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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후에 오는 것들 (공지영)

저자 공지영

(주)태일소담출판사

2024-08-15

소설 > 한국소설




내가 사랑했던 순간들은 결국 나를 만들어준 조각들이었다.




■ 책 속 밑줄


내 마음속에는 오래된 호리병이 하나 놓여 있다. 그 호리병 속에는 머리카락이 싱싱한 스물두 살의 베니라는 이름의 한 여자가 살고 있을 것이다. 살고 있을 거라고 말하는 까닭은 내가 아직 그 뚜껑을 한 번도 열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 여자는 오래된 동화의 거인처럼 처음에는 뚜껑을 열어주는 사람을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려고 했겠지만 지금은 뚜껑을 여는 사람을 파괴해 버릴 결심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로 하자면 케이크의 단면 같은 복잡한 느낌을 나는 일 초도 안 되는 사이에 다 느껴 버렸다. 아니, 느꼈다기보다는 날아오는 공을 얼결에 받아 버린 얼치기 외야수 같은 형국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그가 내 인생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았다.



잊는다는 건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내가 잊으려고 했던 것은 그가 아니라, 그를 사랑했던 나 자신이었다. 그토록 겁 없이 달려가던 나였다. 스물두 살, 사랑한다면 그가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아프리카인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믿었던, 사랑한다면 함께 무엇이든 이야기하고 나누고 비밀이 없어야 한다고 믿었던 스물두 살의 베니였다.



나는 내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온 우주의 풍요로움이 나를 도와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문제는 사랑이 사랑 자신을 배반하는 일 같은 것을 상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랑에도 유효 기간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사랑의 속성이었다. 우리는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믿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랑이 가지고 있는 속임수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사랑의 빛이 내 마음속에서 밝아질수록 외로움이라는 그림자가 그만큼 짙게 드리워진다는 건 세상천지가 다 아는 일이었지만, 나만은 다를 거라고, 우리의 사랑만은 다를 거라고 믿었다.



나는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그때 처음으로 이 호수가 둥글다는 생각이 들었다. 둥그니까 이렇게 앞으로 뛰어가면 다시 그가 서 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나간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결국 그에게 멀어지면서 다시 그에게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원의 신비였다. 그러니 이 원에 들어서 버린 나는 돌아갈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 어찌 되었든 모두가 그에게로 가는 길이다.



감히 영원 같은 걸 갖고 싶었나 봐. 변하지 않는 거 말이야. 단단하고 중심이 잡혀 있고, 반짝반짝 빛나고 한참 있다 돌아와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두 팔을 벌려 주는 그런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 같은 거. 꿈꾸지 말아야 할 것을 꿈꾸고 말았나 봐. 내가 너희 주인한테 물어봤는데……, 처음 만나 너를 주고 나서 물었거든. 변하지 않는 사랑을 믿느냐고. 어딘가에 그런 게 있다고 그 사람이 대답했어. 어딘가라고 말했는데 그게 그 사람 속에 있는 줄 알았던 거야…….



■ 끌림의 이유


사랑이 끝난 뒤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와 상처를 섬세하게 서술한 소설입니다.

저자는 헤어진 뒤에도 내면에 스며드는 사랑의 여운을 직시하며 그 기억이 어떻게 삶의 일부가 되는지를 솔직하게 그려냈습니다.

이 책은 헤어진 이들과 현재의 나 사이에 생긴 간극을 담담히 바라보고 있는데, 그럼에도 결국 우리가 버텨야 하는 하루를 따뜻한 언어로 토닥여줍니다.



■ 간밤의 단상


비가 많이 오던 며칠 전, 책장을 바라보다 나란히 꽂힌 두 권에 시선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창문 너머로 비 내리는 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의자에 앉아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사랑이 끝난다는 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얼굴로 나에게 남는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랑이 존재하지만 사랑과 이별을 겪어보았다면 누군가의 감정이라도 짐짓 이해가 될 것입니다.

사랑이 끝난 이후의 하루들은 어쩌면 더 긴 여행처럼 느껴지다 보니 그 여행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잠시 방황하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독자가 스스로의 상처와 마주하게끔 만들지요.

그리곤 답합니다.

"그래, 사랑 후에도 나는 살아가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사랑은 때론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단순한 것 같지만 복잡하고 쉬운 것 같지만 어려우니깐요.

이별을 겪고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은 다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즉, 저자의 조용한 응원이 담긴 말이 결국은 해답인 것이지요.

사랑 후에도 우리는 결국 살아가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요.



■ 건넴의 대상


이별의 후유증 속에서 마음의 방향을 잃어버린 분

사랑의 끝자락에서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분

누군가의 위로로 깨어나고 싶은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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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감상이 더해지면 이 공간은 더욱 따뜻해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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