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의 우리 사람 (그레이엄 그린)
빙혈 2025/05/13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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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4년 전 리뷰를 남겼던 <브라이튼 록>에서 잘 드러나듯, 그레이엄 그린은 20세기 쇠락해 가는 대영제국의 안뜰과 뒤뜰을 소설에 자주 담았던 편인 작가입니다. 이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배경이 바티스타 정권 하의 쿠바인데, 주인공 제임스 워몰드는 지난 세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임을 뽐내던 영국의 초라한 상황을 상징하듯 매우 어려운 형편에 놓인 자영업자입니다. 말 안 듣는 딸 밀리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면 사춘기 딸 키우기가 이렇게 어렵겠구나 싶은데, 나치에 타격당하고 거의 질 뻔한 전쟁을 간신히마무리지었건만 야당인 노동당에게 정권을 줘 버린 자국민들을 보던 당시 보수당 정치인들의 심경도 이 대목에서 풍자된다는 생각도 저는 들었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워몰드가 먼 대서양 카리브해(p74) 지역에 왜 머물러서 이렇게 힘든 생활을 하느냐면, 그건 대서양 일대 구 유럽 식민지의 형편이 다 그러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물론 쿠바는 영국 세력권이었던 적이 없었지만 인근에 바하마라든가 도미니카연방 같은 곳들도 다 비슷한 경기였고 상황이었으니 말입니다. 현지인들에게 우월적 지위로 뭘 해먹던 게 이제 예전같지 않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식민인들이 기민하게 정세 변화에 대응한 것도 아니고 본국으로 귀환해 봐야 더 상황이 나빠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바나의 정정은 매우 혼란스럽고, 이는 집권자 바티스타의 무능함과 부패가 한몫해서인데 소설 곳곳에서 이 점이 지나가듯 암시됩니다.
1960년대 영화 007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관객 눈에 당혹스러운 게 있습니다. 영국은 2차 대전 후 급저그런 나라로 전락했는데 뭐하러 저렇게 세계의 (비밀) 경찰 노릇을 하려 애쓰며, 그럴 여력이나 있었던가? 이 1958년작 소설을 보면 그 씁쓸한 이면이 묘사됩니다. 첩보 당국은 뭔가 과거의 환상을 붙들고 그들의 사무를 처리하는데, 진지하고 열심이긴 하지만 아무한테도 크레딧 받지 못하는 그 노력이 뭔가 안쓰럽고 우스꽝스럽까지 합니다. 워몰드의 개인적 무능과 당국의 기묘한 무기력이 겹쳐 보여 소설의 코믹한 상황이 아이러니를 더합니다.
시니컬하고 열의가 없는 워몰드에게 슬로피 조의 이방인 손님은 말합니다. "1939년처럼 뒤통수를 맞진 말아야죠.(p47)" 여기서 영어원문은 Ribbentrop Pact라고 표현하는데 이게 (이 번역본에서처럼) 독소불가침조약입니다. 리벤트롭이라고 당시 독일 외무장관 이름을 대면 더 의외의 타격감이 아프게 다가오죠(이 역본에서는 뒤통수 맞음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이것만 봐도 당시 영국은 나치 독일이 아니라 공산주의 소련을 더 큰 주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은 MI6에 복무한 적도 있었기에 이 분위기를 잘 알았으리라는 전제 하에서 말입니다.
캡틴 세구라는 그전부터 워몰드에게 매우 신경쓰이는 작자였습니다. 대체 왜 저런 남성들은 한참 어린 아이들에게 이처럼 구칙칙한 눈길을 보내곤 하는 걸까요? 또, 딸 밀리라도 선명한 처신을 하면 좋으련만 아빠 애를 먹이려고 무슨 작정이라도 했는지 얘마저도 희한한 언행으로 문제를 악화시킵니다(물론 두 번이나, 캡틴 세구라에게 '이 파티는 당신이 아니라 아빠의 것'이라고 못 박긴 했습니다). p141:4의 원문은 "He was hurt that anyone so pretty should look at him with such contempt."인데 여기서 왜 워몰드가 anyone이란 표현을 썼는지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고, 책의 번역문은 그걸 더 타자화하여 효과를 높입니다. 여기서 세구라가 내뱉는 욕설 원어는 스페인어 Coño입니다.
p239를 보면 영국 첩보당국이 이제 패권을 미국에 뺏기고 얼마나 허탈해하는지 국장의 푸념을 통해 그 심기가 간접적으로 드러납니다. 미국에서는 checkers라고 하고 영국에서는 draughts라고 하죠(p141). 이중 첩자라는 게 화제에 오르는데 사실 작가 그레이엄 그린도 이쪽 일에 대해 잘 알 만한 경력을 가친 인물이라서 이 언급은 뭔가 심상치 않게 다가옵니다. 바티스타 정권이 망하기 직전 긴박한 아바나의 모습은 영화 <대부 2>에도 몇 컷이 잘 나오죠.
캡틴 세구라는 밀리의 아빠 워몰드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는 등 거침이 없고(p299), 워몰드 씨는 사태의 전개가 자신의 뜻과 하나도 맞지 않아 당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워몰드의 거주 자격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세구라는 갑의 위치이고, 여기에 닥터 하셀바허(저 앞 p109에서는 갑자기 여자가 된ㅋ)의 죽음과 장례까지 겹쳐 일은 걷잡을 수 없이 꼬입니다. p345에서 언급되는 페르시아만의 바스라는 이라크 소재인데 이때만 해도 이라크는 대단히 세속적인 분위기였습니다. 쿠바 역시 공산혁명 전이라 미국인들이 제 안방처럼 드나들며 영향력과 이권을 키워 나갔는데, 이 코믹한 소설은 한 시대 구간에 찍힌 마지막 기념사진처럼 묘한 풍속도 노릇을 합니다. 영화로도 바로 만들어졌었는데 <닥터 지바고>나 <콰이 강의 다리>에 나왔던 알렉 기네스가 워몰드 역입니다. 사실은 이 워몰드 역이 알렉 기네스 연기의 가장 특징적인 면을 보여 준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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