘ 메뉴에서 4개의 글을 확인했다. 확실히 특정한 날에 글을 더 많이 쓰고, 어떤 날에는 전혀 쓰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연휴 중 어떤 날에 짧게 북플에 접속했다가 과거에 한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었다. 또 어떤 날엔 하나 정도는 글이 있기도 했다.
오늘 아침에 확인한 과거 오늘 쓴 글은 앞에서 말했듯이 4개였다. 재미있는 것은 첫글과 둘째글이 1년 사이에 쓴 것이고, 한참 시간이 지나서 다시 셋째글과 넷째글이 또 1년 사이에 쓴 글이었다. 그 가운데 꽤 긴 시간은 내가 이 알라딘 서재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던 기간이었다. 그때는 좀 더 대중적인 블로그 시스템을 갖춘 곳에 일상 이야기를 올리는 내 공간이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서비스가 없어지면서 몇 년간 올렸던 내 글들이 다 사라져버렸다. 그때 충격이 좀 컸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중요한 글이 아닐수도 있겠지만, 내 일상의 이야기들은 나중에 미래의 내가 본 입장에서는 정말로 소중한 기억들이다. 그런데 그런 기억들이 자본의 논리 때문에 한 순간에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아마도 그 글들을 다른 공간으로 옮기는 유예 기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너무 정신 없이 바빴다. 그런 것들을 챙기지 못했고, 결국 블로그 서비스는 문으 닫았고, 나는 엄청 긴 시간 가끔 기록했던 일상의 기록들을 잃었다.
만약 불시에 알라딘 서재가 문을 닫는다면, 나는 또 다시 그때 이후의 일상의 기록들을 잃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경우가 생기면 이번에는 백업을 꼭 받아두거나, 다른 곳으로 꼭 옮겨두어야지. 별거 아니라 생각했던 작은 메모 하나고 얼마나 소중한 지 알게 되었으니.
과거 오늘 올렸던 글 4개 중에 흥미로운 것이 두 개 있었다. 개인적인 기준으로는 4개 모두 흥미롭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두 개로 압축할 수 있다. 일단 하나는 아이들의 유아어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언어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언젠가 유아어를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을 과거에 했었다고 떠올릴 수 있는 글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르다. 같을 수 없다. 비슷할 수는 있다. 어떤 하나의 상황을 보고 다수가 비슷한 생각과 판단을 하고,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는 있지만, 이걸 아주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다 다른 판단과 감정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유명한 스포츠 스타의 엄청난 업적을 보며, 해당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본인이 인지하는 세상이 바뀔 정도의 감흥을 얻겠지만, 그 스포츠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건 와! 하고 한번 아주 짧게 감탄하고 마는 스쳐지나가는 하나의 사건일 것이다.
다시 예를 들어보면 최근에 본 [승부]라는 영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둑이라는 문화에 나는 어려서부터 익숙했다. 지금도 나는 화투라는 이름의 게임을 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었다. 어떻게 화투를 칠 줄 모른다는 거짓말을 하느냐고. 지금은 그 말이 그리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수도 있는데, 90년대에는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방식으로 반응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당시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 모임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든 화투라는 일본의 게임이자 도박을 익숙하게 접했던 것이다. 내가 화투를 배우지 못한 이유는 명확하다. 내 기준에선 친가와 외가 모두 화투를 치는 문화가 없었다. 나는 자라면서 단 한 번도 화투를 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당연히 화투라는 게임을 배울 수 없었다. 중년의 나이가 될 때까지 화투를 몰랐던 것은 우리 집안에서 도박을 하지 않았고, 나도 도박은 무조건 인생을 망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도박이 아니라 그냥 친한 사람들끼리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로써 화투를 잠시 배우기는 했다. 룰을 조금 배우기는 했지만, 아직 제대로 다른 사람들과 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
아주 조금만 더 옆길로 빠져보면, 다 늙은 이 나이에도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고 말하면 대부분 거짓말 하지 마시라고 반응했다가, 거짓이 아니라고 진지하게 말하면, 어쩔줄을 몰라하는 반응을 본다. 자전거 하나 없이 가난했던 내 어린 시절 덕분에 나는 다 늙어서도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는 것 배운 과정이 어린 시절 지나쳐온,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이라 그렇게 여기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재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배워보려고 마음 먹었던 내 기준에서는 결코 가볍고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혼자 언제든 탈 수 없다. 사람들이 거의 없는 텅 빈 넓은 공간에서만 탈 수 있다. 눈 앞에 사람이나 차량이 나타나면 나는 어쩔줄을 몰라 넘어져버린다.
자, 내가 왜 영화 [승부]와 바둑 이야기를 하다가 화투 이야기로 넘어갔는지 궁금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바둑이 다른 사람들에게 화투와 비슷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친척들이나 이웃들이 모여서 화투를 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대신 바둑을 두는 모습을 늘 보았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바둑돌을 만지작거리며 수읽기에 빠져있는 모습은 어린 아이가 보기엔 재미없고 지루하다. 하지만 그것 외에 다른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내 기준에서는 사람들이 모이면 항상 바둑이란 걸 두는구나. 그럼 나도 바둑을 공부해야 하겠구나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내 주위 사람들이 모두 화투만 쳤다면, 나도 아마 어려서부터 화투를 배웠을 것이다.
자, 다시 과거 오늘 쓴 글 중에 유아어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면, 참 재미있는 것이 대체로는 비슷한 패턴을 보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 보면 정말 재미있고 독특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친구들은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인생의 큰 관문을 건넌다. 그래서 결혼, 출산, 육아에 대해 수다를 떨며 정보를 나누고, 각자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주위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유아어였다. 아직 어린 아가들이 자신만의 표현으로 발음하는 단어들.
큰 아이는 삼촌을 부를 때, ‘찌쭝‘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큰 아이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가끔 생각하는데, 대체 왜 삼촌을 그렇게 발음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해할 수 없다. 당시에 아기였던, 아이에게는 그렇게 들렸거나, 그렇게 발음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몇 년 후에 작은 아이는 삼촌을 ‘땀똔‘이라 불렀다. 이건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 작은 아이 뿐 아니라 전국의 많은 아기들이 비슷한 발음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찌쭝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큰 아이는 계란을 좋아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계란이 귀했다. 비쌌다. 그래서 가장인 아버지만 먹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아버지가 계란을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며 침을 삼키는 풍경, 이것이 80년대와 그 이전 시대를 그리는 모습일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도 그랬다. 아마 어머니는 그런 고민을 했을 것이다. 계란을 비싸게 사면서,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들, 딸에게도 주고 싶지만, 돈 벌어오는 남편에게만 줄 수 밖에 없는 현실적인 상황에 대해 안타까워 하시지 않았을까.
암튼 우리 큰 아이는 계란을 아주 좋아했고, 아주 특이하게 발음했다. ‘기랑‘이라고 발음했는데, 이 ‘기‘자의 발음이 독일어 R 발음처럼, ‘키‘와 ‘히‘ 중간 발음 같은 느낌으로 혀를 굴려서 나오는 발음이었다. 애들 엄마가 독일어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서 독일어 신동인 아기가 태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하지만 유아어는 정말 유아어였다. 아이는 조금 더 자라자마자 곧 그 발음을 잊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본인이 그런 발음과 표현을 썼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큰 아이의 경우에는 나로서도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처음이라 사소한 경험들을 제법 남겨두어, 여러 유아어에 대해 기록을 해두었고, 나중에 그걸 적었던 것이 2013년 오늘 쓴 글이었다. 작은 아이는 상대적으로 기록을 많이 남겨두지 않아서 미안한 마음이 크다. 다만 작은 아이는 언어의 측면에서는 주위 아이를 키우는 다른 부모들에게 들은 이야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유아어도 기억에 남을 만할 독특한 표현들이 없었는데 반해, 행동 발달 측면에서는 정말 달랐다. 이 녀석은 큰 아이와 비교해 모든 지표에서 아주 빨랐다. 큰 아이였다면 아직 배밀이를 하고 있을 정도의 월령에 작은 아이는 본인 키보다 더 큰 인형을 끌고 익숙하게 걸어다녔다.
2010년부터 2013년 정도까지 나는 작은 아이에게서 재미있는 혹은 독특한 유아어가 없는지 유심히 살폈던 것 같다. 하지만 큰 아이의 경우처럼 독특한 단어가 들리지는 않았다. 이건 어쩌면 아이가 가진 개성, 재능과 연관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당시에 생각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확실히 재미는 있다. 당시의 내가 좀 더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여유있는 입장이었다면, 정말 유아어에 대한 연구를 해봤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자꾸 엉뚱한 곳으로 빠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중학교 시절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느꼈을 때부터 긴 시간 글을 쓰면서 습관처럼 굳어진 것이 있다고 느끼는데, 서두에 과도하게 분량을 많이 두고, 쓸데없이 힘을 빼는 것이고, 중간에 자꾸 쓸데없이 곁가지로 빠졌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 것이다. 이게 거의 평생 굳어져 온 습관이라 어쩔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최근에 느낀다. 혼자 개인적으로 쓰는 글에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청탁 받은 글, 기고문, 성명서나 논평 등 공식적인 글에서도 자꾸 이 습관을 떨쳐내지 못해 부끄럽거나 곤혹스러운 상황을 자주 겪는다. 예전에는 분명 그렇지 않았다. 과거의 내가 쓴 성명서나 논평을 보면 핵심을 분명히 짚고, 우리의 주장만을 간명하게 드러내는, 지금 내가 다시 봐도 꽤 잘 쓴 글이었는데, 지금 그런 성격의 글을 쓰려고 하면, 안 써진다.
지난달에 청탁받아서 쓴 기고글은 그런 의미에서 최악의 글이었다. 시간 여유가 너무 없는 상황에서 급하게 쓴 글은 내가 보기에도 너무 엉망이었는데, 어떻게 고쳐야 할지 방향을 잡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친하면서 신뢰할 수 있는 활동가 동료 서너 명에게 글을 보내어 좀 봐달라고 요청했었다. 남성 활동가 몇 명은 내 기대를 저버리고 성의 없게 잘 썼네 하고 말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고 존중하는 여성 활동가는 아주 구체적으로 의견을 전해줬다. 비록 일부는 문장의 구성까지 건드려서 아주 살짝 내 자존감을 건드리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주 내게 필요한 의견이었고, 그를 바탕으로 다시 기고글을 조금 더 객관적이고 쉽게 수정할 수 있었다.
알고 있다. 내 글이, 내가 쓰는 스타일이 쉽지 않고 별로 효율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친한 친구가 늘 하는 말, 형은 서론이 너무 길어. 라는 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런 사람인 것을.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서론을 풀어내는 데 시간과 노력을 더 많이 들일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를 하다가 곁가지로 빠져서 어쩌면 엉뚱한 것처럼 들리는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본류로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글을 쓰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철저한 계산의 결과라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흔히 성급한 사람들이 나의 조금은 긴 서두를 견디지 못하고 너무 길다고 비판하곤 하는데, 사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집중하게 되는 것이 본 이야기가 아니라 서두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달렸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본 이야기가 시작도 하기 전에 서두에서 이미 이 이야기에 흥미를 잃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서두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에 몰두하는 편이었고, 그런 성향이 지금 좀 과하게 관심을 모으는 차원의 서두를 만드는 것이로 이어지는 것 같다.
암튼, 내 생각에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에 감응하는 것은 그 이야기의 교훈이나 올바름이 아니다. 본 편의 흥미와 빠른 전개도 필요하고, 클라이막스의 흥분과 반전도 필요할 수 있겠지만, 사실 서두에서 독자와 청자의 흥미를 가져오지 못하면 사실 본 이야기에 접근할 기회조차 잃는다. 서두를 잘 풀어내지 못하면 본 편은 그냥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친한 친구가 서두가 너무 길다고 표현한 것을 염두에 두고 반영해야 하겠지만, 그 만큼 내가 서두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 편이라는 것을 대개 사람들은 모른다.
내 생각에 감동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연결되는 독특함과 독창적인 어떤 하나의 점에서 온다. 나는 그 밑밥을 서두에 깔아두기 위해 철저히 계산해서 서두에 많은 에너지를 투여하는데, 종종 그것이 과해서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글이나 말에서 이런 나의 방식을 바꿀 생각은 없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공식적인 성격의 글에서도 내 방식을 접목해서 효과를 거둘 수는 없을까를 고민하는 편이다. 내 생각에 나는 남들이 잘 쓰는 방식의 글은 오히려 잘 못 쓰는 사람이라 느낀다. 어릴 때는 내가 글을 좀 쓴다고 자만심에 빠진 적도 있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정말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 사이에서 내 글을 그저 한심하고 초라하기만 하다. 여기서 나를 드러나는 방식은 내가 제일 잘하는, 익숙한 것을 잘 살리는 것이고, 그것이 좀 길고 당장 이해하기 어려운 서두를 잘 풀어내어 본 내용에 연결시켜, 사람들이 느끼기에 아! 하고 환기시킬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어려운 일이고, 대체로는 실패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을 수 있다.
아까 영화 [승부] 이야기를 했는데, 이 영화의 핵심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태도라고 본다. 비교적 젋은 나이에 받아들인 엄청난 재능을 가진 제자. 이 제자가 아직 청소년이었을 때 자신을 넘어선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스승의 입장은 과연 어떨까? 이병헌 이라는 연기의 신이라 부를 만한 배우가 연기한 조훈현 9단은 정말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싱크로율 99.9999퍼세트라고 부를만하다. 과거의 뉴스나 언론에 나온 모습들을 그대로 재현한 장면들은 칭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캐릭터를 부각시키고 관객들이 몰입하게 만드는 영리한 장치들이었다.
유아인은 음, 솔직히 연기가 나쁘지는 않지만 꼭 칭찬을 남길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록 이런 내 생각이 그의 마약 투약 등 사회적 기준의 범죄 행위에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의 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아인의 연기는 늘 미묘한 위화감이 있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단 하나 유아인의 연기가 좋았다고 칭찬할 만한 영화는 [소리도 없이]라고 생각한다. 말이 없을 수 밖에 없는 연기. 그만큼 그 배우의 발음과 발성은 좋지 못했다. 연기를 하면서 왜 이렇게 떨리는 발성이 많은가 궁금했는데, 나중에 생방송에 출연한 모습을 보니 정말 심하게 떨면서 말을 하더라. 그때 알았다. 이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카메라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어쩌면 그래서 이 사람이 마약에 기댈수 밖에 없었던 걸까? 암튼 유아인의 약물 문제 때문에 다 찍어놓은 이 영화를 개봉하지 못하고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다. 어쩌면 영영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이병헌의 신들린 연기를 보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쉬웠을 것 같다. 물론 이병헌도 과거 성범죄 논란이 있었다. 실제 상황은 당사자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그런 논란 만으로도 이 배우에 대한 실망감이 큰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양가감정이 든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연기를 잘 하는 배우를 좋아할 수 밖에 없는 현실과 도덕적, 상식적인 잣대로 배우를 외면해야 한다고 말하는 양심 사이의 갈등.
지금 이 시점에서 문득 깨닫는다. 사실 나는 과거 오늘 쓴 글들 중에서 두 개의 글에서 영감을 받아서 유아어와 문화에 대해 다루고 싶었고, 그 중 특히 최근에 본 영화인 [승부]를 모티브로 바둑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계속 다른 이야기인 화투와 글쓰기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과 분량을 써버렸다. 음, 그렇다. 나는 이렇게 글을 못쓰는 사람이다. 바둑 이야기는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