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전 장우성이 그린 정약용 초상화. 1974년 표준영정으로 지정
반듯하게 틀어올린 상투, 옥색의 두루마기, 꼭 다문 입, 이마의 선부터 곧게 뻗어 있는 코 큼지막한 눈 망울, 짙은 구렛나루의 턱수염에 사방관을 쓴 선비가 비스듬히 바라보고 있다.
이 선비는 어디를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얼굴로 무언의 생각에 잠겨 있어 보이기도 한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년 ~ 1836년)'이다.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줄줄이 따라오는 수식어들은 정조-수원-화성-실학사상-천주교 그리고 목민심서로 '다산(茶山) 정약용'은 조선을 대표하는 통합형 지식인 르네상스 맨이다.
70세를 남짓 살다 간 정약용이 남긴 저술은 모두 182 분량의 책으로 권수로 세어보면 503권에 달한다.

큰 뜻을 품은 자여, 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가
정약용 지음, 이근오 엮음
모티브 / 2025년 6월
1762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정약용은 네 살 때 천자문을 통달 해서 일곱 살 나이에 '산(山)'이라는 한(漢) 시를 지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어요.
먼 땅도 있고 가까운 땅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의 인생의 첫번째 산은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으로 영조 집권기에 특지로 벼슬길에 올라서서 연천현감, 화순현감, 예천군수, 호조좌랑, 한성서윤, 울산부사, 진주목사까지 사회적으로 승승장구 했고 가족을 훌륭한 인품과 자상한 성품으로 보살폈고 가난한 백성들의 문제를 앞장서서 해결해 주려고 노력했던 진짜 선비였다.
아들 정약용의 첫 번째 스승이였던 아버지 정재원은 천자문을 다 익힌 아들에게 경서와 사서를 가르쳤고 아들 정약용은 이를 반복 학습하며 성호 이익이 남긴 저서를 홀로 독파 해나갔다.
그는 18세에 성균관에서 시행하는 승보시에 선발되어 22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증광 감시에서 초시에 합격하고 곧바로 회시에 생원으로 합격한다.(당대 조선 문과 전체에서 수석 합격함)
마침내 평생의 큰 스승이자 조선 후기 최고의 군주 정조를 알현하게 된다.

삶을 바꾼 만남
정민 지음
문학동네 / 2012년 8월
새로운 조선을 만들고 싶었던 개혁 군주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 세력을 눌러 버릴 새로운 정치 집단이 필요 했다.
그는 세종 시절에 존재 했던 규장각을 재정비 해서 가문과 출신을 따지지 않고 젊고 영특 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20대 조선 청년들을 직접 선발하고(면접을 통과 해야 했음) 이들 중에 가장 먼저 정약용이 발탁된다.
그는 규장각으로 정식 입부 하기 전 성균관에서 여섯 해 에 걸쳐서 정조에게 명을 받아 수 많은 보고서와 연구서를 작성하고 정조는 다른 이들이 올린 보고서들을 제쳐 두고 가장 먼저 정약용의 보고서를 읽고 최고 평점을 주었다.
28세에 전시에서 수석으로 급제한 정약용은 종 7품(4급 사무관 직급) 벼슬자리에 올라 규장각의 초계 문신으로 선발 된다.
초계문신(抄啓文臣)은 조선 후기 규장각에서 특별교육과 연구과정을 밟던 문신(文臣)들을 칭하는 용어로 나이가 어린 관리 중 유능한 인재를 재교육하기 위해 정조가 실시한 제도다.
1781년 정조는 자신이 직접 주관하고 창시한 초계문신 선발 시험장에 나와 20대 청년 관리들의 시험 과정을 직접 살폈고 급제자를 정하는 친시(親試)를 실시하기도 했다.
첫 번째 초계 문신 시험에 참가한 정약용은 전체 참가 인원(약 180명) 중에 1등을 했고 같은 해 정조의 명을 받아 한강을 건너 갈 배다리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1795년 정조는 즉위 20년을 맞이하여 이 다리를 건너 화성으로 행차 했다.
정약용은 이 다리 건설을 시작한 지 3년의 세월이 흘러 먼 미래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1997년에 등록됨)에 등록 될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답고 견고한 수원성을 설계 하기 시작한다.

출처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약용은 수원성 설계를 시작함과 동시에 거중기를 발명해서 10년을 예상 했던 공사 기간을 8년이나 앞당겨서 2년 9개월 만에 완공해버렸다.
일찌감치 정약용의 영특함과 근면함을 눈여겨 보았던 정조는 그를 마주 할 때 마다 틈틈이 어려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고 구하기 힘든 기술 서적이나 의학서적을 몰래 주며 배우는 걸 게을리 하지 않는 그의 천성을 깊이 아꼈다.

출처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조의 아낌 없는 지원과 근면한 천성 그리고 영특한 두뇌를 갖춘 정약용은 공사기관과 인건비를 아껴서 수원성을 완공 하기 까지의 모든 기록을 남긴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후대인들이 언제 어디에서 성을 구축하게 된다면 필히 긴요하게 참고 할 수 있게 당대 최고의 정부 공식 기록물을 집대성했다.
의학서까지 집필한 정약용은 종두를 직접 실험하고 관찰한 <마과회통>까지 21세기 AI기술로 완성할 수 있는 지식과 경영학습,정부 관료의 실무 정책,매뉴얼 경영까지 갖춘 18세기 인간 지능의 결합체 였다.
조선 후기 정조 시대때는 조선 최고의 우수한 인재들이 서울 도성안에 가득 모여 있었던 시절이였음에도 어떤 지식인과 맞붙어도 정약용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후학들에게 항상 이런 말을 하며 '배움'을 강조했다.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생에서 공부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살다 간 보람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정약용이 살았던 시대의 평균 수명은 40세로 정조는 50세를 채우지 못하고 47세에 세상을 떠났다.
73세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오랜 귀양 살이로 몸 곳곳이 성할 곳이 없었던 정약용은 책을 너무 많이 읽고 초록과 필사, 집필을 병행하다가 복숭아 뼈에 구멍이 났고 팔목 관절 통증에 평생 시달렸고 두 눈의 시력이 급격하게 나빠서 돋보기 없이는 활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약용은 57세에 <목민심서>를 완성하고 70세에 들어섰을 때 18년 동안의 기나긴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 마재 마을로 돌아와 후학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책 읽기는 짐승과 벌레의 부류에서 벗어나 저 광대한 우주를 지탱 할 수 있는 힘을 만든다. 이것이야 말로 사람의 본분이다.'
그가 고향 땅에서 마지막으로 완성한 산수화 한 점이 있다.

<원인필의도 元人筆意圖>
그림 한 가운데 텅 빈 정자가 있고 뒷편으로 높은 산이 굽이 굽이 이어져 있다.
정자를 에워싸고 있는 키 큰 나무들 앞으로 강물이 유유히 흐른다.
선명한 선이 아닌 흐릿 흐릿 몽환적인 붓질로 완성 한 이 산수화 속 정자가 있는 곳은 정약용이 태어나고 자란 경기도 광주의 마재 마을이다.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그 곳에 큰 강이 흘렀는데 이 강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서로 만나는 교찹 지역으로 구불 구불한 협곡을 넘어가면 곧바로 서울 한강으로 흘러갈 수 있었던 지역이였다.
마재(마현馬峴) 마을의 유래는 임진왜란 때 이곳까지 침입한 왜구들이 산의 정기를 누르기 위해 무쇠로 만든 말 모양의 부적 같은 것을 산 정상에 묻었고 마을 주민들은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이를 물리치기 위해 철마를 모시고 제사 지내면서 동네 이름을 ‘마현(馬峴)’, 마재 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정약용이 살던 시절에 마재 마을은 큰 강이 흘렀지만 협곡에 부딪쳐서 휘감아 돌아갔기에 홍수 피해가 적었고, 넓은 퇴적층이 형성되어 어획량이 풍부했고 씨만 뿌려도 농작물이 잘 자랐던 풍요로운 땅이였다.
1925년 일본은 이곳 마재 마을 앞에 흐르는 강에 댐을 설치해서 물의 흐름을 바꿔 버렸다.
댐이 가동 되고 부터는 마재 마을에는 가뭄도 자주 찾아 왔고 비가 많이 내리는 장마철 마다 홍수 재해가 발생해서 다산 정약용이 남겼던 책들도 물에 잠기는 안타까운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했었다.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인 지식인들은 퇴계 이황과 다산 정약용 단 두명으로 미국 대학에서 개설된 한국학과에 '퇴계학'과 '다산학' 분야로 나눠져 있다.
특히 정약용이 남긴 사상은 인류의 위대한 지식문화 유산으로 2012년 유네스코는 정약용을 세계 기념인물로 선정했고 이는 한국인 최초였다.
18세기 최고의 지식인이자 조선 땅에 수 많은 업적을 남긴 정약용은 기나긴 유배 생활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서 실제 모습의 초상화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안타까움에 후대인들이 50세 전후의 다산의 생전모습을 화폭에 담기 위해 사후 자손들의 증언을 토대로 밑 그림 삼고 다산 후손인 '나주 정씨 월헌공파 종회'를 찾아가서 총 300명이 넘는 후손들의 인상을 직접 관찰하며 이들 중에서 다산의 자손들의 증언과 가장 비슷한 모습의 직계후손 4명의 인상을 면밀히 살폈다.
우연 곡절 끝에 1974년 월전 장우성 화백이 다산 정약용의 영정 초상화를 완성했다.
정약용은 생애 마지막에 배워야 할 학문을 <주역>이라 생각해서 이 학문 만은 정조에게 반드시 배우겠다고 결심했지만 부친 상중에 정조 마저 승하해서 그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50세를 넘기고 홀로 주역 공부에 파고 들었다.
그가 남긴 주역 사전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천하의 일이란 한 사람이 다 할 수 없다. (天下之事 非一人所爲也)”
그가 50세에 남긴 <목민심서>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정선 목민심서 (다산의 지혜 에디션)
정약용 지음, 다산연구회 편역
창비 / 2025년 1월
세상을 우습게 여기고 남을 깔보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고, 재주와 능력을 뽐내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고, 영예를 탐내고 이익을 좋아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고, 남에게 베푼 것을 잊지 못하고 원한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고, 생각이 같은 사람과는 한 패거리가 되고 생각이 다른 사람은 공격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고, 잡스런 책 보기를 좋아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고, 함부로 남다른 견해만 내놓으려고 애쓰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니, 가지가지 온갖 병통들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여기에 딱 맞는 처방이 하나 있으니 ‘고칠 개(改)’자가 그것이다.
-정약용의 목민 심서 중에서
입만 열면 '개(改)’를 외치는 이들이 넘쳐 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누구부터 무엇을 어디 까지 '개(改)’해야 하고 고치고 수정 할 수 있을까?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로 유배를 떠나던 날 정약용은 가족에게 시 한 편을 남겼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다산의 지혜 에디션)
정약용 지음, 박석무 편역
창비 / 2025년 1월
“아버지 아시나요 모르시나요
어머니 아시나요 모르시나요
우리 가문 갑자기 뒤집어져서
죽고 사는 문제가 이 지경이 되었네요.
자식 낳아 부모님 기뻐하시며
잡아주고 끌어주고 애써서 길렀는데
부모 은혜 갚으리라 응당 말했지
이같이 꺾이리라 생각인들 했겠어요
이 세상 사람들께 바라는 바는 다시 자식 낳았다 기뻐 말기를.
-다산 정약용의 시 ‘하담의 이별’ 중에서
4월 23일은 책의 날이다.
온 세상 안과 밖이 뒤숭숭하고 세상 모든 것들이 미친듯이 올라가고 있고 전쟁 발발로 인한 유가 급등에 서민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인구 소멸의 시대 저 성장, 고물가 시대를 살고 있는 국민을 위한 '개(改)’를 외치는 이들은 정작 자신들을 위한 '개(改)’를 실천하려고 부단히 노력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