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오르세 미술관 세잔과 르누아르전은
금융가 로버트 리먼의 콜렉터로서 역할을 강조해 고 삼성 이건희 컬렉션과의 연관성을 강조한 국중박 메트미술관과 다르게
갤러리스트 폴 기욤을 강조하지 않았다. 키스 판 동언의 그림 1점은 있었고 마지막 영상에 모딜리아니가 그린 폴 기욤 그림이 나왔던 것 같다.
전시장 안에 4개 정도 있던 디스플레이 무한도돌이표 영상은 19세기풍 의상으로 입힌 배우들이 마네 세잔 등을 연기했는데 4분 정도되는 분량에 보이스오버가 영상 앞에 전진 배치되어 있어 일화가 계속 반복되는 듯한 세련된 편집력을 보여주었다. 음성 프랑스어의 대사 영어 번역도 꽤 좋았다. 당연히 우리나라를 위해 만든 것은 아니고 동아시아 여러 미술관 투어 다닐 때 틀 용도로 만든 것이겠지
전시 구성은 세잔과 르누아르를 정확히 비교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세잔 부인의 초상화와 광대옷을 입은 르누아르 초상을 전시 초두에 두고
풍경화-정물화-인물(누드)-2점씩 4섹션 비교-수집가-후대영향의 순서로 전시가 진행되었다.
피카소 그림 2점(식탁과 누드)를 포함해 후대와의 연관성을 언급한 섹션까지 코스요리에서 있어야 할 구성은 최대한 지키려고 했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순서는 우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에서 시작해서, 공부가 진행되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고 갔다가, 나중에는 해탈해서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로 돌아온다고 했다. 정반합을 거쳐 돌아온다는 뜻이겠다. 갑자기 무슨 말이냐고?
한국에서 열리는 서양 회화 전시를 보는 사람은 이런 순서로 생각이 바뀌어갈 것 같아서 비유를 들어보았다. 처음에는 멋 모르고 그냥 주어진 전시를 본다. 학생 때는 아는 게 많이 없으므로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전시를 본다. 이때가 1단계다.
공부가 진행되거나 관심이 증가하면서 여러 전시를 본다. 코로나 이후 엔화약세와 일본내 관광진흥정책과 인적교류증가로 인해 일본에 간 사람들은 일본 미술관에 가서 챕터만 7개로 호흡이 긴 서양전시를 보게 된다. 국립서양미술관뿐 아니라 지방미술관에서도 인상주의 회화를 직접 소유하고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란다. 혹은 유럽에 가서 유럽의 어마무시한 미술관을 보면서 번개 맞은 듯한 충격을 받는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원화를 보고 다리가 덜덜 떨리고 호흡이 가빠진다. 아.. 이것이 미술전시의 환희구나! 그리고 한국에서 하는 전시가 얼마나 수준 낮고 양도 부족했는지 한탄하기 시작한다. 청소년 때 유학간 사람들이 겪는 정통병, 원어병 같은 것에 걸린다. 애플이 뭐야 앺흘이지! 어뤤지 주세요! 영어권 국가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 가도 마찬가지다. 시마이와 간지가 일본어였어? 중국이 짱이지 역시 기술하면 독일이지 비엠더블유라니 베엠베야! 등등
2단계의 증상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내가 한국에서 봤던 그 전시는 전시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수준 높은 전시를 못 본다.
그리고 수많은 시간이 흘러 국내의 온갖 미술관을 돌아다니고 시간과 예산 부족에 고생하고 아무리 서구권을 좋아해도 주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으며 점차 해탈해 3단계로 돌아온다. 그래 유럽회화 한 점 없는 우리나라에 비싼 보험료 내고 이정도로 들어오는게 어디야
비싼 비행기 티켓과 호텔비를 내고 관광객 바가지 당하고 시차에 고생하고 이 가격에 이런 냉동음식을 먹어가며 냄새나고 치안 안좋은 유럽에 가서 보지 않고 대중교통 타고 갈 수 있는 지근거리에서 유럽회화를 볼 수 있게 해준 것에 감지덕지지 얼마나 감사한가! 해탈의 3단계는 이렇다.
같은 오르세 미술관 컬렉션이지만 일본 국립서양미술관에선 67점에 일본 자체 보유 컬렉션을 포함해 총 97점의 인상파전을 볼 수 있다. 서초 예전에서는 오르세 미술관 47점이다. 1단계에선 오 예쁘다 좋다 하고 봤다가 2단계에서 해외와 비교하며 47점 밖에 없다고 불멘소리를 내다가 3단계에 와선 이정도라도 들여오느라 고생했겠다, 예산과 인프라부족 속에 47점으로 무슨 스토리를 만들려고 했을까, 하며 보여지는 것에 집중한다.
개인적으로는 세잔과 르누아르를 비교하는데 집중했다고 생각하고, 한국 관객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예쁜 인상파라는 고정관념을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정착시키는데 일조했다고 본다.
예컨대 2013년에 필립스 상을 받은 펜실베니아대 미술사 교수 앙드레 돔브로우스키의 폴 세잔에 대한 미술사 연구서에서는 세잔의 그림에서 폭력, 살인의 모티프를 프로이트 이론으로 분석했다. (놀랍게도 동시대 사람이지만 둘의 교유관계는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대정신은 둘 다 간파하고 있었는데 세잔은 보이는 대로의 재현의 세계를 해체해 구조와 지각의 불안정성을 드러냈고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으로 계몽주의적 이성 이면의 무의식과 억압을 언어화했다. 그러니까 세잔은 시각에서, 프로이트는 언어에서 근대의 확실성이 붕괴되는 모양새를 각자의 방식으로 감지한 것이다)
전시장에 걸려있던 그림이 아니라, 전시장의 디스플레이 화면에서 세잔도 ˝신화적인 그림을 그렸다˝고 하며 1867년의 랑레브망(납치)를 언급하는데 그치지만 위의 책에선 원화의 기반이 되는 드로잉과 비교하며 축 늘어져있는 몸의 모양새를 정밀하게 분석했다. 또, 영상에선 살롱에 2미터가 넘는 왜소증 친구 초상화를 출품했다가 떨어졌다는 특이한 일화로만 1868년의 아쉴 엥프레르 초상화를 설명하지만 이 역시 위의 책에서 왼속의 손이 축 늘어져있는 부분이 특이하다고 주목하며 세잔이 그리는 몸과 살의 구도에 대해 설명한다.
그런데 이런 미술사에 대한 최근 해석이나 뭐 동시대 미술 담론에 초기근대 회화가 어떻게 접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은 차치하고 예쁜 인상파 회화 정도에 머물도록 전시를 구성했다. 그것은 진입장벽을 낮춰 티켓값을 회수하기 위한 영리한 비즈니스 전략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너무 복잡한 공부는 원하지 않는다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다. 미술사 학습이 깊어지면 학술 연구서를 읽다가 이렇게 대중과 일반적 감각과는 유리되면서 산이 산이 아닌 2단계를 거쳤다가 고립을 거쳐 그래 그냥 산은 산이야 하며 3단계로 해탈한다.
이 글은 전시장의 그림이 아닌 영상에서 연구서에 언급된 그림 2점을 봐서 반가웠다고 말하려고 썼다가 아무말 대잔치로 실패한 글이다 총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