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6.7.
인문책시렁 431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20.4.14.
나라지기를 뽑는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나라지기로 뽑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나’를 잊은 채 ‘나라’만 바라볼 적에는, 지난날 일본이 그들 나라 사람들을 ‘황국신민’과 ‘국민’이라는 허울을 들씌우면서 싸움터에 내몰았듯, 오늘날 이 터전도 매한가지이게 마련입니다.
나라가 나를 살리지 않습니다. 나라는 너도 살리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살리고, 너는 네가 살립니다. 아주 쉬운 얼개예요. 누구나 스스로 숨을 쉬고, 스스로 똥오줌을 누고, 스스로 밥을 먹고서 삼켜서 삭입니다. 나라도 남도 못 해줄 뿐 아니라, 안 해줍니다.
숨쉬기와 나라살림은 안 다릅니다. 우리가 스스로 아름답게 보금자리를 일구는 터전에서 ‘집’부터 사랑으로 돌볼 적에는, 나라가 어떤 짓을 하든 우리 삶을 못 건드려요. 이와 달리 우리가 ‘나와 너가 어울리는 보금자리’를 잊은 채 ‘나라’에 얽매일 적에는 스스로 갇힙니다.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를 읽었습니다. 뜻깊은 줄거리를 다루되, 군말이 좀 많아서 아쉽습니다. 강준만 씨가 쓰는 글에 왜 군말이 이토록 많을까 하고 갸우뚱했는데, 강준만 씨는 ‘꾸중(비판)’은 하되, ‘달래기(대안제시)’는 못 하더군요. 누가 어느 대목에서 어떻게 얄궂거나 뒤틀리거나 엉터리이거나 거꾸로이거나 감춘다고 잘 꾸중하지만, 막상 이 모든 잘못과 말썽이 제자리로 잡아가는 길을 차근차근 달래듯 풀어내지는 않거나 못 합니다.
누가 어느 대목에서 어떻게 잘못 짚으면서 사람들을 속인다고 하는 꾸중은 잘 하지요.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바꾸고 고치고 갈고닦으면서 새길과 새일과 새틀로 일어서면서 나아갈 노릇인가 하고 달랠 줄은 모른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 곰곰이 짚을 노릇입니다. 달래지 않는 꾸중은 참말로 꾸중이라 할 만한가요? 이제부터 어떻게 바꾸고 다독여야 하는지 밝히지 않는다면, 꾸중(비판)마저 아닌, 혼잣말이지 않나요? 둘레(사회)에서 굵직굵직하게 터지는 갖은 잘못과 말썽을 ‘구경’하면서 ‘구경글(관전평)’은 쓰되, 우리 스스로 어떻게 바꾸고 가다듬어서 이 터전을 일으킬 만한가 하는 대목은 생각하지 않는 쳇바퀴라고 느낍니다.
얄궂은 놈을 꾸중하는 일은 안 나쁩니다. 그러나 꾸중만 하다보면 ‘꾸중거리’만 찾아나서고 맙니다. ‘꾸중거리’에 스스로 갇혀서 ‘앞으로 꾸중거리가 사라지면 아무 말을 못 하는 판’일 테지요. 오늘날 거의 모두라고 할 만한 글(문학·언론보도)을 보면 ‘꾸중거리’를 ‘특종’으로 찾아내려고 눈이 벌겋습니다. 왜 꾸중만 해야 할까요? 우리 스스로 이 삶을 짓고 가꾸는 ‘아름이웃’을 알아보려는 길에 서야 하지 않을까요? 왼손으로는 꾸중을 한다면, 오른손으로는 아름이웃을 알아보면서 북돋우고 손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두 손으로 그저 꾸중과 꾸지람과 타박만 해댄다면, ‘꾸중꾼(비평가)’은 꾸중꾼대로 ‘일거리’가 늘 있어서 ‘굶을’ 일이 없겠구나 싶습니다만, 이래서야 아름나라로는 한 발짝도 못 내딛습니다.
ㅍㄹㄴ
구세대는 입으로는 페미니즘의 옹호자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그들의 몸과 마음은 가부장제에 찌들어 있는 중독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1990년대생 남성의 반페미니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이 남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과거 세대의 과오에 대해 연대책임을 묻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데도 페미니즘은 ‘남자 대 여자’라고 하는 전통적 잣대를 들이대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싹트기 시작한 반감이 갈등의 증폭 과정을 거치면서 ‘페미니즘 사상 검증’으로까지 나아가게 된 건 아닐까? (61, 62쪽)
다수대표제·소선거구제에서는 ‘51대 49’로 이긴 승자는 아슬아슬하게 이겼음에도 독식을 하고 49퍼센트의 목소리는 대변되지 못한다. 우리 편이 잘할 생각은 하지 않고 상대편을 공격해 승리하는 것을 정치의 본질로 삼는 이 모델에선 누가 승리하건 나라는 골병든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승자독식의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가? (92쪽)
그런데 비극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민주화가 이루어질 대로 이루어진 오늘날에도 유시민이 그 시절의 선명한 선악 이분법의 사고 틀에 갇혀 있으니 말이다. (93쪽)
1980년대의 운동권을 지배하던 사고 가운데 ‘조직 보위론’이란 게 있다. 조직 보위론은 ‘진보의 대의’를 위해 활동하는 운동 조직을 ‘적’의 공격에서 ‘보위’해야 하며, 따라서 내부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이를 조직 밖으로 알려선 안 된다는 논리다. 바로 이 논리에 따라 운동권 내부의 많은 성폭력 사건이 철저히 은폐되었고, 피해자에겐 이중·삼중의 고통이 가해졌다. 유시민은 ‘조직 보위론’의 신봉자로서 이미 여러 차례 이와 관련된 논란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는 민주화가 된 세상에서 그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조직 보위론을 다시 꺼내든 것이다. 왜 유시민은 세상을 그렇게 일관성 있게만 살려고 하는 걸까? 왜 다른 생각은 전혀 못해 보는 걸까? 정말 안타까운 마음으로 묻는 거다. (94쪽)
물론 우문愚問이긴 하다. 유시민은 “보수 정당에서 세종대왕님이 나오셔도 안 찍는다”고 말할 정도로 선악 이분법을 체화한 사람이니까 말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문재인 정당에서 누가 나와도 찍는다”는 말일 텐데, 이건 민주주의라기보다는 ‘군주주의’다. (95쪽)
우리는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대해 적대적이다. 온갖 비난과 욕설마저 불사하는 사람도 많다 …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고 신나는 건 없다는 속설은 패싸움의 경우에 더욱 빛을 발한다. 그런데 패싸움은 그 속성상 논리와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무조건 자기편이 이기는 것만이 정의와 공정의 기준이 된다. (229, 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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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20)
승자독식을 기반으로 하는 이 모델에서 유권자들은 상대적으로 더 반감을 느끼거나 더 증오하는 ‘최악最惡’의 정당을 응징하기 위해 ‘차악次惡’의 정당을 선택하는 투표를 한다
→ 혼자쥐는 이 틀에서 사람들은 더 꺼리거나 미워하는 ‘가장 몹쓸’ 무리를 뭉개려고 ‘덜 몹쓸’ 무리를 고르려고 찍는다
→ 휘어잡는 이 얼개에서 사람들은 더 밉거나 싫어하는 ‘가장 나쁜’ 놈을 밟으려고 ‘덜 나쁜’ 놈을 뽑으려고 한다
92쪽
그런 상황에서 의심과 확신의 경계는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다
→ 그런 판에 못미덥거나 믿는 금은 쉽게 무너지게 마련이다
→ 그러면 갸웃거나 미더운 갈피는 쉽게 무너진다
93쪽
물론 우문愚問이긴 하다
→ 뭐 바보같긴 하다
→ 다만 덜되긴 하다
95쪽
이 말을 뒤집으면 “문재인 정당에서 누가 나와도 찍는다”는 말일 텐데, 이건 민주주의라기보다는 ‘군주주의’다
→ 이 말을 뒤집으면 “문재인 무리에서 누가 나와도 찍는다”일 텐데, 이는 들꽃나라라기보다는 ‘마구나라’다
→ 이 말을 뒤집으면 “문재인 두레에서 누가 나와도 찍는다”일 텐데, 이는 바른길이라기보다는 ‘사슬나라’다
95쪽
온몸에 체화된 습관이요 신앙이다. 진영 논리라고도 부르는 이분법은 자신이 속한 진영의 이해득실 차원에서 세상을 보고 판단한다
→ 온몸에 길든 믿음이다. 무리짓기라고도 하는 갈라치기는 저희 쪽 길미로만 온누리를 보고 따진다
→ 온몸에 들러붙은 믿음이다. 숨은담이라고도 하는 금긋기는 저희가 좋으냐 나쁘냐로만 보고 잰다
132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