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유리 작가의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를 처음 읽었을 때 느낀 기분 좋은 충격을 생생히 기억한다. 아버지의 유골을 묻은 화분이 어느 날 갑자기 말을 건다면, 남자친구의 오른손이 브로콜리로 변한다면 등등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가능하다면 어떨까 싶은 상황을 기발하고도 절묘하게 그린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때부터 이유리 작가님의 팬이 되어 <좋은 곳에서 만나요>, <웨하스 소년> 같은 책들을 따라 읽었다. 전부 무척 재미있게 읽어서 2024년 11월에 출간된 소설집 <비눗방울 퐁>에 대한 기대가 컸다. 이번에는 또 어떤 이야기로 나를 놀래키고 즐겁게 해주실까.
읽어보니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유리 작가의 이전 책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에 약간의 SF 또는 판타지가 가미된 상황을 가정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약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인물들의 상황이 전보다 비참하고 절박해진 것이다. 치매에 걸린 엄마, 남편에게 배신 당한 아내, 생계가 막막한 레즈비언 커플, 깨진 변기를 수리할 돈도 없는 커플 등 약간의 SF 또는 판타지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면 미래에 대한 희망은커녕 잠깐이나마 웃을 여력조차 없는 사람들이 각 작품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걸 보면서 이유리 작가의 작품 세계가 비현실에서 현실로, 환상에서 사실로 경계를 확장했다고 느꼈다.
책에 실린 여덟 편의 작품이 모두 좋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크로노스>와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이다. <크로노스>는 치매에 걸리기 전의 엄마의 모습을 복원한 딸의 이야기이고,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는 애인에게 차인 여자가 자신의 남은 사랑을 타인에게 양도하는 이야기이다. 두 작품 모두 인간의 감정에 기술이 개입하는 상황을 가정하는데, 보통 이런 설정의 이야기가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감정을 통제할 수는 없다'는 식으로 마무리되는 데 반해 <크로노스>와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는 다른 식의 결말을 맺어서 신선했다. 이런 과감함, 단호함도 이유리 작가의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