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대회
지난 토요일 양천마라톤 대회에 다녀왔다. 이번에도 10킬로미터 코스. 이 대회는 풀코스는 없었지만, 하프 코스, 10킬로미터, 5킬로미터에 더해 커플런(10킬로)과 페밀리런(5킬로) 부문도 있어서 개인이 아닌 여러명이 재미있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꾸준히 함께 달릴수 있는 지인들이 있다면, 이런 부문에 참여해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될 것 같았다. 물론 나는 대회에서 기록을 중요시 하다보니 어쩐지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그냥 달려서 싸움이 벌어지거나 서로 서운해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날 달리다가 중간에 아마도 커플런 참가자로 보이는 젊은 남녀와 일정 시간 함께 있었다. 중간에 여성 참가자가 조금 속도가 쳐져서 내가 앞으로 치고 나간 후로는 마주치지 못했었다. 아마도 나보다 훨씬 더 잘 달릴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그 남성 참가자는 커플런이라 여성과 속도를 맞출수 밖에 없었겠지.
양천구가 그렇게 멀지는 않지만, 대회장소까지 버스 타고 약 1시간 10분 거리라고 지도앱이 알려줬다. 집결시각은 7시 50분 대회 시잘은 하프코스가 8시 30분. 10킬로 코스라 8시 40분이었다. 미리 가서 옷도 갈아입고, 짐을 맡기고, 몸을 풀어야 하니 8시 전에 도착해야 원활하게 준비할 수 있겠지. 미리 받은 번호표와 기록칩과 함께 경품 응모권이 있었고, 안내문에는 경품 응모권은 7시 50분까지 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경품을 얼마나 많이 주는지 알 수 없지만, 참가자가 수천명일텐데 내가 당첨될 확률은 없다고 생각하고 깨끗하게 포기했다.
금요일 저녁에 파주에서 아이들과 놀다가 밤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과 조금 이른 저녁을 먹고 돌아와서 그랬는지, 약간 뭔가 더 먹고 싶은 생각에 편의점에서 김밥을 사서 들어와 씻고 먹었다. 평소라면 안 먹었게지만, 다음날 아침 대회에서 달릴 생각을 하니, 아침에는 뭔가 먹기 어려울 것 같아서 차라리 밤에 먹자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잠을 청하려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중요한 일정이 있는 전날엔 거의 매번 이렇게 불면증에 시달린다. 꿈을 꾸면 자꾸 늦잠 자고 시간에 쫓기는 꿈을 반복해서 꾼다. 암튼 새벽 늦게에 잠이 들었다가 알람 소리를 듣고 깼는데, 너무 피곤했다. 두 개의 알람을 끄고 다시 잠들었다가 세번째 알람을 듣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아, 이번에도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양쪽 무릎이 다 안 좋았다. 씻기도 전에 관절 통증이 있을 때 먹는 진통제부터 찾았다. 지금까지 달리리 대회 마다 무릎이 안 아픈 날이 없었다. 매번 진통제를 먹고 뛰었었다.
속을 비우고, 씻고 옷을 입고 짐을 챙겼다. 이주전 불광천 대회에서 간식으로 받은 작은 쵸코바가 남아 있길래, 달리기 시작 전에 먹으려고 챙겨 넣었다. 대회 장소인 안양천 변 축구장은 버스를 내려 한참 걸어야 했다. 지도를 보고 낯선 길을 찾아가다보니 멀리서 스피커를 통해 진행자가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가니 정말 사람들이 많았다. 참가자 수에 비해 이동식 화장실은 수가 너무 적었다. 보통 이렇게 화장실 앞에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여성 줄이 길게 늘어서 있고, 남성은 줄이 짧은데, 여기는 아예 여성은 기다리는 사람이 없고 남성들은 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누군가 지인과 떠들면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남자들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만큼 이 대회에 남성 참가자가 많다는 뜻이겠지. 화장실을 다녀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짐을 맡겼다. 짐 맡기기 직전에 챙겨온 작은 쵸코바를 먹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제일 먼저 챙겼던 진통제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물도 없이 삼켰었다.
안내문에 각 코스 출발지나 나와있지 않았다. 대회 장소를 배회하는 사이에 이미 하프 참가자들은 출발했다. 그 다음이 10킬로 출발이었다. 사람들이 우루루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나도 따라갔다. 정말 많았다. 저 멀리 앞쪽에 노란 풍선들이 몇 개 떠있었다. 페이스메이커들이었다. 안양천 천변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는 불광천 보다는 넓었지만, 그래봐야 차도를 막고 치루는 대회에 비해서는 길이 좁았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길은 좁으니 막힌 길을 뚫고 가기가 어려우리라 예상했다.
출발을 하고 보니 시작부터 앞쪽 사람들의 늦은 페이스 때문에 자꾸 발이 느려졌다. 무리를 해서라도 사람들을 헤치고 앞쪽으로 나가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순간 실수로 부딪히면 크게 다칠 수도 있어서 쉽지 않았다. 간혹 뒤에서 치고 나오는 사람들이 아예 길 바깥의 화단으로 넘어가서 달리길래 나도 그렇게 길 밖을 한참 뛰었다. 사람들을 제치며 1킬로를 조금 지났을 즈음에 1시간 10분 페이스메이커를 만났다. 하, 이제 1시간 10분이라고. 내 목표는 52분이니 얼마나 더 서둘러야 할지 감이 잘 안 왔다. 계속 사람들에게 막혀서 느려졌다가 눈치를 보며 추월하느라 에너지를 더 쓰는 느낌이었다. 앞이 뚫리면 속도를 내고, 막히면 양 옆 구석을 살피며 치고 나갈 틈을 모색했다. 3킬로미터 즈음부터 조금 원활하게 달릴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아예 앞이 막히는 일이 적었다. 나는 대략 510 페이스로 달렸다. 이제부터 온전히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510은 무조건 오버페이스였다. 알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무조건 후반에 지쳐서 죽을 듯이 힘들거라는 것을.
이주전 불광천 대회에서 대체로 520 페이스로 달려서 내 목표였던 53분을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후반에 지쳐서 페이스가 쳐지는 통에 54분으로 들어온 것이 생각났다. 어차피 520 이나 510이나 둘 다 후반에 지치는 건 마찬가지일 터. 속도를 낼 수 있을 때 더 내야지 하는 마음으로 달렸다. 이 대회는 지금까지 겪었던 다른 대회보다 급수대가 많았다. 처음엔 급수대를 만날 때 마다 한 모금이라도 마셨는데, 매번 이렇게 속도를 줄이거나 멈추고 물을 마시면 안 될 것 같았다. 평소 달릴 때에는 15킬로 이상도 물 한모금 안 마시고 달리는데, 이렇게 자주 물을 마실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중간부터 과감하게 급수대를 지나쳐 오히려 속도를 높였다. 반환점을 돌아 6에서 7킬로미터 사이 즈음 최고 속도였다. 500에 가까운 정도. 7킬로를 지나 8킬로를 향해 가면서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졌다. 오른발 앞쪽에 물집이 생길듯 통증이 느껴졌다. 늘 그랬다. 대회가 아니라 그냥 혼자 달릴 때에도 딱 8킬로 즈음에 지치고, 물집이 생길 것처럼 아팠다. 속도를 어느정도 낼 때에는 그랬다. 속도 욕심을 안 내고 좀 여유있게 6분대 페이스로 달리면 10킬로를 넘겨도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20킬로 정도까지는 달렸으니까.
여기서부터가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수백번 발을 멈추고 걷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꼭 목표를 달성하고 싶었다. 시작할 때 너무 뒤쳐져 있었기 때문에 내 속도를 내기 어려웠고, 중간에 오버 페이스를 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9킬로미터 지점을 지나 이제 1킬로 남았는데 너무 지쳐서 발이 무거웠다. 이때부터 길 옆에서 응원하는 분들이 계셨다. 저 멀리서 볼 때 부터 모든 참가자들을 응원하면서 커다란 손 모양 장갑을 끼고 하이파이브를 유도하는 일행 세 명이 보였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그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지나갔지만 한두명 정도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일부러 길가로 옮겨가며 그들 세 사람과 힘껏 손바닥을 마주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들의 응원을 통해 어떻게든 다시 힘을 끌어내고 싶었다. 물론 그건 아주 잠시였다. 이미 지칠대로 지쳐서 얼마 못 가 다시 속도가 떨어졌다. 이번에는 어느 할아버지가 길가에 서서 이제 450미터 밖에 안 남았다고 힘을 내라고 소리를 지르며 응원하고 계셨다. 내가 지나칠 때에도 힘내라고 응원해주셔서, 나도 억지로 웃으며 주먹을 들어올려 보였다. 다시 조금 더 힘을 냈다. 이제 저 멀리 결승선이 보였다. 조금 더 페이스를 올려보고 싶었지만, 이미 한계였다. 현재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도 버거웠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추월했다. 반환점을 돈 후에 긴 시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비슷한 페이스로 달려온 참가자였다. 내가 지쳐버린 이후로 한동안 안 보여서 이미 저 멀리 앞으로 치고 나간줄 알았는데, 그동안 내 뒤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막판 스퍼트를 올리길래, 나도 억지로 다시 발을 더 빨리 움직이려 노력했다. 드디어 결승선을 지났다.
정말 죽을 듯이 힘들었지만, 천천히 걸어서 완주 메달을 받고 간식을 받았다. 화장실을 한 번 다녀오고, 맡겼던 짐을 찾고 난 후에야 비로소 축구장 한쪽 구석 바닥에 앉았다. 처음에 확인한 기록은 51분이었다. 작년 11월 말 대회 54분, 이주전 불광천 대회 역시 54분. 내 목표는 52분이었는데 목표는 달성했다. 그리고 개인 신기록이었다.
그날 오후에는 내가 운영위원을 맡고 있는 지역정당의 총회가 있었다. 아침부터 다른 운영위원들은 총회 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에 나만 혼자 달리기 대회를 하러 와있었던 것이다. 이 대회에 참가 신청을 한 것은 1월이었고, 나중에서야 총회 날과 대회가 같은 날인걸 알았지만, 대회가 오전이라 다른 분들께 양해를 구하고 온 것이었다. 목표는 달성했으니, 기분 좋게 총회를 준비하러 갔다. 물론 곧바로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기 때문에 한참을 쉬었고, 겨우 움직일 수 있겠다 싶을 때 버스를 타러 갔다. 달리면서 안양천 양 쪽으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모습을 보았다. 버스를 타고 돌아올 때는 불광천에도 벚꽃이 활짝 피어있는 것을 보았다.
버스에서 이번에 목표를 달성한 원인을 생각해봤다. 평소보다 몸 상태도 좋지 않았고, 무릎도 양 쪽이 다 아팠었다. 진통제를 먹고 나아지긴 했지만. 엊그제 그러니까 대회 이틀 전에 약 7.5킬로를 뛰었는데, 그게 주요했던 것 같다. 대회를 앞두고 일부러 딱 7에서 8정도만 뛰어야지 생각했던 것이다. 몸의 회복 흐름과 부하의 관점에서 내가 최대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날 이삼일 전에 약 70퍼센트에서 80퍼센트 정도의 강도로 운동을 하면 내 몸이 그 운동의 100퍼센트를 낼 수 있다고 어렸을 때 들었던 기억이 났다.
오후에 총회에서는 사전행사 진행을 맡았다. 버스를 내려 집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씻고 옷 갈아입고 바로 다시 나갔다. 총회를 마치고는 여러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았다. 기록을 세웠기에 용서해 준다고, 만약 기록을 못 세웠으면 용서 안 했을거라는 지인의 장난 섞인 축하를 기분 좋게 받았다.
그리고 주말이 지나 오늘 월요일에 다시 문자가 왔다. 어, 이번에는 다시 1분 가량 기록이 줄어있었다. 다시 받은 기록증의 숫자는 50분이라고 나왔다. 와! 이건 정말 예상 못 한 기록이었다. 51분이나 52분은 그렇게 되려고 달린 거니까 이해할 수 있는데, 50분은. 내가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에는 나오지 않았던 등수가 오늘은 나왔다. 나는 사실 이게 더 궁금하긴 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첫 대회와 두번째 대회 모두 전체 참가자와 성별로 등수를 매겼을 때 절반보다 살짝 앞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얼마나 나왔을지 궁금했다. 세번째 대회인 불광천 대회는 아예 등수를 알려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등수가 비어있길래 나중에 집계되면 나오겠지 싶었다. 자, 그래서 등수는? 10킬로미터 코스 전체 참가자 2228명 중에 229등. 10킬로미터 남성 참가자 1366명 중에 196등. 이 정도면 썩 괜찮은 성적이다. 전체 순위로는 절반이 아니라 상위 10퍼센트로 가까이 올랐고, 남성으로도 20퍼센트 안에 들었다.
작년에 두 번, 올해 두 번 총 네 번의 대회를 뛰었다. 한 번은 너무 더웠고, 한 번은 너무 추웠다. 딱 적당히 뛰기 좋은 날 있는 대회를 고른 것이 이번 양천 대회였다. 정말 딱 뛰기 좋은 날이었다. 오후에는 비 예보가 있었는데, 실제로 비가 왔고, 일요일 새벽에는 눈도 왔다. 나는 처음으로 비를 맞으며 달리려나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다행히 오전에는 살짝 흐리기는 했지만 날씨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이 대회를 잘 골랐던 나를 칭찬하며, 신기록을 세운 것도 칭찬한다. 이제 다시 꾸준히 달리고 가을에 또 괜찮은 날씨에 괜찮은 대회 하나를 나가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