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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5.4.27.

숨은책 1047


《新羅夜話(서라벌 이야기)》

 손대호 글

 선일사

 1956.1.25.첫/1962.3.15.4벌



  서울에서 가난한 책벌레로 살던 무렵, 도무지 사읽을 주머니는 안 되어 책집에서 늘 서서읽기를 했는데, 헌책집에서 서서읽기를 할라치면 책마다 외치는 소리에 귀가 쟁쟁거렸습니다. “나 좀 봐!” “어이, 여기도 봐!” “얘야, 나를 봐주렴!” 책마다 지르는 소리로 귀청이 떨어질 듯했지만, 이런 소리를 듣는 사람은 드물거나 없는 듯했습니다. 책한테 다가가서 “그렇지만 널 장만할 주머니는 아닌걸? 널 샀다가는 오늘도 저녁은 굶어야 하는데?” 하고 속삭입니다. “걱정 마. 하루쯤 굶어도 되잖아? 아니, 사나흘쯤 굶어도 안 죽잖아?” “너는 밥을 안 먹는다고 나더러 굶으란 얘기이니?” “아냐. 우리도 밥을 먹어?” “뭔 밥을 먹는데?” “우리는 우리를 매만지는 사람들 손길이라는 밥을 먹지.” “…….” 아무튼 《新羅夜話(서라벌 이야기)》도 갖은 책소리를 듣다가 집었습니다. 또 저녁을 굶겠구나 하고 여겼습니다만, 더는 고개를 돌릴 수 없더군요. 이 책은 “네가 오늘 날 집어들지 않으면 난 이제 죽는다구. 난 이제 사라져버려!” 하더군요. 이날 밤, 집으로 돌아와서 책끝에 몇 글씨 남겼습니다. 한때 읽혔어도 한참 잊힌 책이 울부짖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할 수 없던 마음이라고 할까요.


2000.3.11.흙. 용산 뿌리서점. 폐지가 되려던 책을 건진셈인가. 어느 책이든 폐지가 될 수 있지. 사람도 죽듯 책도 죽을 수 있지. 살아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야지.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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