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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혈님의 서재
  • 소리 없는 쿠데타
  • 클레어 프로보스트 외
  • 22,500원 (10%1,250)
  • 2025-04-18
  • : 920
수십 년 전 시인 청마 유치환은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보고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이란 천재적인 시구를 만들었습니다. 깃발이 펄럭이는 음향이 사람 귀에 안 들리는 건 아니지만, 깃발이 아우성치는 그 맹렬한 기세, 그 안에 든 다량의 메시지까지는 일일이 고막에 못 담는다는 뜻이겠습니다. 세상사는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드러나지 않는 충격파와 움직임이 더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북뉴스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기업은 군대와 달리 토착민들에게 달콤한 미소를 띠고 접근합니다. 그들이 제공할 서비스와 상품은 지금의 삶의 질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향상시킬 듯 현혹합니다. 맥도널드나 코카콜라 같은 달콤하고 간편한 상품은 그것이 제공하는 서비스와 분위기 등과 언제나 일체가 되어 어필하며 젊은층은 그런 브랜드가 자리한 장소에 젊음의 활기와 낭만이 함께하는 듯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감언이설 교언영색으로 타국에 진출한 기업들, 글로벌 제국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주권을 잠식하며 어느새 현지의 정치적, 산업적 헤게모니까지를 장악합니다. 저자들은 이런 장기간의, 은밀한 권력 교체를 일러 "소리 없는 쿠데타"라 일컫습니다.

책의 원제목은 Silent Coup인데, 영어에서는 그냥 coup라고만 해도 프랑스어 원어의 coup d'etat를 뜻한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쿠데타란, 주권자인 국민의 뜻과 무관하게 정체불명의 소수가 권력을 탈취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글로벌 기업은 한편으로 현지의 정치인들을 매수하고, 다른 한편으로 대중을 세뇌하여 그공중의 참된 이익이 무엇인지 판단을 어렵게 만듭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 시민들은 다국적 기업의 탐욕이 향하는 곳에 곧 국가와 사회의 이익이 있다고 착각하게 길들여집니다. 군대가 주도한 쿠데타는 사람들의 주의를 쉽게 끌고 지탄을 받다가 좌초하기도 하지만, 이처럼 기업들이 주도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 찬탈은 미리 감지하기도 어렵고 쿠데타가 끝난 후에조차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자유의 투사 만델라가 노력한 끝에 남아공 국민들은,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들은 노예에서 주권자의 위치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경제적으로도 완전한 자유를 찾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p63을 보면 남아공 마리카나 주민들이 빈약한 임금을 사실상 강요당하며 얼마나 어려운 삶을 영위하는지가 잘 고발됩니다. 투자자-국가 소송이라는 게 1990년대 후반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며 강대국의 강요 비슷하게 개발도상국에도 규범으로 속속 도입되었는데, 이게 현지의 실정법과 거주자, 토착 기업의 이해를 얼마나 침해하는지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한번 다국적 기업의 눈에 나면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데, 조만간 한국인들도 그 무서운 위력을 구경하고 거액의 국부가 밖으로 유출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미얀마는 영토도 광활하고 인구도 많으며 부존 자원도 넉넉한, 하늘의 축복을 받은 땅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근세 이래 이 땅의 국민들은 풍요로운 삶을 누려 본 적이 없었습니다. 군부는 경제특구(p191)를 설치하여 외국 자본을 유치하려 애쓰지만 부패한 군부와 유착한 해외 자본이 어쩌다 이 제한지역에 발을 들여 놓아도 그들은 현지의 자원과 이익의 착취에 혈안이 되었을 뿐입니다. 정통성과 민주적 정당성이 부족한 군부가, 자주적이고 국민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한 계약을 맺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수백 년 전부터 서유럽의 자본은 카리브해,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에 진출하여 단일 농작물(상품 작물)만 재배하게 강요했습니다. 이를 플랜테이션 농업이라 부르며, 정작 현지인들은 일용할 양식조차 부족하여 빈곤선상에 내몰렸습니다. 이처럼 자본이 국경을 넘어 활보할 때 기층 민중의 생활은 더욱 곤궁해지며 마치 자본이 전제군주나 되는 양 그에게 세공을 바치며 자유를 박탈당하는 게 상례였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도, 바로 우리의 주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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