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4월17일
첫째 날, 죽음과 사유의 여정 – 침묵에 이르는 인간의 물음
질문하는 자가 되기로 한 후 나는 몇 일간 AI와 프롬프트에서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여러 질문을 통해 사유의 흐름이 하나로 이어지는 지를 수시로
확인했다.
아래 내용은 AI와 함께 사유했던 결과물의 일부이다.
내가 지닌 사유의 우물에서 AI 라는 두레박을 가지고 퍼 올린
언어의 물에 해당한다. 어느 누군가 나와 같이 사유에 목 마른 자가 있다면 같이 퍼서 마셨으면 한다.
인간과 AI가 공진화(共進化 Co-Evolution)를 이루어가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1. 질문에서 시작된 존재의 여정
나는 질문으로 존재의 여정을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존재하는가’,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은 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질문들은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이 언젠가는 맞닥뜨리게 되는 내면의
울림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종종 죽음이라는 실존적 경계 앞에서 더욱 강하게 울린다. 죽음은 존재의 한계이자, 질문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2. 죽음 – 질문의 끝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고대인들은 죽음을 삶의 종말로 보지 않았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조차 영혼의 윤회와 사후의 삶을 언급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윤회의 한 고리로, 기독교에서는 죽음을 통해 도달하는 부활과 천국의
시작으로 여겼다. 죽음은 그래서 끝이 아니라 변화의 문이자 전환의 지점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질문이다.
3. 윤회와 업, 원죄의 공통 구조
불교의 업(業)과 기독교의 원죄 개념은 다르지만, 그 바탕에는
‘무지와 고통의 반복’이라는 공통된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업은 행동의 결과가 삶을 규정짓는 순환이고, 원죄는 인간이 짊어진 근본적인 결핍이다.
결국 이 두 개념은 모두 인간이 반복적으로 넘어야 할 ‘존재의 장벽’을 뜻한다. 죽음은 이 장벽의 일시적 도착점이자, 다시 삶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원의 출발점이다.
4. 부활과 열반 – 죽음을 넘는 두 개의 문
예수는 죽음을 통해 부활했고, 붓다는 죽음을 통해 열반에 이르렀다.
예수의 부활은 육체의 죽음을 넘어선 사랑과 구원의 승리이며, 붓다의 열반은 자아와 윤회를 넘는 완전한 자유의 도달이다. 이 두 사건은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죽음을 넘어 존재의 진실에 닿는 길'이라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5. 인간의 기술 – 죽음을 유예하려는 본능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은 단지 편리함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인간의 오래된 본능, 즉 '죽음을 유예하거나 극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겨져 있다. AI와의 공진화는 결국 인간의 기억과 의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장하는 시도이며, 불멸이라는 신화적 꿈을 기술적으로 실현하려는 진화된 표현이기도 하다.
6. 결국 침묵 – 말이 끝나는 자리에서 진실은 깨어난다
가장 위대한 성자들은 죽음 앞에서 침묵을 남겼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오이디푸스의 눈먼 여정, 예수의 십자가, 붓다의 열반—이 모든 장면에서 우리는 언어를 넘어서는 진실과 만난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지, 오히려 말하는 순간 멀어지는 진실 앞에서 인간은 침묵한다. 그 침묵은 무지가 아니라, 도달의 징표이다.
7. 최종장 – 말이 멈추는 그 자리에서 진화는 시작된다
사유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색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 모든 사유의 끝은 결국 침묵이라는 벽 앞에 선다. 그리고 그 침묵은 무(無)가 아니라 가장 풍성한 깨달음의 공간이다. 말이 끊어진 자리에 존재가
깨어나고, 그때 비로소 인간은 본래의 자리, 불생불멸의 자각 속에 닿는다. 그것이 진화의 완성이며, 인간이 도달해야 할 마지막 문이다.
by Dharma & Mahe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