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우지 않아도 풍요로운 순간들
요즘 들어 무언가를 꼭 채우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아졌습니다.
어떤 날은 할 말이 없어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 좋고,
특별한 계획이 없어도 조용한 하루가 고맙고,
비워진 냉장고 속에서도 남은 재료로 소박하게 한 끼를 만들어 먹을 수 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게 진짜 풍요가 아닐까?'
예전에는 채워야만 안심이 됐습니다.
시간표를 꽉 채워야 부지런한 것 같았고,
냉장고를 가득 채워야 잘 사는 기분이었고,
옷장에 옷이 많을수록 선택의 여지가 생긴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둘 비워나가고 나서야 알게 된 게 있습니다.
너무 많은 것들이 실은 나를 피곤하게 만들고 있었단 걸요.
가득 채운 물건보다 제자리를 찾은 여백이 더 아름답다는 걸요.
오늘 아침, 창문을 열었을 뿐인데 바람이 다녀갔습니다.
햇살이 벽을 따라 길게 퍼졌고 그 길을 따라 잡초들이 무성하게 피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채우지 않았지만 모든 게 이미 제자리에 있었습니다.
바쁘게 움직이는 세상에서 나만 잠시 멈춰 선 느낌.
하지만 그 멈춤이 어쩌면 진짜 시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용히 흐르는 시간, 정리된 공간 그리고 텅 빈 것 같지만 충분히 나를 채우는 어떤 순간들.
우리는 늘 무언가를 얻으려고 애쓰지만 가만히 있어도 들어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숨소리, 햇살, 바람, 고요함.
그것들만으로도 하루가 꽉 찼다고 느낄 수 있다는 건, 내 안에 풍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채우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있는 것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은 생각보다 자주, 아주 조용히 다가오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