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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ll1223님의 서재
  • 평범한 인생
  • 카렐 차페크
  • 11,520원 (10%640)
  • 2021-12-10
  • : 5,610

진정한 삶의 가치는 ... 일상성 속에서 사랑과 긍정적 태도를 실천하는 평범한 삶에 있다는 것이 그의 문학이 전하는 메세지다.
...
차페크의 삶에 대한 인식은 인간 개체들이 서로의 차이점이나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해를 확장하여 형제애를 실천하는 것을 지향한다.
ㅡ송순섭 역자 해설 중

두번째 읽기 시도에서 성공한 책.
다시 읽어도 좋을 책.
소설인데도.. 이렇게 밑줄을 많이 그은 책이 있었던가. 어쩌면 철학책으로 읽혀도 이상하지 않을 책!!
그는 매우 검소했다. 몇 번인가 일요일에 아버지가 서랍에서 저금통장을 꺼내어 들여다보던 모습을 본 기억이 난다. 그 모습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세워져 있는 재질 좋은 판자 더미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아버지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얘야, 이통장에는 일과 땀이 모여 있는 거란다. 돈을 낭비하는 건 완성된 일을 망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건 죄악이지>라고하는 아버지에게 내가, <아버지, 그러면 그 돈은 어디에 쓰기위한 거죠?>라고 묻는다면 아버지의 대답은 이럴 것이다.
<노후를 위해서 그러는 건 아니다. 그건 그저 사람들이 해보는 소리지. 돈이란 근면과 절제를 미덕으로 하는 노동의 결과를 보기 위해 존재하는 거란다. 이 통장에는 삶의 내용이들어 있고, 그건 평생의 결실이야. 여기에 내가 열심히, 그리고 검소하게 살았다는 기록이 들어 있는 것이지.> 아버지에게 노후의 시간이 다가왔다.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공동묘지의 대리석 비석 아래 잠들어 있었고(비석을 만드는 데 정말많은 돈이 들었다고 아버지는 경건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곤했다), 나는 좋은 일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무겁고 부어오른 다리를 이끌며 예전보다 일감이 줄어든 소목 공장 일에서 손을 떼지 않았고, 저축한 액수를 계산했으며, 일요일마다 집에서 홀로 통장을 꺼내어 자신의 정직한 삶의 합계를 들여다보았다.
결국 인생의 항로는 크게 보아 두 개의 힘으로 진행되며, 습관과 우연이 그것이다.
사람이 인생의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인생을 내던져야 한다.
 목재 더미 위 높은 곳에 아이가 앉아-아니, 그곳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예전의 아이는 단추를 꼭 채운 공무원 셔츠에 역무원 모자를 쓰고 흥미롭게 창백한 얼굴에 흥미로운 콧수염을 기른 어른이 되어 있었다.
<저자를 왜 이리로 보냈을까?> 세상 끝에 있는 역의 역장은생각했다. 그렇습니다. 역장님. 바로 이럴 목적으로 이리로보낸 겁니다. 고향 집에서처럼 목재 더미 위에 앉아 있으라고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람들은 많은 길을 가야 한다.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어리석은 일을 겪어야 하며, 나무와 송진 냄새가 나는 목재 옆에 있는 자신으로 돌아가려면삶의 한 조각을 각혈해 뱉어 내야 한다. 사람들은 이곳이 폐에 좋다고 했다. 이미 어둠이 깔렸고 하늘에는 별들이 나타났다. 고향에도 별은 있었는데, 도시에는 없었다. 여기에서보이는 별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별을 쳐다보면서 나는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했는지 아는 것이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처럼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이곳은 실로 세상 끝에 있는 마지막 역이었다. 선로는 풀과 냉이 속으로 뻗어 있었고, 그 뒤에는바로 적치장 뒤에는 벌써 우주가 나타났다. 강과 숲이 소리를 냈고, 그 뒤에는 우주가 소리를 냈다. 별들은 오리나무 잎새처럼 깜박이며 소리를 냈고, 산바람이 세상 사이를 가르며불었다. 아, 그곳은 폐를 채우기에 좋은 곳이었다!
별을 쳐다보면서 나는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했는지 아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롭게 창백한 청년이었던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공놀이하는 모습과 나무 핀이 쓰러지는 것을 평화롭고 조용히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강의 물결처럼 늘 똑같고 늘 새로운 생활. 선로가는 냉이와 억새풀로 뒤덮이고 있었다. 목재 더미가 운반되고, 또다시 새로운 더미가 쌓였다. 늘 똑같고 늘 새로운 반복. 그리고나는 송어 다섯 마리를 잡았다. 어디에서? 바로 역 뒤에서.
이만한 놈들이었지. 가끔 나는 놀랐다. 이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그렇다. 이것이 인생이다. 하루에 기차 두 대가 오가고,
끊긴 선로에는 풀이 덮이고, 그 바로 뒤에는 병풍 같은 우주가 나타나는 것이.
흥미롭게 보이는 젊은이였던 나는 목재 더미 위에 앉아 느긋한 표정으로 몸을 숙여 돌멩이를 집어서 신호수가 기르는암탉을 향해 던졌다. 자, 날뛰어 봐라. 이 바보야. 난 이미 분별력 있는 사람이 되었단 말이다!
지금 나는 그 모든 소음과 요동이 단지 궤도 변경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내면이 뒤흔들릴 때 나는 산산이 부서지게 되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그사이 나는 이미 인생의 올바르고 긴 궤도에 들어서고있었다. 인생이 궁극적인 본궤도에 다다르게 되면 사람의 내면에는 어떤 보호 장치가 작동한다. 그때까지는 자신이 이런또는 저런 존재가 되거나, 여기로 또는 저리로 가야 하나 하는 모호함이 있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의지보다 더 높은 정당성에 의해 자신이 결정된다. 그 때문에 내면의 자아는 이흔들림이 바로 운명이라는 기차의 바퀴가 올바른 궤도로 진입하면서 내는 덜커덕 소리임을 모르는 채 좌충우돌한다.
그러나 때로는 지금 경험하는 순간이 뭔가 나의 삶에서 오래전에 일어났던 어떤 일과 연관이 있다고, 이미 예전에 경험했던 어떤 것이 그 순간 완성되고 있다고 분명하게 느껴질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역 사무실의 가물거리는 등불 아래에서 보고서를 작성하던 때 말이다. 그래! 그때가 펜을 물어뜯으며 숙제를 끝내야 한다는 걱정에 쫓겨 미친 듯 공부를파던 때나 전 생애에 걸쳐 떨쳐 버리지 못했던 나 자신이 모든 숙제를 해낸 성실한 학생이라는 느낌을 가졌을 때와 똑같지 않은가! 이 뭔가 오래전에 일어난 일과 아득하면서도 놀랍게도 분명한 연관성을 의식하는 순간들은 어떤 신비하고위대한 것의 현시顯示)처럼 묘하게 나를 흥분시켰다. 그 순간들에서 인생이 이해될 때는 아주 드물지만, 인생은 보이지않는 연관성들로 점철된 심오하고 필연적인 단일체로 나타났다. 세상 끝에 있는 마지막 역에서 아버지의 소목 공장 마당을 연상시키는 목재 더미 위에 앉아 있을 때 나는 난생처음으로 경이로움과 무상함을 느꼈고, 인생의 아름답고 단순한 질서를 좇으며 살기 시작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경우의 인생이 있었던 건가. 넷, 다섯, 여덟? 나의 인생을 구성하는 여덟 개의 삶이 있었다. 내게 시간이 조금 더 남아 있고, 조금 더 맑은 정신이 든다면 일련의 또다른 삶들을 발견하게 되겠지. 아마도 전혀 연관성이 없고,
단지 일회적으로 일어났거나 한순간 동안만 지속되었던 그런 삶들이 나타나리라. 어쩌면 한 번도 나타나지 못했던 삶들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나의 삶이 다르게 진행되었거나, 내가 다른 존재였거나, 다른 상황이 주어졌더라면 내게서는 전혀 다른 인물들이 등장해서 나와는 다른 삶을 영위했을 수도 있다. 만일 내가 다른 여자와 살았더라면 내게서는 호전적이고 흥분하기 쉬운 인간이 나타났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어떤 상황에서는 경솔한 인간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건 배제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것도 배제하지 못한다.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분명한 표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표상에 들어맞는 사건들을 선별하거나, 심지어는 약간의 수정을 가한다. 처음에 나는 평범한 인생에 대한 변명 같은 글을 쓰려고 했던 것 같다. 유명하고 비범한 사람들이 회상록에다 자신의 비범하고 특출한 운명에 대한 변명을 적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 역시 어떻게든자신들의 인생 이야기를 꾸며 내어 그 이야기가 단일하고 사실에 가까운 그림이 되게 만든다. 그 이야기에 어떤 단일한연결선이 생기면 더욱 그럴듯해 보인다. 이제 나는 가능성이란게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인생은 여러 상이하고 가능한삶들의 집합이며, 그중에서 단지 하나 또는 몇 개만이 실현되는 반면, 다른 삶들은 단편으로서나 가끔 발현되든지, 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들 개개인은 우리를 이루며, 개개인은 무한대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집합인 것이다. 단지 자신을 보라. 네가 거의인류 전체를 망라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건 끔찍한 일이다.
네가 죄를 지으면 그들 모두에게 벌이 내리고, 그 거대한 집합이 너의 모든 고통과 저속함을 감당한다. 너는 그 많은 사람들을 저속하고 헛된 길로 인도해선 안 된다. 너는 나이고,
네가 인도자이며, 그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 모든 인물들을 너는 어디론가 이끌고 가야 했다.
그래, 하지만 운명들이 그렇게 많으면, 그처럼 많은 가능성들이 있으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어떻게 모두의 손을 잡고 이끌 수 있는가? 영원히 나 자신을 들여다보며 내 삶의 방향을 바꿔 가야 하는가? <뭔가 또 남아있지 않을까. 왠지 모르지만 다른 인물들 뒤에 웅크리고 숨어 있던 인물을 간과하지는 않았을까, 이 존재의 가능성을 지닌 배아를 내게서 밖으로 드러내야 할까> 하면서? 그러나 인식하고 이름을 붙일
수 있던 배아만도 대여섯 개나 있다. 그것만으로도 족하며,
그 각자는 전 생애를 이루기에 충분한데, 무엇 때문에 더 멀리에서 찾는단 말인가! 그렇게 되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의 속을 뒤지는 일일 뿐이다.
그렇게 뒤지는 일을 하라는 게 아니야. 그건 아무 곳으로도 이끌지 못해.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들이 누구이건 간에너와 같은 집합이라는 걸 모르겠나? 너는 그들과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보기만 해. 그들의 삶 또한 네 속에 있는 무수히 많은 가능한 삶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너도 다른 사람처럼 신사나 거지, 허리춤까지 옷을 벗어젖힌날품팔이꾼이 될 수 있었다. 너도 냄비 장수, 빵집 주인, 또는얼굴 전체에 잼을 묻히는 아홉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것이다. 그 모든 것이 너이다. 네 속에 그런 다양성이 있으니까.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면 그들을 인지할 수 있다. 그 모든게 네 내면에 있다. 그들 중 각자는 네 삶의 어떤 것을 살았다. 경찰이 수갑을 채워 끌고 간 누더기 차림의 인부, 현명하고 말이 없던 신호수 노인, 주정뱅이 대위까지 모두가 네가될 수 있었던 모든 걸 잘 보라. 주의를 기울여 보면 그 각각의속에서 네 자신의 일부를 보게 될 것이다. 그 속에서 놀랍게도 너의 진정한 이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런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내 자아 속에 혼자가 아니다. 사람들아, 나는 이젠 더 이상 너희들 사이로 들어갈 수가 없고, 너희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도 없다. 다만 창밖을 내다볼 뿐이다.
네가 누구든 나는 너를 알아본다. 우리 각자가 어떤 다른 가능성을 살기 때문에 우리는 똑같은 사람들이다. 네가 누구든 너는 나의 무수히 많은자아이다. 네가 악인이든 선인이든, 그건 내 속에도 있는 거야. 내가 너를 미워하더라도 난 네가 나의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는다. 나는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리라. 그의 멍에를 느끼고, 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그에게 닥친 부당함에 대해 함께 괴로워하리라. 내가 그와 가까워지면 질수록 나는 더 많은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이기주의자들을 배척할 것인데, 내가 이기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을 돌볼 것인데, 내가 병자이기 때문이다. 성당문가에 서 있는 거지를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인데, 내가그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의 나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수록 나 자신의 삶은 더욱 완성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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