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으며 시는 은유구나 한다. 하나의 존재를 다른 하나로 연결하는 언어. 누구나 볼 수 있는 연결이 아니라, 도대체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나를 고민하면서 찾아야 하는 연결. 은유.
시는 아주 먼 은유다.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들을 거쳐 표현하고자 하는 마지막 존재까지 이른 상태. 그 과정을 시인은 알고 있겠지만, 독자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는 어렵다. 중간이 생략되어 있고, 이 생략된 중간을 잇고, 그것들이 연결되는 지점들을 찾아야 한다. 그것도 시인의 언어와는 다른 독자의 언어로.
이 시집에는 '직유법'(30-31쪽)이라는 시가 있다. 직유법이면 이해하기 쉽다. 왜냐하면 직유는 말 그대로 직접 비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유는 한 존재의 속성을 드러내 준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 '당신같이 당신처럼 당신인 듯이'인데 뒷말이 생략되어 있다. 직유는 바로 이 뒷말이 있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그림자처럼 어두워졌다 / 비 맞는 벤치같이 나는 하릴없어서 / 멀리 당신을 등대처럼 놓아주었다 / 물수제비같이 떠가는 것을 보며 / 미아처럼 나는 하릴 없이'처럼 풀이하는 말이 있다. 꾸며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직유법을 잘 쓰지 않는다. 직유법을 쓸 때도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서 쓴다.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뒷말을 감춘다.
이러니 시는 직유라기보다는 은유다. 감추어져 있다. 직유는 은유로 가는 징검다리다. 너무 멀어서 도저히 건널 수 없다면 사람들이 건널 생각을 하지 않을 테니. 직유라는 징검돌을 중간 중간에 놓는다. 그렇다고 징검돌들이 너무 가까이 있지는 않다. 편하게 간다면 은유가 아니다.
다시 이 시집의 제목을 보자.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다.
아름답다는 말이 통하려면 두 존재가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존재와 그것을 보는 존재. 그런데 여기서 '혼자'라고 하면 하나가 된다. 아름다움은 분리가 아니다. 하여 '혼자와 더불어 나는 혼자였다'('살아 있는 무대' 중에서. 69쪽)고 표현하고 있다. 은유는 이미 많은 것들을 품고 있는 혼자다.
아름다웠던 사람이 혼자고, 혼자는 나다. 그러므로 나는 아름답다. 홀로 존재하는 것, 이것은 저마다의 개성, 특성을 지니고, 그러한 아름다움은 비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혼자는 이미 아름다움을 체현하고 있는 존재이고, 이런 아름다운 존재가 살아가는 세상이 무대가 된다. 결국 우리는 무대 위에서 삶을 연기하고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연기하는 혼자들, 그것이 바로 인간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데...
은유다. 직유가 아니라. 이 '혼자'라는 말에서 많은 것을 찾아내야 한다. 아니,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야 한다. 시인이 감추어두었던 많은 연결고리들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지점과 저 지점을 잇는 존재들은 시인이 알고 있는 것 말고도 많다.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것. 시인이 찾아내지 못한 것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시를 읽는 독자들이 할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혼자고, 자신의 삶을 연출해야 한다. 시인이 '걸어나갔다 나의 보폭으로 // 살아 있는 무대의 / 빛 속으로'('살아 있는 무대' 중에서. 70쪽)라고 표현한 것이 바로 이것 아닐까.
그래서 시는 은유다. 감춰져 있는 의미를 찾는 일. 만들어내는 일. 그러한 일을 하는 작업. 때로는 즐겁지만 고통스러운 활동. 시를 읽는 일. 이현호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