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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3부작
- 데이비드 마추켈리 외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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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 - 2025-04-30
: 2,790
한국에는 유독 폴 오스터의 팬들이 많습니다(저는 그를 약간 늦게 알았지만). 물론 폴 오스터는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사랑 받는 작가였으며, 작년 그가 타계했을 때 소셜미디어 곳곳에 추모의 물결이 일었습니다. 이 그래픽 노블 버전을 보면(다소의 각색이 있습니다), 특히 (국적 불문하고) 도시 거주자들에게 왜 그가 컬트적 독해의 대상이었는지, 이런 포맷 안에서 이해가 더 잘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픽 노블에 정말 잘 어울리는 게 그의 작품들이었음을 다시 확인하는데, 실제로 이 책(그래픽 노블 버전)도 미국에서는 이미 긴 세월 동안 독자들의 호응을 얻은 베스트셀러였더군요. 익히 알던 그의 뉴욕 트릴러지를 이렇게 한 권에 묶어 비주얼 포맷으로 새로 감상하는 게 저 같은 그의 팬들에게는 큰 선물이 되었습니다.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 책에 실린 세 작품은 작화와 텍스트의 비율이 각각 다르며, 그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또 그림을 보면 스타일이 다 다른데 다른 작가들이 그렸기 때문입니다. 다른 작가들의 솜씨이니 비율이 당연히 다르지 않겠냐고 되물을 수 있으나, 저는 편집자가 세심하게 고려하여 작품마다 최적의 작가라 여겨지는 이들에게 커미션을 맡겼으리라 개인적으로 추측합니다. 특히 저는 첫 작품 <유리의 도시>의 데이비드 마추켈리라는 분이 폴 오스터의 우수 어리고 고독한 세계에 그 스타일이 딱 맞다는 느낌이었는데, 편집진은 아마 다른 깊은 고려에서 트릴러지의 이후 두 작품은 타 작가들을 기용했겠죠. 여튼 좋았습니다.
"그 일은 잘못 걸려온 전화로부터 시작되었다(p9)." 너무나도 유명한 서두입니다. 사실 도시 생활에서 잘못 걸린 전화는 너무나도 큰 짜증을 유발하며, 이 고전에서처럼 기막힌 체험으로까지 유도되기란 힘들지만, 여튼 폴 오스터의 시대에는 일종의 낭만처럼 아주 제한적으로나마 받아들여지기도 했겠습니다. 폴 오스터라는 이름은 엉뚱한 맥락에서 카메오처럼 등장하여 웃음을 유발할까 싶기도 하겠지만, 결말까지 가면 혼돈과 충격에 빠지는 건 대니얼 퀸뿐이 아니라 우리 독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p46에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 <아담과 이브>가 잠시 등장하는데 이 장면에서 아주 적절한 미장센이다 싶어 감탄이 나왔습니다. 피터 스틸먼의 대사들이 p21 이하에서 마치 담배 연기가 입에서 새어나오듯 말풍선이 처리되어 분위기를 탁월하게 표현합니다. 정작 담배를 피우는 건 폴 오스터 탐정님(?)이지만 말입니다. 또 퀸(이 이름도 의도적으로 선택되었겠죠)이 순간 버지니아의 알몸(p34)을 투시하는 것(물론 그의 상상)도 이런 그래픽 노블에서만 구현되는 멋진 센스입니다. p12를 보면 "도시를 걷는 건 언제나 미로를 헤매는 느낌이다"라는 유명한 그의 문장이 나오는데 이걸 읽고 p109의 전체 컷을 한번 보십시오. 어떤 느낌이 드는지.
소설 서두(p16)에서 퀸은 필명 윌슨을 일종의 복화술사로 세팅한다며 허위의 부캐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또 그 편이 이 꽉 짜여진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인정받는 성실한 선택이라 확신하지만 내심 큰 회의를 느낍니다. p65를 보면 스틸먼은 행복하지도 슬프지도 않은 태엽인형으로 그려지는데 여기서 퀸의 공감 내지 일체화는 최고치에 달합니다. 스틸먼과 퀸이 가까워지는 동안, 폴 오스터라는 허무인은 착오로(혹은 고의로) 무대에 끌려나와 탐정 노릇을 하던 걸 마치고, 느닷 액자 밖에서 전혀 별개의 실존 인물로 등장합니다. 이 결말의 처리가 소설의 주제를 새롭게 부각하는데, 도시의 파편화하고 익명화한 삶이 모든 걸 혼란과 의혹으로 몰아넣는다는 암시인 듯합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생각한다. 애초에 화이트라는 사람은 없었다.(p204)" 의뢰인 블랙을 위해 화이트를 찾아 오렌지 스트리트(p182)에서 분투하는 블루라는 사립 탐정은 p194에서 지미 로즈라는 걸인을 가장하여 블랙이란 자가 대체 뭘 노리는지 알아 보여 합니다. 걸인이 월트 휘트먼과 닮았다고 블랙이 말하는데, 대화 중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 너새니얼 호손에까지 이야기가 번지면서 블루는 이미 저 블랙이 모든 걸 꿰뚫어 보았다고 결론 내립니다. p223에서 블랙은 38구경리볼버를 들고 기괴한 가면을 쓴 채 블루를 겨누는데, 텍스트의 비율은 확 줄고 큰 컷의 비주얼로 작가는 독자에게 이 결정적인 순간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개인적으로 소설 원작과 가장 큰 이질감이 느껴진 게 <잠겨 있는 방>이었습니다. 피터 스틸먼(?)은 p365에서 허먼 멜빌을 자칭하는 취객에게 당신 팬쇼 아니냐며 당혹스러운 말건넴을 받습니다. 얀 미쇼도 p359에서 마찬가지였죠. 작가는 원작 소설의 내러티브보다 더 육감적이고 에로틱한 작화를 통해 캐릭터의 복잡한 심리를 전달합니다. 거대한 자연과 함께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갑자기 열린 여행가방 안이었고, 알고보니 건물 안 1층을 벗어나 본 적도 없었다니(p386) 도시의 고립된 삶이라는 게 이처럼 총체적인 인식의 붕괴로까지 이어진다는 게 섬뜩하지만, 그래도 폴 오스터의 세계에는 언제나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담겨서 좋았습니다. 세 그래픽 작가들도 그 점을 너무나 잘 이해했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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