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 장기, 바둑이 있다면 서양엔 체스가 있다. 체스는 바둑보다는 장기와 더 비슷하다. 정해진 말들이 있고, 말들이 움직이는 규칙이 있으며 왕을 잡으면 경기가 끝난다는. 규칙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매우 비슷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기나 체스나 전쟁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장기나 체스는 상대의 말들을 없애는 쪽으로 운영을 하고, 최종적으로는 왕을 꼼짝 못하게 만들면 이기는 경기니까.
그렇다면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상대를 존중하는 싸움도 있지만, 어떻게든 상대를 파멸로 이끌 전략이 필요하다. 자신은 침착하면서 상대를 흥분시키는 전략과 전술. 또한 자신의 의도를 상대가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전술 등등.
이런 일들이 전쟁에서만 벌어지지는 않는다. 인간 관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강자는 서두르지 않는다. 자신의 속내를 보이지도 않는다. 그냥 그는 천천히 상대를 관찰하면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인다. 반면에 약자는 서두른다. 상대의 눈치를 살핀다. 그리고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면 안절부절못한다.
츠바이크 소설 '체스 이야기'가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배에서 일어나는 일. 우연히 체스 세계 챔피언이 탄 것을 알고 그와 체스를 둔다. 그를 이길 수 없음은 당연한데, 우연히 어떤 사람이 훈수를 둬 비기게 된다. 누군가? 세계 챔피언과 맞먹는 체스 실력을 가진 사람은? 서술자는 그를 찾아가 다시 한번 챔피언과 대결하라고 부추긴다. 이에 그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해준다.
이 이야기가 바로 나치에 의해 감금되었을 때의 일이다. 아무 것도 없고, 어떤 할 일도 없는 상태. 우연히 체스 대결을 기록한 책을 얻고, 그것만을 외우다시피 한 인물. 외운 것에서 더 나아가 자신이 직접 체스를 두는 인물. 하지만 한 사람이 둘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분열된다는 이야기.
결국 나치가 원하는 것, 가장 심한 고문은 인간을 분열시키는 것. 자신들은 어떤 물리적 폭력을 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정신이 붕괴되어 가게 하는 것. 그것이 고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한 나치의 잔인한 행위가 드러나는데, 챔피언과 체스를 두면서 챔피언의 태도에서 그는 나치의 모습을 발견한다.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상대가 스스로 무너지길 기다리는 그런 태도.
츠바이크는 나치가 멸망하기 전에 생을 마감했기에, 나치의 어둠이 사라질 것을 믿었지만, 사라지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나치의 행위는 바로 체스 챔피언의 태도와 같은 것. 오로지 하나만 알고 상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신의 의도를 남에게 보이지 않는. 그러면서 상대가 스스로 무너지도록 하는 그러한 행위들.
소설에서 인물은 다행히 무너지지 않는다. 이야기를 듣고, 그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서술자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
상대를 무너뜨리는 챔피언에게 감정이입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나도 저렇게 침착해야지. 나와 상관없는 일에는 신경쓰지 말아야지. 이기기 위해서 상대의 감정을 잘 이용해야지 하는 태도를 지닌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잘나가는 현실. 그런 사람들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사회. 그것이 지금 사회 아닌가.
하여 이 소설은 나치 시대를 비판하고 있지만, 자신만을 알고 다른 존재들을 무시하는, 상대가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어가는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능력주의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사회.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자신을 비난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 그것이 자아를 분열시키는 사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치는 사라졌지만 최근에 신나치주의자들이 발흥하는 이유도 지금 세상이 능력주의만을 숭상하는 사회로 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당시에 나치가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파멸시켰다면 지금은 능력주의라는 허상으로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파멸에 이르게 하고 있으니...
이 소설의 등장인물이 체스판을 떠나는 것과 같이 우리 역시 벗어날 수 있을 때 벗어날 수 있도록 지금 우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념들을 살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분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낯선 여인의 편지'도 잘 읽었다. 한 여인의 지고지순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지고지순한 사랑이 이미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여인의 그 사랑은 결코 남자에게 가 닿지 않는다. 왜? 남자는 강자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사람. 수많은 여인들을 만나는 사람. 그에게 사랑은 하룻밤 또는 한때 집중했던 감정. 지속되지 않는 순간의 사랑이었을 뿐.
그러니 여인의 죽음은 그러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남자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