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키치의 책다락
  • 희랍어 시간
  • 한강
  • 11,700원 (10%650)
  • 2011-11-10
  • : 135,985



진정한 친구는 내가 비를 맞고 있을 때 우산을 가져다 주는 친구가 아니라 나와 함께 비를 맞아주는 친구라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때는 '그러면 그냥 비 맞은 사람 둘이 되는 거 아닌가?'라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손해 볼 걸 알면서도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라는 걸 안다. 친구든 연인이든 간에 그런 사람은 드물다. 드물기에 귀하다.


한강 작가가 2011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을 다시 읽었다. 이 소설에는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나온다. 여자는 남편과 이혼하고 아홉 살 난 아들의 양육권까지 빼앗긴 트라우마로 인해 말을 할 수 없게 된 상태다. 오래 전 처음 말을 잃었을 때 낯선 프랑스어 단어를 듣고 다시 말을 하게 된 것을 기억해낸 여자는, 그저 배울 수 있는 언어 중에 가장 낯설다는 이유로 희랍어를 택해 강의를 듣는다. 남자는 한국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인생의 절반을 보내고 서른 살 후반이 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희랍어 강사다. 그는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중인데, 이런 사정을 아는 이는 독일에 있는 가족 외에는 없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어버린 여자는 각각 희랍어를 가르치는 강사와 희랍어를 배우는 학생으로 한 교실에서 만난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몇 회의 수업이 지나도록 서로의 존재는 알지만 서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남자에게 여자는 그저 말수가 없는 학생이고, 여자에게 남자는 그저 낯선 언어를 가르치는 강사일 뿐이다. 하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은 상대방이 중요한 감각 하나를 잃었거나 잃어가는 중이라는 걸 알게 되고, 어떤 감각인지가 다를 뿐 세상을 인식하고 주변 사람들과 연결되는 수단 하나를 잃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한 처지라는 걸 깨닫는다.


그 깨달음의 순간, 나는 여자가 남자의 눈이 되고 남자가 여자의 입이 되는 전개를 예상했다. 실제로 그런 전개가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공감하는 건, 여자가 눈을 감고 남자가 입을 닫는 때부터다. 볼 수 없는 건 볼 수 없는 것만이 아니고 말할 수 없는 건 말할 수 없는 것만이 아니다. 비를 맞아본 적 없는 사람은 비에 젖어본 사람의 기분을 알지 못하듯이, 볼 수 없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세상이 있고 말할 수 없음으로서 말해지는 감정이 있다. 2016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이런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잃어온 걸까.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