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대로 여행을 다녀온 지 일 년이 다 되어가서 여행 갈 만한 곳을 알아보는 중이다. 문제는 지금 여기서 떠나고 싶다는 마음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에 무엇을 보거나 하려고 떠나야겠다는 목표가 있는 게 아니라서 좀처럼 일정을 픽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들처럼 항공권이 저렴하니까, 숙소가 예쁘니까, 색다른 음식을 먹고 싶으니까 등등의 가벼운 이유로 여행을 떠나면 좋으련만, 나는 왜 자꾸 여행의 이유나 목표 같은 걸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냥 떠나고 싶으니까, 떠날 수 있으니까 떠나면 안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만난 책이 출판사 유유히에서 만든 <여행의 장면>이다. 고수리, 김신지, 봉현, 서한나, 서해인, 수신지, 오하나, 이다혜, 이연, 임진아 등 열 명의 작가들이 참여한 이 책에는 각기 색다른 '여행의 장면'들이 담겨 있다. 내가 떠난 여행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여행을 떠나는 친구를 배웅한 이야기, 여행을 떠난 가족 대신 집을 지키는 이야기도 있다. 일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떠난 여행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떠난 여행 이야기도 있다. 혼자라서 좋았던 여행, 함께라서 좋았던 여행, 인터넷 덕분에 편하게 한 여행, 인터넷이 안 되는(!) 덕분에 편하게 한 여행 등 실로 다양한 '여행의 장면'들이 실려 있다.
모든 글이 좋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글은 임진아 작가와 오하나 시인의 글이다. 공교롭게도 두 분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일본의 여성 문인의 흔적을 찾아 일본을 여행한 이야기를 실었다. 임진아 작가는 하야시 후미코를, 오하나 시인은 가네코 미스즈를 좋아한다고. 나도 이들처럼 좋아하는 예술가, 연예인의 흔적을 찾아 여행하는 걸 좋아하는데, 그러다보니 늘 여행지가 일본으로 정해진다. 하야시 후미코를 좋아하는 한국인 독자를 일본에서 만나고 의외의 장소에서 다시 만난 임진아 작가님의 여행기도 흥미롭고, 가네코 미스즈의 고향에서 감동적인 만남을 가진 오하나 시인님의 여행기도 뭉클했다. 덕분에 나도 이 장소들을 여행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