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부터 “문해력”이라는 단어가 회자되기 시작했다. 풀어보면 “글을 이해하는 능력” 정도일 텐데, 세계적으로 문맹률이 낮은 나라인 대한민국에서, 최근 이 문해력이 떨어지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어 문제라고 한다. 글자를 읽을 수는 있지만 그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하는 상태. 마치 한글을 처음 배운 외국인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이 책의 뒷표지에 실려 있는 소개 키워드에도 이 문해력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그런데 그 앞에 한 단어가 더 붙는다. “성경 문해력”이다. 책은 성경을 읽기는 하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 퍽 괜찮은 세일즈 포인트다.

책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을 보면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성경읽기에 있어서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1부와, 실제로 사례 본문들을 언급하면서 잘못된 이해와 바른 이해를 대조하는 2~4부다. 2부에서 4부는 약간의 집중 타겟의 차이가 있지만 크게 보면 비슷한 형식이다. 책 자체가 한 잡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았는지라, 각각의 글만 따로 떼어 봐도 충분히 읽을 만하다.
개인적으로는 그 중에서 1부의 내용이 특별히 눈에 들어온다. 한국교회의 보수적인 교인들은 이른바 성경의 “영감”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쉽게 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인걸까? 보수적인 학자들조차도 거기에 쓰인 한 글자 한 글자를 하나님께서 불러주셔서 그대로 받아 적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자적 영감”, 그 한 글자 한 글자부터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 위해서는 일종의 신학적 상상력을 통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축자적, 전체적, 유기적 영감이라는 세 가지 기준을 모두 받아들인다고 해도 결정적인 문제가 남는다. 그 세 원칙이 적용되는 “성경”은 각 책의 저자들이 쓴, 하지만 오늘날에는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원본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랜 사본학 연구의 결과로 우리는 (지금 시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식으로 밝혀낸) 비교적 원본에 가까운 사본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본이 쓰이고 전수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오류들, 그리고 한국 독자들이 보고 있는 “번역된 성경”은 또 다시 원문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점들을 인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른바 “성경 숭배”에 빠질 수 있다.

중학생 때 성경을 펴서 읽기 시작한 이래로, 벌써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성경을 읽어 왔다. 성경읽기는 어렵지 않지만, 성경을 제대로 읽는 건 참 어려운 일이이라는 생각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해진다. 물론 성경이라는 책이 말이 아주 어렵게 쓰였다거나,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주문 같은 글로 잔뜩 채워진 것은 아니다. 흔히 말하는, “구원에 이르기에 충분한 내용”은 무슨 신학적 지식을 잔뜩 쌓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구원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 아니던가.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도 성경은 참 중요하다. 그리고 이 때, 우리가 온갖 오해와 억측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낸다면 당연히 우리의 삶에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성경 문해력이 필요한 이유다. 책을 읽으며 단지 몇몇 구절의 원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더 중요한 건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태도다. 이 책은 성경을 좀 더 조심스럽게, 자세히 살피는 데 좋은 도전을 줄 것 같다.