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 고통으로 사람을 치유한다는 사이비 종교가 등장한다. 얼핏 들으면 불교와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불교도 고통을 말하고 있지 않나. 그 고통을 넘어서 해탈로 가는 길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해도 되나 싶기도 하지만) 불교 아니던가.
그런데 불교는 고통을 일부러 주지는 않는다. 이미 삶에 고통이 들어있기에 그 고통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이겨내려고 해야 한다고 한다면, 사이비 종교는 고통을 통해서만 사람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기에 외부에서 고통을 가한다. 신체적인 고통을 포함해서.
반대로 이런 신체적 고통을 없애기 위한 의학적 노력이 있다. 약을 통해 고통을 없앤다는 것도 인간을 기계로 보는 관점일 수 있지만, 현대 의학은 약물을 통해 신체를 조절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부작용도 없고 중독도 되지 않는 약이 나온다면...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는 약이 있다면 어떤 세상이 될까?
그런데 부작용이 없고 중독도 안 되는 약을 개발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실험 대상으로 이용한다면? 그 결과 나온 약으로 고통을 없앨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고통을 없앴다고 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내 고통을 없앤다? 이것도 문제다. 동물 실험을 금지하고 있는 요즘,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하고, 그 사람을 고통에 빠뜨림으로써 개발된 약이라니... 그런 약이 과연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해 봐야 한다. 희생당한 사람들이 있는데...
소설은 강력한 두 부류를 설정하고 있다. 약을 통해 고통을 없애는 제약회사. 고통을 통해 고통을 넘어서야 한다는 사이비 종교. 그렇다면 제약회사가 약 개발에 성공하면 사이비 종교 집단은 그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없다. 제약회사를 없애야 한다. 그러한 약을 개발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자신들이 약의 제조법을 빼돌려 복제한 약을 이용해 고통을 극복했다고 선전한다.
이렇게 두 집단은 대립하면서도 고통을 이용한다는 면에서는 같은 길을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위해 고통받는 사람들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수단에 불과하다. 인간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회, 있어서는 안 되는 사회다.
사이비 종교는 제약회사에 폭파해 최고 경영자들이 죽고 (소설 속 주인공 경의 엄마와 아빠다), , 약 제조법을 훔쳐 약을 제조하고(제약회사에 폭탄을 던진 태의 엄마가 위장 취업해 제조법을 빼내온다) 결국 사람이 죽는다.(검증이 안된 약을 제조해 신도들에게 먹게 하고, 그 부작용으로 사람들이 죽는다.) 형사들이 수사에 나선다. 과거 사건 관련자인 경과 태, 그리고 경을 사랑하는 현이 형사 륜과 순과 함께 등장한다. 여기에 의사... 이 의사의 존재가 환상문학으로 이 소설을 판단하게 한다.
어쩌면 이 의사의 존재는 인간이 고통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몸을 몰랐던 외계의 존재가 인간의 몸으로 고통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를 경험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존재들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려 할까? 아마, 아닐 것이다. 내 고통을 이겨낸다는 것은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통을 아예 없애는 것도 문제지만 고통을 가함으로써 그것을 넘어서라고 강요하는 것도 문제다. 고통이 인위적으로 주어졌을 때는 폭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느끼는 고통, 자신에게 찾아온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 단계 성장한 자신을 발견하겠지만, 성장을 위해 일부러 고통을 가하는 것이 성장을 도울지는 의문이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사람의 삶은 모두 다르고 고통의 경험도, 고통에 대한 대응도 각각 달랐다. 자신의 고통은 자신만의 것이었다. 비일상적인 삶의 경험과 강렬한 고통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타인과 즉각적인 유대감을 맺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통과 고통의 탐색은 오히려 경을 타인으로부터 고립시켰다.
고통의 탐색에 매몰되면 결국 과거의 고통을 끊임없이 되돌아보아야 했다. 그러다 보면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던 그 고통으로 돌아가 결국 다시 그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과거에 발목을 잡히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던져야 할 질문들을 모두 던지고 나면 같은 질문에 더 이상 머무르지 말아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경은 그 사실 또한 확실히 깨달았다.' (301-302쪽)'
이렇게 경의 깨달음으로 소설은 행복한 결말로 나아가지만, 그러한 행복을 보여주기 위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 고통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비윤리적 의약 개발, 살인사건, 사이비 종교, 여기에 음모론까지 다양한 문제들이 등장하고 인물들이 얽히고설켜 소설의 재미를 더해준다. 끝부분까지 의문의 인물인 외계의 존재까지 나오면서 그것이 밝혀지는 과정도 재미 있다. 소설은 그러면서 과연 고통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끝까지 긴장을 하게 하는 사건 전개가 뒷이야기가 궁금하게 만들어 소설을 끝까지 읽게 만든다. 재미와 생각.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소설이었다. 무엇보다 남에게 고통을 주거나 남의 고통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 고통에 발목 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불교를 고통의 종교라고 하지 않고 자비의 종교라 하고, 기독교를 원죄(낙원에서 추방된 고통)의 종교라 하지 않고 사랑의 종교라 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