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완전히 다 이해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드문 드문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다고만 말할 수 있겠다.
평생에 걸쳐 ‘나‘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온 학자가 내놓은 지금까지의 결론은 :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일반적인 답은 없다는 것이다. 특히나 자기에게만 있는 고유한 것은 없다는 것. 다만 자기에게 중요한 타인에게서 간신히 자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이 학자의 결론이다. 난 이 결론이 철학적 논증이 이해 되고 아니고를 떠나 마음에 든다.
내 몸이라고 쉽게 말할 수는 있지만 이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신의 몸에 대해 아주 조금밖에모른다. 등이나 항문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아니, 타인이 나를 나로 인정하고 기억해주는 그 얼굴을, 공교롭게도 당사자인 나는 평생 볼 수가 없다. 거울이나 사진으로 시간차를 두고 확인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타인을 마주하고 있는 순간의 바로 그 얼굴(나 자체)을 나는 볼 수가 없다. 하물며 나를형성하고 있는 이 신체의 내부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아무래도 병이 난 것 같아도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게 정말 ‘내‘ 몸인지 묻고 싶을정도로 몸은 나로부터 멀리 격리되어 있다. "나에게 가장 먼존재는 나 자신이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인용한 이 독일 격언이 몸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실감 나는 표현인 것 같다.
‘나‘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창가에 기대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마침 내가 그곳을 지나가고 있다면, 그는 나를 보기 위해 거기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천만에. 왜냐하면 그가특별히 나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런데아름답다는 이유로 어떤 여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정말 그 여인을 사랑하는 것일까? 천만에. 왜냐하면 천연두가 그녀를 죽이지 않고 그녀의 아름다움만 앗아간다면 그 사람은 그녀를사랑하지 않게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만약 사람들이 나를 나의 판단력이나 기억력 때문에 사랑한다면, 과연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천만에.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을 잃지 않아도 이런 장점만 잃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육체 속에도 영혼 속에도 없다면,
‘나‘는 도대체 어디 있을까? 또 이런 성질들은 소멸할 수 있으므로 나의 본질을 형성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성질이 없다면어찌 육체나 영혼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인간은 어떤 이의 영혼의 실체를, 그 안에 어떤 성질이 있든 상관없이, 추상적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뿐더러 또 옳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결코 인물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성질만을 사랑하는 셈일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무나 직책 때문에 존경받는 사람들을 경멸해선 안된다. 인간은 어떤 인물이든 바로 그 빌려온 성질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므로.
ㅡ블레즈 파스칼, 《팡세》, 단장 323
우리는 보통 성장한다는 것은 다양한 속성을 익혀가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는다양한 가능성을 잃어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여러 가지를 잃고 있다. 잃으면서 살아간다. 지금 내게 가능한 것 가운데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이 삶이라면, 산다는 것은 그 밖의 몇몇 가능성은 버린다는 뜻이다. 우리가 잃은 것. 그렇게 될 수도 있었던 자신,
하지만 이제 그렇게는 될 수 없는 자신 철학자 구키 슈조는 이를 가리켜 "멀고 먼 곳, 내가 태어난 곳보다 훨씬 더먼 곳, 그곳은 아직 가능이 가능인 채로 존재했던 곳" 《때마침》)이라 했다.
여기서 ‘나‘라는 것의 존재 방식 중 하나가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있는 존재‘라기보다 ‘이야기되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향해서 말이다.
아이덴티티 identity라는 단어가 있다. ‘내가 나인 근거‘라든가 ‘자기동일성‘, 또는 ‘독자성‘이라고도 번역되는 단어다. 앞에서도 등장한 정신과 의사 랭은 아이덴티티를 다음과 같이정의하고 있다.
‘아이덴티티‘란, 이로 인해 지금 이곳에서도 과거에서도 미래에서도 자신이 동일 인물이라고 느끼는 성질의 것이다. 이것은 이것으로 인해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성질의것이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들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동일한 지속적 인물이라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사람들은 이런 ‘아이덴티티‘가 공상일수록 한층 더 애지중지한다.
(로널드 랭, <자기와 타자 Self and Others》)
랭에 의하면
나의 아이덴티티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내 자신에게 들려주는 스토리
예를 들면 사람은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나, 유치원생이 되고, 학생이 되고, 회사원이 되고, 아버지가 된다..... 이런 역할이나 속성 자체를 제거하면 그 사람을 만들고 있는 것들중에 어느 것 하나 그 사람 고유의 것은 없다. 이들은 내가 타자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타자가 나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의 재료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총계가 ‘나‘인 것은 아니다.
내가 ‘내‘가 되는 것은 오히려 이들의 역할이나 속성의 단편을 이어 붙여, 나라는 것의 이미지를 조립하는 과정에서다. 랭은 이를 "일관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라고도 표현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나의 아이덴티티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내 자신에게 들려주는 스토리"라고
하지만 스토리를 자아내려면 자신을 다양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인생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자와 타가 서로 의미를 무효화하는 부조화 속에서 ‘내 자신에게 들려주는 스토리‘가 몇 번이고 파탄을 겪는 과정이고, 또그것을 끊임없이 다른 방법으로 고쳐 말하기 위해 시도하는과정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야기가 하나밖에 없다면, 그것이 무너졌을 때 자신도 회복이 불가능해진다.
인생이라 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선을 떠올리는데 이런 습관을 고쳐야 한다. 인생의 어느 시기지는 순진무구하고, 어느 시기부터는 때가 타기 시작한다는것은 거짓이다. 어느 시기까지는 행복하고 어느 시기부터는불행해진다는 것도 거짓이다. 무엇보다 하루하루가 마냥 행복하고, 마냥 불행하다면 분명 지루해서 견디기 힘들 것이다.
까? 하나의 시나리오 안에 있어야만 하는 걸까? 동일한 존재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우리를 종종 극심한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불안. 그것은 늘 미래를 그리는 상상력과 떼어놓기 어려운형태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젊은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에대해 생각할 때, 불안해하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업신여기는느낌이 있다. 자기보다 겨우 몇 살 많은 사람을 늙은이 취급하기도 하는데, 이는 곧 다가올 자신의 미래에 절망하고 있다는 증거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 공격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그의 어두운 현재를 보여준다. 이래서야 뭔가가되고 싶다는 이미지가 결여된 채 지금의 자신으로부터 탈출하고싶고, 다른 내가 되기를 희망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풍족한 노년을 보내고 있으면 현재가 밝다는 뜻일까? 앞에서 봤듯, 만족스러운 노년이란 대부분의 경우 과거의 영광에 대한 기억에 의지하고 있다. 그때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살 수 있다....... ‘행복한 노년‘이란 지금까지의 자신의 업적에 만족하는 상태인 것이다. 즉, 과거의기억과 거기서 형성된 재산에 기대어 산다. 그런데 이는 다른형태의 삶을 애초에 차단한 삶이다. 이미 확정된 과거의 연장선 위에서 현재가 성립되는 것이며, 따라서 이 만족스러운 노년은 점점 한계가 있는 좁은 세계로 들어간다. 자신이 변화하거나 존재가 잊히는 것을 스스로 금하는 삶의 태도이다.
나다움 같은 것을 찾아 자기 내부를 샅샅이 뒤지지만, 사실우리 내부에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만약 그런 게 잠재되어 있다면 애초에 그런 질문에 얽매일 일도 없을 것이다. 그보다자기가 여기에 있다는 감각을 느끼기 위해서는 오히려 시선을 밖으로 돌리고, 나는 누구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인지를 생각하는 편이 더 낫다.
‘나‘라는 것은 타자의 타자로서 비로소 확인되는 것이라는 말을 다시 떠올려보자. 타자는 타인과는 다르다. 엄마도나는 아닌, 타자다. 그런 타자에게 나는 의미 있는 타자인지의 여부가 우리가 나 자신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산 사람은 불행해진다. 이 이야기가 언젠가 파탄 나거나 완료됐을 때 남는 것은 공백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인생을 일에 걸고 살아온 사람은 자신의 아이덴티티(이야기)를모두 일에 바쳐버렸기 때문에 그 안에 있을 때는 좋지만, 정년을 맞아 그 이야기가 무효가 되었을 때 다른 이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그래서 배우자에게 매달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란 내가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생각은우리를 구원해주기도 한다. 같은 인생이라도 이야기 방법에 따라. 해석 방법에 따라, 다른 모습을 나타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바꿈으로써 한계점에서도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전하고자 했던 것은 단 하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은 없다는 것이다. 이 질문을 자신의 내부로던지고, 거기서 뭔가 자기에게만 고유한 것을 찾는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그런 건 어디에도 없다. 자신이 소유한 자신의 속성가운데서가 아니라 누군가 어떤 타자에 대한 타자 중 한 명일수 있다는, 그런 양식 속에서, 사람은 간신히 자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문제는 항상 구체적인 누군가로서의 타자,
즉 나의 타자에 관한 것이며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는 일반적인 해답이 없는 것이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길에서특정한 타자를 만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게 있다. 그것은 타자의 타자라는 것이 타인에게 나를 바치는 것, 즉 자기 포기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타인에게 자신을 바친다는 것은, 타인안에서 자신의 장소를 확인한다기보다 오히려 자신을 바치는그 타인을 이미지로서 자기 안에 갖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이미지화한 타인, 즉 자기 안의 타인에게 자신을 바친다면 그건결국 자기애에 지나지 않는다. 랭도 말했듯 타자의 타자가 된다는 것은 타인 안에 자신이 의미 있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느냐아니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이를 타자의 입장에서 말하면 타자와 긍정적으로 관계를 맺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은 그가 먼저 나와 관계를 맺어주기 때문인 것이다. 나도 타자를 이처럼 대해야 할 것이다. 타자에게 그 존재를 부여하기 위해. 타자에게 나를 바치는 것과 타자에게 그 존재(존재의 계기)를 선사하는 것은 전혀 별개다. 타자의 타자라는 것은 타자에게기대고, 타자를 기다리는 게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랭이 예로든 엄마와 아들의 만남 유형 중 세 번째 경우처럼) 서로 타자에게 상
처를 입을 때까지 관계를 맺는 것이고, 때로는 (같은 예의 두 번째경우처럼) ‘~해주기 바란다‘는 부정적인 수동이 아니라 ‘긍정적인수동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은 헌신이라는 이름의 밀착과는 거리가 먼 행위다. 우리는 서로 존재를 부여함으로써 살아갈 수도 있는 것 같다. 여담인데 독일어에서는 ‘있다‘
를 ‘그것이 준다es gibr‘고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