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불멸의 화가 반 고흐
2024-11-29(금) ~ 2025-03-16(일)
1. 호불호가 있을 전시다. 볼 게 없다 vs 유명 작품 잘 보았다.
최근 일본여행 붐을 타서 일본에서 미술관 한 번 다녀온 사람들은 호흡이 짧다고 느껴질 것 같다. 작품의 절대적 가짓수가 적게 느껴진다. 국내에 고흐 소장 작품이 없다면 빌려오는 작품의 가짓수는 다 돈이다. 그러니 예산의 제약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핵심 작품을 들여오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몇 십 년 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반 고흐를 볼 수 있다니! 했겠지만 이제 한국사람들의 눈이 너무 높아졌다. 유럽여행 다녀온 사람들도 많이 생겼고, 가까운 일본의 서양전시는 훨씬 더 수준이 높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는 만족이 안된다. 애호가들이 실망하기 시작하면, 일본에 가서 보고 한국 전시는 안 가게 될 것이다. 미술전시의 외주화. 그로 인한 양극화. 도태되고, 이미지가 하향세로 돌아서면 겉잡을 수 없다. 일본만큼의 전시를 하자니 돈이 문제가 되고, 그만큼 예산이 안되거나 가성비가 안 맞고, 진퇴양난이다. 쉬운 선택은 이머시브전시다. 빛의 벙커 같은. 그러면 애호가들은 오지 않고, 서양 그림 봤다는 것에 만족하는, 평소에 전시를 안 보는 사람들이 아이들과 와서 재밌게 시간을 보낼 것이다. 눈앞에서 이동하고 소리 나오고, 하는 그런 이머시브전시가 연희문화 전통이 강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더 적절한 것 같기도 하다.
2.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서 해바라기를 본 적 있다. X-Ray로 검사한 검사지를 보여주며 물감 특징 때문에 색깔이 바래서 지속적으로 보존처리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일본 도쿄 솜포 미술관에서 해바라기 작품을 봤다. 일본은 근대 유럽과 동시대에 살고 있었구나 생각을 했다.
3. 예술의 전당 반 고흐 전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세 가지. 초기 드로잉, 착한 사마리아인 그리고 직기와 직조공(1884 loom with weaver)다.
누드만 그리는 사람과 누드를 절대 그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누드를 한 작품만 남겼다면 그 선택의 이유가 궁금하다. 반 고흐가 그렇다.
비슷한 맥락에서 반 고흐의 종교화는 드문데 착한 사마리아인을 그렸다. 말의 눈은 삐뚤고 작풍은 그의 스타일이지만 묘하게 다르다. 드로잉에서부터 유화까지 일관적으로 보이는 그의 작풍은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운동성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작풍을 보면 흐르는 강의 유속, 수증기, 밀밭을 스치는 바람, 나무의 움직임이 하나의 방향성을 지닌 벡터처럼 시각화된다. 짧고 끊어지면서도 연속적인 붓터치는 파동의 흐름을 따라가며 역동적인 다이내미즘을 부여한다.
인물표현의 특징으로는 목각 인형 같이 각진 코와 튀어나온 뭉개진 귀, 대각선으로 기울어진 포즈, 얼굴과 발만 부각된 과장법, 곱등이 같은 등과 왜곡된 엉덩이와 넓적다리가 눈에 들어 온다. 이러한 표현들은 자연주의적 이상이나 리얼리즘적인 균형을 따르기 보다 인물의 심리상태와 정서적 무게감을 시각적으로 환기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움직임과 감정을 붓질의 결로 치환한 것이다. 전시 작품 내내 반복된다.
드로잉에서 이런 인물묘사의 특징과 붓질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직기와 직조공은 왜냐? 그답지 않게 탄탄한 구성과 섬세한 배치가 눈에 띄였기 때문. 이런 작품은 검색해도 잘 나오지 않는다. 아는 전시라도 가서 봐야하는 이유다. 세렌디피티. 어디서 무엇을 우연히 선물같이 만날지 모른다.
4. 아쉬운 것은 영어. 인칭형용사가 잘못 되어있다.
Van Gogh's fame undoubtedly stems from his extraordinary talent
as a painter and his distinctive, thickly painted his oil pantings, which are..
his가 두 번 나오면 안된다. 3달이 지났는데도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거나 아무도 안 읽겠지 하고 넘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하이컬쳐는 사소한 디테일에서 품격이 갈린다. 외국인은 분명 읽을텐데, 이런 기본적인 문법실수는 치명적이다.
파인 다이닝도 디테일에서 무너지면 손님이 빠져나가듯이. 선진국 문화로 나아간다면 디테일에서 매섭게 집착해야한다. 디테일을 놓치고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살면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기껏 이뤄놓은 이미지가 다 망가진다.

4. 이것말고도 별로 원어민스럽지 않은 영어는 다른 파트에 있었다. 필기해왔다.
한글 : 반 고흐가 자화상에 집착한 이유는 모델료가 없어서 모델을 구하지 못하는 경제적 이유가 그 첫 번째이고, 네덜란드 시기부터 그의 주된 연구대상였던 인물화에 대한 그의 집착이 두 번째이다.
영어 : If Van Gogh's obsession with self-portraiture was due to the economic reasons of not being able to afford models, the second was obsession with portraitrue which had been hi main subject of study since the Dutch period.
특히 "모델료가 없어서 모델을 구하지 못하는 경제적 이유"에 해당하는 "the economic reasons of not being able to afford models"가 부자연스럽다. 직역하면 모델을 구하지 못하는 경제적 이유인데, 두 가지 점에서 어색하다.
우선 economic reasons of인데, 영어에서는 reasons for로 쓰거나, 혹은 아예 다른 방식으로 재서술하는게 좋다.
그리고 not being able to afford models는 문법적으로는 옳지만, of +ving to v o 구조로 써서 뚝딱뚝딱 거린다. 차라리 because he couldn't afford models로 풀거나 다른 방식으로 재서술하는 편이 좋다.
대안은 무엇인가? 나는 이렇게 쓰면 원어민스럽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영어: Van Gogh’s preoccupation with self-portraiture stemmed first and foremost from financial constraints. Unable to afford models, he turned to himself as the most accessible subject. Beyond economic necessity, his persistent engagement with portraiture reflected a deeper artistic fixation, one that had been central to his practice since his Dutch period.
한글로 재번역하보면 이렇다.
한글: 반 고흐의 자화상에 대한 집착은 무엇보다도 재정적 제약에서 비롯됐다.
모델을 살 여유가 없었던 그는 가장 접근하기 쉬운 주제로 자신에게 돌아섰다.
(모델을 쓸 형편이 되지 않아, 그는 자신을 가장 손쉬운 대상으로 삼았다.)
경제적 필요성을 넘어 네덜란드 시대부터 초상화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참여는 그의 실천의 중심이었던 예술적 집착을 반영했다.
여기서 중요한 표인트는 주어 술어를 명쾌하게 하나씩 설정하고, 부수적인 문장은 분사화하거나 전치사구로 빼서 선명한 구조를 통해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특히 신경쓴 부분은 Unable to afford models, he turned to himself as the most accessible subject인데,
Being이 생략되어있어 형용사의 주어는 he이고, (Being) unable to afford models, he..라는 문장이다.
unable은 he를 지칭하므로,
모델을 구할 수 없어, 그는... 이라고 해석하는 게 아니라
모델을 구할 수 없었던 그는... 이라고 해석한다. 관형격을 늘 which 후치수식하지 말고, 전치수식할 수 있는데, 특히나 앞문장에서 의미상 연결될 경우 더더욱 그렇다.
다시 생가해보자 원래 한글의 의미요소에서 메시지를 뗀 다음 영어식 패턴에 맞게 재배치해보자
(1) 반 고흐가 자화상에 집착한 이유는 (2) 모델료가 없어서 모델을 구하지 못하는 (3) 경제적 이유가 그 첫 번째이고,
->
(1) 반 고흐가 자화상에 집착한 이유는 (3) 경제적 이유 때문인데, (3) 그 경제적 이유는 곧, 모델료가 없어서 모델을 구하지 못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 이런 식으로 차근차근 스텝밟아서 설명하는 방식이다.
->(1) 반 고흐가 자화상에 집착한 이유는 (3) 경제적 이유 때문인데, (주어-술어)
(3) 모델료가 없어서 모델을 구하지 못했던 그는 ... (우리말의 관형격을 영어에선 분사구로 전치수식-주어-술어)-
->우리말의 자연스러움을 살려서 이렇게하는게 최선이다.
모델을 쓸 형편이 되지 않아, 그는 자신을 가장 손쉬운 대상으로 삼았다.)
이런 것이다.
5. 프로이트 이후, 심리학과 정신의학이 발달하면서 영화, 문학을 비롯한 예술 비평에서 작가의 유년 시절을 들춰내어 작품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만연해졌다. 영화 속 빌런이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받은 상처 때문이고, 화가의 그림이 어두운 이유는 유년기의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식의 해석이 흔해졌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작가를 한낱 과거의 굴레에 가두는 편리주의적 해석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거칠게 표현하면 이현령비현령,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작가의 불행했던 유년시절을 끌어와 작품을 해석하는 만병통치약이다.
물론 작가의 유년의 경험이 작품에 녹아들 수는 있다. 하지만 기억은 흐려질 수도 있고 삶의 어느 지점에서 따스한 인연을 만나 상처를 극복할 수도 있지 않은가. 가장 큰 문제점은 외부 이야기가 작품에 대한 정당한 접근을 방해하다는 점이다. 모든 창작물을 작가의 생애와 억지로 엮어 해석하는 것이 때로는 작품 자체를 온전히 감상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말이다. 작품이 곧 작가의 자서전이어야 한다는 전제는 경직된 해석을 낳으며, 특정한 사례에서만 유효할 뿐 보편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장에서 “이 아줌마, 정신병이 있어서 이렇게 점만 찍는대”라는 소곤거림을 듣고, 반 고흐 전시에서 “정신병을 앓아서 색을 이렇게 쓴대”라는 속단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작품에 대한 몰입보다 작가의 병력에 집중하는 경향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창작자가 구축한 예술 세계를 피상적으로 소비하게 만들고, 작품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기회를 빼앗는다.
대안은 무엇인가? 작품 자체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시각적 분석과 작품 간 비교, 시대적 맥락 속에서의 조망이 우선되어야 한다. 언어로 그림을 표현하고, 다시 문자화된 시각적 표현을 실제 작품과 대조하며 감상의 깊이를 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술은 결국 작가를 넘어 독립적인 존재로 기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6. 작가의 생애를 끌어오는 만병통치약적 해석이 만연한 이유는 그게 동아시아의 맥락중심적 사고방식에 잘 들어맞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아시아인은 전체를 먼저 보고 개체를 본다. 작품이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큰 맥락을 먼저 본다는 뜻이다. 반면 영미, 유럽인은 개인에서 시작해서 사회로 나아간다. 작품을 볼 때도 개별 형태, 구성, 요소, 색 같은 시각적 요소에서 출발해 작가개인사, 연계작품, 역사적 사실로 나아간다.
동아시아인은 사회에서 시작해 개인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작품을 볼 때도 작가 출신지, 학벌, 사회적 지위, 교류관계, 수상내역에서 시작해 작품으로 들어간다. 이런 방법은 적절하지 않다. 작품 자체에서 시작해, 작은 사실을 통해 큰 이야기를 그릴 수 있어야 미술사의 시각분석에 가깝다. 그리고 이게 선진국 사람들이 미술관 박물관에서 무언가 골똘히 쳐다보는 이유다. 작품 자체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외부 사실이 아니라.
작가의 사생활은 작품을 감상하는데 부차요인이다. 작품에서 시작해서 큰 이야기를 빚을 수 있어야한다.
7. 다른 예로 한국인은 영어를 써도 이렇게 쓴다. 스쳐지나가는 어느 SNS에서 읽었는데, 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관련없는 사람이며, 그 사람을 불편하게 하기 위해 쓰는 분석이 아니다. 한국인이 영어를 쓴다면 너도 나도 이런 패턴으로 쓸 것이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문해력과 독해력이 감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 작년에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지금까지는 이만큼 밖에 못 읽었네. 올해는 더 열심히 공부하기로 함!" 이것은 한글로 번역한 것이고,
원래 글쓴이는 영어로 이렇게 썼었다. I’ve been feeling lately that literacy and reading comprehension are declining worldwide. I started reading books last year, but this is all I've managed so far. This year, I’m determined to work harder!
그런데 원어민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어색하다. 마치 우리가 외국인이 말하는 한국어를 들으면 문법이 맞아도 가끔 표현이 이상하다고 느끼듯이.
원어민은 개인에서 시작한다.
Started reading books last year but barely got through anything. Honestly, feels like people’s attention spans and reading skills are getting worse these days. Gonna try harder this year!"
작년에 책 읽기를 시작했는데 거의 아무것도 못 했네. 솔직히 요즘 사람들의 주의 집중력이 떨어지고 독서 실력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 같아. 올해는 더 열심히 공부할게
구 트위터, 스레드, 페이스북, 뉴스댓글 등 원어민이 쓰는 글에서는 이런 식으로 쓴다. 주어를 종종 빼기도 하면서.
여기서도 보면 한국인은
1) 탑다운으로, 전체에서 개인으로 초점을 이동시키고
2) 외부상황이 그러하니, 나는 이렇다, 라는 식으로 큰 사회 맥락 속에 나의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한국인 뿐 아니라 일본인도 거의 대부분 이런 식으로 쓴다.
작품 자체에서 출발해서 기술적인 분석을 먼저하고 범위를 넓혀나가는 것이 더 적절한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