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책이 있는 풍경
  • 사상의 좌반구
  • 라즈미그 쾨셰양
  • 25,200원 (10%1,400)
  • 2020-09-01
  • : 1,420



제일 관심이 가는 챕터, <포스트 여성성>을 읽었다.

해러웨이가 보기에 우리는 모두 어떤 점에서는 사이보그다(358쪽). 나는 지금 안경을 쓰고 있고, 출근할 때는 콘택트렌즈를 낀다. 안경이 없으면 제대로 볼 수 없다. 행동에 제약이 있다. 그 지점에서, '본다'는 점에서 나는 사이보그다. '우리는 모두 사이보그다'에서 시작한 해러웨이는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흐릿해진 만큼 '인간/동물과 인간/기계'라는 이중 경계 역시 사라진다(361쪽)고 주장하는데, 이는 새로운 존재론으로 이어진다.

해러웨이가 보기에 인공물은 모든 사물에 대한 사유 모델을 제공한다. 그의 인공물주의는 급진적 반본질주의다. 그는 세계 내 어떤 실체도 ‘본질‘을 소유하지 않으며, 따라서 상호작용하는 다른 실체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는 없다고 여긴다. 사물은 언제나 혼종적인 것이요, 여러 심급의 혼합이다. 이는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반본질주의는 동시대 비판 사상 대부분에 공통적이다.(361쪽)

혼종으로서의 사물, 여러 심급의 혼합인 사물을 상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생김새가 다른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일테면, 『랜들 먼로의 친절한 과학 그림책』 62쪽 '생명체의 나무'를 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생명체가 한 가족이라는 생각은 인류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비교적 최근에서야 나타났다. 인간, 근대적 인간은 분류하고, 구분하고, 무리 짓고, 카테고리별로 묶었다. 생명체의 나무에 따르면, 사람은 집에서 키우는 물고기보다는 새에 더 가깝고, 집에서 키우는 그 물고기는 사람을 잡아먹는 커다란 물고기보다 사람에 더 가깝다고 한다. 작은 나무처럼 생긴 버섯은 나무보다는 동물에 가깝고, 나무, 벌레, 사람과 같이 '하나보다 많은 보따리로 이루어진 모든 생물'은 세 번째 큰 가지에 속한다. 나무와 벌레, 그리고 사람. 작은 차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구별과 분류가 해러웨이 앞에서 무너진다.

해러웨이의 인공물주의의 이론적 결과 중 첫 번째는 반인간주의다. 어떤 사물도 본질을 갖지 않는다면, 인간 존재 또한 본질을 지니지 않는다(361쪽)는 주장. 당연히 인간은 동물보다 특별하지 '않다'. 이러한 주장은 자연스레 반종차별주의로 간다. 두 번째로 해러웨이는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362쪽), 인간이 유기체와 기계의 얽힘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하에서 인간과 동물 간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듯, 여성과 남성 역시 '본질'적인 구분이 불가능하다. '여성'됨이라는 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다(362쪽)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이제 주디스 버틀러다. 휴우~~

버틀러가 보기에 섹스는 젠더와 마찬가지로 문화적 구성물이다. '섹스'와 '젠더'라는 구분 자체가 사회적·역사적으로 정립된 것이니, 그 구분을 이루는 항목들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 결국 버틀러가 최종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바로 본성과 문화의 분리다.(369쪽)

섹스와 젠더를 이해하던 이전의 방식을 버틀러는 완벽하게 분쇄한다. 어디까지가 본성의 범주이고 어디에서부터 문화의 영역인가. 평생에 걸쳐 반복해서 이루어지는 '젠더 사회화'를 통해 인간은 여성으로, 남성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강제적 이성애와 남녀 이분법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더욱 공고해진다.

나왔다, 스피박.

포스트식민주의 연구와 페미니즘 내부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킨 스피 박의 개념은 전략적 본질주의strategicessentialism다. 본질주의에 대한 비판은 동시대 비판 사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젠더든, 계급이든, 민족이든 모든 정체성은 사회적으로 구성되었고, 따라서 우연적이라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정체성은 객관적이거나 실체적인 그 어떤 것도 가리키지 않는다는 얘기다. 전략적 본질주의 개념 역시 이런 비판에서 유래하며 사회 세계에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그러한 본질을 제거하기가 어려워 보일 만큼 일상생활과 사회 투쟁에서 개인이 본질을 자주 참조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379쪽)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전에 써두었던 글을 여기에 붙여둔다.


전략적 본질주의 :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5259889


저항주체인 여성의 전략적 본질주의 :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5262820



다시 해러웨이에게로 돌아가 보자. 해러웨이는 사물에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핵심은 급진적 반본질주의다. 버틀러의 주장에 따르면, 섹스는 젠더와 마찬가지로 문화적 구성물이다. 일상적 수행을 통해 특정 젠더로서 '기능'할 뿐이다. 버틀러가 고전 페미니즘의 '여성'이라는 범주에 대해 비판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379쪽) 젠더든, 계급이든, 민족이든 모든 정체성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379쪽) 하지만, 여전히!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압당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고, 이런 현실에 대한 대응으로서 스피박은 '전략적 본질주의'를 주창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382쪽을 읽다가, 나는 저자의 얼굴을 확인하러 구글로 갔다.


『제인 에어』는 19세기 자율적인 여성 주체의 출현을 나타낸 작품으로 여겨지지만, 스피박은 이런 여성 주체의 출현이 식민지 출신 여성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는, 다시 말해 식민지 출신 여성을 인간 이전의 상태로 일축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이는 여성이 집안일에서 해방되는 것이 흔히 식민지(그리고 피지배계급) 출신 가사도우미의 원조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명백하다. 따라서 여성이 놓인 조건의 역사와 제국주의의 역사는 분리될 수 없다. 이 둘은 함께 고려돼야 한다. 다만 이제껏 페미니즘에서는 그 작업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382쪽)

남자일거라 예상했지만, 굳이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던 건, 페미니즘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집안일에서 해방되는 것은 식민지 출신 가사도우미의 원조를 전제로 한다'는 그 말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많은 경우 그랬고 또 지금도 그러하다. 하지만, 여성이 해방되고자 간절히 원하는 '그 집안일'은 여성만의 몫이 아니다. 이에 대한 페미니즘의 비판과 평가, 연구가 앞으로도 이루어지겠지만, 그 비판의 목소리조차 나는 여성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자신의 밥을 스스로 잘 챙겨 먹는 사람일 거라 추측하고 싶다. 엄마가, 아내가, 여자친구가 해주는 밥을 얻어먹으면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는 뜻이다.

해러웨이와 버틀러, 스피박 이론의 핵심을 잘 짚어내면서도 쉽게 설명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밥 이슈를 빼고는 괜찮았다.


정리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좌반구 살짝 돌았고, 우반구는 다음에 돌기로 하자.

이제부터 놀아야겠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