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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스트 (컬러 명화 수록 무삭제 완역본)
- 알베르 카뮈
- 10,800원 (10%↓
600) - 2025-04-08
: 1,990
책의 겉표지에는 우리들에게도 익숙한 클림트의 <죽음과 삶> 일부가 미려하게 인쇄되었습니다(본문 중에서는 p368에도 있습니다). 현대지성에서 고전을 정확히 다듬어 펴낸 기획이 이 번역본으로 벌써 예순세권째에 이르렀습니다. 이 책은 유기환 한국외대 명예교수께서, 카뮈 특유의 그 박력 있고 냉소적인 문체를 잘 살린 완역으로 독자들에게 선보입니다. 현대지성 클래식 특유의 일관된 장정 디자인은 여기에서도 그대로이며, 본문 중에는 뭉크, 빅토르 타르디유, 게리 맬커스 등의 그림들이 천연색 도판으로 실렸는데, 이 작품 <페스트>의 내용 전개와 어느 정도 관련도 있는 주제들이라서 더욱 흥미롭습니다.
(*북유럽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 번역본의 특징 중 하나는 요즘 독자들에게 낯설다 싶은 한자어에 일일이 한자를 병기했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p62 같은 곳에서 기벽(특이한 습관. 奇癖), 명구(名句) 같은 단어들이 그렇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 대목에서 베르나르 리외(Bernard Rieux)가 그랑(Joseph Grand)을 가리켜 "출처를 모를 진부한 표현을 덧붙인다"며 불편해하는 모습이 담겼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의사인 리외는 이내 "필경 심각하지는 않을, 여기서의 페스트가 아니라, 역사상의 재난이었던 페스트 한복판에서도 그는 항복하지 않을 사람"으로 그랑을 평가합니다. 물론 지금 이 역병이 대수롭지 않으리라는 의사(le docteur)의 예상은 빗나갔지만 말입니다. 참고로, 이 번역본에서 "꿈 같은 시절"로 옮긴 구절 원문은 un temps de reve, "도원경의 불빛"은 un eclairage feerique입니다.
"이때는 또한 도시에 갇힌 모든 수인(囚人)이 자포자기하던 시절이기도 했다(p137)." 기자 랑베르는 특히나 무력감을 느끼며 특히 리외의 눈에는 길 잃은 유령처럼 보였다는 문장이 인상적입니다. 이 고전을 읽은 이들은 익히 다 알듯 랑베르는 당시 그럴 만한 개인적 사정이 있었습니다. 애초에 식민 북아프리카에 딱히 뿌리를 둔 처지도 아닌데, 하필이면 끔찍한 역병이 돌 때 손으로 찾았던 도시에 억류된 꼴이니 말입니다. p174를 보면 코타르가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죠. "다른 의미에서는, 페스트가 돈 이후로 제 형편이 더 좋아졌다는 사실입니다." 이 알쏭달쏭한 말은 그의 수수께끼 같은 처지와 함께 독자에게 묘한 느낌을 주며 나중에서야 드러나는 충격적인 사건을 암시합니다.
"페스트가 끝날 때가 됐어(p218)." 시민들은 희망 섞인 바람을 근거도 없이 품고 표현하지만 이 질병이 도시에 내린 계엄이 해제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2차 대전 중 나치 독일이 강점한 북아프리카 오랑(Oran)의 암울한 처지를 이 장편이 암유했다고 해석했으며, (카뮈의 정치적 성향과 다소 배치되기는 하나) 미셸 푸코적 의미에서의 감시, 처벌, 억압 기제를 이 페스트(la peste)가 상징한다고도 새깁니다.
"사랑을 대신한 맹목적 고집에 저녁마다 더없이 충실하고 음울한 목소리를 부여한 제자리걸음 소리(p222)"는, 비상사태 때문에 더이상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아 일체의 기계음 따위가 사라진 도심에서 사람들이 웅얼거리는 소리, 힘없는 구둣발 소리 등을 놓고 저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점령된 도시, 빼앗긴 문화와 문명, 압류당한 자유와 활기를 이렇게 묘파한 카뮈의 통찰과 상상력이 빛나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보잘것없었던 만큼 더욱더 효율적이었던 페스트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p218)." 이민족이 명분 없이 짓쳐 들아오건, 조상 대대로 지켜온 자존과 명분을 능멸당하건, 사실 우리 소시민들은 비굴하고 무기력하며 비루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각오가 된, 하찮기 그지없는 부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같은 고귀한 사치가 비상시에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역병균은 바이러스와 달리 여름에 강하고 겨울에 힘을 잃습니다. 이 작품의 시대, 공간 배경에서 만성절(p280)이라 하면 오늘날의 할로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시민들이 살아 있는 유령들이 되어가는 즈음, 코타르는 p281에서 "이 (억압된)도시의 하루하루가 만성절이었다"라는 기막힌 독백을 뇌까립니다. p330에서 코타르는 드디어 사람들이 우려하던 방향으로 경솔한, 혹은 통제 안 되는 행동을 저지르며, 도시의 긴장이 해소되어가는 흐름과 정반대의 침체를 겪는 그를 보며 독자의 마음도 착잡합니다. p362에서 기관총에 맞아 쓰러지는 개 한 마리와, "형용사가 모두 지워진" 도시의 풍경을 보며 우리도 일상과 비상의 진정한 경계가 무엇인지 생각에 잠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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