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베트의 만찬>. 오랫동안 영화 제목으로 알았는데 최근에야 원작 소설이 있다는 걸 알았다. 마침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출간되었기에 반가워하며 구입했다. 원작 소설이 얼마나 훌륭하면 영화로 제작되고 그 제목이 내 머릿속에 입력되기까지 했을까. 일단 소설부터 읽고 나중에 영화도 꼭 보기로 다짐했다. 책을 펼쳐보니 <바베트의 만찬> 외에 네 편의 단편이 더 실려 있다.
소설을 읽기 전에 작가 이력부터 읽었는데 이력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자크 디네센(본명 카렌 블릭센)은 1885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29세에 남작 폰 블릭센과 결혼해 남작부인이 되었고, 남편을 따라 케냐로 이주해 대규모 커피 농장을 경영했다. 남편에게 옮은 매독 때문에 남은 생 내내 투병했다. 193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해 출간을 시도했지만 덴마크와 영국에서는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미국의 한 여성 작가가 이자크 디네센의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아서 미국의 출판사와 연결해 주었고(여돕여), 이후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책이 출간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으나 덴마크 문단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어째서...).
로버트 레드포드, 메릴 스트립 주연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원작도 이자크 디네센이 썼다. 근데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회고록, 즉 실화라고. 본명인 카렌 대신 이자크라는 필명을 사용한 것은 여성의 이름으로 책을 내면 남성의 이름으로 낸 책보다 덜 중요하고 덜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표제작 <바베트의 만찬>은 노르웨이의 작은 시골 마을이 배경이다. 주인공 자매는 목사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검소하고 신실한 생활을 해왔다. 젊을 때는 자매의 아름다운 외모와 신성한 노랫소리에 반해 관심을 보이는 남성들도 있었지만, 결국 자매는 아무와도 맺어지지 않고 오로지 신만을 섬기며 수녀님처럼 독신으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매는 친척의 부탁으로 프랑스에서 온 여인 바베트를 식객으로 맞게 된다. 친척에 따르면 바베트는 파리의 유명한 요리사였는데 혁명으로 집과 일터, 가족까지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세 여성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 얼마 전 복권에 당첨되어 큰 돈을 벌게 된 바베트가 자매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한 상차림을 준비하겠다고 나서면서 긴장이 발생한다.
이어지는 단편 <템페스트>의 내용도 흥미롭다. 배우를 꿈꾸는 말리는 쇠렌센이라는 연극 연출자의 눈에 띄어 셰익스피어의 연극 <템페스트>의 에어리얼 역을 맡게 된다. 몇 달에 걸쳐 열심히 연습한 말리는 공연을 위해 배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 직전에 이르는 사고를 당한다. 이때 말리가 용감하게 나서서 사람들을 구조하고 배의 난파를 막은 것이 알려지자 배의 주인이 말리를 자택으로 초대하고 며느리감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었던 여성이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두 남자와 엮이면서 원래의 꿈으로부터 멀어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작가의 생애와 겹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