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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洞好世, 얕은 책수레
불안의 기원
베터라이프  2025/04/29 21:20
  • 불안의 기원
  • 지그문트 바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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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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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은 1925년 폴란드의 포즈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유대계 폴란드인이었지만, 바우만은 어려서부터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스스로 폴란드인임을 일찍이 자각했습니다. 1939년에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을 당했을때, 그의 가족은 동쪽으로 탈출하게 되는데요. 이후 바우만은 소비에트 연방이 지휘하는 폴란드 의용군에 자원하였고, 콜버그와 베를린 전투에 참가합니다. 1945년부터 1953년까지 바우만은 군내 정보 보안대인KBW (Korpus Bezpieczeństwa Wewnętrznego) 에서 복무하고, 당시 KBW는 폴란드 레지스탕스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조직되었습니다. KBW에 복무하는 동안, 바우만은 바르샤바의 폴란드 사회과학원에서 처음 사회학을 접하게 됩니다. 1953년에 바우만은, 그의 부친이 이스라엘로 이주할 목적으로 바르샤바에 있는 이스라엘 대사관에 접촉한 이후, 갑작스럽게 불명예 제대를 당하고 맙니다. 그는 특히 자신의 부친과는 다르게 시오니즘과 선을 그었고, 오히려 반시오니스트였으나, 자신의 항변은 당국에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실업 상태가 된 그는 이 기간에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54년부터 1968년까지 바르샤바 대학에 강사로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1년에 영국 런던 정경대 (LSE)에 기회가 닿아 로버트 맥킨지 밑에서 수학하게 됩니다. 그는 당시에 영국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포괄적 연구를 진행했고 이것의 그 첫번째 주요 저작이 됩니다. 그는 살아생전에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해 강한 비판을 유지했고, 이러한 이행이 초래한 시민들의 삶의 불안정성과 그러한 속에서 복합적으로 발생하는 체제의 불안과 자본에 종속된 정치의 문제들을 규명하는데 온 힘을 쏟기도 했습니다. 그가 출간한 논저들은 거의 30여권이나 되었으며, 이것들의 공통된 주제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근대성, 소비주의, 도덕의 성찰 등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iquid Fear"로 지난 200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초역은 2009년에 이뤄졌으나, 이번 판본은 사실상 개정판으로 최근인 2025년 4월에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서두에는 연세대 김호기 교수와 유명한 모 북튜버의 소개글이 실려 있습니다. 물론 김호기 교수가 지그문트 바우만을 알지 못해서 그런 제한된 인식의 글을 쓰지는 않았겠지만 바우만의 이 책은 그저 현대인의 불안한 일상에 대한 평범한 논의를 담은 글이 아닙니다. 이 글이 쓰여진 2005년 당시 대표적인 뉴올리언스를 비롯, 미국 남부를 휩쓴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촉발된 미국의 재난 안전 대비가 아주 극명하게 쓸모없는 것으로 드러났는데요. 여기에는 조지 W. 부시의 정실 인사로 볼 수 있는 마이클 D. 브라운이 얼마나 무능력한 인간이었는지 여실히 증명되기도 했습니다. 이 재앙이 어떻게 전세계 성공적인 신자유주의 국가인 미국의 민낯을 드러냈는지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데요. 이런 맥락으로 바우만은 서장에서 정치학자 존 던을 인용하면서, 무엇보다 "이기주의적 질서 시스템"을 지목하고 있었습니다. 시민들이 허리케인에 의해 삶의 터전을 모조리 빼앗긴 사태에서, 미 연방 정부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와 더불어, 한 국가에서 참혹한 재해에 이르러서도 왜 백인과 흑인이 구별될 수밖에 없는가를 저자인 바우만도 되짚어 보고 있습니다, 동시에 많은 사회학자들 역시, 이를 학문적으로 규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능력과 배짱으로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찬양하는 이 이데올로기"는 반대의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국가와 사회의 보호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이해되기까지 합니다. 후에 5장에서 바우만은 "현대 민주주의 발전은 불확실성, 불안, 두려움을 유발하는 잇따른 원인을 없애거나 제한거나 길들이려는 노력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현재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기심을 추동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거의 '보모 역할'에 그쳐, 오늘날 벌어지는 '병든 사회 국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정부나 사회가 더 이상 '보모'로 자임할 수 없다던 과거 마가렛 대처의 발언이 오버랩 되는 것은 그저 지나친 상상만은 아닐 겁니다.

우리가 인간성의 발로에서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듯, 두려움은 언제 어디에나 있습니다. 일전에 토머스 홉스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사회 계약의 측면에서 증명했기에 오랫동안 역사의 주변에서 불을 지펴온 계몽주의가 비로소 태동하여, 수많은 계몽주의자들의 등장 속에 무엇보다 계급주의적 권력과 사실상 기형적으로 존재했던 과두제가 '다수에 의한 지배'에 의해 어느 정도 타파되기에 이릅니다. 이것의 성과는 몇 문장의 단어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겁니다. 사실 이러한 정치적 진행의 맥락은 평범하고 보편적인 모두가 신변의 안전을 보장 받고, 스스로 삶의 온존을 위해, 가능한 충분히 그 자원을 제공 받을 권리를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기도 한데요. 하지만 바우만이 이 책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좀 더 수월하게 확장될 수 있는 '효과적인 자본주의 이행'의 측면에서 다수의 이익과 그것에 기반한 아이디어 전반은 지금까지 철회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바우만은 5장에서, "그동안 사회가 유발한 두려움에 대항해 오랫동안 투쟁한 결과 실업, 장애, 질병, 노령 등 개인이 겪는 불행을 국가가 집단적으로 보장하는 체계가 마련되었다"고 서술하고, 그동안 신자유주의자들이 '복지 국가'라는 미명하에, 그동안의 체계를 뒤엎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폭로하는데요. 일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일방적인 관점을 갖는 것은 다소 불필요하다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만, 1980년대부터 전세계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진행된 특히 미국을 필두로 세계 경제 체제의 지배적인 역할과 기능을 한 체제는 결국 소수 계층과 그 주변의 지식인들을 둘러싼, 소위 특별한 이해 관계의 연합으로 '특권화'가 되었다고 여기 그의 논증을 통해, 여실히 비판이 가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은 기존의 노엄 촘스키조차도 비판했던 내용이기도 한데요. 어찌됐든 이 신자유주의적 기법은 사회적 역사라는 측면에서 성공적으로 이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앞선 부분과 관련해 여기서 인용된 맥스 헤이스팅스는 "가진 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세계화다"라고 강조하는데요. 일반적으로 세계화에 대한 '온건하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작업에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여전히 동조하고 있고 (2008년 악몽과도 같은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에도 불구하고) 바우만이 숱하게 경고했던 바대로, 이러한 이행 과정에서 발생했던 '부수적 피해'도 사회가 무조건 감당해야 되는 몫으로 강요 되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이 부수적 피해에 아랑곳 없이, 자본주의로 미화된 자아 실현, 소비주의, 능력에 따른 분배 등은 외형적으로 심지어 노동자들조차 거부할 수 없게 만든 부분이기도 한데요. 사실 과거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대에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의 건전한 제휴는 이미 철회된지 오래이고, 어기서 드러나는 바우만의 평가대로 지식인들이 스스로 역사의 노정에 놓여 있는 중요한 존재들이었다면 사회학이 밝혀내어 결국 병폐를 개선시키고자 하는 그 일련의 논의들이 그들에게도 역시 중요한 주제여야만 했습니다. 비록 이 글에서도 '사유를 잃어버린 노동자들'이 언급되기도 했지만 저는 무엇보다 비판 의식을 보이지 않는 지식인들이야 말로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토머스 프랭크가 캔자스에서 규명한 일반 노동 계층에게 있어 정치적으로 비판적 사고의 실종이 신자유주의자들이 내심 반기는 일이 되었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시민들에게는 결국 이러한 사례가 비극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2장에서 보이는 바우만의 일관된 논증은 작금 우리 세계가 보이고 있는 패착과 그로인한 수많은 '시민들의 불안'이 결국 일정 부분 우리가 자초한 일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바우만이 이 역사적 과정의 인과를 무시하고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 책임의 다른 주체인 권력과 그것을 맹종하는 지식인들, 그리고 이들에게 이익을 건네주는 신자유주의자들이 함께, 추동한 이 체제의 문제로 말미암아, 이기심이 효과적으로 발휘되는 세상에 저항할 수 없었다고 첨언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바우만이 보기에 우리 시민들이 오래전부터 '사유'를 잃었으며, 인간의 직관이 충분한 사유에서 비롯되지 않고, 나아가 세계의 구성 원리를 탐구하지도 않았기에 어쩌면 한나 아렌트가 숙고한 '진리의 현실적 조건'이라는 철학적 테제가 갖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마찬가지로 떠올리게 만듭니다. 지난 세기의 참혹한 파시즘이 초래한 절망스런 교훈에 대해 후세의 우리가 충분히 반면 교사를 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로지 저변에 깔려 있는 '불안'을 매개로 자신들의 권력을 확고히 하려는 엘리트 관료들과 나날이 소수의 권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현실적 민주주의의 엄혹한 모습을 짚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연계로 과거 조지 W. 부시가 수행한 '테러와의 전쟁'과 그것을 위해 움직인 정보 당국, 그리고 미국 사법부의 FISA가 법에 근거한 비판적 검토 없이, 비상시기라는 이유 만으로 당국과 협업 했던 점은 무엇보다 법원이 시민의 자유에 마지막 보루가 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듭니다. 자유는 기본적으로 시민이 삶을 영위하게 만드는 중요한 가치이고, 이 자유를 무엇보다 보호하고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최후 보루는 체제 내에서 어느 기관보다 사법부라고 지칭할 수 있겠는데요. 법의 기본 원리를 떠올려 본다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4장 이후, 바우만이 짚어내는 바와 같이, '이기심의 권력화'에 있어 과연 우리 사법부는 마지막 방패막이 될 수 있을지, 심히 우려가 됩니다. 바우만의 이런 회의는 안보 불안마저도 이득으로 삼을 수 있는 자들과 구축된 조직이 있다는 점, 그리고 안보 불안과 시민의 자유, 기본권이 대립하게 될 때 과연 민주주의는 시민을 보호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과 유사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매우 불행하게도 말이죠.
사실상 이 시대의 중요한 맥락인 '현대의 이성'이 바우만의 일관된 평가대로, "독점을 형성하고 배타적 권리를 확립하는 데 특히 적합하고 명민하다"는 것에 쉽게 동의하게 됩니다. 특히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보편적 규범과 이 현대적 이성은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여기에 더해 현대적 이성이 결국 소수의 특권을 옹호하게 되었고 그들의 특권 유지를 위해 모든 사람들이 적용받는 '동일한 규범'이 거부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집중된 자원과 권력을 이용하여 사법 제도의 빈틈을 이용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즉 바우만의 확장된 논의대로 타인의 고통과 불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차원을 넘어, 그러한 다수의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특권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스스로 '초월적 이성'이 이기적으로 작용되는 세계 체제, 또는 계급적으로 배타적 사회 규범이 사회에 뿌리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전에 일독했던 이안 브레머의 논의와도 아주 유사할 정도의 비판이기도 했습니다. 이어지는 3장 역시, '재난의 계급화'와 함께 불안도 계급별로 재분배된다는 적나라한 논지를 바우만은 펼치고 있었는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카트리나가 인간 폐기물의 처분을 도운 건 아닐까?"라는 노골적인 질문은 당시 희생된 대다수 흑인을 비롯한 스패니쉬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구축한 체제 - 때론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세련되게 표현하는 듯한 - 가 결국의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결과를 지속적으로 강도높게 유인했다고 본다면 이는 그저 과장된 수사일까요. 
인간의 불안이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놓고 본다면 그저 본성 안에 내재된 악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될 것입니다. 결국 C. 라이트 밀즈가 거의 비판적으로 분석했던 현대 관료제, 혹은 엘리트 관료제의 출현과 더불어 우리는 더이상 사유를 하지 않은 채, 자본주의에 종속된 국가적 체제에 충실히 복종하는 것으로 시민의 비판적 의무를 사실상 제한 받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과거 르네상스 시기의 도시 국가 피렌체를 지배하던 메디치 가문의 공화정이 사실상 과두제와 다름 없었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오늘날 민주주의도 경우의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곳에서 과두제와 가까워지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아주 수월하게 본심과 외면을 포장할 수 있듯, 이 인간들이 구축한 사회 체제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일반적인 정치의 측면에서 권력의 지배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외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과 함께 과거에 볼 수 없던 후안무치한 정치가 비로소 드러났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인간 정치에 내재되어 있었는지는 불명확합니다만 '뉴딜 시대'를 거친 과거에는 결코 꺼낼 수도 없었던 비상식적인 언사와 주장들이 이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3장에서 바우만은 포괄적으로 이 현대적 관료제와 정치의 세속화 혹은 '자본주의적 이기심의 발로'라는 공익과 도덕의 회피를 마찬가지로 함께 다루고 있지는 않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엘리트 관료제가 견제 받는 건 고사하고 스스로 책임지지 않는 정치로부터 오히려 보호를 받고 있는 현실을 이미 우리는 목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대적 관료제가 과연 누구에게 봉사해야 하는가를 떠올려 본다면 이런 구조가 어떠한 원리 속에 놓여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데요. 다음 4장의 세계화가 초래한 '이 지경의 세계'를 이해하는 이러한 인식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4장 서두에 바우만은 "지금까지의 세계화는 부정적 측면만 있었다"고 단언하고 사실상 그 '긍정적 측면'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마찬가지로 언급합니다. "세계화의 긍정적 측면은 아직 먼 미래의 가능성에 불과하며 일부에서는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 예측한다"는 말의 핵심은 거의 확실합니다. 이처럼 세계화가 더 이상 영토 주권과 경계를 인정하지 않기에 그 반대 급부로 우리는 과도한 개방성과 그것의 알량한 이익이 결코 다수에게 향하지 않는 지난 수십 년간의 시간을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지금까지 구축된 세계화를 마치 부정하는 듯 보이는 최근의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관세 정책이나 탈이민 대책은 거의 극명한 인지부조화를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는데요. 한때는 아니 거의 최근까지 이 세계화는 신자유주의적 이상의 결과물이자 전세계 곳곳에서 이익 추구를 가능케하는 아주 합당한 이론이기도 했습니다. 의외로 지젝은 신자유주의가 쇠퇴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만 바우만은 그와는 명확히 반대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세계화가 모두의 불안과 불행을 초래했다는 핵심 주장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가 아니라 거의 신자유주의를 이식하기 위해, 실행된 중동에서의 전쟁, 그로인해 파급된 테러 위협은 "겉으로 보기에 선진국은 안전하게 보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은 2001년부터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으로 국가적 안보 함의에 따라, 시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사법적 대응으로 나타났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안보는 결코 완벽히 충족될 수 없는 무언가이기도 합니다. 뒤에 나오겠지만 영국이 테러와의 전쟁으로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된 장면에서 이는 분명하게 드러나기도 하는데요. 이렇게 세계화에 따른 자본의 거대한 흐름과 축적, 그리고 그것이 소수에게만 향유되어 국가와 정부를 초월하는 특권 계층의 모멘텀이 되었다는 점과 그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미국의 중동 개입, 911 테러와 전면적인 테러와의 전쟁은 이렇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수 시민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되어 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글 말미에 바우만은 앞으로 다가오는 세기가 궁극적인 재앙을 맞이하는 시대가 되거나 혹은 지식인과 이제 인류 전체를 뜻하게 된 대중이 새로운 협정을 맺고 이를 실현하는 제2의 계몽주의 시대가 될 수도 있다고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간절한 바람처럼 그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대한다는 말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미래에 전제 되어야 할 가정은 '우리가 세계화의 부정적 측면을 통제할 수 있겠는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공교롭게도 자본주의가 지금의 안정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지속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안정이 전제 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시장의 인정과 경쟁의 지속은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자본주의는 소수의 특권층과 여기에 연계한 지식인들, 그리고 소수 중산층들만의 체제로 유지된다면, 역시나 제2의 카트리나와 같은 부수적 피해를 넘어서는 '인간 쓰레기 취급'과 같은 격리와 배제로 더 크게 왜곡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바우만의 말대로 더 이상 사유하지 않는 시민, 성찰 하지 않는 노동자, 비판하지 않는 지식인과 언론인들이 맞물려, 이런 왜곡된 체제가 가속화 된다면 이 책의 제목과도 같은 모두의 '불안'으로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쩌면 새로운 파시즘과 더 나아가 과두제를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목도할 수도 있을 텐데요. 이런 디스토피아적 예견은 결코 소설 속의 장면만은 아닐 겁니다. 그래서 바우만은 그가 죽는 날까지 남아있는 시민들의 미래를 누구보다 걱정하기까지 했는데요. 그 유명한 "우리가 모두 손을 잡고 다같이 무덤에 들어가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개선이 없는 체제의 일방향성은 스스로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 것입니다. 더 이상 사유와 비판, 성찰이 없다면 말입니다.  
- 제가 그동안 읽은 많은 사회과학,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경제학과 관련된 논저들에서, 아주 직접적으로 미국의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언급하는 지식인을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그저 에둘러 표현하거나 경제적 기조의 한 방편으로만 해석되었는데요. 이것은 마치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실체를 언급하는 것이 어렵다는 식으로 해석될 정도로 말입니다. 하지만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글 4장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프로젝트"에 대해 적시하는 듯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괴롭히는 두려움은 개별 사례를 살펴보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할 수 있지만 그에 맞서 싸우는 일은 개인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과거에 생계를 책임지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아내의 수입에 의존하거나 빈곤에 직면하게 되었고, 안정적인 평생직장을 다니며 자신감을 가졌다가 노동조합이라는 보호막을 잃고 ‘유연한 노동 시장‘이라는 리스크의 굴욕에 노출되었다.
이처럼 놀라운 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의 것을 훔치고 자원을 재배치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유혹적이었다.
이성은 인간의 영구적이고 보편적인 속성이지만, 이성이 무엇을 다룰 수 있는지는 어떤 도구를 사용해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
제 몫을 하는 훌륭한 관료라면 사유할 줄 알아야 한다. 막스 베버의 말처럼 자신의 지적 능력과 판단력을 한계점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그 특권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규범을 적용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여겼고 실제로 거부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가로 자신의 고통을 덜어내는 상황에 처한다면 우리의 이성은 다른 사람이 치러야 할 대가에 반대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한다.
편파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언제나 있었지만 아우슈비츠. 굴라크, 히로시마의 가장 무서운 교훈은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괴물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발전‘이란 주로 과거와 현재에 발전 속도를 높이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발생한 직접적이거나 ‘부수적인‘ 피해를 복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행복 추구를 보편적 인권으로 선언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적자생존을 외치던 정부의 관심과 정치적 의제에서 변방으로 쫓겨났다.
도덕적 판단을 폄하하고 의사 결정 과정에서 이를 무관한 것으로 배제하려고 노력한 탓에, 도덕적 판단의 힘은 상당히 약해졌다.
민족주의, 종교적 광신주의, 파시즘, 테러리즘 같은 위험한 부산물을 발전시킨 것은 미국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프로그램에 발맞춰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를 비롯한 다양한 위성 기구들과 함께 펼친 정책이었다.
따라서 기어티는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사법부가 시민의 자유를 수호하는 데 앞장서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진보적 이상주의자들과 의도는 좋지만 그와 비슷한 착각에 빠진 사람들뿐이다"라고 결론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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