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읽어보려 벼르던 에리히 캐스트너의 시집 <마주보기>를 구매해서 읽어보았습니다. 1899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그는 교사가 되고자 사범학교에 진학했다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징집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하고 신문기자가 되었습니다. 여러 매체에 시를 발표하다가 소설과 아동소설을 발표하여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히틀러 집권 때는 집필금지를 당하고 책들이 불태워지기도 했습니다.
<마주보기>는 ‘문학이란 동시대의 아픔을 담을 수 있어야 하며, 가장 쉬운 말로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에리히 캐스트너의 소신이 잘 드러난 시집이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시를 쓰려고 노력해왔는데, 마음의 통증을 치료해주는 시, 일상에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시, 즉 ‘가정상비약과 같은 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고 합니다. 유머, 분노, 무관심, 아이러니, 명상, 과장 등가 같은 유사 치료제를 이용해 일상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도와줄 책으로 <마주보기>를 출간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119개의 시의 제목을 늘어놓은 목차 다음에 사용지침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119개의 시를 영역별로 구분하는 대신에 ‘나이 드는 것이 슬퍼질 때’, ‘가난을 접할 때’, 등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고민에 따라서 읽으면 도움이 될 만한 시들을 추천하는 것입니다. 마치 약을 먹을 때 복용법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독자들은 삶에서 생기는 장애를 줄이거나 없애고 싶을 때마다 이 사용지침서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살짝 확인을 해보니 하나의 시가 여러 경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나이 드는 것이 슬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나이가 적지 않은 저로서는 ‘나이 드는 것이 슬퍼질 때’라는 상황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 중에 두 번째인 「사촌의 구석창문(E.T.A. 호프만에게 바침)」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교회 종탑 뒤에서 불타는 / 저녁노을을 사랑한다. / 그는 삶과 죽음을 사랑하고 /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것도 사랑한다.’라는 세 번째 연을 읽으면 나이 드는 것을 슬퍼하는 사람이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시는 독일의 후기낭만주의 작가 호프만의 소설 『사촌의 구석창문』을 소재로 썼다고 합니다. 이 소설은 두발이 마비되어 휠체어에 의존해 생활하는 사촌과 그가 머무는 고층 건물의 구석방에 찾아온 화자가 창문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나누는 이야기를 담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번역 소개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때 작가인 사촌은 젊은 화자에게 작가의 기본 자질 가운데 하나인 ‘보는 기술’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호프만 역시 독일 시인 칼 프리드리히 크레쉬칸의 「창가의 폴 스카론(Scarron am Fenster)」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마비된 프랑스 작가 폴 스카론이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익살맞게 묘사했다고 합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호프만의 『사촌의 구석창문』과 일본 작가 에도가와 란포의 단편「지붕 속 산책자」를 비교한 논문이 있습니다. 『사촌의 구석창문』은 정지된 도시산책자로 「지붕 속 산책자」에서는 도착적 도시산책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금년 초에 펀트래블의 일본근대문학기행을 통해 다녀온 일본 여행기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행하면서 경험한 순간들에 안성 맞춤한 비유들을 <마주보기>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마주보기>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상황에 잘 맞는 시들이 참 많다는 생각입니다. 시인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읽지 않더라도 사용지침서를 참조해가면서 읽어보고 싶은 시를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